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 재개된 11세기 후반부터 활발한 조성
고려 문종의 요청으로
보내온 건칠불상 ‘효시’
정국안화사 등 사찰 불상
송나라의 영향 많이 받아
안동 보광사 관음보살상
12세기 불교조각 대표작
낙산사 관음보살상 역시
송과의 교류 흔적 보여줘
양양 낙산사 건칠보살좌상, 고려말 조선초, 크기 143.0cm, 낙산사
송나라 불상이 고려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송과의 국교가 재개된 문종(文宗, 1046~1083 재위) 때이다. 문종의 요청을 받아 송의 신종(神宗)이 원풍(元豊) 년간(1078~1085)에 건칠(乾漆)불상을 보내왔고, 이것을 흥왕사(興王寺)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그 사실을 알려 준다. 이는 1073년에 고려에서 김양감(金良鑑)과 노단(盧旦, ?~1091)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의자(醫者, 의사), 약인(藥人, 약사), 소공(塑工, 조각 장인), 화공(畫工, 그림 장인) 등 사공(四工)을 송나라에 요청한 것과 관련된다. 고려에서 소공과 화공이 필요했던 것은 2800여 칸 규모의 흥왕사(興王寺, 1067년 1차 완공)에 봉안할 불상을 조성하고 벽화를 그리기 위함이었다. 신종은 소공과 화공을 파견하는 대신에 고려 화공이 상국사(相國寺)의 벽화를 모사하여 가져가는 것을 허락하고, 흥왕사에 봉안할 건칠불상을 보내었다.
송과 국교가 재개된 11세기 후반은 박인량(朴寅亮, ?~1096)이 당시의 고려 문물(文物)을 송과 견줄만한 “소중화(小中華)”라고 기록할 만큼 송의 영향이 상당했던 시기였다. 흥왕사를 필두로 하여 1095년에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인예왕후, 문종의 비, 의천의 모친)의 원찰(願刹)로 세운 개경의 국청사(國淸寺)와 송의 휘종(徽宗)이 1118년(예종 13)에 보내온 소조십육나한상(塑造十六羅漢像)을 봉안하고 있던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 등 많은 사원의 불상과 불화가 송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고려 12세기 중엽, 크기 113.6cm,
양국 간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흥왕사의 건칠불상과 정국안화사의 소조십육나한상과 달리, 이 무렵에 공적 사적으로 송나라를 방문한 고려 사람들은 대부분 관음보살상(觀音菩薩相, 조각 혹은 그림)을 가지고 돌아왔다. 1086년,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3000여 권의 교장(敎藏, 불교 경전 및 주석서)과 함께 가져왔다는 오십오지식상(五十五知識像)도 이 중 한 예이다. 오십오지식상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깨달음을 구하고자 55분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는 <대방광불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내용을 주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림인지 조각인지, 55존의 선지식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선지식을 대표하여 보타락가산(布陁洛迦山, Potalaka)의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만을 표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친형인 국원공(國原公, 선종宣宗, 1083~1094 재위)이 1083년에 봉안한 수월관음도에 의천이 직접 찬시(讚詩)를 쓴 사실은 이 상(像)이 그와 선종(국원공)에게 친숙했던 수월관음상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한편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도 관음보살도의 전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송에서 유학하던 권적(權適)이 1116년(혹은 1117년)에 고려사절단(高麗使節團)과 함께 귀국할 때, 송나라 휘종(徽宗)이 관음상(관음보살도)을 하사하였고, 이후 그의 딸(최자의 할머니)에게 전해졌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개성 천마산 석조관음보살좌상, 고려 12세기 전반, 크기 113cm,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
고려와 송의 교류는 요(遼)와 금(金)에 의해 육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바닷길을 왕래하던 송나라 상선(商船)을 통하여 주로 이루어졌다. 고려 사람들은 개경의 벽란도 항을 출발하여 관음보살의 성지(聖地)인 보타산(普陀山)이 있는 송의 명주(明州,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에 도착한 다음, 운하를 따라 황도(皇都) 변경(汴京, 하북성 개봉)에 이르렀으며, 귀국할 때도 같은 길을 주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11세기 말부터 고려에 전래된 관음보살 도상은 변경과 명주에서 유행한 보타락가산의 관음보살신앙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1096년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승려 혜진(惠珍)이 강원도 양양의 보타낙산(普陁落山, 보타락가산, 현 낙산사로 추정) 성굴(聖窟)을 친견하고자 하였으나 숙종(肅宗, 1095~1105 재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송나라 관음보살 도상의 전래와는 별도로 이미 고려에서 보타락가산의 관음보살신앙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 기록은 늦어도 11세기 말에는 낙산사에 관음보살상이 존재하였음을 추정하게 하는데, 이 상은 13세기 전반 몽골에 의해 파손되었던 불복장(佛腹藏)을 다시 갖추어 봉안했다는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기록된 보살상일 가능성이 높다. 보살상은 임진왜란 때 낙산사 원통보전(圓通寶殿)과 함께 소실되었기 때문에 혜진이 친견하고자 했던 관음보살상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현재 원통보전에 있는 건칠보살좌상은 한국 전쟁 때 낙산사가 전소되어 양양의 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건칠보살좌상은 보관에 화불(化佛)이 없어서 관음보살로 특정할 수도 없고 낙산사와의 관계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말 조선초의 수준 높은 조형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혈사가 낙산사와 멀지 않아 혜진이 친견하고자 했던 고려시대의 낙산사 관음보살상을 연상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
12세기 중엽 이후, 고려에 전래된 송나라 관음보살상은 남송(南宋)의 황도인 임안(臨安, 절강성 항주)과 보타산이 있는 명주를 중심으로 유행한 절강성의 관음보살상이거나 그것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고려 사람들이 절강성 전당(錢塘)에 와서 관음보살상을 조각하여 배에 실어 가고자 하였으나 움직이지 않자 명주의 개원사(開元寺)에 들어가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과 1174년에 절강성 전당 출신인 김영의(金令義)가 관음보살상을 경상북도 상주의 소림사(小林寺)에서 발원하였다는 사실은 12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된 고려의 관음보살상이 명주의 보타산 관음보살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고려 사람들이 관음보살상을 조각하여 가져가려고 하자 움직이지 않았다는 기록은 당말 오대(唐末五代)부터 보타산에 전해오는 불긍거관음(不肯去觀音, 가기를 꺼려 하는 관음)의 설화를 연상하게 한다. 한편 의종(懿宗, 1146~1176 재위) 때, 환관(宦官) 백선연(白善淵)이 발원한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40폭와 방청련(房淸璉)의 처 피씨(皮氏, 1115~1195)의 염불(念佛) 대상이었던 관음보살상(혹은 관음보살도)도 절강성 관음보살상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개성 천마산 석조관음보살좌상 뒷면.
현존하는 고려의 관음보살상 중에서 절강성 관음보살상을 그대로 답습한 예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보타산 관음보살상과 같이 독존상(獨尊像)이면서 송나라 보살상의 조형적인 특징을 갖춘 예는 더러 확인된다. 황해도 개성의 천마산(天摩山) 관음사(觀音寺)에 전해 오는 2존의 석조관음보살좌상이 그 예로, 이 중 한 존은 보관 정면과 양 옆면에 모두 3존의 화불(化佛)이 표현되어 있다. 보관 정면에만 화불이 있는 일반적인 관음보살상과 달리, 3존의 화불을 새긴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보살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단정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는 두 가닥의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양옆으로 펼쳐져 있다. 보살상은 오른쪽 다리를 내려뜨리고 왼쪽 다리를 대좌 위에 둔 안락좌(安樂坐,유희좌遊戲坐)로 앉아 있다. 양쪽 어깨에서 대좌 앞까지 U자를 그리며 흘러내린 커다란 꽃무늬 장식과 가슴 중앙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조백(皁白) 자락이 특히 눈에 띈다. 보살상은 송나라 12세기 초에 조성된 절강성 소주(蘇州)의 서광사탑(瑞光寺塔)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좌상과 사천성(四川省) 대족(大足)의 북산(北山)석굴 불만(佛灣) 136굴의 옥인(玉印)관음보살좌상(남송 1142~1146년)과 조형적으로 유사하다.
송나라 보살상의 조형적인 영향은 경상북도 안동의 보광사(寶光寺)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도 보인다. 보살상은 원래 안동의 용수사(龍壽寺)에 있던 것으로,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가부좌하고 있다. 화려한 꽃으로 치장된 보관 정면에 화불(化佛)이 표현되어 있어서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리고 왼손을 배 앞에 둔 채 설법인을 취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독존의 관음보살상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미타불상의 좌협시상인 관음보살상은 대부분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올리기 때문이다. 둥근 얼굴, 이마에서 곧게 뻗어내린 코, 비교적 긴 상체는 12세기 중엽의 조형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왼쪽 옆구리의 치레 장식, 가슴 앞 법의(法衣)의 옷깃을 따라 길게 흘러내린 영락(瓔珞), 무릎을 덮고 있는 장식 등은 고려시대 14세기 이후의 특징들로, 보살상이 이 무렵에 다시 보수되었음을 알려 준다.
보광사 관음보살상은 12세기 중엽의 조형적인 특징을 갖춘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점과 최고의 불상재(佛像材)인 향나무(침향목沈香木)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왕실에서 발원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살상은 의종(毅宗, 1146~1170 재위)이 1151년(의종 5)에 목공장(木工匠, 나무 조각 장인)을 시켜 침향목으로 만든 관음보살상이나 최선(崔詵, ?~1209)의 <용두산용수사중창기(龍頭山龍壽寺重創記)>(1181)에 기록된 침향목의 목조관음보살좌상(1165년, 의종 19)과 연관될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신문36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