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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 모방 이론 (Mimetic Theory)
인간은 타인을 모방하면서 학습하는데 내면적인 욕망조차도 모방한다는 이론
글쓴이 : 한길사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오늘날 우리의 욕망 체계를 소설 주인공의 욕망 체계에서 발견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성을 분석한 탁월한 작품이다.
지라르의 관심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욕망하는지를 살펴서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가치)을 자발적으로 욕망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낭만적 거짓’에 불과하다.
사실은 우리가 욕망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중개자를 세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욕망구조에 편입되어 있으며, 이것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드러나는 ‘소설적 진실’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삼각형의 욕망이란 거의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형이상학적 질환에 속한다.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암처럼 자각증세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진단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형이상학적 질환에서 치유될 수 있는 희망은 없어 보인다. 지라르가 낭만적 거짓을 폭로하고 삼각형의 욕망이라는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형이상학적 질환의 원인을 찾아내서 치유하자는 것이다. 타인을 모방해서 타인과 같아지거나 같아지려고 하면 경쟁과 원한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되므로 차별화된 자기만의 멋을 키워 싸움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원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더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마존의 원시부족을 보라. 그들은 문명이 미진해서 모방할 것은 적지만 오히려 문명인보다 행복지수가 더 높다. 종교사회도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을 가졌던 다신교 사회가 훨씬 안전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싸움도 모방에 의해 확장된다고 보는 르네 지라르는 모방의 폐해를 단절시키는 예수의 말. 즉 원수를 사랑하라.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 뺨을 돌려대라는 그의 말에 감명받아 기독교에 귀의했으나 창조신화나 예수의 부활 미신은 믿지 않는 인문학계의 다윈과 같은 인물이다
모방이론에 따르면 이상형의 배우자로 생각하고 결혼했는데 막상 살아보니까 그런 배우자가 아니었거나 적어도 그런 배우자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사람이라도 다른 이상형의 이성에게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배우자를 그 이상형에 강제로 맞추려고 강요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부당하다. 사람은 서로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된다. 인간이 완벽히 똑 같다면 예컨대 복제인간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무서운 세상이 될 것이다. 나와 욕망이 완벽히 똑같기 때문에 만약 대상이 하나 뿐이고 대상의 차지 여부가 생존과 결부된다면 치명적인 싸움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간의 싸움이 더 폭력적인 이유가 잘 설명될 수 있다. 평소에 상대를 모방할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 남을 부분적으로 모방한다 하더라도 똑같아 지려고는 하지 말고 자기만의 차별적인 멋을 만들어 가면서 그 차별성을 서로 인정해 줄 때 세상의 가치는 더욱 다양해지며 안전한 사회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결론은 피차의 스트레스를 야기하면서 남과 똑같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말고 남을 자기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말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존재감과 가치를 인정해 주고 상생하라는 것이다
삼각형의 욕망으로 투영되는 현대인의 욕망
이 책에서 맨 먼저 분석의 대상이 되는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이다. 그가 이 소설의 분석에서 얻어낸 결론은 『돈키호테』의 주인공들의 욕망은 간접화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개인이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그 개인이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때 초월은 자기가 욕망하게 되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그려보면 개인에 해당하는 주체가 밑에 있고 대상이 그 수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돈키호테』에서 살펴보면 주인공 돈키호테는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가 되고자 한다. 여기에서 돈키호테는 주체가 되고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그 이상적인 방랑의 기사가 되기 위하여 아마디스라는 전설의 기사를 모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돈키호테는 직접 이상적인 기사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디스를 모방함으로써 거기에 도달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상적인 기사도에 도달하고자 하는 돈키호테의 욕망은 아마디스라는 중개자에 의해 간접화되고 있으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는 간접화 현상이 일어난다. 즉 주체의 욕망이 수직적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상승하여 중개자를 거쳐 대상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간접화 현상은 기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구조이다. 어느 기독교인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곧 예수라는 중개자를 모방하면 된다. 이때 기독교인과 예수와 진정한 기독교인은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형성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의 대상과 그 욕망의 중개자가 삼각형의 구조를 갖게 되고, 이처럼 간접화한 욕망을 ‘삼각형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지라르는 현대인의 욕망은 이처럼 삼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면서 소설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욕망의 왜곡되고 비진정한 속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로써 시장경제체제 사회 속에서 개인은 그 욕망마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암시된 욕망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제시한 셈이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공의 욕망의 구조와 주인공을 태어나게 한 사회의 경제구조 사이에 구조적인 동질성을 발견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지라르는 따라서 돈키호테의 욕망이 돈키호테 내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마디스라는 중개자에 의해 암시됨으로써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점에서 종래의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산초 판사를 현실주의자로 규정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진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진실이 아니다. 예전에는 산초 판사의 욕망(작은 섬 하나를 소유하는 것, 딸에게 공작부인의 칭호를 갖게 하는 것)이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를 현실주의자로 보았다. 그러나 지라르는 산초 판사의 바로 그 두 가지 욕망이 그의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욕망이 아니라 그의 주인인 돈키호테에게서 암시받은 욕망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돈키호테가 산초 판사의 욕망의 중개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라르는 이처럼 하나의 작품이 여러 개의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가 분석하고 있는 스탕달의 『적과 흑』,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주인공들의 욕망이 여러 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지라르는 모든 삼각형의 욕망이 동일한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좀더 복합적인 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더욱 복합적이고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삼각형의 구조에서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분석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둘 사이의 거리이다.
다시 말하면 『돈키호테』에서 주체 돈키호테와 중개자 아마디스는 동일한 세계에 있지 않다. 즉 아마디스는 전설적인 가공의 인물이어서 돈키호테와 만날 수 없는 인물이다. 이때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는 극복될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다. 그런 관점에서 주체로서의 산초 판사와 중개자로서의 돈키호테 사이의 거리는 함께 다니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때의 거리를 물리적인 거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돈키호테는 주인이고 산초 판사는 시종이기 때문에, 둘이 함께 다닌다고 해서 그 둘 사이의 거리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초 판사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주인의 자리를 꿈꾸어본 적이 없고 주인과 경쟁해보고자 한 적이 없다. 그것은 두 인물이 동일한 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엄연하게 구분되는 정신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스탕달의 『적(군복)과 흑(사제복)』에서 라모르 후작의 딸, 마틸드가 집에 아빠의 비서로 들어온 영민한 천민의 아들, 줄리앙 소렐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경쟁자인 페르바크 원수 부인과의 경쟁관계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처럼 주체인 마틸드와 중개자인 페르바크 원수 부인이 동일한 공간 안에서 대상인 줄리앙 소렐을 욕망하는 데 서로 경쟁관계에 있다는 것은 욕망의 간접화가 훨씬 더 비극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 지라르는 전자를 외적 간접화라 하고 후자를 내적 간접화라고 하며 전자의 범주에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분류하고 후자의 범주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분류한다. 그는 현대인의 욕망이 주체와 중개자의 거리가 가까워짐으로써 주체와 대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점에서 훨씬 더 비극적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지라르는 오랜 기간의 연구를 거쳐 인간의 역사란 곧 모방욕망의 역사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역사의 굽이마다 모방욕망의 영향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으니까요. 문제는 상호 간의 모방욕망이 사람들의 관계를 갈등과 분쟁관계로 만들어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모방욕망의 고리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경쟁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경쟁에는 끝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은 심화됩니다.
“한 모방자가 그의 모델들에게서 그들 공통의 욕망의 대상물을 빼앗으려 할 때 그 모델은 당연히 저항하게 된다. 이리하여 욕망은 ‘양측에서’ 모두 강해진다. 이 모델은 이 모방자의 모방자가 되는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적대자들을 점점 더 같은 것으로 만들면서 갈수록 완벽해져가는 이런 이중 모방 속에서는 모든 역할은 서로 바뀌고 서로를 반사한다.”(『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 중에서)
명품을 가진 친구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렵게 돈을 모아 같은 제품을 삽니다. 욕망이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애초에 명품이라는 사물은 욕망의 진정한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욕망한 것은 타인, 즉 자신의 친구였으니까요. 친구처럼 되고 싶은 것이지, 그가 가진 사물을 단순히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방욕망은 다시 시작됩니다. 게다가 친구라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또한 이내 욕망 경쟁에 참여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도 경쟁을 시작합니다. 모방하는 자의 따라잡기와 모방되는 자의 따돌리기는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모방욕망은 사람들 사이의 욕망 경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욕망 경쟁의 끝이 상호폭력의 구렁텅이라는 데 있습니다. “같은 대상을 향하는 두 욕망은 서로의 장애물이” 되고, “욕망에 기반을 둔 모든 <모방>은 자동적으로 갈등으로 귀착”되고 맙니다(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사회적 폭력은 증폭되고 공동체는 위기에 빠집니다.
“인간 폭력의 주요 원인은 모방적 경쟁 관계에 있다. 인간의 폭력은 우연한 결과도 아니고, ‘공격 본능’이나 ‘공격 충동’의 결과는 더더욱 아니다.
모방적 경쟁관계가 심해지면 경쟁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함량미달이다며 비난하면서 그 가치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경쟁자들은 서로의 소유물을 빼앗고, 서로의 배우자를 유혹하고, 심지어는 살인마저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중에서)
모방욕망 때문에 공동체가 파멸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지라르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방경쟁으로 증폭된 폭력을 인류는 어떻게 해결해온 것일까. 대답을 찾기 위해 그는 세계 각 지역의 신화와 전설을 연구합니다. 그러고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죠. 지역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폭력 해소 방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을 ‘만인의 일인에 대한 폭력’으로 변환하는 것이었죠.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참 간단한 방법입니다. 상호 간의 폭력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 슬쩍 한마디 해주면 됩니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좀벌레, 좀비, 이단, 악의 근원, 고문관, 해충, 거지)이야. 모두 저 사람 잘못이지.” 그렇습니다. 희생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희생 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대체하고 전체에게 봉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희생 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폭력의 방향을 공동체 전체로부터 돌려서 외부의 희생물에게 향하게 한다는 말이다. 희생 제의는 도처에 퍼져 있는 분쟁의 씨앗들을 희생물에게로 집중시키고, 분쟁의 씨앗에다 부분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폭력과 성스러움』 중에서)
소수의 희생양을 만들어 그에게 사회적 분노와 폭력을 집중합니다. 모든 잘못은 희생양에 돌리고 그들을 처형함으로써 사람들은 그간 쌓인 폭력성과 스트레스를 소거합니다. 즉, 희생양의 죽음을 통해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은 파멸로부터 구원받습니다.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희생양으론 보복의 가능성이 없는 약자가 좋습니다. 주로 외국인, 여성, 아이, 장애인 등이 선택됩니다.
이들에 대한 꽤 세련된 가공과정도 필요합니다. 희생양을 죽어 마땅한 존재로 만들거나 신성한 순교자로 포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희생양에 대한 사회적 폭력의 추악한 본모습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술의도와 목적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라
지라르는 우리 현대인의 욕망이 간접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신만의 진실한 욕망을 찾아 나서길 바란다.
욕망의 간접화를 통해 경쟁의 사회학을 그려 보인 지라르는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개인의 욕망은 자연발생적이지 않다는 것, 그 보다는 중개자(TV 광고모델, 드라마(영화)의 주인공, 자본의 매체들 등)에 의해 암시된 욕망(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를 추구하게 됨)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간접적 욕망인 타자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기만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진실한 욕망이 무엇인지를 통찰하여 이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1923년12월25일 남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나 1947년 파리 고문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인디애나 대학 프랑스어 강사를 시작으로 듀크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 주립대학, 스탠퍼드 대학 등에서 정교수·석좌교수 등을 지내며 프랑스의 역사·문화·문학·사상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1961년에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비평언어와 인문학’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는데, 여기에는 바르트·데리다·골드만·이폴리트·라캉·풀레·토도로프·베르낭 등 많은 학자들이 참가했다.
지라르의 관심은 소설 속의 인물들이 어떻게 욕망하는가 하는 인간 욕망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그의 첫 저서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인간의 욕망과 구조를 밝혀내려는 작업의 결실인 『폭력과 성스러움』(1972)은 1973년 프랑스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밖에도 그는 『지하실의 비평』(1976),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온 것』(1978, 공저), 『이중규제』(1978), 『희생양』(1982), 『옛 사람들이 걸어간 사악한 길』(1985), 『나는 번개처럼 빠르게 떨어지는 사탄을 보았노라』(1999)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2015년 11월 4일 사망(향년 92세)
■ 낭만적(浪漫的, Romantic)이라는 말은 현실적이 아니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상태. 예컨대 사춘기 시절 연애하는 남녀의 마음 상태처럼 마음에 일종의 파도가 일렁이는 흥분 상태를 말한다.
낭만적[ Romantic, Romantisch, Romantique] 이라는 개념은 예술사적으로 '고전적'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고전적'이란 말이 고대적 작풍(作風)을 지향하는 데 반하여, '낭만적'이란 말은 오히려 중세적인 것을 지향한다
낭만이란 말은 중세 로마어로 쓰여진 공상적ㆍ모험적ㆍ정감적인 기사 이야기를 가리키는 romance에서 유래한다.
낭만적인 예술경향에서는 정신적 내지 감정적인 것이 존중되고, 고전적 형식성은 경시된다. 미술에서는 통일적인 구도보다는 격정적인 표현을 중시하고, 문학에서는 완성된 구성보다는 오히려 무한하게 전개되는 불명료성이 지배한다.
첫댓글 학습을 위해 부분적으로 모방하되 자기만의 창조적인 멋을 만들고 자기와 다른 타인의 멋을 인정해 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욕망의 삼각형을 알면 갈등해결사로 거듭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