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계표를 옮기지 말라
(신 27:11-26)
어느 나라든 해야 하는 법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법이 있습니다. 만약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면 응분의 벌이 따릅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40일 금식기도를 시키시면서 613가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248가지는 해야 할 율법이요, 365가지는 하지 말아야 할 율법입니다.
모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할 일을 가르쳤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사이에 백성을 모으고 11가지 저주의 율법을 다시 한 번 선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가장 범하기 쉬운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17절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하신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지계표가 무엇일까요? 지계표란 논과 밭의 경계나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경계석을 가리킵니다. 이 표를 옮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옮기는 사람은 남의 땅을 빼앗으려는 도적질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1. 신앙의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주 안에서” 라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그 말씀에는 예수 떠나서는 안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벧전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됩니다. 우상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됩니다. 혹은 하나님 멀리 하고 세상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가까이하면 지계표를 옮긴 것입니다. 신17:16에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라” 하셨습니다. 애굽은 세상인데 세상 죄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가 철저히 세상만 배격해도 복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셨을 때 그대로 순종했더니 이삭이 농사하여 그 해 백배나 얻었고 창대하고 왕성하고 양과 소가 떼를 이루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마음에 세속이 있으면 다 추방해 내세요. 진실로 회개하세요. 그러면 복이 옵니다. 형통이 옵니다. 생명이 임합니다. 천국이 옵니다. 유쾌한 날이 옵니다. 기도가 응답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세속의 물결이 우리 마음에 침투하면 안 됩니다. 역청을 발라 바닷물이 새지 않고 둥실둥실 떠간 노아의 방주와 같이 세상 틈타지 않게 신앙의 지계표를 옮기지 않아야 합니다.
2. 사명의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마다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의 지계표를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사명이란 다음 세 가지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① 나는 이것 때문에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 ② 나는 이것 때문에 산다. ③ 나는 이것 때문에 죽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사명입니다.
바울을 보십시다. 바울은 복음 증거가 자기 사명이고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자기를 복음 전도자로 불렀다고 고백합니다(갈1;15-16). 그리고 행20:22-24을 보면 복음 때문에 살며 복음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 른지 알지 못 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結縛)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그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사명입니다.
남북전쟁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미국의 어느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남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던 한 병사가 포로가 되어 북군의 포로수용소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포로가 된 것도 거기서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했습니다. 한 편 북군에서는 그의 석방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석방의 기회가 있었지만 다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곳에 보냈다고 확신했기에 강제로 끌어내려고 했으나 그는 오히려 석방을 시키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 후 그 병사는 전쟁이 끝나기까지 그 포로수용소에 남아서 포로들을 돌보며 전도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필리핀 대통령 막사이사이 아버지는 땜쟁이었습니다. 아들이 대통령이 되자 늙은 아버지를 궁궐로 모시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 하면서 끝내 그는 평생 땜쟁이로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사명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사명, 어머니로서의 사명, 아내 남편으로서의 사명도 일종의 사명입니다.
사명은 각자 다르지만 다 있습니다. 이 자기 사명의 지계표를 옮기면 안 됩니다. 그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소홀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데 옮겨서 고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감정따라 이 사명을 소홀하여 지계표를 옮기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 욕심 때문에 이 사명의 지계표를 옮기다가 죽었습니다. 자기 사명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복의 줄입니다.
3. 한계의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계표는 자기 땅의 한계를 의미하는 표입니다. 그 한계를 넘으면 그것이 도둑이요, 사기입니다. 우주 역사상 최초의 죄는 루시퍼의 반란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천사장 루시퍼가 지계표를 넘었습니다. 자기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구 역사상 최초의 죄는 무슨 죄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마귀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인간이 넘지 않아야 할 지계표를 넘어 하나님이 되려고 했습니다. 자기 한계를 넘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이단의 교주들이 자기 한계를 넘어 자신을 신으로 소개하거나 구주로 소개하면서 영혼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지계표를 넘으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집니다. 계19:20을 보면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도 함께 불 못에 떨어집니다.
이조 시대에 일어난 일입니다.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아무도 왕을 왕으로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똑똑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당신 면장 시켜 주면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지요.” “당신 군수 시켜 주면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지요.” “당신 시장시켜 주면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지요.” 이렇게 계속 묻다가 “그러면 왕 시켜 주면 할 수 있겠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왕을 무섭게 노려보더니 뺨을 세차게 후려치면서 말했습니다. “나보고 왕을 반역하라고요?” 왕은 뺨이 아팠지만 그 청년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후에 그 청년을 궁중으로 불러서 큰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지계표를 넘지 않는 청년의 아름다운 모습 때문입니다.
사사기 9장을 보면 숲속에서 나무들이 나무의 왕을 뽑기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감람나무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자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하며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무화과나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그러자 나무들은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그래서 가시나무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그러자 가시나무는 말하기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자기 한계를 아는 나무였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자기 한계를 모르는 나무였습니다. 자신을 알았다면 "나는 찌르는 나무입니다. 나를 조심하세요. 나는 이곳에 가만히 있음이 가장 옳은 것입니다." 했을 텐데 그것을 몰랐기에 비극이 왔습니다.
오늘날의 혼란은 한계의 지계표를 옮긴 것입니다. 누가 통치자이고 누가 백성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회도 혼란입니다. 교회도 혼란입니다. 가정도 혼란입니다. 직장도 혼란입니다. 매춘도 직업으로 인정해 달라고 데모를 합니다. 동성애도 법적으로 보장해 달라고 법을 고치려고 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이 교사를 사진 찍어 고발하고 폭행합니다. 세상을 고발할 기자들이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세상을 변질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경계를 넘으면 파멸과 죽음이 있습니다. 비극이 있습니다. 교만하지 맙시다.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물리치십니다. 더 겸손해집시다. 더 허리를 굽히십시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이런 경고를 주셨습니다.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호5:10) 지계표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계표를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살고, 사명 안에서 살고, 자기 한계 안에서 사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