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필리핀 독립기념일(6월 12일)
필리핀 국민 영웅의 죽음… 독립운동 확산 불붙였죠
필리핀 독립기념일(6월 12일)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입력 2024.06.12. 00:30 조선일보
필리핀 비밀결사 조직 카티푸난 회원들. /위키피디아
필리핀 독립기념일
오늘은 필리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인 필리핀 독립기념일이에요. 300년 넘게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았던 필리핀은 1898년 6월 12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답니다. 독립기념일이 되면 수도 마닐라에서는 퍼레이드가 열려요. 거리는 화려한 장식과 필리핀 국기로 물들죠. 마닐라 남쪽에 있는 카비테주 카윗에선 조금 색다른 행사를 볼 수 있어요. 바로 에밀리오 아기날도 박물관에서 진행되는 국기 게양식 행사입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장군이 그의 고향 카비테 카윗에 있는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행사라고 해요.
필리핀은 스페인에 이어 1946년 7월 4일 미국으로부터 한 번 더 독립했어요. 하지만 필리핀은 에밀리오 아기날도 장군이 필리핀 최초의 국기를 들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6월 12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해 공휴일로 삼고 있어요. 왜 필리핀은 두 번의 독립을 하게 된 것일까요?
필리핀, 유럽에 알려지다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로 진출하던 시기, 필리핀을 겨냥한 나라는 스페인이었어요.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떠난 탐험가 마젤란은 1521년 세계 일주를 하던 도중 필리핀의 세부에서 현지 원주민들과 싸우다 죽었는데요. 마젤란 일행이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필리핀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게 됐어요. 이후 16세기 중반 탐험가 레가스피가 지휘하는 스페인 원정대가 필리핀을 정복했습니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점령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필리핀에는 스페인이 원했던 향료와 값비싼 자원이 없었어요. 하지만 북부 필리핀은 중국과 인접했기 때문에, 스페인이 필리핀을 차지하게 되면 중국과 교역하기 쉬워진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는데요. 스페인은 중국 시장에 은을 공급하고, 유럽 시장에서 수요가 늘던 실크와 도자기 등 중국산 물품을 얻고자 했죠.
스페인 식민 시대에 필리핀 원주민들은 고통받았어요. 스페인 식민 정부는 인종에 따라 서열을 매겼는데 가장 밑바닥에 필리핀 원주민을 두고 착취했습니다. 이들은 가혹한 세금과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고통받던 필리핀 원주민들은 17세기 초부터 식민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1872년 어느 날 스페인 식민 정부에 고용돼 카비테 지역에서 근무하던 필리핀 군인과 무기고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의 여파는 전국으로 확산됐어요. 스페인 식민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필리핀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신부 3명을 사형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립에 대한 필리핀 사람들의 열망이 들끓게 돼요. 당시 필리핀에서는 해외에서 교육을 받고 귀국한 중산층 자녀들이 새로운 엘리트 계층으로 성장하고 있었어요. 그들 가운데 일부가 스페인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앞장섰죠.
필리핀의 독립운동가들
대표적 인물이 필리핀 역사상 최고 소설가이자 영웅으로 꼽히는 호세 리살(1861~1896)이에요. 스페인에서 유학했던 그는 1892년 귀국해 독립운동을 지휘합니다. 그는 필리핀이 아직 싸울 만한 힘을 갖지 못한 상황이라 보고 무장 투쟁보다는 온건한 방법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스페인 식민 정부는 그를 체포해 섬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스페인 식민 정부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필리핀 사람들의 반발도 커졌어요. 또 다른 독립운동가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1892년 ‘카티푸난’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합니다. 카티푸난은 독립운동을 이끌며 사실상 필리핀 혁명 정부의 역할을 했어요. 첫해엔 회원이 10만명 정도였는데, 4년 뒤 약 40만명으로 늘었다고 해요. 1896년 보니파시오는 카티푸난이 봉기를 일으키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를 ‘필리핀 혁명’의 시작으로 봐요.
스페인 식민 정부는 이 혁명의 배후에 리살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를 사형합니다. 하지만 리살은 보니파시오와 달리 무장 투쟁을 반대하고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에 보니파시오와 카티푸난의 무장 투쟁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죠. 리살의 죽음은 필리핀 전국을 뒤흔들었고, 독립운동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스페인 식민 정부와의 교전에서 거듭 패하자 카티푸난 회원들은 보니파시오가 혁명의 지도자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이들은 새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를 열고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어요.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아기날도 또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필리핀의 독립을 꿈꿔왔어요. 하지만 스페인과의 교전에서 상황이 계속해서 좋지 않게 흘러갔고, 결국 아기날도는 스페인 식민 정부와 휴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약에 따라 카티푸난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을 가게 됐습니다. 아기날도 또한 홍콩으로 망명했어요.
그런데 그사이 스페인에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바로 쿠바입니다. 쿠바에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이 됐어요. 이때 미국은 스페인을 혼란에 빠뜨리고자 카티푸난 지도부와 접촉합니다. 미국은 카티푸난 지도부가 다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설득했어요.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했던 카티푸난 지도부는 해외 망명에서 돌아와 다시 독립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는 필리핀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답니다.
하지만 필리핀의 독립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 결과 패전한 스페인은 미국과 파리조약을 체결해요. 그 결과 스페인은 미국에 괌과 필리핀, 푸에르토리코의 지배권을 넘기게 됩니다. 독립을 생각했던 필리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식민 지배가 시작된 거예요. 결국 아기날도가 이끄는 혁명 공화국 정부는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들의 교전은 3년간 계속됐어요. 하지만 1901년 아기날도가 생포되면서 혁명 정부는 미국에 항복합니다. 이후 필리핀은 1946년이 되어서야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답니다.
탐험가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하던 도중 필리핀의 세부에서 현지 원주민들과 싸우다 죽었어요. 마젤란 일행이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필리핀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게 됐어요(왼쪽). 호세 리살. 스페인 식민 정부는 필리핀 혁명의 배후에 리살이 있다고 보고 그를 사형해요(가운데). 필리핀 독립운동가이자 제1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오른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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