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사순절 1주 주일설교. 사순절의 절제 (자기통제, self-control) (갈라디아서 5장 22-24절)
--------------------------------------------------------------------------------------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내용 중에 마지막 열매로 기록된 ‘절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절제라는 단어는 영어로, self-conrtol, ‘자기통제’,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보다는 절제(節制)라는 한자어를 보면 더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절(節)’ 자는 마디 절 자이고, 규칙, 법, 제도, 예절 등을 일컬을 때 사용이 됩니다. 이 글자의 부수(部首)는 대나무 죽(竹) 자입니다. 대나무 마디마디처럼, 우리 내면에 믿음의 경계(담)를 많이 이루게 하여서,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거르고, 또 걸러내야 하겠죠.
제(制) 자는 마를 제 인데, 이 글자의 부수는 칼도(刀)자로, 잘 베어지는 칼로 사물을 잘라 버리듯이, 우리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들어 올 때 말과 행동으로 옮기기에 앞서, 끊어낼 것은 확실하게 끊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해 드리면, 절제의 절(節) 자는, 마음에서 악한 것들을 걸러낼 수 있는 믿음의 경계들을 쌓아가는 것이고, 제(制) 자는,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에 의지하여 악한 것들을 물리치는 과감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하면서, 이 글자의 의미들을 찾아보고, 묵상하는 가운데, ‘절제’라는 한자어의 의미만 제대로 적용해도, 설교 전체의 내용을 충분하게 담을 수 있겠다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에서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 표현 되었지만, 다른 성경에서는,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이성으로 감정을 조절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고전 9:25; 벧후 1:6)을 이야기 합니다. 특히 술(레 10:9; 민 6:3; 잠 23:31; 31:4; 렘 35:6; 단 1:8; 눅 1:15; 롬 14:21), 언행(딤전 3:11; 딛 2:2; 약 3:2), 육신의 정욕(롬 6:12; 고전 7:9), 건전한 부부 생활(고전 7:5), 지식(벧후 1:6) 등에 대해서 절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이르기를, 참된 절제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고(갈 5:22-23), 또한 주의 말씀을 좇아가고(딛 2:1-2), 하늘의 것을 소망할 때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9:25). (* 이 단락은 [네이버 지식백과] 절제 [節制, self-control] (라이프성경사전) 의 내용을 참고 했음)
22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제를 포함해서, 우리가 살면서 맺게 되는 신앙의 모든 열매들은, 오직,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절제하는 것은, 24절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멘. 절제 할 수 있으려면 제일 먼저 우리의 육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지 않고는 절대로 절제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모두는 죄를 범하려고 하는 육체의 강력한 본성적인 저항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의 육체를 유혹하는 공격에 전혀 대응할 무기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를 이루어 가려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체를 반드시 죽이고,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하신 능력을 공급받아서 이겨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육체가 죽는 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전하신 의(의로움, righteousness)를 이루신 예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충만하게 공급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번으로 구원의 의를 이루셔서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는 그 의를 힘입어 살아가기 위해서 매일 같이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의를 구하는 반복적인 행동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일입니다. 매일 같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시시 때때로 십자가를 묵상하고, 십자가의 주님과 동행하는 과정을 수행해야 합니다. 목소리 크고, 기가 펄펄 살아서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안 죽어서, 아직 덜 죽어서 그런 겁니다.
‘자기 독선에 빠지다’ 라는 영어 문장을 보면, ‘be blinded’, 맹인이 되었습니다. 독선에 빠졌습니다. 뭐에 의해서요. ‘by self righteousness’, 자기 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righteousness, 의로움이 주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지면, 고결한 행동을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의로움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면, 그 의로움은 교만과 아집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구절인, 로마서 6장 12-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아멘.
은혜 받고, 의인이 되었다면서, 왜 자꾸 우리의 몸을, 내 몸을, 죄에게 함부로 내어줍니까?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그 고귀한 희생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이 전해져 왔는데, 왜 우리는, 왜 나는, 그 고귀한 의로움을 개인적인 사욕을 위해서 사용합니까? 연약하고 나약한 우리들을 의의 무기로 만들어 주셨는데, 왜 우리는, 왜 나는, 불의의 무기가 되어 더러운 세상과 짝하며 살아갑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영원히 은혜 아래 살도록 보호해 주시고 계신데, 왜 우리는, 왜 나는, 사망의 법 앞에, 사탄의 유혹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외침은 무엇보다도 제 양심에 호소하는 말들입니다. 주님은 저에게, 많은 은혜와, 기회와 시간을 충분하게 주었는데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저의 언행과 태도에 대해 많이 화가 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제자들에게 혼을 내셨던 주님의 진노하시는 질책이 저에게 마구 쏟아졌습니다.
주님이 진노하시는 큰 음성을 듣고,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참으로 내 자아로만 열심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제 실체가 너무나도 싫고, 혐오스러웠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힘도 빠지고,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힘들게 주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에, 다시 기회를 주시려는 주님의 은혜가 희미하게 느껴졌습니다. 칼빈이 자신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 첫 장에서 강조한 것과 같이, 우리 자신, 내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될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완전하심, 예수님의 온전하심,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저는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절제력을 상실해서 좌충우돌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의가 없이 내 의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교만 때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24절 말씀처럼,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매일 같이)죽여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곧 주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자녀입니까? 세상의 자녀입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의로움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내 자신의 의로움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순절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은 주님이 주시는 의로움을 다시 채우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은 자신의 내면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자기 의를 다 버리고 청소하는 시간입니다. 오늘부터, 부활 주일 전 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절제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오직 성령에 의지하여, 오직 주님의 의로움만 내세우시고, 다른 어떤 바쁜 일에 우선하여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십자가 앞에 무릎 꿇리며 나아가시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처음에 절제를 한자어로 설명 드렸는데, 절제의 본래 그리스어(엥크라테이아)는, 하나님을 향한 것도 아니고, 타인을 향한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미덕을 말합니다. 특히 절제는, 19~21절에 나오는 여러 가지 육체의 일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음행’, 곧 성적인 문란함에 대해서 절제하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는, 십자가에서, 육체와 함께 못 박았다라고 하는 ‘정욕’과 ‘탐심’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도, 인간의 내적인 욕망, 금지된 것에 대한 갈망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육체에는 필연적으로 성적인 욕구,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겉은 멀쩡하게 생기고, 법 없이 살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언제, 어느 순간에 헛된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우리가 육체로 살아가는 한 음행에 대한 욕망은 계속 우리를 유혹할 겁니다. 참아내고, 절제하지 못해서 그것을 무분별하게 발산하면, 곧바로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단단히 마음먹고 음행에 대한 극도의 절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과는 도무지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11), “사람이 범하는 죄 마다 몸 밖에서 일어나지만, 음행은 자기 몸에다 죄를 짓는 것이다”(고전 6:18),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고 호소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음행하는 자들은 영적인 간음을 저지른 자들이라는 겁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창녀와 연합하여 몸을 더럽히고도, 거룩한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는 것처럼 자기를 가장하는 자들이 됩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음행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자기는 예수님의 신부라고(교회라고) 기만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말하는 허투른 말들에 일절 귀 기울이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우리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우리 각자의 스스로의 양심에 한 번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나는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질문이 음행하는 것에만 국한되어져 있다면, 나는 실제적인 음행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나름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절제하며 살았으니, 정욕과 탐심에서 어느 정도는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주님은, 육체적인 접촉만을 음행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율법 해석을 벗어나서, 극히 보수적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마음의 음행, 곧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음행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머리 속에는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지만, 엄청난 양의 음행적인 생각들이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성적인 음행 이외에,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는 맘몬주의(물질주의) 사고방식,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비 경건의 신앙행위,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시기, 질투, 판단하는 일체의 행위들까지도, 음행의 다른 방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넒은 의미에서 “우상 숭배”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말과, 육체로 행해지는 일체의 행동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모두 음행을 행하고 있는 자들이 되는 겁니다. 또한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위배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정욕과 탐심을 확대해서 펼쳐 놓은 상황에서, 다시 질문을 우리 양심에 던져 보십시오. “나는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땅에 살고 있는 아무라도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도덕기준과 윤리 기준을 제시 하십니다. 그 기준이 되는 단어가,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은 하나님의 본 성품입니다. 거룩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주신 겁니다. 우리의 몸은 단순한 몸이 아니라,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결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몸을 지배하여야 우리는 거룩해 질 수 있고,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사순절은 음행과, 맘몬주의와, 비 경건과, 불순종의 생각과 마음들을 버리고, 또 버리는 시간입니다. 그 시작은 내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우리 주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컴퓨터 안에 여러 가지 사이트가 내 음행의 도구라면, 컴퓨터 자체를 집 안에서, 내 곁에서 치워 버리십시오. 휴대전화가 내 음행의 도구라면, 필요한 시간 이외에 전화기를 곁에 두지 마십시오. 내 음행의 도구가 사람을 만나는 자리라면,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가지 마십시오. 내 음행의 도구가 내 혀(말) 이라면 사순절 기간에라도 입을 닫고 사십시오. 내 음행의 도구가 외식하는 태도라면, 기도하는 일에 온 시간을 쏟으십시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함축의 단어가,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인 ‘절제’라는 겁니다. 오늘부터 절제의 카드를 꺼내셔서 단단히 사용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절제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절제 할 수 있기 때문에 회복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사순절 기간 동안 만이라도, 내가 세상의 죄 아래 살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은혜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기억이 희미해 지셨다면, 다시 재생시키시고, 복원 시키십시오. 물과 피를 다 쏟으심으로, 나에게 의로움을 선물해 주신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도록, 내 머리와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탐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완전하게 못 박고, 절제하는 자세로, 예수님만을 깊이 생각하시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사순절 첫 주를 절제의 마음으로 출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은혜 아래 살게 하시고, 의인으로서 모든 음행과 우상들을 물리치고, 오직 성령이 주시는 거룩의 능력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절제를 가르쳐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