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러셀 (Jane Russell,1921~2011)
1921년 미네소타에서 태어난 '제인 러셀'은 어릴 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영화 배우였던 어머니는 그녀가 연기와 음악에 관심을 갖도록 키웠다.
그녀는 잠시 L.A 의 '맥스 라인하츠 시애트리컬 워크숍' 에서 수업했고, 연기
코치인 '마리아 우스펜스카야' 에게 배우기도 했다. 18살 때 치과 접수계 직원
으로 일하던 중 우연히 억만장자 영화제작자인 '하워드 휴즈' 의 눈에 띄어
연예계로 들어서게 됐다.
배우로 발탁될 당시 접수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던 '제인 러셀'은 〈The Outlaw〉
(1943)로 첫 배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주로 '제인 러셀'의 도발적인 옷차림
때문에 몇 년 동안 일반에게 공개되는 데 제한을 받았다. 1943년 잠시 상영된
이후 1946년까지 상영이 보류되었다. 그후 몇 년간 항의와 더욱 심해진 검열
및 법적 분쟁 속에서 간헐적으로 상영되었던 이 영화는 1950년에 공식적으로
재개봉 되었다.
〈The Outlaw〉의 재상영 및 편집기간 동안 '제인 러셀'과 7년의 계약기간에
합의한 '하워드 휴즈' 는 그녀를 영화에 출연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이 기간 동안 다른 제작사에 임시 기용되어 눈물을 짜는 드라마인
〈Young Widow〉(1946)에 유일하게 출연했을 뿐이었다.
1940년대 초반 한정된 영화 출연에도 불구하고 〈The Outlaw〉를 둘러싼
논란은 '제인 러셀'에 관한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벽걸이 사진에 나오는 핀업 모델로도 인기를 얻었다.
섹스 심벌 이미지가 그녀의 활동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인 러셀'은 역량 있는 여배우이자 가수로서 호평을 받았다. 그녀는 흥행작
〈The Paleface〉(1948)와 그 후편인 〈Son of Paleface〉(1952)에서
'보브 호프'와 공연했다. 이 두 영화는 '제인 러셀'의 노래 실력을 뽐내는
기회가 되었다.
'제인 러셀'의 가장 유명한 역할은 1953년 '마릴린 먼로'와 함께 출연한 뮤지컬
〈Gentlemen Prefer Blondes〉에서였다. 또한 그녀는 후속 시리즈인
〈Gentlemen Marry Brunettes〉 (1955)에도 출연했다.
'제인 러셀'은 가수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940년대에 그녀는 라디오 쇼
에서 밴드 리더로 활동했으며, 후에 뮤지컬에서도 활동을 시작해 나이트
클럽 순회공연 뿐만 아니라, 솔로 및 그룹으로 앨범을 녹음했다.
또 1971년 뮤지컬 〈Company〉에서 '얼레인 스트리치'의 역할을 대신 맡으며
'브로드 웨이'에 데뷔했다.
'제인 러셀'은 입양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과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
하다. 그녀는 해외 아동들의 미국 입양을 돕기 위하여 세계입양국제기금을
설립했다. 그녀 자신도 3명의 아이들을 입양했다. 1985년 러셀의 자서전
〈제인 러셀: Jane Russell: My Path & My Detours〉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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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 외국의 유명 연예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닙니다. 이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돈 때문인데, 그만큼 우리나라가 문화 예술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가 그리 의미 있는
시장이 아니었고 한국을 찾는 외국 유명 연예인들도 대부분 전성기(全盛期)를
지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최근 못지않게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휴전이후에도
첨예한 대치가 이뤄지던 지난 1950년대가 바로 그랬는데, 당대의 초특급
스타들이 줄지어 내한하였습니다. 그때 한국을 찾은 유명연예인들을 살펴보면
밥 호프(Bob Hope), 마릴린 맥스웰(Marilyn Maxwell), 미키 루니(Mickey
Rooney),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등 이루 거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1950년 10월 최전선인 원산에서 위문공연을 펼친 밥 호프]
당시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여서 문화 예술 분야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만한 시장이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평생 이름도
들어 본적이 없던 한국을 찾아왔던 이유는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54년 초에 방한한 '마릴린 먼로'는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왔다가 미군 당국의
요청이 있자 망설이지 않고 한국으로 곧바로 건너와 병사들을 위해 한 겨울에
얇은 무대복을 입고 공연하였을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금전적인 댓가도 없이 자발적으로 찾아온 경우여서 최전선의
불편한 시설을 결코 탓하지 않았습니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사는 그들은 오히려
이것을 당연한 의무로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할리우드의 유명 스타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 우리나라의 연예인들도 위험한 최전선으로 병사들을
찾아가, 사지(死地)에서 고생하는 국군을 위문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을 찾아왔던 할리우드 스타들 중에는 1957년 방한 한
'제인 러셀'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1953년 빅히트를 기록한 영화인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Gentlemen Prefer Blondes)’ 에서 '마릴린 먼로'와
주연으로 함께 나온 또 한명의 유명 섹시스타였습니다.
방한한 그녀는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대통령'을 예방하고, 전방부대를
찾아가 위문공연도 펼쳤습니다.
그런데 '제인 러셀'이 잘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의 아니게 그녀는
한국 전쟁과 상당히 관련이 많습니다. 흔히, 철의 삼각지대라 불린 중동부
전선의 요충지 금화에 있는 쌍둥이 고지를 미군들은 '제인 러셀고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 고지'는 피로 흘러넘친 격전지였던
'단장의 능선', '피의 능선', '저격 능선' 부근에 있던 무명고지였는데, 이곳의
이름이 '제인 러셀'로 불리게 된 데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툭 튀어 오른 쌍둥이 봉우리가 마치 '제인 러셀'의 풍만한 가슴을 닮았다고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습니다.'제인 러셀'의 가슴은 할리우드 여 배우
중 최고라고 여겨질 만큼 유명하였는데 삭막한 전쟁터에서, 그것도 병사들이
수 없이 죽어가며 빼앗고 지켜야할 고지의 이름을 '만인(萬人)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가슴을 상상하며 지었다는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지옥의 전쟁터에서 잠시나마 낭만을 찾으려 하였던 것
같아 측은하기 까지 합니다.
1951년 휴전회담이 개시된 이후 한국전쟁의 양상은 양측 모두 이기려 하지도
그렇다고 지려 하지도 않는 방향으로 변화하였고, 그 결과 '고지전(高地戰)'이
가열되었습니다. 만일 전선을 돌파하여 전선을 밀어붙일 생각을 하였다면,
그냥 지나쳐도 될 수많은 무명의 고지들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총과 폭탄에 의해 사라져갔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던 깊숙한
곳에 있던 이름 모를 수많은 '고지'는 현실에 등장한 지옥(地獄)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 그들은 잠시 동안 전쟁을 잊고 싶었는지 전쟁과 관련 없는 많은
이름들을 전선의 '무명 고지' 위에 남겼습니다.
화채 그릇을 빗댄 '펀치볼(Punch Bowl)' 전투, 먹음직스런 돼지갈비를 연상시키는
'폭챂 힐전투(Porkchop Hill)'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고,
'제인 러셀' 또한 본의 아니게 선택된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의 희망과
달리'제인 러셀' 고지 위의 전투는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었습니다.
단지 이름만으로 바뀔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인천 아이러브색소폰 클럽 대표 윤양로 원장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