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번역된 시는 제2의 창작이라 함이 옳은 것이다. 시 번역은 왜 불가능한가?
시라고 하는 것은 문학 중에도 가장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며 선택적이고 상징적인 문학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이라 함은 착상이 斂活岵琯Ⅴ?상념의 미화 방법이 무제한함을 뜻하고, 포괄적이라 함은 문장이 내포하는 의미의 세계가 깊고 광활함을 뜻하며, 선택적이라 함은 시 형성에 있어서 시어(詩語)로서 우수한 것을 선별하는데 기교가 따름을 뜻하고, 상징적이라 함은 사물, 사상, 느낌을 표현하는 매재(媒材)가 극히 암시적임을 뜻한다.
시가 난해성(難解性)을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시의 흐름을 아는 사람에게는 시는 영적 촉각을 일깨우며 승화된 정신 세계를 보여주는 위대한 예술이다. 종교 문헌들이 시로 쓰여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기에 외국어로 쓰여진 시는 그 시의 참 맛을 알려면 쓰여진 원문으로 읽을 수 있는 어학의 실력과 시적 안목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어떤 시인 영문학자가 영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 시에 감격하여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하자.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문학적 성격 때문에 번역시가 원문 시에서 느끼고 알 수 있는 같은 가치의 맛을 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영어와 우리말의 언어 구성, 어휘의 뉘앙스, 말의 체계가 다르며 적정어(適正語)가 결핍한 사실 등 여러 가지 장벽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시는 제2의 창작이요 같은 번역시에도 번역자의 문학적 기량에 따라 걸작이 있을 수 있고 졸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찬송가는 어떤가?
찬송 가사 번역도 그것이 시이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다행히 찬송 가사는 그 원문이 정형시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자유시보다는 좀 쉬운 편이라 할 수 있다.
가사는 느낌을 운문(韻文)으로 리드미컬하게 서술한 문장이어서 자유시보다는 시어 융합(詩語 融合)이 단조롭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찬송 가사는 우리와 같은 신앙 세계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며 공통된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들의 작품이어서 의미를 포착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찬송 가사 번역에는 또 다른 큰 어려움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악곡(樂曲)의 Phrasing이나 억양에 맞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하여 한국 최초의 규모를 갖춘 악보 찬송가인 '찬양가'를 1894년에 번역 발간한 언더우드는 그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곡조를 맞게 하려 한즉 글자가 정한 수가 있고, 자음도 고하 청탁이 있어서 언문자 고저가 법대로 틀린 것이 있으니...운운" (註: 찬양가 서문).
그러니까 찬송 가사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이상 말한 바와 같은 번역문학이 지니는 난점이 있고 우리말로 된 가사가 원 가사의 악곡의 구절과 억양이 맞아야 하며 가사가 각기 지니는 내용에 있어서 찬양 또는 증거 또는 고백 문학으로서 신학과 신앙의 바른 내용이 되어야 하는 예배 찬송으로의 필수 조건이 있다.
이런 모든 실정에서 그 요구에 부응하는 믿음으로, 찬송 가사의 원문을 충분히 소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바른 해석을 찾아, 원작자와의 은혜의 공감대에서 제 2 의 창작으로 이루어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라 하겠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들, 개편. 합동. 새찬송가의 가사가 번역 가사로서 최선의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아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보다 더 완전하게 가사를 새로 번역, 그러니까 개작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사의 대부분은 그 번역이 잘 되었든, 잘못되었든 간에 이미 교회 예배 대중의 몸에 배고 마음에 익어 한국 교회 신앙의 토양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선교 100년을 맞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외국 찬송가(그 중에는 외국에서는 찬송가에 끼지 못하는 것까지도)가 이미 정착 애송되어 그야말로 토착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모순이 없는 이상 고치지 않는 편이 한국 교회 예배에 적용하기에 유익하다는 것이 교계의 요망이요 여론이라고 본다.
이상과 같은 가사 번역의 문학적 성격과 음악적 요건의 바탕에서 교회의 실정을 감안하면서 가사 통일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마무리가 된 것은 한국 교계를 위하여 큰 경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제 번역된 찬송 가사의 문학적인 고찰을 돕기 위하여 우리 찬송 중 몇 개의 가사로 예를 들어 보자.
비교적 쉬웠고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
개편 1장(합, 새 4장)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의 원작자는 영국의 히버감독(1783-1826)인데 삼위일체주일 예배용으로 작사된 것이다. 이 가사는 서정적인 높은 수준의 영시로 평가되며 영국의 시성 테니슨이 '찬송가 중의 찬송가'라고 격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사의 원문을 편의상 1절만 곡조에 구애없이 본 가사에 충실하게 번역한 번역문과 함께 소개해 본다.
<원문>
Holy, holy, holy!
Lord God Almighty!
Early in the morning our song
shall rise to Thee;
Holy, holy, holy!
merciful and mighty!
God in three persons,
blessed Trinity!
<번역문>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 하나님!
아침 일찌기 우리의 노래가
당신을 향하여 일어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주여!
삼위 중의 성부여,
복된 삼위일체시여!
<통일가사>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여
성 삼위 일체 우리 주로다.
사실 이 찬송의 첫머리 귀절 '거룩, 거룩, 거룩!' 은 1894년 언더우드의 찬양가에는 '거룩 거룩하다'로 번역된 것이다. 그것이 1918년 장감 연합공의회가 발간한 '찬숑가'에는 '성재 성재 성재(聖哉 聖哉 聖哉)'로 번역되었고 1931년 신정 찬송가에는 다시 '거룩 거룩하다'가 되었는데, 이때 이것이 1934년 장로회 제 23회 총회 결의로 신편찬송가를 별도 간행하는 찬송가 분열의 이유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가사는 원문과의 근사치로나 가사로서의 세련미로나 잘 된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논란이 많았던 가사.
개편 502(합 162, 새 358)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은 영국의 유니테리안 신자이며 시인, 사라 F. 아담스 부인의 작사(1840)다. 이는 1888년경부터 번역되어 불러온 몇 편의 찬송가 중 하나이며 가장 애용되는 것이어서 지금으로부터 47년 전 당시 이화여전 음악 교수 박경호는 '40만 교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마음에 박혀서 그들의 민요가 된 찬송'(기독신보, 1935 2. 20 자)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원문 1절>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E`en though it be a cross
That raiseth me;
Still all my song shall b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my God, to Thee,
Nearer to Thee!
<번역>
나의 하나님,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당신에게 더 가까이!
비록 이 일이 나에겐 다구치는
십자가 일지라도
나의 모든 노래는 오직,
나의 하나님, 당신에게 더 가까이
나의 하나님, 당신에게 더 가까이,
당신에게 더 가까이!
<통일 가사>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가사의 논쟁점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개편. 합동)과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새)에 있었다. 양편이 다 민요화(?) 될 정도로 익숙해졌는데 어느 편을 택할 것이냐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의 문장으로는 '하려함은'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하게함은'으로 낙착된 데는 신학적인 주관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안다.
결국 이 가사는 원작자 사라 F. 아담스 부인이 환란을 무릅쓰고 일편단심 주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접근하는 정신, 즉, 이 가사의 문학 정신이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의 피동적인 문귀를 사용함으로써 모호해진 점은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이 이 가사에 강조됨으로 문학적으로는 하나의 오점이 된 셈이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을 택한 이유는 이해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언더우드의 1894년 찬양가 가사를 택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심정이다.
언더우드의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주 가까이 더 가까이
나를 떠난 것이 괴로워도
항상 찬양하여 우리 주 가까이
우리 주 가까이 더 가까이
이 얼마나 원문에 가깝고, 문학적인가? 이 번역이야말로 원 가사의 작가 사라 F. 아담스 부인의 간절함에 넘치는 심령에 가장 접근한 번역이라 하겠다.
한국적으로 개작된 가사
번역 가사란 개작된 가사이지만 그 중에 한국적 정화에서 번역에 취약성을 드러낸 가사로 개편 246 장(합 255, 새 425)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를 들 수 있다. 이 가사는 윌리엄 T. 슬리펀(미국)의 작사다(1877년).
작곡가 죠지 C. 스텝먼스가 유명한 부흥사 무디의 집회를 도와 활약하면서 곡명 'Jesus I Come'으로 많이 부름으로서 크게 보급된 Gospel Hymn이다.
<원문 1 절>
Out of my bondage, sorrow and night,
Jesus, I come, Jesus, I come;
Into The freedom, gladness and night,
Jesus, I come to Thee.
Out of my sickness into Thy health,
Out of my want and into Thy wealth,
Out of my sin and into Thy self,
Jesus, I come to Thee.
<번역문>
나의 멍에, 슬픔, 어둠에서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는 갑니다. 예수께로 나는 갑니다.
당신의 자유, 기쁨, 빛 속으로,
예수여 나는 당신께로 갑니다.
나의 병에서 벗어나서 당신의 건강으로,
나의 궁핍에서 벗어나서 당신의 부요로,
나의 죄악에서 벗어나서 당신 자신께로,
예수여, 나는 당신께로 갑니다.
<통일가사>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옵니다.
병든 내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삶이 부해지며
죄악을 벗어 버리려고
주께로 옵니다.
이 가사 번역의 취약성은 'Jesus I come.' 'I come to Thee:'에 있었다. 즉 개편에는 '예수께로 나갑니다' '주께로 갑니다'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예수께로 나옵니다' '주께로 옵니다'로 합동찬송가 가사로 되돌아간 것이다.
'나갑니다'와 '나옵니다'는 반대어다. 어떤 것이 옳은가?
이 가사의 흐름은 죄악으로 말미암은 슬픔의 멍에를 벗기 위하여 예수께 나가는 자신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원문대로 '나갑니다'가 옳다. '나옵니다'로 되돌아 간 것은 예배를 드리는 현장이 주님 앞이라는 관념과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온 습관 때문일 것인데 그렇다면 '왔습니다'라는 완료동사를 쓰는 것이 문학적이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왔습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위의 몇몇의 찬송 가사 번역의 사례가 찬송 가사 전체의 번역 과정의 경향에 대한 집약적인 사례라고 생각하면 과히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잘 된 것인가, 잘못 된 것인가?
이에 대하여 가사 한편 한편을 가지고 자기 주견대로 평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찬송가 통일이라는 거대한 목적을 두고 합격 여부를 위하여 평점을 놓는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로 안다.
이유는 누가 작업을 하여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어느 개인이 자기 주견대로 작업을 하여 보다 문학적인 아름다운 가사를 내놓아도 그것이 한국 교회가 지니는 그 두터운 벽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찬송 가사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느끼는 것은 원가사에 함축된 의미와 감흥과 리듬을 번역 가사가 양(量)으로나 질(質)에서 도저히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문학적인 과제가 있다. 문학적인 과제란 기독교적인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과 접근하는 보다 깊은 신앙 체험을 통하여 문학적 호흡이 열려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다 함께 노력하자. 그래서 앞으로 보다 더 영감이 넘치는 가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끝으로,
나는 이미 정착된 가사에 대하여는 이렇게 생각한다. 찬송가에 바르게 되지 못한 것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어찌하든 그것이 한국인에게 정착된 찬송가가 되었다. 마치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졌지만 정착되어 있으니 오히려 진기한 예술품이 아닌가!
그와 같이 이미 정착된 우리 찬송가는 우리의 훌륭한 기독교 문화 풍토를 이루고 있는 예술품이다. 예술은 논리학이나 물리학이 아니요 정(情)이다. 그러니 누구의 취향 따라 고치는 일을 쉽게 하지 말 것이며, 그래서 찬송가 통일을 방해하는 결과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이 글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국찬송가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는 중(1982년) '한국찬송가 발전을 위한 세미나'에서 오병수 목사님이 강의한 내용으로, 연구지 강의안 pp.12-18에 있는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