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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택수 작품론, 애지 2018년 봄호.
언어 너머의 정동
남기택 문학평론가 강원대 교수
1.
또 다른 새해가 밝았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맞았던 한해가 어느덧 지나가 버렸다. 그간 정권이 바뀌었고, 문단을 포함한 문화계의 지형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부박한 세태와 무관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도 있다. 나무를 포함한 자연이 그것이다. 풀이나 꽃은 언제나 의연하다. 이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요, 이를 전유하여 삶을 사유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 중 언어를 매개로 한 전유 활동이 문학이라면, 가장 경제적인 언어로 고도의 추상을 응집하는 장르는 시일 것이다.
시작의 시간은 부단한 노력과 인내의 순간을 전제로 한다. 그런 까닭에 결코 쉽지 않은 도정 위에 시의 미래가 놓여 있다. 그 와중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시-되기의 운명에 기투하려는 시인 중 한 사람이 손택수이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꾸준한 모습을 보면 손택수의 생활이 시작과 하나된 것임을, 시적 전유로서의 삶이라는 길이 그의 것임을 알게 된다.
손택수 시가 그간 고집스럽게 구축해 온 문학적 경향은 이제 하나의 정형이 된 듯하다. 일반화하기 어려운 세부적인 결이 실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나의 스승”(「나무의 수사학 1」)이라는 명구는 손택수 시의 아비투스를 적시하기에 충분하다. ‘나무의 수사학’이 상징하는 감각과 언어가 손택수 시의 특장이라는 데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이번 신작 시편들에서도 손택수 특유의 발상과 표현은 잘 드러나고 있다.
세계일주여행을 떠난 장 콕토가 바다 한가운데 선상 갑판에서 찰리 채플린을 만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초면에도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가지만 정작 한 마디 말도 나눌 수가 없었지요 수줍어서? 아닙니다 그냥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채플린의 부인이 통역을 자청하고 나섰는데, 이때 채플린이 조용히 부인을 가로막습니다 통역이 되지 않는 상황, 한 마디 말도 주고받을 수 없는 이 순간이 오히려 그들을 더 간절하게 한다고, 말로 이 짧은 순간의 감동을 가로막지 말라고
시를 쓴답시고 나무들의 말을 번역하려 하였으나 오역 투성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식물사전을 펼쳐놓고 횡설수설 했지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느 도서관에서는 식물과 인문학 특강도 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잠시만이라도 말을 멈춘 채 나무와 저 사이의 침묵에 골똘해지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도무지 번역이 되지를 않는, 말이 멎은 자리에서 생겨나는 몸짓과 눈빛과 숨결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이 어디 나무와 저의 관계 뿐이겠습니까만은
―「나무 번역가」 전문
「나무 번역가」는 그간 손택수 시의 기조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편의 메타시라 할 만하다. 우선 1연에서 화자는 장 콕토가 여행 중 찰리 채플린을 만났던 일화를 소개한다. 1889년에 태어나 20세기 초를 풍미하던 동갑내기 예술가들끼리의 만남은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보고” 다가갈 만한 운명적인 계시를 동반한다. 그 순간에 대해 화자는 이들이 “한 마디 말도 나눌 수 없었”는데, 그 이유가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묘사한다. 화자가 전하는 이들의 만남 장면은 ‘말’의 무용함을 시화하기 위해 극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일종의 시적 비약인 셈이다. 정작 콕토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나는 영어를 못하고 채플린은 프랑스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데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략) 아마도 그 언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언어들 가운데 가장 생생한 언어이리라.”(장 콕토의 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 2003) 이어 그것이 “몸짓의 언어, 시인의 언어, 마음의 언어”일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의 예술 세계와 향후 계획 등에 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다면 「나무 번역가」의 화자가 표현한 “한 마디 말도 주고받을 수 없는 이 순간”에서의 ‘말’은 규범적 언어 혹은 이른바 공준의 언어일 것이요, 그런 언어가 무력했던 순간을 뜻하게 된다.
2연 역시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나무에 관한 인식론을 다룬다. 나무와 인식 사이를 매개하는 ‘번역’은 곧 시작의 과정을 뜻한다. 이들 사이에 시라는 장르가 놓인 이상 언어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오역 투성이”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 작품은 서정적 자아와 나무의 관계, 나아가 언어의 불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나무와 저 사이의 침묵에 골똘해지는 편”을 강조하는 태도는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경계를 환기한다. 나무와 자아 사이에 놓인 정동(情動)이라 할 그 무엇은 결코 언어로써 재현될 수 없는 현상이요 징후이다. “말이 멎은 자리에서 생겨하는 몸짓과 눈빛과 숨결”의 현시는 곧 관계 스스로가 체현하는 온전한 정동의 순간과 같다. 기존의 규범적이고 공준이 된 언어로는 형상화할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그것은 “나무와 저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무의 번역 과정이 가져온 절망은 이처럼 언어 너머에 있는 정동의 존재론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여름풀은 그냥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고 하지만
게으름을 마냥 선전할 수도 없는 노릇
잘리는 풀잎 위로 메뚜기가 뛰고 풀여치가 뛴다
나무 위의 새들이 좋아서 왁자지껄이다
바리깡으로 밀어낸 자리마다 돋아나는 속살
뽑히면서 지뢰 파편처럼 씨앗을 더 널리 터뜨린다
손목의 정맥줄이 튀어나와라 강단을 부리는 풀들
쉽지 않다 만리장성도 어쩌면 풀이 만든 역사 아닌가
풀어놓은 양떼들이 장성을 만들고 허물며
사라진 왕조들의 국경을 선포한 것 아닌가
주린 양의 창자 속으로 들어간 국경선으로
젖을 짜는 노래를 들어라 차라리
초원을 불어가는 풀의 제국 신민이 되어라
머리 한 올 잡아당기면 몸 전체가 그쪽으로 쏠리듯이
뿌리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마당 전체가,
마당을 둘러싼 대지 전체가 앙버티고 있는 한여름
일어나는 땅거죽이 지구의 살거죽 같아서
나는 그만 들어올린 나의 행성을 가만히 내려놓다
―「풀의 행성」 전문
손택수 시가 ‘나무의 수사학’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위와 같이 “풀의 제국 신민”임을 확신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풀 한 포기가 “나의 행성”인 바에야 시인의 운명은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는 2013년 「저물녘의 왕오천축국전」으로 노작문학상을 수상할 때 “시를 쓰는 이 치고 누가 그 ‘제멋의제국’을 만들어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니 ‘제멋의제국’의 신민이라도 되어보고 싶질 않겠습니까”(「‘제멋의제국’의 신민이 되어」, 제13회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라고 소감을 적은 바 있다. ‘제멋의제국’이라는 표현은 1928년 5월 별건곤(別乾坤)에 발표된 홍사용의 「朝鮮은 메나리 나라」에 등장한다. 자신의 민요시론 중 하나인 이 글에서 홍사용은 “요사이 흔한 ‘양시조’, 서투른 諺文風月, 도막도막 잘터놋는 新詩타령, 그것은 다-무엇이냐. 되지도못하고 어색스러운 앵도장사를 일부러 애써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멋의제국으로나 놀어라.”라고 썼다. 우리의 메나리, 즉 전통 시가를 통해 시단의 새로운 양식을 구축하고자 한 홍사용 식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홍사용의 민요시론이 당대 문학장에서 점하는 역학 관계와 문학사적 의미는 단순히 정리될 문제도, 여기서 거론할 계제도 아니다. 다만 “풀의 제국 신민”이나 “‘제멋의제국’의 신민”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는 맥락을 참조하고자 할 뿐이다. 손택수 시가 신민 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일종의 강박증에 빠져 있는 이유는 홍사용의 지적처럼 천박한 ‘앵도장수’의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메나리 세계를 구축하려는 야심찬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 서정에 착목하여 “풀이 만든 역사”를 기록해가고 있는 시 세계에 있어서 외부 이론이나 유행적 사조는 부차적인 외장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나무 번역가의 운명을 지니고 풀 한 포기의 행성에 정주하려는 시인으로서 고유한 로컬의 언어 운용은 절대적 가치라 하겠다.
2.
손택수 시가 정주하는 풀의 왕국이 낭만적이라거나 정론성이 결여될 수 있다는 의혹은 우문일 뿐이다. 그 경계는 식물이라는 종의 범주를 언제든 넘어서는 것이고, 그토록 정제된 서정이 기원하는 치열한 내적 갈등을 항상-이미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냥을 긋고 얼른 담배로 불을 가져갈 때
꺼지지 않게 불을 감싸던 두 손은 꽃봉오리를 품은 잎과 같았지
맞아, 그때 적어도 나는 불이 그냥 불이 아니라
누군가의 심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등으로 바람벽을 하였지
하긴 그때 성냥은 다들 동물들이었으니까
닭표, 사슴표, 펭귄표, 용마표, 오리표
동물들이 불을 켜곤 하였으니까
(중략)
그런 성냥갑엔 근사한 말들도 있었지
‘인간은 오직 노동에 의해서만 세상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편안을 누릴 수 없다.’
알 수 없는 명언들이 우리를 명상으로 이끌었지
먼지가 켜켜이 쌓인 성냥공장 노동자의 노동은 왜 골병인지,
노동은 왜 휴식이 되지 못하는지,
유황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는 내게 그 많은 동물들은
성냥이 단순히 성냥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성냥갑 동물원」 부분
지난 시절의 애틋한 추억을 하나의 화소로 삼아 변주하는 양상 역시 손택수 시에서 보편적 시상 전개의 방식에 해당된다. 위의 작품에는 성냥이라는 유산이 중심 화소로 등장한다. 화자가 아련하게 추억하는 것처럼 성냥의 상호에는 유독 동물 이름이 많았다. 성냥갑은 “천마표와 비호표, 비사표” 등 “세상에 없는 동물들”도 만나게 해 주는 환상의 동물원이었던 것이다. 물론 성냥 상표가 “다들 동물들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성광’, ‘신흥’, ‘UN’ 등의 상표 역시 성냥의 추억을 소환한다. ‘성냥갑 동물원’은 화자의 시적 세계를 극화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명이 작위적인 느낌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개연적인 상상으로 시대와 사회를 아우르는 동화의 이미지를 긴장감 있게 구성하고 있다.
성냥은 화자의 두 손을 “꽃봉오리”로 전이하는 주술로도 기능하였다. 또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편안을 누릴 수 없다”는 명언을 들려주는가 하면, 정작 휴식이 되지 못하는 노동에 관한 명상을 이끄는 기제이기도 하였다. 성냥갑의 동물들은 “성냥은 단순히 성냥만은 아니”었음을 웅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냥갑에 새겨진 명언의 묘사 장면은 조경란의 소설 「성냥의 시대」(일요일의 철학, 2013)를 부른다. 소설에서 이 문구는 성냥공장에서 50년 넘게 일한 ‘그의 아버지’가 매달 골라 새기는 그 달의 문구로서 선택한 아우어바흐의 경구였다. 동일한 경구를 매개로 소설은 “성냥의 시대는 끝났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의 노동을, 시는 “노동은 왜 휴식이 되지 못하는지”를 반성하는 자아의 내면을 각각 형상화하고 있다. 아련한 성냥갑이 환기하는 우리 시대에 관한 문학적 형상들이다.
청산가리에선 아몬드향이 나지
포스겐 독가스에는 새로 자른 건초향이 나지
바다에 면한 공단에선 분홍색 눈이 내린다
염색공장들이 눈까지 염색을 해서
하늘도 구름도 염료 빛깔이다
분홍색 눈을 탈색하려면 더 많은 약품을 써야할지도 몰라
죽은 소를 잊기 위하여 등심을 꽃피우듯이
반월공단은 안산스마트허브로, 시화공단은 시화스마트허브로
(중략)
분홍색 파란색 눈이 내리는 도시
머리 염색이 절로 될 것 같은 거기
아이들은 총천연색 공기들을 마시지
파란 콧물을 흘리면서
―「동화의 나라」 부분
최근의 손택수 시는 동화적 상상력에의 적극적 관심을 보여 준다. 나의 첫 소년(2017)은 그에 관한 상징적 사례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계몽적인 주문과 다르다. 「동화의 나라」도 표제의 이미지와 달리 현실 고발적 성격이 강하다. 동화의 배경부터가 “분홍색 파란색 눈이 내리는 도시/ 머리 염색이 절로 될 것 같은 거기”라 한다. 일견 “반월공단은 안산스마트허브로, 시화공단은 시화스마트허브로” 첨단의 외장을 지니게 되지만, 사실은 청산가리의 아몬드 냄새와 같은 위선의 향기일 뿐이다. 이처럼 「동화의 나라」는 문명의 폐해를 직시하면서도 동화의 외장을 담담히 유지하고자 한다. 비판적인 주제를 천연스러운 정서로 처리하는 외현은 반어의 기법을 전형적으로 취한 형국이다. 그리하여 원색적인 상상의 나라는 손택수의 시선이 항상 가닿으려 하는 상처의 현실이 된다.
3.
이번 신작 시편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말을 위하여」가 아닐까 한다. 풀의 제국을 벗어나 언어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는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생활의 편린으로부터 시상이 비롯되는 손택수표 시학이 예의 작동하고 있다.
보도블록은 일테면 안장 같은 것이다
야생에 얹은 나의 문장들이 그러하듯이
안장이 말의 잔등을 찧어 상처를 내기도 하겠으나
나는 말에게 안장을 얹어서 먼 길을 함께 떠나는 수고를 마냥
단죄하고 싶지만은 않다
장맛비와 일대 일로 씨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알리라
몇 시간씩 퍼붓는 물에 침수된 지층방에서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심장을
양수기 모터가 타버리듯 돌려본 적이 있다면
물은 생명이면서 죽음이다 절망이면서 전망이다
그 앞에 똑똑히 나를 서 있게 한다
그 모든 것인 말과 함께 나는 길을 가리라
길섶에 핀 들꽃에 코를 벌름거리기도 하면서
말의 숨소리와 뱃구레의 오르내림을 따라 출렁이리라
하루의 노역에 지쳐 새어나오는 내 한숨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는
말도 어느 순간 내 몸의 기별들에 반응을 하겠지
가령 나는 말이 고개를 돌려 나를 감아줄 때
그가 그 긴 목으로 다정하게 포옹을 하고 있음을 안다
그가 그 큰 눈망울 속에 담은 나를 보여줄 때 거기에 눈부처가 앉아 있음을 안다
허구헌 날 길을 뜯는 공사 먼지가 눈을 흐리는 일은 좀
자중하였으면 얼마나 좋겠나 발굽이 다치면 나 또한 절룩거려야 하니
안장은 사실 애물단지 같기도 하다 말과 나 사이의 장벽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통방을 하듯이, 거기 누고 없소
또각또각 깔린 대지에 함께 노크를 하리라
장맛비 뒤에 나온 인부들이 깨진 보도블록을 수선하고 있다
편자를 박듯 망치로 블록을 끼워 맞추고 있다
이런 식으로밖에 말과 만나지 못하는 게 좀 서글프긴 하지만
이마저 없다면 우리는 영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말을 위하여」 전문
위에서 화자는 “장맛비 뒤에 나온 인부들이 깨진 보도블록을 수선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 ‘말’의 사유를 끌어들인다. 보도블록과 말(言)과 말(馬) 사이의 미적 거리는 가깝지 않다. 그리하여 화자는 동음이의 개념들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부르면서 이들을 연결하는 장치로서 ‘안장’을 활용한다. 작품 모두에서 보도블록을 안장이라 지시하는 것이다. 대지 위에 얹은 보도블록이 안장인 것처럼 화자는 “나의 문장들”을 “야생” 위에 안장으로 얹는다.
안장을 매개로 하여 “이런 식으로밖에 말과 만나지 못하는 게” 서글프더라도 말은 “그 모든 것”이기에 대면해야 할 타자일 수밖에 없다. 안장이라는 존재는 “사실 애물단지”이자 “말과 나 사이의 장벽”일 뿐이다. ‘말(언어)’을 만나기 위해서 ‘말(문장)’을 사용하지만, 말은 말의 장애물일 수밖에 없다. 지극한 언어도단의 정황이기만 하다. 그 아포리아의 순간 속에서도 “이마저 없다면 우리는 영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진지하게 전유해야 한다는 전언이 오롯하다.
이처럼 손택수 시는 구체적인 시적 정황과 정제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손택수 시를 접해 본 독자라면 그의 시가 일종의 매너리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알 것이다. 이는 제도화된 문단 구조 속에서 시작의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따르는 불가피한 한계상황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를 기쁘게 맞이하는 것은 발상의 진정성과 시어 세련의 탁월한 감각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실 손택수 시의 자아는 근본적인 모순을 인지하고 있다. 모두에 감상한 「나무 번역가」를 통해 “말이 멎은 자리에서 생겨나는 몸짓과 눈빛과 숨결”이 또 다른 정동의 생성 순간임을 화자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작가라면 언어 자체의 물성을 전유하려는 기획에 생을 걸어야 한다. 무수한 불면의 밤을 바쳐 신체와 비신체 사이의 정동을 체감하려는 노력이 없고서야 문학은 한낱 재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이 녹록하지만은 않다. 문학장은 정론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고, 그저 여기(餘技)로 적는 문장들이 작품인 척하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뼈아픈 반성이 필요한 시절이다.
손택수 시는 그런 상실을 위무하고자 한다. 시대의 상처에 대한 숙주이기를 자처한 그의 시는 새로운 계절에도 변함없는 위로로 우리 곁에 와 주었다. 그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다 혼자 밥을 먹는”(「혼자 밥 먹는 사람」, 동안 2016년 봄호) 동안에도 언제나 “말과 함께”일 것이다. 그 속에 존재할지 모를 무의식적 반복은 시인 스스로가 지양해 나갈 것임을, 독자이자 친구로서, 이 글은 확신하고 있다.
1. 약력(저서명, 대학, 문학상 경력) : 1970년 대전 출생. 1999년 작가마당, 2007년 현대시 평론 등단. 근대의 두 얼굴, 김수영과 신동엽, 지역, 문학, 로컬리티 외. 2010년 최인희 문학상. 현재 계간 동안 편집장,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