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드온 찬양대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항상 좋지만 오늘은 더 좋은 것 같네요.
말씀을 전하기 전에 광고 하나 드리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재정부의 요청이 있어서 교회 상황을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21년이 됐는데 항상 하나님께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채워주시고 하셨는데 금년 상반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그래요. 재정적으로 그래서 매달 고정비가 나가야 되는데 그 꽁두가 비어서 굉장히 어려운 상태라고 우리 재정부장님이 어렵게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오늘 우리와 함께 모든 교우들이 그 상황을 좀 아시고 함께 마음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저도 어렵게 말씀 전에 여러분들에게 이걸 좀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진행이 됐는가 했더니 우리 재정 부장님이 그걸 본인이 물론 헌금 본인이 한 거지만 본인이 그걸 채워 넣었어요. 그래서 유지가 되도록 했는데 계속 그렇게 하기는 한 사람이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또 어려울 때 막 크게 또 헌금을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그때 또 채워지고 하는 기적을 우리가 늘 봐왔는데 금년 상반기가 좀 그런 상황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좀 잘 이해를 하시고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십일조 생활을 하던 크게 하시던 분들이 귀국을 여러분들이 하셨고 그게 좀 아마 역할이 있을 거고 영향이 있을 거고 그다음에 제가 보니까 지난번에 보니까 주일 헌금이 줄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예배드리는 분들은 계속 늘어났는데 우리가 이제 11조 감사의 물은 본인들이 결단해서 하는 건데 또 주일마다 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드리는 그 주정 헌금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주일날 준비를 잘 못했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우리 교회에서 아마 요즘은 다 크레딧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주일날 갑자기 현금을 준비하기가 어려워서 그럴 것이다 그런 이제 논의가 있어서 기계를 하나 여러분 몽마르트나 이런 성당에 가면 그 기도할 때 촛불 하나 사서 하는 그런 게 있더라고 그걸 조그만 걸 하나 은행하고 해서 했는데 뒤에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근데 제가 보니까 좀 까다롭긴 해요. 뭘 넣어야 되고 아주 복잡한데 어쨌든 그렇게 해서라도 주일날 주정 헌금함을 예배 시간에 드릴 수 있도록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은 하고 있는데 아직 좀 부족한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주일날 주정 헌금도 잘 여러분들이 준비를 해 주시고 특별히 십일조 생활을 여러분들이 좀 최선을 다해 주시면 고맙겠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체면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이 아니라 이런 어려운 기간은 우리 모두의 교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번 맥시멈,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위기를 함께 넘어갈 수 있는 맥시멈을 여러분들이 한번 작정하시고 헌금에 참여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사실 우리 부목사님들이나 전도사님들 이런 분들이 어떤 분들은 그냥 무보수로 봉사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여기 전임으로 있는 분들도 최소한을 받으면서 열심히 사역을 하는 거예요.
저희들도 화려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교회 상황이 있기 때문에 가령 부교역자들 사례비가 정해지면 되게 그게 물가 상승률에 따라서 올리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어요. 그렇다고 뭐 보너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하고 저도 약 한 13년 전에 제가 스스로 동결을 해놓고 13년이면 굉장히 세월이 바뀌었는데 지금까지 그걸 유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사역을 위해 출장을 가지만 출장을 가도 현지에서 내가 숙박과 움직이는 거 먹고 자고 하는 모든 건 현지 조달을 합니다. 교회에 요청을 하지 않고 설교하고 또 후원받아서 그렇게 해서 돌아가면서 우리 디아스포라 교회지만 우리 교회가 어쨌든 위축되지 않고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 여러분들 지금 교회 상황이 그렇다는 걸 좀 아시고 여러분들이 이 기간에 좀 최선을 다해서 우리 헌금에 참여해 주시고 생활해 주셨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아멘 반응이 없으셔서 동의를 하시는지 몰랐어요. 꼭 그렇게 참여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어요.
자주색 옷감 장수 루디아에 대해서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여인 때문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고 그 빌립보 교회는 유럽 최초의 교회 그래서 그때부터 기독교 문명이 유럽으로 넘어와서 나중에는 미국으로 우리 한국까지 오게 되는 그 놀라운 터닝 포인트가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지지난주에 선교사 대회를 하면서 그리스에서 하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고린도하고 아테네는 여러 번 다녀왔는데 데사할로니카와 베레아 그리고 빌립보 네아폴리를 못 가가지고 언제 가보나 그랬는데 이번에 찍고 다녔지만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루디아의 기념 교회도 보고 또 빌립보라고 하는 지역이 어떤 지역인지 사실 데살로니카는 잠만 잤어요. 거기는 실제로 못 봤어요. 그게 좀 제일 아쉽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냥 거기는 지나치다시피 했고 빌립보하고 네아폴리 바울이 첫 발을 디뎠던 그 현장을 감동적으로 보고 돌아왔습니다.
특별히 빌립보 우리 한번 사진 한번 보시면 빌립보가 가보니까 이 고대 도시인데 굉장히 생각보다 큰 도시더라고요. 그래서 빌립보 저 성 바로 위쪽에 큰 길이 나 있는데 그게 아시아에서 건너와서 로마로 향하는 굉장히 중요한 도로가 있는 그런 지역에 세워진 도시였습니다. 옛날에도 저랬으니까 옛날 그 시절에는 굉장히 크고 힘 있는 그런 도시였어요. 거기서 사도 바울이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고 루디아를 어디서 만났나 가 봤더니 이제 루디아가 이 강가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가보니까 강은 아니여 저걸 강이라고 할 수는 없죠. 저기 그러니까 루디아 기념 루디아를 바울이 만난 현장을 사진을 찍어온 거예요. 적이라고 하니까 이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이게 성지라고 하는 것은 고증은 하지만 100% 맞지 않아요. 근데 거기밖에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가까운 곳에 바로 루디아 기념 교회도 있고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내년 정도는 우리가 여기 살면서 한국에서도 막 그렇게 오는데 여기는 너무 가까이 2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니까 한번 팀을 꾸려가지고 우리도 한번 갔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은 영 반응이 없네. 그래서 꼭 많이 갈 필요 없습니다. 딱 갔다가 일주일 주말까지 딱 보고 현장을 밟고 오면 성경이 보여요. 성경이 바울이 이곳에서 한 달 정도를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이제 성지순례 이런 곳을 갔다 오면 또 하나 느끼는 게 뭐냐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떤 곳은 굉장히 거리가 가깝구나. 예루살렘 신약성경 예루살렘 이런 부분은 예수님이 바로 저기서 잡히셨고 바로 여기를 여기 언덕 이 계곡을 건너오셨네. 굉장히 생각보다 가까운 것을 느끼는 반면에 어떤 곳은 너무 멀다 막 그 거리가 그 거리 감각이 생겨요.
그러면 성경을 읽어나가는데 감정 이입이 되고 현장으로 들어갈 수가 있어요. 근데 바울이 다녔던 여정은 굉장히 멀고 험준 산령이 있고 우리가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데도 더 너무 피곤한 거예요. 너무 멀고 근데 거기를 걸어서 다닌 거예요. 그런 걸 보면서 바울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광인이라고 해요. 뭔가에 미친 사람이 아니면 이 거리를 다닐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빌립보라고 하는 곳은 다섯 번이나 갔다 그래요. 그곳을 다 걸어서 비행기 타고 가기도 어려운데 걸어서 걸어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걸 보면 야 바울은 복음에 미친 사람 자기가 고백한 것처럼 그런 사람 이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하여튼 이 빌립보에서 한 달 그리고 데살로니카에서 3주간 대개 한 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습니다. 오래 머물렀던 곳은 고린도와 에베소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 에베소에서는 3년을 머물러요 그런데 이 오랫동안 물론 나중에 로마에서도 장기간 머물렀죠.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에서는 목회를 하면서 글을 씁니다. 그래서 그때 쓰여진 글들이 다 바울 서신으로 성경에 들어온 거예요.
빌립보에 머무는 동안 하루는 바울이 길을 가는데 기도하기 위해서 한 장소로 가는데 어떤 여정이 자꾸 따라오면서 괴롭게 하는 거예요. 그 여종이 사람들에게 막 외치고 바울에게 외치기를 이 사람은 지극히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사람들이다. 굉장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듣기 좋은 좋지 않습니까? 비록 귀신 들린 여자가 외치는 말이라도 귀신이 알아보는 거 아니야 이 사람은 목사야. 이 사람은 능력이 있어. 이 사람은 진짜 크리스찬이야.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면서 외치는 거예요. 귀신이 몰라보는 크리찬도 있어요. 하도 나이롱으로 믿으니까 저게 믿는 건지 아닌지 근데 딱 보면 악한 형들도 막 깜짝 놀라는 그런 크리스찬이 있어요.
근데 사도바울은 그것을 원치 않았어요. 사도 바울은 이 귀신으로부터 자기 신분이 보증받는 것을 원치 않은 거예요. 우리가 보통 이런 귀신 들린 여정 점치는 사람이잖아요. 점치는 것도 배워가지고 적당히 치는 게 있는가 하면 우리 크리찬도 흉내만 내는 사람이 있고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 있어요. 성령에 기름부음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이 무당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배워가지고 흉내내면서 그것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속여먹을 만합니다. 사람들이 되게 이제 가난한 마음으로 오니까 속죠. 근데 이제 진짜가 있어요. 진짜는 뭐냐 하면 영매가 들어오는 거예요. 영매를 좋은 말로 영매고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면 귀신입니다. 귀신. 그래서 그 귀신이 들어와서 귀신이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상황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미리 파악해가지고 얘기를 해주니까 귀신같이 알아맞추는 거예요.
귀신같이 알아맞춘다는 건 그 귀신이 역사한다는 겁니다. 여기 여정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래가지고 하니까 이렇게 얘기하니까 주변에 있는 상상해보세요. 그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가서 물어보고 이게 장사가 됐다는 것은 맞췄다는 거 아니에요 그 귀신 들린 여종이 바울을 증거하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지금부터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데 탄탄대로가 열리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거절해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신분이 지금은 행색은 누추하지만 자기 영적 신분이 귀신에게 보증받아야 될 귀신이 증거해야 될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보증하시는 신분이라는 거 이게 크리스찬의 신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신분이에요. 그래서 너무 세상이 조금 알아주고 몰라주고 이런 걸로 마음이 흔들리지 마세요. 세상이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를 모르는 것은 그 사람들의 문제예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니까 또 너무 조금 세상이 알아주고 영웅 취급해 준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어요.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께 보증받는 사람 이게 바로 크리스찬이고 이게 바로 사도바울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귀신을 내어쫓았어요. 그랬더니 그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이 고발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멋지게 한 번 펌 잡았다가 갑자기 붙들려가지고 끌려가서 그 거기서 묶여가지고 죽도록 얻어맞았어요. 이번에 갔더니 바울이 묶여서 맞았다고 하는 그것을 있어서 제가 그거 다음 이렇게 아니 그거 말고 또 하나 있을 거예요.
이렇게 앞에 아닌데 이게 다예요. 내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여튼 이렇게 예수님이 영화에 보면 채찌개 맞을 때 묶여 있는 거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있더라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죽도록 얻어맞고 아까 보였던 사진 빌립보 감옥에 갇혔어요.
저는 이제 감옥 그러면 국정원의 지하실 정도 되는 줄 알았어요. 아니면 최소한 우리 교육관의 지하 정도 되는 줄 알았더니 가서 보니까 저게 이제 감옥이요. 저게 사도바울이 갇혔다고 하는 감옥입니다. 제가 안으로 이렇게 카메라를 넣어서 찍었어요. 아마 그 후로 뭐 가지 퇴적이 되고 여러 변화가 있어서 저 정도가 됐겠죠. 어쨌든 저기에 갇히게 됐습니다. 한번 멋지게 한 번 펌 잡다가 잡혀가지고 얻어맞고 감옥에 갇힌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충돌하고 있다는 걸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 19절에서 21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신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이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지금 사도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하는 일들 때문에 그동안 이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에 있었던 그 가치가 충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교적인 문제 사회 풍속의 문제로 고발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었어요. 그런 여러 가지 겉으로 드러난 것 내면에 있는 사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 그것은 자기 수익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게 부딪힌 겁니다. 바울이 와서 아무리 뭘 해도 수익에 지장이 없다면 아마 이 사람은 고발하지 않았을까 얘나 지금이나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깊이 들어가 보면 모든 사람들의 내면 속에 세상 세상 사람들의 내면 속에 그리고 세상의 가치 중심에는 바로 이 수익에 대한 문제 재물에 대한 문제가 깊이 자리를 잡고 있어요. 모든 행동의 동기가 뭐냐 재물이라는 거예요.
버느냐 못 버느냐 손해를 보느냐 내가 이득을 보느냐 재물에 대한 욕망 이것이 얼마나 크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섬기는 것과 비교를 했어요. 두 가지를 겸해서 섬길 수 없다 할 정도로 세상은 사람의 인권이나 생명을 말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자신의 이득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인권, 생명 이런 걸 다 얘기하다가도 그 일이 자기에게 손해가 난다 할 때는 돌변하게 됩니다. 그럴 듯한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있지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이게 세상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건드리면 누구나 뚜껑이 열리는 거 점잖다가도 그 부분을 건드렸을 때 다 뚜껑이 열리는 거예요. 이 주인도 귀신 들린 여종을 이용해서 점을 쳐서 돈을 벌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사람의 인권이나 생명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어요. 돈 벌면 된다. 그게 더 컸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했어요.
그 사람도 하나의 생명인데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빼앗았어요. 물론 돈 주고 샀겠죠. 자기 재산일 수 있어요. 세상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오늘날에는 이득을 위해서 인신 매매도 하고 장기 적출도 한다. 제가 유튜브에서는 보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데 갑자기 없어지는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거예요.
옛날에 중국에서 파륜궁이나 이런 사이비 종교 단체를 처벌할 때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는 거예요. 어차피 죽을 사람들 장기 적출해서 파는 거예요. 뭐 하여튼 제가 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는 설들이 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세상의 그 가치에만 붙들려 산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다릅니다. 우리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돼요. 그래서 자기 생활도 하고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살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수단이죠. 더 멋지게 살기 위한 수단이에요. 우리는 더 높고 더 깊은 곳에 가치를 둬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마음이 뭡니까? 생명을 사랑하는 거예요.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주셨어요.
생명 살리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아들을 희생시키신 겁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여러 번 유대 땅에서 여러 번 안식일 규정을 어겼어요. 그것 때문에 막 예루살렘이 뒤집어졌습니다. 베데스타 연못의 병인을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이 화가 났습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누구나 아는 안식일 규정 반드시 지켜야 되는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지켜야 되는 규정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걸 알면서도 그날 병인을 고치는 거예요. 몰라서가 아니에요. 예수님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어요. 생명 살리는 거 고쳐주는 거예요. 한 인생을 회복시키는 것이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종교적 규정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심리학에서는 이런 사람을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성인 아시죠? 동양에서는 군자라 그래 군자 뭐 이렇게 걷는다고 군자가 아니야 어떤 가치에 도달했느냐 하는 거예요. 뭘 붙들고 사느냐? 기독교에서는 그걸 세인트라고 그래요.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규정을 넘어서서 생명의 가치를 두고 매진하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과 저도 군자가 될 수 있고 여러분과 저도 세인트가 될 수 있어요. 생명 하나님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그 생명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위 규정은 때로는 어길 수도 있어요. 물론 그러다 감옥 가는 거죠. 사도바울이 지금 감옥 갔잖아요. 만약에 제가 이렇게 차 몰고 가다가 저 건너편에서 우리 교인이 교통사고가 났다. 내가 빨리 가서 도와주면 살 수 있다. 그런데 이 교통질서를 지켜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 끝까지 가서 턴을 하면 이게 한 10분 걸려요.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목사가 그냥 가서 터내야 돼. 그냥 그 자리에서 돌리는 거예요. 욕하겠죠 야 목사가 저럴 수 있냐 또 벌금도 내야죠. 잡혀 들어갈 수도 있는 거예요. 미국 같으면 총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나는 나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지고 움직였어요. 양심에 문제가 없어 거리낌이 없어 나머지는 치르면 되는 거예요. 지금 바울이 그렇고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에게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있었어요. 그것은 복음이고 사람을 살리는 거였어요. 이 이 종이 있잖아요. 종 여종을 가진 주인도 권리가 있어요. 그리고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풍습이었어요. 노예는 값을 주고 사고 팔아요. 주인이 사면 부릴 수 있는 거예요. 내가 돈 주고 사서 내 마음대로 부리는데 뭐가 문제가 있냐 그 말이 맞아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아요. 그 사회 시스템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쫓았어요. 귀신 나가면 그 여자는 건강해지지만 이 주위는 망한다는 거 알았어요. 어떻게 보면 바울이 비난받을 일이에요. 그러나 바울은 그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 없어요. 왜 생명을 봤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인 한 여인을 봤기 때문이에요. 그 여인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은 사회 시스템이나 제도를 넘어서는 거예요.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근데 이게 쉽지는 않아요. 이 가치가 충돌할 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진 우리가 세상 가치와 충돌할 때 내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는 각별한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용기 바울이 바보입니까? 지금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고소할 거 알아요. 그리고 지금 이 사회 바울은 이방인이에요. 외부에서 온 사람이에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 줄도 상상할 수 있어요. 적대감을 가지고 매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거예요.
그러나 용기를 내서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그 결과는 사람들이 막 존중하고 사랑하고 영웅처럼 떠받으면 좋겠는데 죽도록 얻어맞고 감옥에 간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참혹한 거죠. 그러나 바울은 바울의 마음은 참혹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해야 될 일을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감옥에 갇혔어요. 사람들은 그를 창고에 채워서 꼭꼭 묶어놨어요. 그러나 그는 그 감옥에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갇혔으나 자유한 사람이 있고 아무 데 묶인 데 없는데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나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다. 25절에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신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함에 죄수들이 듣더라. 기도하고 찬미했다. 마음과 양심의 자유가 있는 사람들만 가능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갇힌 동굴 아까 그거보다는 깊었겠죠 디모데와 누가는 갇히지 않았어요. 바울과 실라만 갇혔어요. 몸이 묶였어요. 그러나 그 양심과 마음은 자유에서 사람들이 세상 권력이 할 수 있는 일은 묶어놓는 거예요.
그러나 양심과 마음까지 묶지는 못합니다. 바울은 양심, 바울의 양심과 마음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기도하고 찬미했습니다.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어떤 기도를 했을까? 하나님 나 정말 너무 억울하게 오늘 얻어맞고 여기 들어왔습니다. 그냥 오늘 제가 기도할 때 기적을 내리셔서 천벌을 내리셔가지고 저 저 많은 여종의 주인 오늘 그냥 급사하게 하시고 저 억울하게 때린 그 사람들 오늘 가다가 발목이라도 부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뭐 그렇게 기도했을까요?
이 양심의 자유를 얻은 사람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요 가끔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진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야 정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좋겠다 하고 막 그런 기도가 나오려고 할 때가 있다 이 근데 아마 바울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 회복된 여정이 잘 회복되기를 그 주인도 그걸 계기로 새롭게 되기를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들의 몸은 쇠사슬에 묶였지만 양심과 마음은 자유로웠어요.
오늘 부른 찬송처럼 옥중에 있는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하나님이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에요.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감옥에서도 누리는 자유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의 몸을 가둘지라도 마음과 양심은 가둘 수 없습니다. 복음은 이 자유를 말해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우리에게 주신 게 자유라니까요. 양심을 따라 사는 자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는 자유. 종교개혁이 뭡니까? 종교개혁은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그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을 따라 드리는 예배, 우상숭배 말고 정말 회복된 그 예배를 선택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따라가고자 하는 운동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도 위그노들도 장깔뱅도 그런 길을 걸어갔어요. 국가 권력이 위협하고 여러분 카톨릭 세력이 당시에 그냥 걸리면 화형당하고 다 죽였어요.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위협했지만 그들의 양심의 자유를 억압할 수는 없었어요. 그들은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갔어.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굿세기에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저와 여러분에게 그런 용기와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우리 청년부 헌신 예배를 드리는데 청년들은 그런 기백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멋지게 성장하고 늙을 수 있어요. 최소한 나중에 나이 들고 늙어서 조금 사람이 바뀔 수도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청년 때는 이런 기백이 이게 매력입니다. 양심의 자유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많은 사람이 몸은 자유롭지만 그들의 양심과 영혼은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노예가 많아요. 아무도 억압하지 않는데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돈의 노예, 명예의 노예, 또 두려움의 노예 미움의 노예 누가 조금 억울하게 했다고 물론 화가 나죠.
그런데 그 화가 막 계속 자리를 잡으면서 끊임없이 미워하면서 자기 인생을 소모시켜 그럼 자기도 불행하고 뒷골 당기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는 거예요. 건강을 잃어 두려움의 노예 욕심과 상처에 놓여 언제 한 번 받은 상처 가지고 평생 그거 되내이면서 붙들려 살아가요. 몸은 자유하지만 그 마음이 노예가 돼서 끌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자유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라고 그리고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깊은 옥에 갇혔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있어요. 얼마나 멋있습니까? 바울과 신라처럼 우리도 한번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도 20대 30대는 진짜 그런 기백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떤 민주주의의 가치, 어떤 중요한 그 당시에 이슈가 되는 가치를 위해서 막 몸을 불사르고 감옥에도 가고 막 자기 젊음을 불태우는 그게 젊은이들이에요.
여러분들이 가진 건 없죠 젊음 하나죠. 그 젊음이 위대한 거예요. 오늘 제가 칼럼에도 썼지만 어느 영화 대사 중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거 굉장한 명대사예요. 한 시대를 정말 젊은이들이 가진 게 없지 그래도 여러분이 각오가 없냐 젊은이답게 크리스찬답게 살아야 됩니다. 바울처럼 감옥에 갇혔다고 질질 짜고 하나님 원망하고 그러면 다 끝난 거예요. 뭐 이럴 수가 있냐고 다시는 내가 하나님 안 믿겠다고 그러면 어떻게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졌겠어요? 다 그 시간에 죽도록 얻어맞고 들어가서도 거기서 감사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그게 가오예요. 가오라는 말을 찾아보니까 일본말 얼굴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그게 이제 그런 세계에서 이제 유행이 되다가 우리가 이제 가오가 없냐 할 때는 클라스가 있는 당당하고 품위 있는 어떤 모습 그걸로 한국 사람들은 이제 가오 그러면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클라스가 있다 이거예요. 우리가 돈이 없지 클라스가 없냐 바울이 지금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가오가 없냐 다 당당하게 그때 찬양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각오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진짜 각오가 생기는 거예요.
찬송과 기도는 기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신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함에 죄수들이 듣더라.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그냥 뭐 바람 불어가지고 뭐 이렇게 문이 삐그덕 열린 게 아닙니다. 지진이 큰 지진이 일어났다. 막 이 땅이 흔들리는 그러면서 목문이 열리고 모든 메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찬송과 기도의 능력입니다. 찬송과 기도해야 됩니다. 더 놀라운 기적은 이 사실을 보고 간수 가족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재판도 안 하고 때려서 가뒀던 그 관원들이 와서 로마인을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환송하는 정말 해피엔딩 의 본문입니다. 감사와 찬송 그리고 기도는 막힌 것을 뚫고 닫힌 문을 열고 묶인 것을 푸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능력이 주어져 있어요. 살다 보면 저도 한 60년 살아보니까 그렇게 좋은 날만 있는 건 아니에요. 산 너머 산 산 하나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 그게 인생입니다. 그때마다 가오를 잃으면 어떻게 해요? 그때마다 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지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시지 그리고 자기 마음을 잘 추스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넘어가면 기적이 하나하나 쌓여서 우리 인생이 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읽고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책이 있어요. 머린 캐로더스 미국 군목 목사님이 쓴 책입니다. 얇은 책인데 찬송 생활의 권능 이 표현으로 나온 게 감옥 생활에서 뭐지 찬송 생활로 감옥 생활에서 찬송 생활로 이게 저한테는 큰 감동을 줬습니다. 그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에요. 어려운 상황, 인간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 질병 어떤 사건들이 있을 때, 그리고 너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이 목사님이 오히려 역으로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른 거예요. 하나님 감사하다고 이런 상황을 허락하셔서 감사하다고 이건 양심의 자유가 충만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럴 수 있냐고 하나님 이럴 수 있냐고 이런 게 아니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무슨 뜻이 있겠죠? 그리고 무조건 감사하면서 기도했더니 그때마다 기적이 일어난 거 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요.
제가 100% 그걸 실천은 못했지만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고 또 목회를 하다가 힘든 상황들, 이번에 이런 상황들 야 이거 어떻게 하지? 내가 손쓸 수 없는데 그럴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뜻이 있겠죠. 찬송하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찬송과 기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옥문을 엽니다.
찬송과 기도는 아말렉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이기게 합니다. 문제도 해결해 주고 장애물도 뛰어넘는 능력을 주십니다.
찬송과 기도는 몸과 마음 질병을 치료해 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과 신라는 옥에 갇혔지만 그 양심은 자유에서 이게 핵심입니다. 그 양심으로 원망 대신에 기도하고 찬양했더니 기적의 씨앗이 뿌려졌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사실 한 가정이 구원받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새로운 문명 세계가 열렸어요. 2천년 세계를 지배한 문명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기독교 문명의 세계가 그날 바울의 그 결단에서 열린 거예요. 거기서 바울이 삐까닥해서 거기서 사도의 가울을 버렸다면 아마 거기서 끝났을 거예요. 놀라운 세계를 여는 기적이 일어났습. 저와 여러분들도 바울과 신라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