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58년 11월 24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부내면 용상리 법흥골(현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臨淸閣)에서 아버지 추암(秋巖) 이승목(李承穆, 1837~1873. 4. 27)과 어머니 안동 권씨(1832~1902. 4. 5)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초명 상희(象羲)에서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을미사변 다음 해인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뒤 류인식, 김동삼 등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경술국치 다음 해인 1911년 1월 양기탁(梁起鐸)과 협의한 뒤 2월 서간도에 도착하여 한만관계사를 연구, 집필하였다.
1919년 3.1 운동 후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독립 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에서 남만 한족 통일회를 개최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24년 10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督辦)에 선출되었다.
1925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임시 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자손들도 독립운동가였으며, 무녀독남인 이준형(1875년 ~ 1942년)과 그의 아들 이병화(1906년 ~ 1952년) 또한 나중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1932년 5월 병으로 지린성에서 사망했다. 독립운동을 하였던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30년 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3. 기타
자손들도 독립운동가였는데, 외아들인 이준형(李濬衡, 1875년 ~ 1942년)과 손자 이병화(李炳華, 1906년 ~ 1952년) 또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
박찬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인천 연수구 갑)이 외손자다.
임청각 앞 안동댐 방향으로 올라가는 도로(석주로)에는 신목(神木), 혹은 귀신나무로 불려지던 수령 300년 정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도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이 나무는 원래 임청각 안에 있었으나 중앙선 개통으로 임청각 일부가 헐리면서 집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나무가 도로 가운데 서 있는 이유에는 여러 전설같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이상룡 선생 일가가 만주로 떠나기 전 이 신목에 제사를 지내고 올라갔을 정도로 이전부터 신성시하던 나무였으며, 안동댐 건설 당시 장비 진입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도로 한가운데를 막고 있던 이 나무를 베려고 하였지만 귀신들린 나무라 하여 아무도 베려 하지 않았고 이에 용감한(?) 인부 한명이 전기톱을 들고 베려 하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쳐 죽어버렸고, 굴삭기를 동원해 나무를 부러뜨리려 하였지만 삽날이 부러지는 등 이상한 일이 발생하자 나무를 피해 도로를 확장하였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안동댐으로 올라가는 도로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거대한 회화나무와 이 나무를 피해 양쪽으로 나 있는 2차선 도로로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었으나, 2008년 8월 22일 새벽 누군가 이 회화나무를 전기톱으로 잘라내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역 교회 목사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신목을 잘라내버렸다는 등, 신기가 돈 한 할아버지가 새벽에 막걸리를 마시고 그랬다는 등 여러 소문이 있었으나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한 채 사건이 종결되어 버렸다. 지역 주민들은 이 회화나무를 소생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거듭한 끝에 다음 해 잘린 밑둥에서 새 줄기를 틔우는데 성공하였지만... 2010년 8월 3일 새벽, 대학생 2명이 몰고 가던 승용차가 도로 가운데 있던 나무 밑둥에 정면충돌하는 사고가 났고[6] 이 사고로 회화나무가 뿌리째 뽑히면서 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버렸다. 이 사고 후 회화나무가 있던 자리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도로로 완전히 덮여버렸다.
현재는 나무가 서 있던 흔적은 찾기 힘들지만, 법흥육거리에서 안동댐 방향으로 150m정도 올라오다 보면 지하도로 합류지점에서 도로의 좌우 폭이 일시적으로 넓어지며 도로 한가운데가 어설프게 아스팔트 포장된 구간이 있는데 이곳이 과거 회화나무가 서 있었던 자리임을 확인 할 수 있다.
3.1. 임청각 일제 훼손설
이상룡 선생의 생가, 임청각에 대하여 조선총독부가 고의적으로 중앙선 철로를 임청각 마당을 관통하도록 건설하면서 훼손당했다는 아주 오랜 관념이 존재했다. 이 관념이 여러 미디어 매체들과 문재인 정부 차원에서 크게 공론화됨으로, 2020년 중앙선 안동 시내 전 구간 이설과 함께 임청각 부지에 대한 복원 사업이 추진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 관념에 대하여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보는 분석이 있다.
해당 논문의 저자에 따르면, 이상룡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한 것은 1911년이고 1932년에 병사했다. 이후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은 가족을 이끌고 1933년 안동으로 귀향했다. 그런데 중앙선 안동 구간에 대한 측량이 이루어지던 것은 1935년이고 임청각을 가로지르는 선로가 확정된 때는 1936년 8월, 중앙선 안동구간이 개통된 것은 1942년이다. 즉, 선로가 확정되던 1936년에는 이미 이상룡이 병사하고 대다수의 일가족들이 안동으로 귀향한 뒤였기에 일제 입장에서 딱히 보복을 할 필요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선로가 확정되던 1936년 당시 이준형이 남긴 어느 편지글에서도 철도 때문에 집이 부서진다는 사실을 한탄할 뿐, 일본의 보복이나 민족 정기 때문이라고 분노하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구 중앙선 선로가 기형적으로 설계된 이유는 당시 예천 쪽에서 이어진 경북선에 따라 동서방향으로 설계된 기존 안동역사를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초 남북으로 이어지는 중앙선에 맞춰 건설하는 게 최종 목표였지만, 기존 안동역사를 활용할지 아니면 신 안동역을 건설할지를 두고 몇 년 내내 설왕설래하다 1936년 8월에서야 기존 역사를 활용하는 것으로 결정났기 때문이다.
결국 동서구조로 만들어진 기존 안동역사를 유지하면서, 남북으로 이어질 중앙선과 연결하기 위해 시내를 최대한 우회해서 부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형편 속에 기존 안동역사 바로 동쪽에 위치해 있던 임청각이 운 나쁘게 피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상룡 선생의 정기를 끊으려 임청각에 선로를 지었다는 주장은 실제 그러한 일제의 의도보단, 당시 민중의 정서가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혹자는 서지역까지 바로 직행하도록 부설했다면 굳이 임청각을 건들 필요가 없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로를 90도로 급격히 트는 게 더 부자연스럽고, 안동역 동쪽부터 서지역 사이엔 영남산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결국 안동역에서 서지역까지 직행하려면 영남산 전체를 터널로 뚫어야 하는데, 당시 기술로 산 전체를 터널로 뚫는 건 여러모로 난공사를 강요하는 터라, 일제 입장에서 터널을 뚫는 대안을 우선적으로 채택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보다 낙동강변을 따라서 지상에 무난하게 철로를 동쪽으로 부설하다가 영남산과 용점산이 이어지는 지점이자 산세의 높이가 낮아지는 지점을 기준으로 삼고, 부설 공사를 한 거라고 바라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만일 안동역에서 임청각을 피해서 서지역까지 직행하는 철도를 건설한다면, 선로를 북쪽으로 90도 급하게 틀어서 영남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3km나 건설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중앙선 선로는 낙동강변을 따라 영남산 산자락을 우회하는 식으로 지어졌다.
주간조선의 이동훈 기자도 일제의 정기 훼손설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당시 안동역은 경북 철도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중앙선이 안동역을 지나는 것은 당연했고, 안동읍성 남문 방향에 위치한 안동역에서 90도로 방향을 틀어 영주로 북상하려면 민가가 밀집한 안동읍성을 지날 수 밖에 없는데 예나 지금이나 도심 한복판에 철도를 부설한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앙선이 안동역에서 불과 1km 떨어진 임청각을 지나게 된 것은 안동읍성 내 민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에 가깝지, 어떤 음흉한 목적에 따라 억지로 노선을 바꿨다고 해석하는 건 비약이라고 평한다.
참고로 일제가 고의적으로 중앙선 철로를 임청각 마당을 관통하도록 건설하면서 훼손했다는 설은 중앙선데이에 이덕일이 연재한 '이덕일의 事思史(사사사) 근대를 말하다 2011년 8월 7일자 기사인 ’“무릎 꿇고 종이 될 수 없다” … 이상룡 일가도 집단 망명'에서 처음 등장했다.[13] 다만 안동 주민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왜놈들이 임청각 지기를 누를려고 일부러 철도를 저쪽으로 뚫었다' 라는 등의 이야기가 많이 돌았기에, 이것은 이덕일 혼자만의 망상이 아닌 안동지역 주민들의 민족 감정에 근거한 풍문을 진실로 오판해서 인용했을 거라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