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침묵] 저 거룩한 수도원
김소일 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때 스님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작가 최인호의 고백이다. 실제로 친한 스님의 승복을 빌려 입고 압구정동 거리를 걷기도 했다. 그가 꿈꾼 스님은 치열한 구도승이었다. “땡중이 아니라 진짜 중, 면도날처럼 기가 살아 있는 중, 생사의 허물을 벗기 위해 백척간두에 홀로 서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시퍼런 중”이었다. “한참을 살다가 언제 가는지도 전혀 모르게 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왔다가 물 위에 비친 기러기처럼 사라지는 중”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1987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체험을 ‘벼락을 맞는 충격’으로 묘사했다. “110V도 아니고 220V도 아닌 엄청난 벼락이 제 몸의 피뢰침을 향해 내리꽂혔다”고 썼다. 한동안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란에 그의 독특한 묵상 글이 실렸다.
가톨릭 신자가 스님이 되고 싶다니? 묻는 이에게 그는 대답했다. “내 감정은 비단 스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나는 스님도 되고 싶고, 은수자도 되고 싶고, 수도원의 종지기도 되고 싶다.” 그가 그리워한 것은 결국 수행과 구도의 삶이었다.
불교 조계종은 연초에 ‘특수 출가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은퇴 후 출가를 원하는 이들에게 문을 열겠다는 것이다. 전문성을 갖춘 은퇴자를 받아들여 전문 분야의 소임을 맡긴다는 구상이다. 세상 번뇌에 시달리던 직장인들이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가톨릭과 불교는 서로 비슷한 수행 문화를 갖고 있다. 선불교에 장좌불와 용맹정진의 참선 문화가 있다면, 가톨릭에는 사막의 은수자로부터 이어져 온 치열한 수도 문화가 있다. 기도와 노동으로 이뤄진 단순한 삶의 전통은 오늘날 남녀 수도원에 면면히 흐른다.
두 종교의 수행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불교적 수행이 해탈을 목표로 한다면, 가톨릭은 신비적 합일과 구원의 은총을 갈구한다. 깨달음은 철저하게 고독한 수행을 요구한다. 가족도, 이웃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 한다. 가톨릭 수도 문화는 공동체적 사랑을 중시한다.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은총도, 구원도 얻지 못한다.
때늦은 출가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원망하는 가족을 뒤에 둔 출가는 무책임한 도피일 뿐이니, 조계종에서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십자가가 있다. 가족은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면서 또한 끝까지 보듬어야 할 대상이다. 오늘날 많은 가장이 가족 부양을 힘겨워하면서도 기꺼이 그 수고를 감당한다.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도, 친구도,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다.
작가 최인호 베드로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아내와 아들딸을 둔 내 가정이야말로 평생 수도원이니 나는 이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평수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오후, 수도원을 그리는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수도원이다. 목표가 사랑일진대 가정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수도원이다. 고통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삶이 곧 수행이니, 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걷는 저들이 모두 수도자다. 힘겨운 노동과 더불어 틈틈이 기도할 수 있다면 그곳은 어디나 수도원이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삼종 소리에 잠시 고개를 숙이는 그대는 이미 수도원에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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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사원(寺院) / 김영식
저녁의 숟가락 이 작은 분화구를 보라지 불빛들이 허기처럼 몰려든 아비규환의 점철을 보라지 뒤집으면 아귀 같은 입이 되었다가 나는 종일 숟가락을 위해 헌신한 사람 숟가락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숟가락敎의 맹신자 채워도 금방 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욕망의 눈부신 블랙홀을 보라지 굽은 손잡이 위로 한 사내가 귀가하고 잘그락거리는 불빛을 집어삼키며 마침내 배가 부른 웅덩이가 지어 올리는 신전 한 채 그 오래된 밀교密敎를 들여다보면 어느새 숟가락이 나를 퍼먹고
꽃의 사원 / 강경호
겨울이 지나가자
여기저기에 사원이 들어섰다
개나리꽃 사원이 낮은 옥상에 노랗게 드리우고
울타리 가 하얀 목련꽃 사원이 성전을 드러내자
한때 이교도라고 생각했던 벌과 나비
오래 기도하지 않던 냉담자들이
붕붕대며 팔랑거리며 예배와 미사에 참석한다
이어서 신록의 사원들이 불타오르자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기도가 되어
벌이나 새처럼 통성기도를 하지 않아도
고백성사가 될 것 같다
묵은 죄를 사해주실 것 같다
내가 알던 나는 죽고
온몸에 순결함이 충만한 연둣빛 가지를 벋어
아기손 같은 여린 싹을 틔울 것 같은 날
살아있는 것이면 모두가 세례를 받는다
저쪽 사원 / 함순례
산길은 무덤을 향하고 있다
산책길을 찾아
이 길 저 길 더듬어보니 그렇다
가격家格에 따라 무덤의 위용과 무덤으로 가는 길도 달랐다
사람은 죽어서도 평등하지 않았다
나의 후생은 사람 두엇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숲길 하나 얻는 것일까
혼자는 외로우니 두런두런 말 섞으며 걸어가면
어떤 슬픔도 측백나무 향처럼 부드러워지겠다
잘 죽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
허나 저쪽 세상을 나는 모른다
발을 딛지 못하는 허방일까 황홀한 꽃밭일까
나는 저쪽 세상의 색깔을 모른다
양지바를까 짙푸른 미명일까 암흑천지일까
저쪽을 들여다보기에 이쪽은 너무 캄캄하다
그러니 저쪽은 가보지 않은 사원이다
은은한 경배의 자리다, 다만 때가 되면
울지 않고 돌아가는 것
그 길은 만날 수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뿐이다
몸속의 사원 / 이화영
당신과의 인연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 된 후
내 몸속에 사원이 생겼습니다
사원의 누각에 걸린 鐘에는 당신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바느질하듯 정으로 새긴 형상입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생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한동안 버려두었던
종 채를 찾아 누각에 올라갑니다
당신의 음성이 종소리 되어 울려 퍼져 나간 자리마다
우묵한 우물이 파였습니다
우물이 찰박찰박 깊어질 때
벌레와 몸을 기댄 풀잎이 고요를 젖히며 일어납니다
당신이 사원을 나와 천천히 뒤편의 숲으로 들어가
바위에 엎드려 태아처럼 웅크립니다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몸은 신열이 올라
우물을 퍼 올려 마른 정수리에 끼얹습니다
당신이 내 태아인 듯 양수가 부풀어 오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영겁의 인연이라면 어느 전생에서는 내가 당신의
여식이거나 남편이기도 했을 겁니다
다가올 어느 사후에는 당신이 내 자식이기도 할 겁니다
그 사원은 내 자궁 안에 있습니다
사원과 몸을 바꾼 바람이 알려준 비밀입니다
절벽 사원에 부리가 노란 까마귀가 산다 / 김태형
눈 녹은 물줄기조차 흐르지 않는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설산은 그 뒤에 멀리 있을 뿐이다
나는 고대의 세계관을 믿는다
세상의 끝은 절벽이다
이곳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 사원이 있어야 할 것인가
가장 마지막에 신을 찾는다고 했던가
나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세례를 받았다
기어오르기도 힘든 가파른 곳에 진흙을 이겨 벽을 세웠다
방을 만들고 작은 창을 내어서
절벽은 그 아래를 건너다보는 곳이 되었다
절벽까지 찾아온 이들을 세상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는 곳이 되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다 숨이 차서 뒤돌아보니
아래층 지붕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부리가 노란 까마귀
둘러봐야 아무것도 없다
걸어서 갔다 오면 하루는 족히 걸릴 만한 곳에 설산이 가로놓여 있다
눈표범이 자취를 감추는 동안 며칠 만에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또 설산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어디든 다 황량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부리가 노란 까마귀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황량한 고원에서 까마귀들이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까마귀는 사원 뒤쪽이 아니라
멀리 개울이 흐르는 골짜기 쪽을 향해 앉아 있다
그러다가 바람 한 자락을 끊어서
무슨 영혼인 듯 날아간다
그곳이 세상이라는 듯이
사원도 그쪽으로 계단을 내려놓는다
와서는 다시 되돌아가야 할 곳이 저기라는 듯이
배롱나무 사원 / 김지헌
신흥사에 가보니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딱 하나
배롱나무에 힘껏 제 것을 박아 놓은
적송을 보기 위함이라
나는 그 희한한 광경을 이쪽저쪽
줌을 맞춰가며 카메라에 담는데
근처 해신당과 세트로 기를 받으면
왕건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해 준다니
천년 고찰에서
이종교합 불륜을 부추긴다?
한여름 땡볕의 고요가
어쩐지 불길하기만 한데
꽃 피는 일이 일생의 전부인 배롱나무가
제 속엣것 모두 퍼주고
공즉시색
속이 텅 비어가자
부신 햇살에 잠자던 솔씨 하나가
눈뜬 것이리라
그래서 죽어가던 배롱나무도
이심전심이 된 것이리라
세속 사원 / 복효근
집 밖에서 집을 보네
밤이 새벽으로 건너가는 시간
금성이 춥게 빛날 때
울다 잠든 아내 두고
집 밖에서 퀭한 눈으로 내 사는 아파트 덩어리
모래와 시멘트로 뭉쳐진 커다란 산
저 속에서
그만 살 것처럼 사랑하고
또 다 산 것처럼 싸우고
옷 벗고 뒹굴고 또 옷 입고 종주먹을 들이대고
나날을 최후처럼 살았네
불현듯
타클라마칸 사막의 한가운데
돈황의 막고굴이 떠올랐다네
커다란 산에 층층이 동굴을 뚫고 수도승들은
화엄세계를 새겨 넣으려
굴 밖에 거울을 세워두고 빛을 반사시켜 들여서
몇 십 년 몇 백 년 작업을 했다지
얼마나 죽고 싶었을까
그들에게 차라리
내가 버리고 싶은 이 사바가 극락쯤은 아니 될까
그래, 나의 이 고해가 극락이라니
목말라 물을 찾다 밤새 술만 들이켰던 그곳이 우물터였다니
수많은 생불들이 불을 켜는 새벽
나 옷깃 여미고 저 사원으로 돌아가겠네
사원의 발자국 / 최 준
해안 절벽 힌두사원 뒤뜰
흰, 붉은 꽃들이 피어 있다
발리에서 보는 타로 점은 신이 되기 위한
여행자의 몸부림
과거로 돌아가는 길엔 빛이 들지 않는다
가슴을 디디고 간 무수한 시간들을
결코 기억하지 못한다 출구 없는 실내가 어지러워
여행자는 꽃잎 뒤에 숨은 자신의 손가락에
바늘을 꽂기도 한다
화들짝 놀라 바늘을 뽑아낼 때
봉싯 솟아오르는 한 방울의 피
아린 게 손가락이 아니어서 여행자는 슬프다
사원의 꽃이 현실이 아닌 게 아프다
타로 점은 여행자를 뒤뜰에 가두고
그의 피를 돌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꽃잎 사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오후
흑마술처럼, 태양이 사라지고
벼랑만 남았다
그러므로 사원은 영원한 그늘
세상의 뒷문을 조용히 빠져나가는
여행자의 발자국은
예외 없이 어둡다 꽃들의 영혼은
신전을 찾아 / 박화남
기도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 엎드렸다
억울하고 속상한 일
모두 일러바치면
엄마는
깊고도 넓어
나보다
더 엎드렸다
박화남, 『맨발에게』, 작가,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