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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날짜: 2013년 7월 28일
본문: 마태복음 6:16-18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이렇게 기도하여라 3 - 아버지께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마태복음 6:16-18]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외식이 무엇인가요?
산상수훈 말씀 중에 반복되는 구절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외식과 잘난 척은 다른 것입니다. 마음과 행동이 같이 좀 과도하게 나오는 것은 상대방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외식’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말하는 외식은 무엇입니까?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보이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접하면서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뜨끔하지 않던가요?
저는 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네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늘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금식하고 기도할 때면, 누군가가 내 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배가 고프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힘든 기색을 하죠. 얼마나 괴로운지를 말할 필요도 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합니다.
제가 금식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저는 배가 고파서 죽겠는데, 교인들이 제 모습을 보고, “목사님, 금식하시더니 얼굴이 빛나네요.”라고 해주시는 말이었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그 힘든 걸 알아줘야 조금은 견디기가 좋을 거 같은데….
그렇죠? 금식기도 하면서 때로는 하나님과의 교제보다는 ‘견디는 시간’을 기도로 착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죠.
조금 신비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 또는 사역자들이 40일 금식에 도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기 전에 40일 금식을 하셨는데 그렇게 40일 금식한 것이 목회의 훈장이 되어 버립니다. 마치 금식을 마치고 나면 큰 권능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 한 선배가 40일 금식을 하던 중 39일째 세상을 떠나기도 했지요. 왜 40일을 금식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좋지만, 예수님처럼 40일을 기어코 채우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참 많이 생각하게 하지요.
지난 사순절 고난 주간에 한 끼 금식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많이 들은 이야기가 금식하는 기간에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금식을 할 수 있을까? 금식도 하고 살도 빼고.
굉장히 인간적인 생각과 기도를 통해 얻는 부수적인 효과가 자리를 대신합니다.
“그래 너희가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
어떤 목사님의 글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전에 저는 어느 교회 옆을 지나가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큰 플래카드를 벽에 걸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방금 사십일 금식 기도를 끝내셨습니다.'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마치 그 목사님은 어떤 큰 기록을 세우듯이 사십일 금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런 사람은 공연히 굶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는 조금 다르죠?
우리는 흔히 열심히 많이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싸움하듯이 그래서 금식도 최후의 수단으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면서 ‘영성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기도를 보면 영 다른 것 같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하듯이 금식 기도를 한다고 선포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금식할 때에”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다시 강조한다면 ‘기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방법과 동기에 대하여 계속해서 본질적인 질문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관심을 끌려는 수법은 하나님께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외식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신뢰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에 온전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뢰가 없는 금식은 단지 우리가 시간을 정해놓고 우리가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불신앙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에 나오는 글입니다.
다른 사람을 인내하지 못하는 마음 뒤에는 하나님을 인내하지 못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앞에 정말로 내려놓으면 하나님의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스스로 모든 것을 주관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인내심도 바닥나 버린다.
금식은…
예수님 당시 금식은 이런저런 이유로 다양하게 행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금식은 하나님에 의해서 명령받아진 7월 10일 대 속죄일이었습니다. 이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허물을 벗겨주는 날로 삼으셨습니다. 이날에는 전체 이스라엘이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악한 죄를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때부터 그 다음 날 저녁때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그 어떤 일도 하지 말고 지낼 것을 말씀하신 것에서(레 23:26-32) 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에 유대인들은 대 속죄일의 금식일과 함께 4월과 5월, 7월과 10월에 각각 금식일 절기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금식도 역시 하루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한 주간, 열흘 혹은 40일 금식기도로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 몰골이 흉측해지는 일도 없습니다. 하루 금식한다고 해서 이 정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이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외식하는 자들이 기를 쓰고 자신의 모습을 슬프게 보이거나 흉하게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그 사람이 금식하는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잘못된 것 중 첫 번째 것은 기도를 하나님을 향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순간 그들이 하나님께 받을 상은 없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금식하며 기도를 했는데도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니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잘못은 기도의 동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금식은 속죄일에 죄사함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금식 자체’에 집중하면서 금식하는 사람의 ‘의’를 드러내는데 온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순간 금식은 하나님의 기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죠.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하나님을 위해 시작해도 자신 속에 있는 욕망의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하며 기도할 때 의도적으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서 얼굴을 씻어라!”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상상해 보세요.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하루를 금식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거룩한지 알리기 위해 핼쑥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면도도 하지 않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침울하게 다니는 모습을 보니 말입니다. 단 하루를 금식하면서. 그런데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 말입니다.
제가 군목 시절 이야기입니다.
지휘관이 교인이었기 때문에 저는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열심히 군종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점심때가 되어 참모들과 함께 식사할 때면 제가 하는 일을 좀 알려야 하는 데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쑥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제 선행을 드러냈던 기억이 납니다.
“어젯밤에 보니 병사들이 참 잘 걷더군요.”라고 하면 지휘관이 여지없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어젯밤 훈련하는데 계셨습니까?”
“아니 뭐 그냥 위문품을 가지고 잠시 들렸습니다.”
제가 뭐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해야 할 일을 했고, 그것을 지휘관에게 알렸을 뿐입니다. 물론 제가 그 일을 한 것이 지휘관에게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병사들을 위해서 한 일도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자기의 일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의 동기 자체가 자신의 거룩함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과 실제의 목적이 다른 ‘위선’입니다.
“너희는 이미 상을 받았다!” 이 말씀은 진짜 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질타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금식은 자신의 유익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신앙적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이제 오늘 분문 18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순간 우리의 생각과 계획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도가 단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의 원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여 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에 정답이 있습니다.
좋은 예화가 될 듯합니다.
예전에 한 기독교 대학의 예배 시간에 설교하고 있었는데, 청중석 맨 앞자리에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다. 예배당에는 주로 젊은이들만 모였기 때문에 그들 부부가 거기 앉아 있는 모습은 다소 생뚱맞게 보였다. 예배가 끝난 후 이들은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며 가슴 아프지만 한편 훈훈해지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들 부부에게는 말도 못하게 반항적인 딸이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고트족들이 입고 다니는 검은 복장에 검은 립스틱을 바르고 팔뚝에 가득한 문신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다녔다. 심란한 외양보다 훨씬 더 큰 문제는 아이의 공격적인 태도였다. 부모는 오랫동안 열심히 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딸이 분노와 반항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 딸은 자신은 기독교 대학에 갈 것인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곳에서 쫓겨나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아이는 그토록 크리스천들을 경멸했다.
이들 부모는 연초에 있었던 일을 내게 꼭 말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이 학교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던 그때, 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인생을 돌이키는 결정을 한 후에 그 딸은 기숙사로 돌아가 부모님에게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아이는 그동안 부모님에게 주었던 모든 상처에 용서를 구했다. 아이는 자신이 성령을 체험하고 확실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했다. 아이는 집에 가서 부모님이 자신에게 언제나 원했던 것처럼 부모님을 끌어안게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이후로 가족에게 참 좋은 일들이 펼쳐질 모습들을 고대했다. 편지는 그렇듯 아름다운 생각들로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시내 근처에서 편지를 부치고 난 후 비극이 일어났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들 부모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딸을 땅에 묻었다. 그들은 딸아이와의 관계가 화해와 치유 없이 끝나버린 것에 대해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장례를 치르고 사흘 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딸이 부친 귀한 편지가 우체통에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딱하게도 편지가 너무 늦게 도착했군요.”
그 부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늦은 게 아닙니다! 우리 딸이 편지에서 아름답게 소망하고 있듯이 아이가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가 아이를 끌어안을 때가 올 겁니다.”
하나님은 절망으로부터 소망을 끌어내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에 하나님은 새롭게 시작하신다.
기도하면서 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사야 55장 8-9절을 보십시오.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금식기도 역시 다른 하나의 기도의 방법일 뿐이지 본질적 기도의 목적과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금식기도를 통하여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되지요.
기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이런 불평을 합니다. 이사야 58장 3~5절을 보겠습니다.
3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예레미야 14장 12절은 더 무서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리라”
여기에서 보면, 금식은 금식할 때 금식하는 자가 금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에 금식하는 이유와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단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몸을 힘들게 하여 괴롭히는 데 그 목적과 유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관련된 것으로 하나님이 그의 하는 일을 기쁘게 받으심으로 그에게 주어진 식물을 기쁨으로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있는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는 금식은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하는 것으로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금식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앞서 ‘구제’와 ‘기도’에서도 같이 하신 말씀입니다.
본래적 금식기도의 의미를 이사야 58장 6-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너희가 먼저 불쌍한 동족을 보호해 주고서 나에게 부르짖으면 내가 즉각 너희에게 응답하고 도와주겠다.
너희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으면 내가 곧 '너와 함께 있다.'라고 대답하겠다.
너희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고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조롱하는 것과 나쁘게 말하는 버릇을 고치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네 음식을 나누어 주고 고통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면 네 어둠이 밝아져서 네게서 사방으로 대낮같이 밝은 빛이 퍼져 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 여호와가 직접 너희를 어디서나 항상 인도하여 주겠다.
메마른 땅에서도 내가 너희를 배불리 먹여 주며 너희 뼛속에서 힘이 샘솟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언제나 물이 넉넉한 동산과 같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을 것이다.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다시 돌아와서 폐허가 된 옛 마을을 재건할 것이다. 옛 기초 위에 그들이 모두 새롭게 건설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가 '성벽의 무너진 틈을 메우고 성읍을 재건하여 다시 거처로 만든 백성'이라고 불릴 것이다.”
즉, 진정한 금식이란 금식을 통해 남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 우리가 측은하게 보임으로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거나 의로운 사람으로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금식을 통해 남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수평적 사람의 관계와 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금식기도는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금식을 시작하면서 음식을 끊고 내 고통을 참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돌아보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이웃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진정한 금식은 나에게 무관심했던 영역에 손을 내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종교화된 신앙을 ‘삶의 신앙’으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종교화된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실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다스리시는 이 모든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금식하며 하루를 먹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이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그들을 돌아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질책하신 것은 기도하는 시간조차도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몰두하는 종교적 신앙을 꾸짖고 계시는 것이죠.
17절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라는 말씀은 전도서 9장 7-8절의 말씀과 연관 지어 이해가 됩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금식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성이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셨음으로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금식과 괴로움을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종교적인 행위를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금식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오히려 잔치를 베풀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회에 가서 특강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기도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데 계속해서 강조하는 말이 “40일 금식을 하고 났더니.”라는 말이었습니다. 기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위대한 기도가 종교적 자랑으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본질을 안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알아야 그 길을 벗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금식의 정신이 신앙생활의 행위로 변해 버릴 때, 기도의 힘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하루를 굶으므로 자신들의 신앙생활에 의무감을 다했다는 만족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니 그 만족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얼굴에다 흰 분을 바르고 초췌한 모습으로 자신의 금식을 알리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죠.
하나님은 우리를 은밀한 중에 보십니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알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과 의도로 기도하고 금식하는지 꿰뚫어 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신자의 삶과 인생에 실현되며 신자가 속한 공동체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화되길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