반계리 은행나무 외 4편
이영선
팔백 살 먹은 나무를 만나러 갔네
'케케묵어 거무죽죽한 껍질하고
다 썩어 구멍 숭숭 뚫린 몸뚱이 하고
제멋대로 갈라진 괴기스러운 나무의
그 무엇을 보겠다고 갔네'
노란 이파리들을 보고
'야, 올드가 아니라 골드네'
사람들은 환호했네
나는 멀찍이 있는 들마루에 누워
나무처럼 서 있는 사람과
그 뒤에 있는 까만 아기염소와
눈앞의 구름을 보다가 잠이 들었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꿈처럼 한 노래가 지나가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드론 한 대가
얼굴 위를 요란스레 돌다가
잠든 나와 아기염소를 돌다가
제 잎으로 제 그림자를 덮고 있는 은행나무를 돌고 있었네
드론의 눈 속에 그 모두가 뒤섞이는 순간이
황급히 지나가고 있었네
거짓말 게임
이영선
우리는 다이아몬드 무늬 타일로 외벽을 한 파랑새 아파트의 꼭대기
펜트하우스에 살아요
엔진이 있는 이 방은 어두울수록 환하죠
그 아래로 백 개의 창이 연결된 열차처럼
환하게 불을 켠 방들이 지하 새벽으로 달리지요
우리는 날마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것들을 먹고살지요
체리 씨같이 붉은 시간을 툭툭 뱉으며
구름에 송송 구멍을 내는 시간을 눈으로 따라가지요
비 그치면
창을 활짝 열고
부리가 넓적하고 깃털이 연분홍인
슈빌이라는 이름의 황새 한 마리 날려 보내지요
구두코 모양의 부리로
커다란 메기 한 마리 물고 오라고
씨앗 몇쯤은 거꾸로 박혀 싹을 틔우라고
처음 보는 나무가 젝크의 콩나무처럼 쑥쑥 자라
푸른 뱀 한 마리 보여달라고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구름을 만들지요
새해 첫날
이영선
툭 터진 석류 껍질을 비집고 움찔움찔 붉은 즙이
흘러나온다
낼름 혀로 핥다가는 낄낄대는 개 한 마리
붉은 침이 목으로 가슴으로 가랑이 사이로 튀어 대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개의
가랑이 사이로 비죽이 서는 그것
석류 훔쳐먹은 죄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다
화살나무 사이에서
자작나무 사이에서
사철나무 사이에서
어떤 붉은 것이 발걸음마다
흔들린다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이영선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
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
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
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
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
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
새벽바람에 잔가지 서로 부딪던 소리라 하고
첫서리 내려앉던 아침 새끼 고라니 울음소리라 하고
면봉으로 조심스레 그것들을 끌어내니
온갖 소리들 잠잠하다
구멍이 깊다
구멍 속에서 노란 벌레 한 마리가
향내 가득한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방사 가는 길
이영선
오래된 매점 앞을 지나 언제나 있던 것 같은 그저 그런 작은 다리 하나 만난다 갈색 줄무늬가 있는 작은 다람쥐 두 마리 지나간다.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승용차 한 대 지나가고 무거운 짐을 실은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가고 유리문을 내린 1톤 트럭이 지나간다. 자동차 매연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것이 뿌옇게 지나간다.
그는 왼쪽으로 난 숲길로 접어들고 나는 곧바로 난 길을 달음질쳐 올라간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결국 우리는 정방사 돌계단을 올라 낡은 해우소 앞에서 만날 것이다
그의 근심과 나의 근심은 해우소 얇은 나무 벽을 사이에 두고 씨이 울다가 싸아 울다가 결국 비릿한 숲 냄새로 만날 것이다
겹겹이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와 해우소를 지나는 바람이 저 멀리 청풍호까지 실어 나른다는 생각을 하는데
누가 던졌는지 모를 솔방울 하나 굴러 내리는 소리 들린다
우리가 가로질러 오를 수 없는 길을 솔방울 하나가 유유히 굴러내려 가고 있다
이영선 당선소감
당선소감
한 무리의 개미가 줄지어 가고 한 무리는 다시 돌아오고
그렇게 한창 분주합니다 그 중에 입에 먹이를 문 개미는
몇 마리 되지 않습니다 내 눈에 개미는 그저 까맣기만 합니다
문득 개미에게 말 걸고 싶습니다 사무실 냉장고에 잘라 놓은
사과 한 쪽을 꺼내 던져 줍니다
사과는 순식간에 개미 떼에게 점령당합니다
달콤함에 비틀거리는 개미들을 보다 저장해 둔 당선 문자를 확인합니다
취한 글자들이 까맣게 몸집을 불리고 조르바처럼 춤을 춥니다
오랜만에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봅니다
경북 김천출생
충북 충주시 금봉대로 397 LG아파트 102동 601호
sunrise054@hanmail.net
첫댓글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