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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옥세현(玉世賢) - 일편단심 뜻만 위해 4. 부산에서 다시 선생님 모시면서 1 1950년 10월 14일에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 그전에 본궁 분소에서는 이미 죄수들을 다 죽였고, 흥남 형무소에서는 매일 죄수들을 불러내어 산에 데려가 죽이고 폭격이 심한데도 죄수들을 끌고 나가 일을 시켰다. 모두 죽이려는 수단이었다. 2 그러나 선생님이 계시는 일터에는 폭탄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 이상이 없었으나 감방의 죄수들을 차례로 끌어내어 총살시키므로 죄수들은 안절부절못했다. 선생님이 계시는 방에도 오늘내일하는 그 찰나에 유엔군이 진격하여 구사일생으로 감옥에서 나오셨다. 3 선생님은 그 길로 열흘 동안 걸어서 평양에 도착하셨다. 우리 집 식구들이 피난 갔다가 돌아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이들이 와서 웬 거지 같은 사람이 나를 찾는다고 하여 나가보니 자기는 흥남에서 왔는데 문 선생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4 그 사람은 선생님과 같이 출옥한 옥중 제자로서 선생님의 명으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 사람을 통해서 이모 댁에 계시는 선생님을 우리 집에 모시고 와서 같이 지냈다. 5 우리 집에 계시면서도 선생님은 줄곧 옛 식구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셨다. 자신이 식구 댁을 방문하지 않으면 원필 씨를 시켜서 식구들을 모으려 했지만 복중교인 2명이 오고 아무도 안 왔다. 20일 정도 지나니까 이남에 남아있던 남편이 돌아왔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괴롭다고 원필 씨와 같이 방을 얻어 가지고 나가셨다. 6 1950년 12월 4일, 후퇴 명령이 내리자 맏아들이 밤중에 차를 가져와서 살림을 모두 싣고 대동강을 건너와 그날 밤을 아들의 부대에서 자고 그 이튿날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부산으로 피난 가서 초량교회에 다녔다. 7 어느 날 원필 씨가 초량교회 교인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의 형편을 물어보니 남의 집에 계시며, 옷은 이북에서 입던 것을 그대로 입고 계신다고 했다. 내가 그전에 선생님과 원필 씨를 위해서 양복지 2벌을 마련해 둔 게 있어서 그걸 팔아서 하숙이라도 하시라고 드리고 왔다. 8 그때는 피난 시절이라 우리 집 식구들이 모두 한집에 모여 살아서 내가 뒤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그러니 선생님이 고생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도와드리지 못하고 겨우 1주일에 두 번 예배드릴 때만 선생님을 뵈었다. 9 선생님은 감옥에서 나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머리가 자라지 않았으므로 방이라도 하나 얻으면 빨갱이라고 쫓아내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으니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때에 엄덕문 씨를 만나 거기서 몇 달 지내시고 원필 씨가 미군부대에 취직하여 하숙시켜드리기도 하였다. 10 내가 일요일과 수요일 예배 때 가면 선생님과 원필 씨의 빨랫감이 많이 밀려 있었다. 어느 날 빨랫감을 가지고 나가서 빨려고 하니 선생님도 따라 나오셔서 빨래를 잡아당기셨다. 내가 왜 그러시느냐고 물으니까 ‘혼자 언제 다 빨겠소. 내가 좀 도와주겠소’ 하시며 꼭 도와주겠다고 하시는 걸 억지로 들어가시게 하고 빨았다. 11 빨랫줄도 없어서 새끼 토막을 이어서 널어놓고 빨래 마르면 걷으시라고 말씀드리고 뛰어서 돌아가야만 했다. 범내골에서 초량까지는 전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지리도 몰라서 무한정 타고 간 적도 있었다. 12 내가 교회와 집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선생님은 하숙집에 홀로 계시고 원필 씨는 미군부대에 가서 종일 일하는 것을 볼 때마다 울면서 하나님께 선생님께서 뜻을 이루신다는데 선생님과 원필 씨와 둘이서 어떻게 뜻을 이루겠느냐고 호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3 선생님께서는 하숙하시면서 지게를 빌려서 범내골 골짜기에다 흙도 져 나르고 돌멩이도 주워 모아서 조그마한 움막집을 지으셨는데 7월 장마에 무너져 버렸다. 선생님 혼자서 다시 쌓으시는 걸 나도 도와드렸다. 14 지붕 덮개가 없어서 원필 씨가 퇴근할 때마다 미군부대에서 박스를 튿어가지고 나와서 그걸로 지붕을 덮었다. 그런데 구들장을 놓으려고 바닥을 파니까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물길을 따로 내어놓고 방을 꾸미고 불을 때니 이번에는 아궁이에서 물이 나와서 다시 물길을 돌리기도 하였다. 15 문도 선생님께서 손수 만드셔서 8월에 움막집을 완성하셨다. 그 집은 부엌에서부터 물이 나와서 밖으로 개울을 이루었다. 그때는 움막집 근처에는 사람이 얼씬도 하지 않아서 사람 보기가 힘들었다. 16 그 집에 제일 먼저 찾아온 손님은 강현실씨였다. 어느 날 집 근처에 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개울물에 손을 씻고 있기에 내가 어느 직장에 다니느냐고 묻자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인데 여기에 특별한 선생님이 계시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움막집에 데리고 들어갔다. 17 선생님은 산에 올라가 계셔서 내가 가서 선생님을 모시고 왔다. 선생님과 현실 씨가 얘기하는 중에 점심때가 되어 내가 점심상을 가지고 들어가니까 선생님이 현실 씨에게 기도를 시키셨다. 현실 씨가 기도를 못하겠다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기도하셨다. 선생님의 기도에 현실 씨가 감복하였다. 그다음부터 계속 찾아왔다. 18 현실 씨는 고려신학교 학생이었는데, 선생님께서 학교 그만두고 전도하라고 하시니까 순종하여 전도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현실 씨가 전도 다니는 동안에 나는 선생님 뒷바라지를 마치고 우리 집에 와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책망이 내렸다. ‘선생님이 고생하고 계시는데 홀로 두고 너는 여기 와 있느냐’라고. 그때부터 선생님을 모시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왔다. 19 아이들은 때때로 찾아와서 자기들을 다 죽이고 왜 여기 있느냐. 엄마만 여기 와서 있느냐고 하면서 집에 가자고 애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할 나이니 어쩔 수 없었다. 20 그래서 하나님께서 엄마를 부르실 때에 너희들 뒤치다꺼리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 뒤치다꺼리하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엄마를 데려가면 영영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달래서 보냈다. 그 후로 쭉 선생님과 함께 생활했다. |
証言 玉世賢 - 「一片丹心、み旨だけのために」 4. 釜山で再び先生に侍りながら 一九五〇年十月十四日に国連軍が興南に上陸しました。本宮分所では、その前にすでに囚人たちは皆、殺されました。興南刑務所では毎日、囚人たちを呼び出して山に連れて行って殺し、爆撃が激しくても囚人たちを引っ張り出して仕事をさせました。全員を殺すための手段だったのです。 しかし、先生がいらっしゃる仕事場には爆弾が落ちず、何の異常もなかったのです。監房の囚人たちを順番に引っ張り出して銃殺するので、囚人たちは落ち着きませんでした。先生がいらっしゃる部屋も、きょうか明日に銃殺が行われる、というときに国連軍が進撃してきて、九死に一生を得て監獄を出てこられたのです。先生はその足で十日間歩いて平壌に到着されました。 私の家族が避難先から戻ってきてから二日目に、見知らぬ乞食のような人が私を訪ねてきたと子供たちが言いました。それで出ていってみると、「私は興南から来たのですが、文先生を知っていますか?」と尋ねるのです。その人は、先生と一緒に出獄した獄中の弟子で、先生の命令で私を訪ねてきたのです。その人を通して、叔母さんの家にいらした先生を私の家にお迎えして一緒に過ごしました。 先生は私の家にいらっしゃるときも、常に以前の食口たちに関心を持っておられました。ご自身が食口の家を訪問されないときには、元弼さんに命じて食口たちを集めようとされました。しかし、腹中教の信徒二人だけが来て、あとはだれも来ませんでした。 二十日くらい過ぎると、以南に残っていた私の夫が帰ってきました。すると先生は、私がつらいだろうということで、元弼さんと一緒に部屋を借りて出て行かれました。 一九五〇年十二月四日、後退命令が出ると、長男が夜中に車を持ってきて家財道具をすべて載せました。そして、大同江を越え、その晩は息子の部隊で休み、その翌日にソウルに到着しました。そして、それから数日後に釜山に避難して、草梁教会に通う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ある日、元弼さんが草梁教会の信徒を連れて私を訪ねてきました。先生のごようすを尋ねると、他の人の家にいらっしゃり、服は以北で着ていらしたものをそのまま着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した。私が以前、先生と元弼さんのために準備しておいた二人分の洋服地があったので、「これを売って下宿でもしてください」と言って、差し上げました。 このときは、避難時代だったために、私の家族は皆一つの家に集まって暮らし、私が世話をして支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れゆえに、先生が苦労されていることを知りながらもお手伝いすることができず、一週間に二度、礼拝をささげるときにだけ先生にお会いしました。 先生は、監獄から出てこられたばかりで、まだ髪の毛が伸びていなかったため、部屋を借りても「共産主義者だ」と言われて追い出され、あちらこちらに移り住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頼る所がどこにもなかったのです。そのようなときに、嚴徳紋 さんに出会われ、そこで何か月か過ごされたり、元弼さんが米軍部隊に就職して、下宿させてさしあげたこともありました。 私が日曜日と水曜日の礼拝のときに行ってみると、先生と元弼さんの洗濯物がたくさんたまっていました。ある日、洗濯物を持って外に出ていって洗濯をしようとすると、先生もついてこられました。 そして、洗濯物をつかんで引っ張られるのです。 私が「なぜそのようにされるのですか?」と尋ねました。すると、「一人で全部洗いきれないだろう。私が少し手伝おう」と言われたのです。しかし、手伝うと強く言われるのを無理に家の中に戻っていただいて、私が洗濯をしました。 洗濯ひももないので、いつも小さい棒切れに洗濯物をつるし、「乾いたら取り込んでください」とお話しして、すぐに走って帰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ポムネッコルから草梁までは、電車に乗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地理がよく分からないので、行き過ぎてしまうこともありました。 私は家と教会の間を行ったり来たりしながら、下宿に一人でいらっしゃる先生と、米軍部隊に行って一日中仕事をする元弼さんを見るたびに、「み旨を成すと先生は言われるのですが、先生と元弼さんの二人でどのようにしてみ旨を成すのでしょうか?」と、泣きながら神様に訴えたことが、一度や二度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先生は下宿されながら、背負子を借りてポムネッコルの谷に土を運び、石を集めて小さな穴蔵の家を建てられたのですが、七月の梅雨で崩れてしまいました。 先生おひとりで再び家を築かれるので、私も手伝ってさしあげました。このとき、屋根にかぶせるものが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で、元弼さんが仕事の帰りに少しずつ米軍部隊からもらってきた段ボールを屋根にかぶせたのです。また、オンドルの石を置こうとして床の下を掘ると、水があふれ出てきました。水が違う方向に流れるようにして、部屋を整えてから火をたくと、今度はかまどから水が出てきたので、再び水の方向を変えました。戸も先生自ら作られて、八月に穴蔵の家を完成されたのです。 その家は、台所から水が流れて、外に小川を形成していました。そのころは、穴蔵の家の近所に人の気配はなく、ほとんど人を見かけませんでした。その家にいちばん先に訪ねてきたお客さんは、姜賢實 さんです。 ある日、彼女がその家の近くで、かばんを下ろして小川の水で手を洗っていました。私が「どこの職場に通っているのですか?」と尋ねると、「職場に通う者ではなく、イエス様を信じる者なのですが、ここに特別な先生がいらっしゃると聞いて訪ねてきました」と言うのです。それで穴蔵の家に連れて行きました。 先生は山に登っていらしたので、私は呼びに行って、先生をお連れしました。先生と賢實さんが話をしているうちに昼食の時間になったので、私が食事を持って入っていくと、先生は賢實さんに祈祷するように言われたのです。しかし、賢實さんが「祈祷できません」と言うので、先生が祈祷をされました。そのとき、賢實さんは先生の祈祷に感服したのです。その後、継続して訪ねてきました。 賢實さんは、高麗神学校の学生でしたが、先生が「学校をやめて伝道しなさい」と言われるので、従順に従って伝道活動を始めました。 賢實さんが伝道に出ている間に、私は先生のお世話を終えて自分の家に戻って生活していたのですが、ある日、天からの叱責が下ったのです。 「先生が苦労しておられるのに、おひとりにして、おまえはここに来ているのか!」 そのときから、先生に侍ることにして、家を出ました。 子供たちはときどき訪ねてきて、「自分たちを放っておいてなぜここに来ているのか」、「なぜ、お母さんだけここに来ているのか」と言いながら、「家に帰ろう」と哀願しました。しかし、私は神様の命令どおりに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かたがありませんでした。 ですから、「神様がお母さんを呼ばれるときに、おまえたちの面倒を見なさいと言って呼ばれたのではない。おまえたちの面倒を見ていたら、神様が永遠に私を連れて行かれて(おまえたちと)会えなくなってしまう。お母さんに会いたければ、いつでも来なさい」と言って、慰めて送り返しました。その後、ずっと先生とともに生活しました。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