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클리닉 의원
이따금 앰뷸런스가 소리치며 드나드는 입구엔
아크릴 의원 간판이 보이다 말다 했다.
퇴직자들처럼 빽빽이 서 있는 버즘나무들
하나같이 허리가 굽었다.
그 밑 나무 의자엔 눈이 퀭한 초점이 없는 노인들
아침부터 고요를 깔고 앉아 일어설 줄 모른다.
지하 통증 치료실마다 세상 소음에 신경 다친 환자들
큰 대자로 죽은 듯이 누워 있다.
저주파 전기 치료와 초음파 치료 중인지
희미한 형광 불빛 아래 미세하게 흘리는 신음 소리들.
뒤뜰엔 팔에 링거를 꽂은 헐렁한 환자복 차림의
가을 땡볕들이 드문드문했다.
누런 잎사귀들 잠복했다 날아와 눈 찡그리며
텅 빈 휠체어에 포개어 앉는다.
담장 너머로 아득히 지는 해
누가 저린 발로 일어서는 저린 그림자를
어스름 속 등신대로 두고 갔나.
회진이 없는 텅 빈 적요가 그 속에서 삐걱거린다.
나무 위의 작은 집
집이 없는 사람은
나무 위의 방 한 칸 세 들어 살 일이다.
무겁고 낡은 구두 벗고 올라가
나무 위에서 생각하거나 한뎃잠에 든다면,
중천에 뜬 해를 바라보고
열매나 목초액을 먹고 산다면.
궤도에 뜬 인공위성처럼 높은 고공에서
세상을 샅샅이 뒤져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 사람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그는 아침마다 우짖는 때까치 소리와
깃털보다 보드라운 햇살 먼저 만져보려고
나무 위의 작은 방 한 칸 엮어 세를 산다.
하늘 더 높은 궤도에서 지구의 알몸을 본 뒤로는
폭풍우 속 환한 무지개를 본 뒤로는
누군가 지구를 덮치는 손이 있을까
땅 위 발자국 같은 건 찍지 않기로 맘먹었다.
그래 그가 한 말이 수렵꾼처럼
밤마다 사람들의 꿈을 뒤지러 온다.
결코 빛나지 않은 생업일지라도
나무 위의 방 한 칸 엮어 세 든다면
우연히 떨어지는 별똥별 한 잎
가등처럼 환히 밝혀 든다면
대기권 뚫고 솟은 작은 위성처럼
나도 홀로 빛나리.
정동진역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 『바다가 처음 번역된 문장』, 실천문학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