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담비(초:貂)와 양말(socks:洋襪) / 이원우
사냥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다. 자다가도 일어나게 할 만큼.
한반도에도, 옛날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동물들이 살고 있었단다. 크기나 종류, 숫자에 이르기까지. 70년대 초반이었던가? 어느 신문에 연재되었었던 '명사수 열전'에서 읽었던 충격적인 사실 하나. 어느 포수가 지리산에 사냥을 나섰다가 그만 허탕을 치고 말았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포수는 지친 걸음으로 귀갓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중간쯤 내려왔을 때 썩어 넘어진 굵다란 고목을 하나 발견하고 타고 넘으려는 순간! 고목이 꿈틀했다.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엄청나게 큰 구렁이었더라나? 포수는 총을 쏘아 구렁이를 잡고 동료들을 불러 모아 짋어지고 내려왔는데, 배를 갈라 보니 커다란 노루가 한 마리 들어 있었단다. 반세기 전에는 우리 그런 포식자가 득실거렸다는 데서, 지금과 비교하면 크나큰 아쉬움을 갖는다.
이제 한반도에는 그런 포식자가 없다. 연일 인터넷을 달구는 게 기껏해야 담비 타령이다. 앞서의 그 포수야말로 여담으로 담비가 호랑이를 잡아 죽이는 장면을 실감 있게 그려냈었지만, 어찌 둘을 비교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한반도에는 담비란 놈이 먹이사슬의 최고봉을 점령한 포식자란다. 실제 동영상까지 올려놓았는데, 고라니 새끼를 여럿이 힘을 합쳐 사냥하는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나는 신음소리를 낼 뻔했다. 내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담비란 놈을 수도 없이 보아왔는데, 그 녀석들이 마침내 산돼지까지 잡아 먹는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명실공히 최고 포식자란 표현이 틀린 건 아니지 않는가?
담비란 아주 작은 동물이다. 몸길이 60센티미터 안팎. 그런대로 덩치를 가진 녀석으로 여기게 하지만 몸무게는 겨우 3킬로그램. 다른 것과 한 번 비교해 보라고? 흔해빠진 요크셔테리라 있잖은가, 영국이 원산지인 애완견 말이다. 그게 암수 구분없이 한계 체중이 3.18킬로그램이다. 그런데 그 녀석들이 제 몸의 백 배나 되는 돼지의 숨통을 끊는다니 아연할 수밖에.
선친은 고향에서 서당을 여셨다. 재미 나는 한자를 가르치시며 성취동기를 부여하셨다. 여자가 셋 모이면 간사할 간(姦)/ 수레거가 같은 숮자일 때는 수레바퀴 소리 굉(轟)/ 가장 획수가 많은 글자는 비익조 만<蠻鳥>-컴퓨터엔 없구나 - 등등. 그러다가 당신은 흔한 동물들을 끌어다가 한자로 가르쳐 주곤 하셨으니 새 鳥/ 닭 鷄/ 개 犬 혹은 개 狗/ 비둘기 鳩---마침내 당신은 이리 랑(狼)/ 삵쾡이 이(狸) / 노루 장(獐)/ 담비 초(貂)/ 여우 호(狐 )등등에까지 이르렀다.
세월이 수도 없이 흘렀는데 새삼스레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그립기만 하다. 지금 고향 옛집에 가봐야 그 근처엔 노루 정도만 볼 수 있으리라. 세월 무상, 선친께서 저 하세한 지도 반세기다. 대신 나는 지금 일곱 살 유일한 외손자를 데리고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40년 넘게 초등학교에서 몸담았었지만, 지도 기술이라니 선친의 반의반도 못 따라간다. 그래도 흉내를 내려 한다. 당신께서 저승에서 나를 가상하다고 하실까? 나는 밤낮으로 <<한자 사전>>을 붙들고 앉았다. 한 달 뒤에 한자 능력 시험을 볼 계획으로. 아참, 손자 녀석은 지난번에 6급에 거뜬히 합격하고도 동상까지 받았었다. 그러면 그렇지! 쾌재를 부르던 생각이 절로 난다. 3천 5백자쯤 알면 1급을 겨냥할 수 있을까? 특급도 같은 수준이라더라.
한자 능력 시험 1급? 하나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이 나이에 어디 취업할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 목표는 아름답고 중하다. 시험지를 앞에 놓고 정답을 써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설마하니 5천 자면 특급도 정복하겠지. 그것까지 끝나면, 나머지는 하느님의 몫이고. 그리고 한자를 모르면 문학 창작에 그만큼 뒤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쩌다가 잠이 안 오는 밤, 누운 채 눈을 감고 머리가 뻥 뚫리게 하고, 그 속에 한자를 쏟아넣는다. 나누기도 합하기도 재미있다.
불면증에 특효약을 또 하나 얻은 셈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심호흡과 소리 없는 노래(기도)를 우유 한잔과 맞바꾸었는데---.수면제 먹기는 얼마나 잦았던가? 내 아직 우울증에서 2퍼센트 벗어나지 못했는데, 이번에 한자를 완치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
오늘은 '양말(socks)'을 붙들고 앉았다. 내 어리석고 무지한 주제에 '양말'이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양말은 洋襪에서 유래되었단다. 이 襪이 자전에 버젓이 버선 襪로 나와 있으니 유구무언, 그런데 그기 막히게도 그냥 양말이라 하는 것과 서양 버선이라 풀이해 놓은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육필로 누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洋襪이라 휘갈길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잠자리에 들 때 몇 번 짚고 넘어가면 눈이 스르르 감기는 건 서양 양말이 주는 은혜다.
일흔이 넘어도 중병에 시달린다. 교만에 휘둘리고, 과욕을 버리지 못한다. 시기와 질투심이 왜 이리 떠나지 않는지---. 처방이 새로 생겼다며 생색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는가? 다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면서 한갓 미물인 담비에게 박수만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다. 담비는 초(貂)다. 기껏해야 열두 획. 그 함수를 뛰어넘어야 한다. 나는 한자를 알되, 수필에 많이 끌어다 쓰는 건 반대한다. 다만 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 우리말의 7할은 한자에서 비롯되었다니, 손자 녀석에게 어휘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서도 하루 한 시간은 투자한다. 게다가 한갓 낙수지만, 비둘기 구(鳩) 자를 공부한다 치자. 비둘기가 내는 소리는? 구구구다, 해서 비둘기 아홉 마리가 구구대니 鳩다. 내친김에 pigeon이라 가르친다. 길 道, 길 路를 합치니 道路다. 이건 영어로 로(路)드 아닌가? 모기는 mosquito-모기가 무니, 모기 蚊. 찾으면 수십 개는 아마도 좋이 되리라. 일거삼득, 따로 없구나!(15장)
필자 이원우('83<<한국 수필>>천료/ '97년 <<한글 문학>> 등단/ 지은책 28권/ 전 초등학교장/ 전 유네스코 부산 협회 부회장/ 무료 노인 학교 21년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