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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이 본 거대지진의 비극 / 7/31(월) / 현대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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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쿠 대화재, 겐로쿠 지진, 운젠·후겐다케 분화, 교토 텐메이 대화재…헤이세이, 레이와 시대와 마찬가지로 재해가 많았던 에도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재해에서 살아남았는가?
18세기 네덜란드 상관장으로 나가사키에 부임한 탄토는 당시 발생한 겐로쿠 지진 피해를 목격한다. 여기서는, 전회의 <<모든 가옥이 붕괴해 소실되었다>… 에도 시대의 「네덜란드인」이 본 「거대지진의 피해」에 이어, 그때 탄토가 남긴 기록을 쫓는다.
※ 본 기사는 프레데릭 클레인스(저), 이소다 미치후미(해설) 『네덜란드 상관장이 보았다 에도의 재해」(고단샤 현대 신서)의 내용을 발췌·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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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카이도변의 피해
탄토의 일기로 돌아가자.
오다와라의 숙소 주인에 대한 상황을 들은 탄토는 다시 말을 타고 오다와라를 떠났다. 하지만 이내 앞길을 가로막는 험난한 곳에 부딪혔다. 사카와가와(酒匂川)이다. 사카와가와는 앞서 언급한 오오이가와(大井川)와 마찬가지로 다리가 없고 나루터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강 건너 인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건널 수 없다. 이때 사카와가와는 물살이 유난히 세고 물이 깊었다. 이 강을 건너기 위해 탄토는 353명이나 되는 인부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다와라에서 오이소까지의 길 중의 상황에 대해서 탄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길바닥 어디나 대부분의 가옥이 무너지고 다리가 부서지고 수목이 쓰러져 있다. 또 산에서 무거워 보이는 돌들이 많이 굴러떨어져 있었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며 탄토는 여행을 계속하다 저녁에 오이소에 도착했다. 오이소의 숙소는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손상이 심했다. 또 가옥 일부가 무너졌을 때 하인 몇 명 외에 한 아이를 잃었다고 숙소 주인이 탄토에게 말했다. 심지어 마지막 여진이 있었던 것은 8일 전의 일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오이소의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정보를 알아내지 못했다.
다음 날인 3월 29일 탄토는 오이소에서 출발해 에도로의 여행을 계속했다. 나룻배로 「바뉴가와(馬入川)」(사가미 강의 하류부)를 건넌 직후에 지진이 있었던 것 같다. 탄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처음에는 몇 명의 하인, 그 후에 다이통사[마타에몬]로부터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는 충고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가마 안에 있고 다른 네덜란드인들은 말을 타고 있었고, 가마와 말의 상하운동으로 인한 흔들림 때문에 우리는 지진을 느끼지 못했다."
이 지진은 경미한 것으로 곧 끝난 듯 네덜란드인들은 앞서 히라쓰카와 후지사와를 통과했다. 두 숙소에서는 대부분의 가옥이 무너져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예년 후지사와에서 점심을 먹었지만 매년 점심을 제공하던 여관은 모두 파괴돼 탄토는 단숨에 도즈카까지 가기로 했다.
도즈카는 본 장의 최초로 거론한 신임 나가사키 부교 이시오 우지노부가 지진 발생 시 큰 곤욕을 치른 숙소이다. 탄토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토즈카의 대부분 가옥은 역시 무너진 채였다. 또 무너지지 않은 가옥은 버팀목으로 보강돼 있었다. 도즈카 동쪽 끝에서 겨우 피해를 덜 본 여관을 찾은 탄토 일행은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했다.
길가의 호도가야에서도 대부분의 가옥이 붕괴되어 있었다. 오후 4시에 가나가와(神奈川) 숙소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다닌 숙소와 비교하면 가나가와는 피해가 적었다. 탄토 일행은 가나가와(神奈川)에서 밤을 보냈다.
30일 밤중 탄토는 처음으로 여진을 느꼈다. 탄토는 여진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행은 새벽 3시 가나가와에서 출발해 나룻배로 '로쿠고가와(六郷川)'(타마 강의 하류부)를 건넌 뒤 9시경 시나가와에 도착했다. 그래서 습관에 따라 일행을 수행하던 일본인들은 에도로 들어가기 위해 여행용 복장부터 단정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옷 갈아입기가 끝나자 일행은 여행을 계속해 무사히 에도로 들어갔다.
◎ 에도(江戸)의 부흥 활동
지진 후의 에도를 보고 탄토가 품은 첫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에도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가옥이 지진 때문에 붕괴되고 소실되어 생긴 광범위한 공터가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터 곳곳에 짚 등의 소재를 사용하여 간이하게 꾸며진 오두막이 세워져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 가옥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타지 않은 재목을 열심히 긁어모으고 있었다. 목수들과 다른 장인들은 모두 부지런히 일했고 새 가옥 건설 및 준비에 종사했다."
탄토의 일기에서는 지진 재해 후에 일본인들이 열심히 부흥 활동에 착수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광경은 일본 측 사료에서 잘 찾아볼 수 없다. 지진 재해에 지지 않는 건강하고 씩씩한 일본인의 기질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일본인이 임하고 있는 부흥 활동을 관찰하면서 탄토는 오전 11시에 에도 숙소인 나가사키야에 도착했다. 나가사키야는 건물의 여러 곳이 기울어져 있어, 나무 구조가 어긋나는 등 심한 손괴가 눈에 띄었지만, 붕괴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재해지를 통과하는 여행을 무사히 완수함으로써 탄토는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큰 재해가 닥친 에도에서 한시라도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하고 있었다.
탄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또다시 우에몬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앞으로 관리들과 나가사키야의 주인 겐에몬과 함께 먼저 에도에 도착해 있던 나가사키 부교 나가이 나오치카 및 당시 막부 내에서 네덜란드 관계를 담당했던 대감찰 마쓰마에 요시히로와 사쿠지 부교 오바타 시게아츠에게 네덜란드인의 도착을 알리러 갈 것이라고 탄토에게 전했다. 탄토는 마타지에몬에게 쓰나요시의 알현 허가가 빨리 내려지도록 막부 고관에게 청원해 줄 것을 강력히 다짐했다. 알현을 조기에 마치면 그만큼 빨리 에도에서 나올 수 있을 것으로 탄토는 기대하고 있었다.
마타지에몬이 나가고 나서 에도에 와 있던 나가사키쵸 촌장인 다카시마 시로베가 탄토에게 인사하러 왔다. 그는 그 다음날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데지마에 남아 있는 네덜란드인들에게 탄토 일행의 무사함을 전해 달라고 탄토는 부탁했다. 이후에도 몇몇 봉행소 관리들이 탄토를 찾아왔다. 탄토는 네덜란드 파이와 홍차로 그들을 대접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일본인 방문객들에게 내놓았던 파이나 구운 과자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빵 버터 치즈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음을 여러 네덜란드 상관장 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저녁에 돌아온 마타지에몬은 탄토 일행이 무사히 에도에 도착한 데 대해 나가사키 부교와 막부 관리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희소식도 있었다. 쓰나요시에 대한 알현은 사흘 뒤인 4월 2일로 결정되었다. 알현이 이렇게 빨리 결정된 것에 탄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탄토는 즉시 진상품 정리에 착수했다.
지진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탄토는 밤에 담화하던 겐에몬의 장남에게 지진과 이후 화재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 물었다. 「에도와 오다와라의 사망자 수는, 남성, 여성, 어린이를 포함하면 27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현지 에도성 및 오다와라성에서 사망한 사람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것도,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대답을 탄토는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겐에몬의 장남은 나가사키야의 불행에 대해 탄토에게 털어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임신하여 출산이 임박했던 그의 어머니[겐에몬의 아내]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 놀란 나머지 조산에 이르러 태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공무일기에 기록을 남길 정도로 탄토에게 충격을 준 듯하다. 이 일례에서 보듯 겐로쿠 지진이 많은 비극을 낳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연재 기사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이 본 '거대지진'의 충격>에서는 탄토의 경력부터 그가 겪은 재해 모습까지 자세히 해설하고 있습니다.
프레데릭 클레인스
https://news.yahoo.co.jp/articles/86e40beb438a7778465031e83de7a2004fda1536?page=1
「江戸は見るに堪えないくらい悲惨な状況だった」…オランダ人が見た「巨大地震」の悲劇
7/31(月) 7:03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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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ビジネ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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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暦の大火、元禄地震、雲仙・普賢岳の噴火、京都天明の大火……平成、令和の時代と同じように災害の多かった江戸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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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びとはいかに災害を生き抜いたのか?
18世紀にオランダ商館長として長崎に赴任したタントは、当時発生した「元禄地震」の被害を目の当たりにする。ここでは、前回の<「すべての家屋が倒壊し、消失している」…江戸時代の「オランダ人」が見た「巨大地震の被害」>に引き続き、そのときタントが残した記録を追う。
※本記事は、フレデリック・クレインス (著), 磯田 道史 (解説)『オランダ商館長が見た 江戸の災害』(講談社現代新書)の内容を抜粋・再編集し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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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道沿いの被害
タントの日記に戻ろう。
小田原の定宿の主人についての状況を聞いたタントはふたたび馬に乗り、小田原を後にした。しかし、すぐに行く手を遮る難所にぶち当たった。酒匂川である。酒匂川は前述の大井川と同様に橋がなく、船渡しも許されていなかったため、川越え人足の力を借りないと渡れない。この時酒匂川は流れがひじょうに強く、水が深かった。この川を渡るためにタントは三百五十三人もの人足を雇用せざるを得なかった。
小田原から大磯までの道中の状況について、タントは次のように記録している。「道中どこもほとんどの家屋が倒壊しており、橋が壊れ、樹木が倒れている。また、山から重そうな石が数多く転がり落ちていた」。
このような光景を眺めながらタントは旅を続けて、夕方に大磯に到着した。大磯の宿は完全に倒壊してはいなかったが、損傷がひどかった。また、「家屋の一部が倒壊した時に数人の使用人のほかに一人の子どもを失った」と宿の主人がタントに語った。さらに、最後に余震があったのは八日前のことであるとも話してくれた。しかし、大磯の死者数については情報を聞き出せなかった。
翌日の三月二十九日にタントは大磯から出発し、江戸への旅を続けた。渡し船で「馬入川」(相模川の下流部)を渡った直後に地震があったようである。タントは次のように書いている。「最初は数人の使用人、その後に大通詞〔又次右衛門〕から地震が起こっているとの忠告を受けた。しかし、私は乗物のなかにいて、ほかのオランダ人は馬に乗っていて、乗物や馬の上下運動による揺れのため、我々は地震を感じなかった」。
この地震は軽微なもので、すぐに終わったらしく、オランダ人は先へ進み、平塚と藤沢を通った。両宿場ではほとんどの家屋が倒壊していた。オランダ人は例年藤沢で昼食を取っていたが、毎年昼食を提供していた宿屋は全壊したので、タントは一気に戸塚まで進むことにした。
戸塚は、本章の最初に取り上げた新任の長崎奉行・石尾氏信が地震発生時にたいへんな目にあった宿場である。タントが到着した時には、戸塚の大部分の家屋はさすがに倒壊したままだった。また、倒壊しなかった家屋は控え柱で補強されていた。戸塚の東端でようやく被害の少なかった宿屋を見つけたタント一行は、そこで昼食を取り、すぐに出発した。
道中の保土ケ谷でもほとんどの家屋が倒壊していた。午後四時に神奈川宿に到着した。それまでに通った宿場とくらべると、神奈川は被害が少なかった。タント一行は神奈川で夜を過ごした。
三十日の夜中にタントははじめて余震を感じた。タントは、その余震は「さほど強くなく、長く続かなかった」と記している。一行は早朝三時に神奈川から出発し、渡し船で「六郷川」(多摩川の下流部)を渡った後、九時頃に品川に到着した。そこでは、習慣に従って、一行に随行していた日本人は江戸に入るために、旅行用の服装から整った装いに着替えた。着替えが終わると、一行は旅を続けて、無事に江戸に入った。
江戸の復興活動
写真:現代ビジネス
地震後の江戸を見て、タントが抱いた最初の印象は次のとおりだった。「江戸は見るに堪えないくらい悲惨な状況であると思った。というのも、家屋が地震のために倒壊し、焼失してできた広範囲の空き地が各所に見えたからである。そして、そうした空き地のところどころに藁などの素材を使って簡易に拵えられた小屋が建っていた。労働者たちは、新たな家屋を作る材料として使用するために、焼けていない材木を熱心にかき集めていた。大工たちやほかの職人たちは皆せっせと働き、新しい家屋の建設およびその準備に携わっていた」。
タントの日記では、震災後に日本人が一生懸命復興活動に取りかかっている姿が生き生きと描写されている。このような光景は日本側史料にはあまり見られない。震災に負けない元気でたくましい日本人の気質を我々に伝えてくれる貴重な史料である。
日本人が取り組んでいる復興活動を観察しながら、タントは午前十一時に江戸における定宿の長崎屋に到着した。長崎屋は建物の複数箇所が傾いていて、木組みが外れるなどのひどい損壊が目立っていたが、倒壊までには至っていなかった。被災地を通る旅を無事に成し遂げたことでタントはひと安心した。しかし、他方では、大きな災害に見舞われた江戸から一刻も早く出発できるように神に祈っていた。
タントがそのように考えている時に、又次右衛門が部屋に入ってきた。彼はこれから役人と長崎屋の主人である源右衛門とともに、先に江戸に到着していた長崎奉行・永井直允および当時幕府内でオランダ関係を担当していた大目付の松前嘉広と作事奉行の小幡重厚にオランダ人の到着を知らせに行くとタントに伝えた。タントは又次右衛門に対して、綱吉への謁見の許可が早く下りるように幕府高官に請願してくれることを強く念押しした。謁見を早期に済ませれば、それだけ早く江戸から出られるとタントは期待していた。
又次右衛門が出かけてから、江戸に来ていた長崎町年寄・高島四郎兵衛がタントに挨拶に来た。彼はその翌日に長崎へ戻る予定であった。出島に居残っているオランダ人にタント一行の無事を伝えてくれるようにとタントは頼んだ。その後も数人の奉行所役人がタントを訪ねて来た。タントはオランダのパイや紅茶で彼らをもてなした。当時オランダ人が日本人訪問客に出していたパイや焼き菓子が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かは詳らかではない。ただ、パンやバター、チーズなどとともに日本人にたいへん受けが良かったことが、複数のオランダ商館長日記からうかがえる。
夕方に戻ってきた又次右衛門は、タント一行が無事に江戸に着いたことに、長崎奉行と幕府高官がたいへん喜んでいると伝えた。そして、朗報もあった。綱吉への謁見は三日後の四月二日に決まった。謁見がこんなに早く決まったことにタントは喜びを隠せなかった。タントは早速献上品の整理に取りかかった。
震災に対する好奇心を抑えきれなかったタントは、夜に談話していた源右衛門の長男に、震災とその後の火災でどれだけの犠牲者が出たのかを尋ねた。「江戸や小田原における死者の数は、男性、女性、子どもを含めると二十七万人に上ると推定されている。それには当地の江戸城および小田原城で死亡した人は含まれない。というのも、それについては話してはいけない」という返答をタントは記録している。
その後、源右衛門の長男は長崎屋の不幸についてタントに打ち明けた。彼の話によると、妊娠して出産間近であった彼の母〔源右衛門の妻〕は地震が起こった時に驚きのあまり早産に至り、胎児とともに亡くなったという。この話は公務日記に記録を残すほどタントに衝撃を与えたようである。この一例に見られるように、元禄地震が多くの悲劇を生んだことは想像に難くない。
さらに連載記事<長崎の「オランダ商館長」が見た「巨大地震」の衝撃>では、タントの経歴から、彼が体験した災害の様子まで詳しく解説しています。
フレデリック・クレイン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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