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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특강>
필유사성, 필유사기
-잘못 가르치고 있다. 수필시학을 찾아서 -
권대근
수필학박사
대한민국 수필학 대한명인(제15-436호)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은 청승스럽다. 청승은 슬픔과 다르고, 궁상은 가난과 다르다. 궁상과 청승은 청산해야 할 우리 문학의 유산이다. 이 시는 너무 감상적이고 직설적이어서 시인의 감정이 객관화되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슬픔을 어떻게 시로서 성공적으로 표달하는가이지 아내의 죽음을 청승스럽게 슬퍼하는 일, 그 자체는 아니다.
■ 이번 특강은 본격수필을 꿈꾸는 작가들에게 격조 높은 수필미학, 또는 수필시학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안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동양의 ‘모르는 게 약이다’보다는 서양은 ‘아는 게 힘이다’라는 논리가 학문세계에서는 더 유용하지 싶다. 알아야 쓴다는 의미는 머리 속에 수필의 원형적 구조가 그려져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지만 수필을 써가는 손끝은 수필의 메타성을 지향해야만 원고지 위에 좋은 수필이 들어앉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내가 아는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x)
=>수필은 교술에 속하며, 자아를 세계화하는 것이다.(x)
=>수필은 논픽션이다.(x)
■ 문제는 지금까지 수필시학을 구축하면서, 수필 장르를 수필 속에 가두어두고, 수필의 내포만 다져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수필의 문학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수필의 상위 개념인 문학, 나아가 예술, 작가라는 차원으로 확대해서 수필 시학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수필의 문학성과 수필의 요건이 동일한 의미인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본격수필을 쓰려면, 우선 자신의 머리 속에 수필의 좌표라는 수필시학을 확고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제가 정립한 <필유사성사기>는 수필창작에서 시급한 수필의 원형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수필은 사실대로 쓰는 것이다.(x)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다.(x)
=>수필 ->문학 ->예술 ->작가
=>①사회에 대한 장님, 사회를 보되,
②그 흐름을 작품 속에 담아내지 못하는 사람,
③사회 한복판에 서서 그 흐름을 파악하고, 문제를 작품 속에 담아내는 사람
=><인간됨>을 지향하고, <인간답게>에 공헌해야
=>매슈 아놀드 -모순에 찬 사회를 다시 인간이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종교가 아니고, 문화, 문화의 핵심내용은 예술작품이며, 문학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 <작수필유법불가, 무법역불가>, ‘수필을 씀에 있어서 작법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는 말에는 작법이 꼭 무엇이라 말할 수 없지만, 어떤 룰이 있을 것이란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가설에 따라 수필시학을 찾으려고 많은 수필학자들이 노력을 하고 있는 건 기정사실이다. 필자 역시 <필유사기>, ‘수필은 사기다’에 이어, <필유사성>, ‘수필은 네 가지 성질을 가진다’라는 필법을 드디어 완성하였다.
=>
수필에서 피해야 할 네 가지는,
① 품격을 잃으면 안 되고, <격약불노>-삼화
② 지성이 없으면 곤란하고, <이단불심>-통섭
③ 의도가 불순해서는 아니 되고, <의잡불순>-감화
④ 재주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재부불아>-진실
수필에 있어야 할 네 가지는
① 예술적 차원에서 수필은 비가시성을 가시화해야 하고, <비가시성의 가시화>
② 문학적 차원에서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이어야 하고,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
③ 수필 차원에서 구성적 비유의 형상적 의미화를 이루어야 하며, <형상적 체험>
④ 작가의식 측면에서 수필은 차이를 가치화하는 저항적 담론이어야 한다는 젓이다. <저항적 담론>
=>침묵은 몰지성의 최대 도피처
■ 한국에서 수필이 여전히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폄하되고 있는 까닭은 수필의 잡문성에 기인한다. 이런 부당한 인식을 바꾸어주기 위해서는 실력있는 비평가가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수필에 대한 이론적 연구가 활발하고 이론체계가 잘 세워진 곳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잡문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사실은 수필창작에 앞서 제기되는 것이 메타수필이라는 원형적 구조다. 메타수필이란 수필작품으로 구체화하기 위하여 작가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추상적 구도를 말한다. 메타수필에 대한 개념을 머리 속에 인지하고 있는 작가는 그렇지 못한 작가보다 더 본격수필을 쓰기 쉽다.
=>수필은 제재나 주제 중심의 글이다.(x) ->제재와 주제
=>제재를 통해서 주제를 겨냥해야 한다.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 <형상적 체험>
=>머리 속의 수필 ->원고지 위의 수필
■ 본격수필을 쓰는 작가들은 늘 제재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성찰과 관조를 시도하고,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미적 구조로 재조직하여, 문학적 문장과 담론전략으로 독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오늘 이 특강이 본격수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진지한 탐구의 문으로 연결되길 희망한다. 이를 통하여 그 동안 쌓여있던 수필문학에 가해진 오해와 편견들도 사라지길 소망한다. 뿐만 아니라 시도 소설도 희곡도 아니면서 다른 장르들의 장점을 변증법적으로 취하여 절묘하게 생성한 게 본격수필임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심층구조 ->제재와 주제의 상관화(철학자)
=>표층구조 ->인식의 언어적 형상화(어휘채집가, 활어디자이너, 이야기꾼)
=>담론구조 ->비유의 형상적 체험화(언어의 연금술사)
■ 루카치에 따르면, 모든 대상은 보편성과 개별성의 범주를 지니는데, 그것을 변증법적인 통일을 통해서 특수성의 형태로 범주화하는 것이 바로 수필의 행보다. 좋은 작품은 예술성과 철학성, 그리고 그것들이 혼융 속에서 생성되는 미적 울림의 구조와 정체를 유기적인 심미작용 속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에 완성한 수필시학은 수필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수필시학으로써 널리 수필가들에게 인지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어불성설이다. (치환) (이것을 저것으로, A를 B로)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기실현으로
=>덮개-기억이 아니라 아하-경험
=>지금부터 실상이 아니라 상상으로
■ 진정한 작가는 오직 문학작품만을 생각하고, 생산해 내는 사람이 아닐까
<작품 감상>
순장소녀
송명화
핏빛 옷을 입은 가야의 소녀가 내게 오른 손을 내밀고 있다. 큰 눈동자가 자신의 삶이 궁금하지 않으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 손을 잡은들 무슨 온기가 느껴지며 그 입술을 주시한들 무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랴마는 그 눈빛의 간절함에 묶여버렸다.
올여름 복천박물관에서 열린 ‘순장소녀 송현, 비사벌을 말하다’라는 전시회에서 나는 송현이를 만났다. 그녀는 창녕 송현동 15호 고분 속에 함께 순장된 세 명의 사람들과 함께 백골이 되어 누워있었다. 현세의 시간을 버렸건만 세월 속에 완전히 육탈되지 못한 뼛조각으로 인해 다시 현세로 돌아온 그녀는 지금 자신을 보는 우리의 눈길이 기꺼울까.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길까. 백오십 남짓 자그마한 키를 가진 가녀린 모습의 열여섯 살 소녀가 영원의 숨결로 돌아와 먼 역사 저편의 이야기를 내게 건넨다.
송현 : 언니, 주군을 따라가는 게 저의 운명이랍니다. 그 분이 혼자 저 세상으로 가신다면 그곳에서 어찌 사신답니까? 제가 함께 가서 돌봐드려야 하겠지요.
나 : 너는 어찌 너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게냐? 네 인생의 주인은 너야. 네가 죽는다면 너의 부모님과 친구들은 얼마나 슬퍼할까 생각해 보았니!
송현 : (눈물을 흘리며) 그렇지만 부모님도 저에게 주군을 잘 모시는 게 저의 임무며 운명 이라고 하셨는걸요. 아, 무덤 속은 얼마나 어두울까.
나 : (송현의 두 팔을 세게 잡고 흔들며)그럴 수는 없다. 네가 있어야할 곳은 이곳이지 저 승이 아니야. 두렵지 않니? 오빠 말처럼 얼른 국경을 넘도록 하여라. 얼른.
송현 : 내가 도망을 친다면 부모님은 어떻게……. 이제, 호위무사가 독배를 가지고 올 테 고.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무서워요. 언니, 무서워요…….(멀리서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진다.)
송현이가 보고 있는 세상은 비화가야의 빛나는 문화가 숨 쉬는 찬란한 땅이었다. 순장부에 이름이 오르고서도 그녀가 보는 세상은 아름다웠을까. 왕의 죽음이 확정된 후 그녀는 박물관 유리장 앞에 서 있는 저 모습처럼 놀란 눈으로 표정을 잃고 말았던 것일까. 그녀 또래 소녀들은 낙엽이 구르는 모습만 보아도 울고 웃는다고 하는데, 꽃잎처럼 고운 입술로 소녀는 말했으리라. 무서워요……. 무서워요…….
무덤 속만 무서운 게 아닌 것 같다. 살아서 두 손 모아 바치던 음식을 죽은 뒤에도 상전에게 받쳐드리고자 하는 충성심을 믿고 싶어 한 왕의 자비롭지 못한 심성이 두렵다. 죽은 뒤에도 현실의 삶이 그대로 이어진다고 믿은 가야인들의 무지가 무섭다. 지배계급이 가진 칼날의 그늘 아래서 죽어서도 피지배계급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사람들의 내세관에 오싹해진다. 게다가 어린 송현이가 독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회유하였을 살아남은 이들의 냉담한 체념은 차라리 아프지 않은가.
송현이는 무덤 속에 누웠다. 차고 투명한 이성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녀는 하나뿐인 생명조차 권력자에게 뺏겨야만 하였다. 처음부터 그 세상에 인간적인 자비가 있기나 하였을까. 세상 밖에나 무덤 속에나 그것은 자리하지 않았다. 고고학자는 그녀가 반듯한 뼈의 형상으로 볼 때 산 채로 매장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게다가 뼈에 상처가 없어 누군가처럼 두개골이 깨지는 고통을 당하지도 않았으며, 아마도 독을 마셨거나 질식사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 학자는 다행이라고 표현하였지만 그녀에게 다행이란 낱말은 어울리지 않으리라.
현대과학기술에 힘입어 되살아난 송현이는 사랑니도 채 자라지 않았고 성장판도 닫히지 않은 사춘기 소녀였다. 무릎을 꿇는 생활을 많이 하였는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릎뼈가 닳았고, 빈혈이 있었으며, 여러 개의 충치로 고생하였고, 앞니로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끊은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온갖 질병으로 힘들어하며 여린 무릎뼈가 닳도록 억눌려야 했던 삶을 죽어서도 계속하기 위해 순장의 굴레를 졌단 말이던가. 혹여 그 억울함 누를 길 없어 그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노라 증언하러 내게 왔단 말이더냐. 왼쪽 귀에 매달린 금귀걸이의 반짝임조차 그녀의 삶에 빛이 될 수는 없었으리라.
귀걸이 한쪽은 어디에 두었을까. 어쩌면 독배를 들어야했던 그 시각이 오기 직전, 헤어지기 싫은 친구와 한 개씩 나누었을 수도 있으리라. 아니면 그녀의 시신을 옮기던 인부가 그 귀한 반짝임이 탐이 나 슬쩍 챙겼을지도 모를 일이지. 가야나 신라지역의 순장자들이 지녔거나 함께 묻힌 껴묻거리들을 살펴보면 평민들은 가질 수 없는 값나가는 것들이 많아 죽은 이들이 제법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는 추측을 한다. 왕의 죽음 앞에서 높은 신분의 소유자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이 순장의 대상이 된다는 현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는 목숨을 거둘 날을 받아놓고 위로의 의미로 그녀가 평생 가져보지 못한 금귀고리를 그녀에게 건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어느 경우라도 그녀가 흘렸을 눈물의 깊이는 잴 수 없을 것 같다.
죽음 앞에 누가 의젓할 수 있을까. 도를 이룬 깨달은 이도 아니고, 산전수전 겪어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싶을 만큼 자포자기한 사람도 아니다. 분홍빛 꿈을 가슴속에 키워나가던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처사였다. 자신의 다음 세상이 두려워 다른 사람까지 모호한 죽음 후의 세상으로 이끈 왕은 참으로 대왕다운 지도자는 못 되었던 것 같다. 죽음 앞에서는 성직자도 살려 달라 의사의 가운을 잡아당기고, 백수를 코앞에 둔 노인조차 혹시나 싶어 보약을 끓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누군들 죽음의 검은 휘장 속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현세의 삶이 죽어서도 이어진다는 계세사상을 신봉하는 시대였다. 살아서 모시던 왕을 죽어서까지 섬기는 내세관을 송현이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일까. 그것을 숙명으로 여겨야하는 세상이었다면 그건 분명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세뇌시킨 무자비한 폭력이 아닌가. 죽음 이후의 세계가 두려웠던 권력층의 간절한 바람이 가져온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어찌하면 좋을까. 순장이 불가능해지자 토용을 빚어 넣고 사후세계를 위해 온갖 껴묻거리를 함께 묻어 자신들의 바람을 이루려한 그들의 기원이 안쓰럽다. 사후세계를 준비한 대표적 인물인 진시황의 병마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기막힘이었다. 살아서는 불로초를 구하느라 노심초사하고 죽어서는 엄청난 병마용을 소유하여 그만의 제국을 계속 누리려한 그 욕심에 놀랄망정 찬사를 보내는 이는 없지 싶다.
가녀린 몸에 걸친 버겁도록 헐거운 옷이 그녀를 짓누른 삶만큼이나 무거워 보인다. 긴 소맷자락에 덮인 채 나를 향하고 있는 그녀의 손끝에서 단호함을 본다.
송현 : 이제 말하고 싶어요. 얼마나 싫었는지. 두려웠는지. 또 서러웠는지! 그리고 얼마 나 살고 싶었는지!
나 : 알아. 네 마음을. 너의 부활로 비사벌의 비극은 햇살 아래 섰다. 이젠 웃으렴.
송현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살풋 꽃 피우다 잘려버린 가련한 꽃망울이 안쓰러워 화면은 얼핏 핏빛이 된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지만 역사 속에 온당치 못했던 죽음이 어찌 안식에 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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