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에베소서 6:1~4
제목: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 기독교는 성경을 신앙은 물론이고 생활 지침에서도 최고의 규범으로 알고 믿는 신앙입니다. 해마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정의 달에 많이 읽는 성경 말씀 중의 하나가 엡6:1~4절일 것입니다.
엡6:1.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
위 말씀에서 핵심 단어가 무엇인지? 고르라면 백인백색으로 다른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묵상자에게 고르라면 저는 1절의 “주 안에서”와 4절의 “주 의 교훈과 훈계”입니다. 부모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를 강조해서 자녀들의 봉양을 많이 받고 싶을 것이고 자녀들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를 강조하여 부모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위 성경의 말씀은 좌(부모)로나 우(자녀)로나 치우치지 않고 중심선에 “주 안에서”와 “주의 교훈과 훈계”를 배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엡6:1에서 “주 안에서”가 빠지고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만 강조하면 자녀를 학대하고 자녀의 등골을 빼먹으며 심지어는 의붓딸과 친딸을 강간하는 사악한 아비도 비난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단 구성원들이 자녀를 출산하여 이단으로 양육하고 있습니까? 이단의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기 위해 이단부모와 함께 이단이 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이고 이단을 떠나고 최후에는 이단 부모를 떠나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한편, 자녀들이 엡6:4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를 빼고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만 강조하면 부모에게 불효하고 십계명을 어기며 악한 지경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아비가 잘못 사는 자녀에게 “주의 교훈과 훈계”로 교육을 한다면 자녀가 그 말이 듣기에 거북하고 불쾌해도 들어주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 엡6:1과 엡6:4은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할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자녀에게 복종해야 하는 상호 복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묵상자 개인의 생각만은 아닙니다. 개혁주의 성향의 쉬운 주석인 베이커 주석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내용이 좋아서 아래에 직접 인용합니다.
상호 복종하라는 동일한 명령이 자녀와 부모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6:1~4). 다시 한 번, 바울은 한 쌍을 이루는 사람 중 의존적인 쪽에 먼저 말한다. 자녀들은 상호 복종하라는 명령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로서, 자기 부모를 순종해야 한다(6:1). 그리고 다시 한 번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대한 바울의 호소는 예로부터 내려온 기대를 단언한다(6:2~3). 이 명령에 처음으로 하나의 약속이 포함된다는 바울의 말은 왜 순종하는 일부 자녀들이 젊어서 죽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이 명령은 복잡한 공동체 윤리에 속해 있다. 여호와의 백성은 여호와의 뜻을 반영하는 생활방식을 영위하도록 부름 받는다. 순종하면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실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장수하며 살 것이다. 자녀들에게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그저 특정한 어느 자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전체 민족에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자녀를 기르는 것에 대해 하는 말이다. 복종하는 부모라는 개념은 아마 바울의 독자들에게는 복종하는 남편이라는 개념만큼이나 기괴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부모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복종하라고 명한다(6:4). 첫째,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변덕스럽고 불친절하게 대함으로 불필요하게 자녀들에게 노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피하고, 자녀들을 존엄과 존중함으로 대해야 한다. 요점은 자녀들의 노여움이 아니라, 부모가 그 노여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자녀들은 사랑이 많고 복종하는 부모한테서 정숙한 행동의 의미를 점진적으로만 배워 나간다. 둘째, 부모들은 기독교적 훈계와 교훈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고귀한 특권이면서 또한 종종 좌절을 느낄 만한 과업을 수행함으로, 자기 자녀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본문은 바울이 결혼한 부부에게 서로 행하도록 권하는 자기부인을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한다. 아마 이 본문이 부모들 자신이 자녀를 양육할 때 주의 교양과 훈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바울이 이 본문을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바울이 이 말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
예전과 달리 상상을 초월하는 역기능 가정들이 은근히 많이 숨어 있습니다. 특히 명목상의 기독교인 가정에서 어머니의 경우보다 아버지들이 더 많이 갖가지 기괴한 악행과 추문으로 위선하며 아내와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긴 자녀는 기독교를 떠나고 심지어는 정신질환에 걸려서 인생을 망치고 평생 고초를 겪기도 합니다. 위선하는 목사∙장로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핵심은 부모의 입장이나 자녀의 입장이 아니라 “주 안에서”와 “주의 교훈과 훈계”의 입장입니다.
● 엡6:4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창18: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
아브라함의 집안이 형통한 이유는 부모가 자식에게 명령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해서 그리 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족과 자녀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알려주고 행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목사의 말이라도 부모의 말이라도 상관의 말이라도 그것이 여호와의 도와 의(義)에 배치된다면 거절해야 합니다. 목사의 그루밍에 왜 여성 신자가 성폭행을 당합니까? 그것이 여호와의 도와 의(義)에 배치되는데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친아비나 의붓아비의 강압과 회유에 의해 가련한 딸들이 왜 성폭행을 당합니까? 그것이 여호와의 도와 의(義)에 배치되는데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군대나 직장에서 악한 상관의 위력에 의해 왜 여성 부하들이 성폭행을 당합니까? 그것이 여호와의 도와 의(義)에 배치되는데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도와 의(義)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고 용기도 필요합니다. 믿음에는 신뢰의 의미와 용기의 의미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는 명령자나 군림자가 내게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와 부모와 상관이 나보다는 높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에게 하나님께 하듯이 “절대”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엡6:1절의 “주 안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부모와 상관이 자행하는 악한 일들은 “주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조심하고 경계하며 정중히 거절해야 합니다. 목사와 부모와 상관들도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과 이해타산으로 아래 사람에게 명령하고 복종을 요구하면 아니 됩니다. 엡6:4절의 “주의 교훈과 훈계”를 윗사람들이 철저히 복종하고 실천하며 솔선수범을 하면서 그에 기초한 덕으로 아랫사람에게 가르치고 양육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 가정의 달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연약한 자녀들인 어린이의 날이 5월5일에 5월8일 어버이날보다 먼저 있습니다. 어린이가 천지난만하게 활짝 웃을 수 있도록 어른들이 아비들이 먼저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아비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고 아껴 주어야 합니다. 아내와 자녀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다면 그것이 직접적으로 남편과 아비의 악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남편과 아비는 불신자라면 인생을 잘못 산 것이고 신자라면 나일론이거나 위선자일 것입니다. 남편과 아비의 종교적 위선은 먼저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노엽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방해할 것이며 가정을 무너뜨리고 언젠가는 완파할 것입니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점검하고 회개하고 사랑으로 돌아오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상호 복종 <--- 베이커 주석, 에베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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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복종으로서의 지혜(5:22~6:9).
바울은 가정 규례라는 문화적으로 익숙한 형식을 사용해(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문화를 기독교화 해), 가정 안의 관계에서의 세 가지 상호 복종을 성령 충만한 삶의 표시로 본다.
바울은 세 개의 유사한 가정 안의 관계에서, ‘더 연약한’ 쪽을 먼저 다룬다. 그래서 첫 번째 관계에서는(5:22~23) 아내가 자신들의 남편에게 주 예수께 하듯이 범사에 복종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5:22). 바울의 이론적 근거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며 구주가 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는 것이다(5:23~24). 여기에는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표준적인 문화적 지혜다. 하지만 이 본문이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여자들을 학대하는데 사용되었다는 비극적인 역설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는 해석자들이 24절에서 해석을 중단하기 때문에 졸렬한 모방이 생겨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델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서뿐 아니라, 또한 이어서 남편들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도, 가정 규례의 결혼 부분을 기독교화한다. 남편들에게 주는 바울의 교훈은(5:25~33) 아내들에 대해 사용하는 지면의 세 배에 달하는 지면을 차지한다. 이것은 명백한 함축을 지닌다. 전체 부분은 여전히 21절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복종의 방식은 역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본을 따른 것으로, 남편에게 아내를 위해 자신을 내어줌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바울은 이런 자기희생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긴다.
바울은 또한 남편의 자기희생이 그리스도와 같은 동기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목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아내의 완전한 잠재 능력을 촉진하는 것이다. 전체 설명(5:26~27)은 인류의 온전함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획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원리는 남편들이 어떻게 자신과 합하게 된 사람의 인간적 영광을 증진시키려 애써야 하는가에 똑같이 적용된다.
@장코뱅 마치 남편의 아내가 남편 자신의 몸의 연장인 것과도 같다(5:28~29). 또 다시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과 마찬가지다(5:30). 두 사람이 하나가 된 이 육체적 사람의 정체성은 이미 창세기 2장 24절에서 정착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동일성을 율법까지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5:32). 여기에 대응하여 암시되어 있는 것은 남편들이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들이 그리스도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때, 남편들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
여자들이 자신을 부인하는 남편들에게 복종하도록(마치 선천적 결합을 통해 그런 것처럼)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지는 대단히 논쟁의 소지가 있다. 22~24절에 나오는 바울의 교훈들은 죄 때문 에 왜곡된 당시의 문화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 역시 짙다. 상호 복종이라는 견지에서, 아내가 자신을 이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에게 기꺼이 복종하는 것처럼, 남편도 아마 진정으로 남편인 자신을 위해 '죽는' 아내에게 똑같이 기꺼이 복종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바울은 상호 복종을 요구했으며(5:33),
@장코뱅 이 복종은 적어도 남편이 자기 아내를 위해 스스로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하고, 아마도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존경하기 위해 스스로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경의 하나 되게 하신 것”(4:3)을 증진하는 가정 기반 생활방식을 이보다 더 심오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호 복종하라는 동일한 명령이 자녀와 부모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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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커 성경주석
@장코뱅 주석을 첨부해 주시니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노베 제가 시도한 바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의 좋은 포스팅입니다. 어제 밤에 잘 읽었습니다.
@장코뱅 상호복종에 대해서는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좋은 분별로 보입니다.
묵상 내용에 공감합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륜이 망가지니 존속에 대한 죄악 못지 않게 비속에 대한 죄악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비들이 남편들이 윗사람들이 더욱 정직하고 겸소하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서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이 비뚤게나가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네, 믿음 안에서 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죽하면 어느 교회에 아버지 학교가 있겠습니까?ㅠㅠ
@장코뱅 그런 이유가 있군요ㅠㅠ
네, 공감합니다.
상호복종하라는 의미가 크게 다가오네요. 아주 맞는 말씀입니다.
먼저는 연약한 자들이 연장자나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이 질서에 맞는 일이라서 먼저 권면의 말씀이 나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가 있으니 연장자나 존경을 받는 자가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먼저 사랑하신 것과 같다는 건데요.
부모 부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주 안에서, 주의 교훈과 훈계로 행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해주심으로 크게 공감하고 유익을 얻습니다.
저도 베이커 주석의 상호복종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독자님들께 즐주와 기쁜 주일을 기원합니다.
@장코뱅 아멘!
@장코뱅 아멘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