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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곧 성인임도 역시 그러하여 범부와 성인이라는 이름이 있을 뿐 하나의 체성이어서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
그러므로 선덕(先德)이 『화엄경』을 해석하여 이르기를 “하나의 세계가 법계에 다함 또한 그와 같다 함은, 한 눈이 같으면 온갖 눈의 같음도 모두가 그러한 줄 알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한 사람의 몸에 손발이 있으면 온갖 사람에게서 모두 손발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이 한 마음을 분명히 모르면 모두가 두 가지 소견을 이룬다. 만약 범부가 이 마음을 집착하면 윤회의 업을 짓고, 2승은 이 마음을 싫증내어 버리면서 회단(灰斷)의 결과를 구한다. |
또 범부가 눈이 없으면 보리 지혜의 조명을 가져다 번뇌의 불에 타게 하나니, 마치 큰 부자인 소경이 보물창고 안에 앉아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다가 보물에게 상처를 입는 것과 같다. |
2승은 여래의 4덕(德)의 비장(秘藏)을 무상한 5음(陰)으로 삼아서는, 이것은 “도둑이요, 범이요, 용이요, 뱀이다”라고 하면서 두려워하며 달아난다. |
속박과 해탈은 비록 다르나 취하고 버림에 다 같이 과실이다. 만약 진실로 알아 통달한 이면 일으키지도 않고 없애지도 아니하며 얻음도 없고 남[生]도 없어서 이 허망한 마음이 생각마다 체성이 없는 줄 알거늘, 무엇으로부터 집착을 일으켜 생각생각에 스스로가 여의겠는가. 끊어 없앨 필요도 없고 오히려 하나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둘이겠는가. |
그러므로 알라. 모든 법이 진여에 따르면 원성실(圓成實)을 증득하면서 망정으로는 없고 도리로는 있으며, 뭇 유정이 뜻을 어기면 변계(遍計)를 집착하면서 망정으로는 있고 도리로는 없다. 항상 있음을 따르고 하나의 길을 어기거늘 어찌 일찍이 체성을 잃겠는가. 망정은 도리를 거스르지 아니한다. 천 갈래 길이면서 잠시도 갈래가 지지 못했고, 그를 꿰뚫으면서 망정과 도리가 이름을 끊었으니 그를 알게만 되면 따름과 어김은 자리조차 없다. |
그러므로 법마다 모두 말 없는 도에 계합하고 생각마다 모두 얻음 없는 종지에 돌아가리니, 천진이요 자연이며 조작이 아니다. |
『무언보살경(無言菩薩經)』에서 “그 때 사리불이 무언보살에게 말하였다. ‘그대 족성자여, 말로 할 수 없거늘 어떻게 여래의 이치를 묻고자 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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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이 말하였다. ‘온갖 법은 다 문자가 없고 말씨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온갖 중생은 모두 다 자연이라 모든 말의 가르침과 뭇 생각들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
그런 까닭에 만약 현상[事]에 맞추어 자세히 설명하면 범부와 성인은 틀림이 없으면서 틀리고, 본체[理]에 나아가서 어울려 결합되면 중생과 부처가 틀리면서도 틀리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틀림과 틀리지 아니함은 다같이 진여의 체성을 여의지 않았다. |
『화엄연의(華嚴演義)』에서 이르기를 “틀림이 없으면서 틀린다 함은 바로 원융(圓融) 위의 항포(行布)요, 틀리면서 틀림이 없다 함은 바로 항포 위의 원융이다. 마치 별(別)을 잡아서 총(總)을 이루고 별을 여읜 그 밖에 이 총이 있는 것이 아님과 같다”라고 한 것과 같다. |
이렇게 어울리고 거두면 법마다 돌아가지 아니함이 없고, 곧 삼승(三乘)은 셋이 아니요 5성(性)은 다섯이 아니다. 이렇게 미묘하게 알아야 종경(宗鏡)의 빛을 받게 되고 이런 소견이 나서 모두 둘이 없는 뜻 어기는 것을 여의게 된다. |
[문] 만약 일체 중생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3기(祇)와 백겁(百劫) 동안 공을 쌓고 덕을 쌓아야 이루어진다 했는가. |
[답] 다시 일승(一乘)을 배우는 실법(實法)을 위해서요, 또 5성(性)에 나아가는 권기(權機)를 위해서다. 여기서는 자증(自證)의 법문을 논한 것이요, 화의(化儀)의 방편을 진술한 것은 아니다. |
또 『능가경(楞伽經)』에서는 넷의 부처가 있음을 말했으니, 첫째는 화불(化佛)이요, 둘째는 보생불(報生佛)이요, 셋째는 여여불(如如佛)이요, 넷째는 지혜불(智慧佛)이다. |
근기에 따라 나아가 감통하는 그것을 화(化)라 하였고, 그의 옛 원인에 갚아지는 그것을 보(報)라 하였으며, 본각이 환히 비추는 그것을 지혜라 하였고, 본체와 체성이 둘이 없기 때문에 여여라고 했다. |
『화엄경』에서는 열 가지 부처를 밝혔다. 이른바 세간에 편안히 머무르면서 이루는 정각불(正覺佛)이니 집착 없음에서 보았고, 원불(願佛)이니 태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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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보았고, 업보불(業報佛)이니 깊은 믿음에서 보았고, 주지불(住持佛)이니 수순함에서 보았고, 열반불(涅槃佛)이니 깊이 듦에서 보았고, 법계불(法界佛)이니 널리 이름[至]에서 보았고,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름에서 보았고,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고 의지함 없음에서 보았고, 본성불(本性佛)이니 분명히 앎에서 보았고, 수락불(隨樂佛)이니 널리 줌에서 보았다. |
또 부처도 총괄하면 열 가지 몸을 갖추었다. 첫째는 중생신(衆生身)이요, 둘째는 국토신(國土身)이요, 셋째는 업보신(業報身)이요, 넷째는 성문신(聲聞身)이요, 다섯째가 연각신(緣覺身)이요, 여섯째는 보살신(菩薩身)이요, 일곱째는 여래신(如來身)이요, 여덟째는 지신(智身)이요, 아홉째는 법신(法身)이요, 열째는 허공신(虛空身)이다. |
따로따로 5교(敎)에 의하면 교에 따라서 일정하지 아니하다. |
첫째는 소승교에서 두 몸의 부처가 있다. 첫째는 생신(生身)이요, 둘째는 법신(法身)이다. |
둘째는 대승 초교(初敎)에서 세 몸의 부처가 있다. 첫째는 법신(法身)이요, 둘째는 응신(應身)이요, 셋째는 화신(化身)이다. |
셋째는 종교(終敎)에서 네 몸의 부처가 있다. 첫째는 이성신(理性身)이요, 둘째는 법신(法身)이요, 셋째는 보신(報身)이요, 넷째는 응화신(應化身)이다. |
넷째의 돈교(頓敎)에서는 한 부처의 몸뿐이어서 실상불(實想佛)이며, 다섯째의 일승원교(一乘圓敎)에서는 열 가지의 부처가 있다. |
또 성품으로 성불함에서 보면 5교가 서로 다르며 같지 아니하다. |
소승에서는 실달(悉達)한 사람만이 부처 성품이 되고, 초교(初校)에서는 반은 이루고 반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품 있음과 성품 없음으로 갈라지기 때문에 부처가 되며, 종교(宗敎)에서는 초목 등을 제외한 마음 있는 것이면 장차 부처가 될 수 있고, 돈교에서는 부처도 없고 성품도 없고 언설의 모양을 여읜 것이 부처가 되며, 원교에서는 부처의 성품이 있지 않는 것이 없어서 세 가지 세간의 모두가 이는 부처가 되는 것이니, 세 가지 세간 모두가 부처라면 안과 밖 마음과 경계가 부처 아님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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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음으로 성불한다는 데서 보면, 소승에서는 착한 마음으로 닦아 얻는 바가 부처가 되고, 초교에서는 마음 성품이 부처가 되며, 종교에서는 마음의 모양과 성품이 없어짐이 부처가 되고, 돈교에서는 마음이 본래 생기지 않음이 부처가 되며, 원교에서는 마음이 걸림 없고 그지없음이 부처가 된다. |
또 천태(天台)에서는 네 가지 교(敎)의 부처를 밝혔다. 첫째는 장교불(藏敎佛)이요, 둘째는 통교불(通敎佛)이요, 셋째는 별교불(別敎佛)이요, 넷째는 원교불(圓敎佛)이다. |
가령 여여불ㆍ심불ㆍ본성불의 경우 어느 사람인들 갖추지 않았으며, 가령 국토신ㆍ법신ㆍ허공신의 경우 무슨 법인들 뚜렷하지 않겠는가. |
곳곳마다 모두가 이는 보배 절인데 언덕이 어찌 있겠으며, 생각마다 모두 정각을 이뤘는데 망상이 어디서 구분되겠는가. 마치 소경이 광명을 보지 못함이 아침 해와 밤 달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고, 소승이 원돈(圓頓)을 듣지 아니함이 어찌 불심(佛心)의 미묘한 뜻의 친소(親疎)에 있어서이겠는가. |
법이 약해짐은 근기의 미미함에 연유하고, 도가 넓어짐은 도량의 크기에 있다. 얕은 근기라고 스스로가 느끼면 묘유(妙有)가 증득되나 무상한 것이 되고, 박복하다고 될 대로 여기면 값진 보물이 변하여서 조약돌이 된다. 부질없이 자기 눈을 미혹하여 다른 이의 몸으로 오인하고, 실제(實際)를 천 가지 차별로 나누어 화의(化儀)의 백 가지 변화가 되게 한다. |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서 이르기를 “그 때 부처님께서 대운밀장(大雲密藏)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제 큰 지혜 등불을 켜서 모든 중생의 어리석은 어두움을 깨뜨려야 되느니라. 만약 여래가 진실로 수두단(輸頭檀)의 집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고행을 닦아 익히며 악마 병사들을 무너뜨리고 도량에 앉아 보리의 도를 이루었다 한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바로 부처를 비방하는 것인 줄 알지니라. 차라리 머리를 끊고 그 혀를 빼어낼지언정 끝내 이런 허망한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는 여래의 비밀한 말을 잘 안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
또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이르기를 “만약 석가여래가 도솔천으로부터 어머니의 태 안으로 내려오셨고, 내지 8상(相)으로 성도하셨다 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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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바로 성문의 굽은 소견이니라”고 했다. |
때문에 “하열하게 아는 중생들을 위하여 어머니 태 안에서 나왔다”고 했다. |
그러므로 이 종경(宗鏡)에 들면 하는 말마다 허물이 없고 내는 생각마다 모두가 진실이거니와, 만약 이 문에 아직 이르지 못했으면 옳은 것을 말해도 그른 것이 되고 마음을 거두어도 오히려 그르친다. |
『원각경(圓覺經)』에서 이르기를 “생각을 움직임과 생각을 쉼은, 모두가 미혹함에 돌아간다”고 함과 같으며, 『신심명(信心銘)』에서 이르기를 “오묘한 뜻을 알지 못하면/고요함을 생각함도 헛수고니라”고 했다. |
융(融) 대사가 이르기를 “이 종(宗)을 깨친 사람은 부처가 아니라 해도 좋거니와, 만약 아직 믿지 못한 이면 설령 염불한다 하여도 역시 거짓말이 된다”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종경(宗鏡)을 통달하지 못하면 견해가 있다 하여도 모두가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비방하고 승가를 비방한 것이니, 천만 가지 생각으로 상응하지 못하거니와 겨우 이 뜻을 알게만 되면 자연히 한 생각 오차가 없으리라. |
그런 까닭에 『화엄론』에서 이르기를 “처음 발심으로부터 10주(住)의 끝에 이르기까지 삼매의 힘으로써 단박에 3계(界)를 도장 찍으면 3세가 한 동안이요 모든 법이 한 맛이며 해탈이며 열반이며 언제나 적멸의 맛이리니, 다시는 처음과 마지막이 없고 인과가 한 끝이며 모든 성품이 한 성품이요 모든 지혜가 한 지혜이며 모든 모양이 한 모양이요 모든 행이 한 행이며 3세가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3세이며, 내지 10세이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은 자재하여 걸림이 없고, 이 경의 법문은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으므로 언제나 법륜을 굴린다고 말한다”고 했다. |
그러므로 이 경의 교문은 근본에 의하여 편안히 서서 큰 뿌리를 갖추고 근본에 의한 한 끝이라 처음과 마지막을 세우지 않나니, 허망한 소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
하나에 들면 온통 나머지를 얻음은 법계가 한 끝이기 때문이요 권학(權學)의 소견이 다하지 못한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며, 나머지에 들면 온통 하나를 얻음은 법계의 체성이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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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둥근 구슬은 모가 없는 것 같고, 밝은 거울은 단박에 비추는 것 같으며, 허공은 막이가 없는 것 같고, 메아리는 의지함이 없는 것 같으며, 그림자는 거리끼지 않는 것 같고, 요술하는 사람이 만들어 냄과 같다. |
이 법문은 바로 모두가 묶어져서 처음과 마지막이 한 끝이고 원만하여 걸림이 없으며 이루어짐도 없고 무너짐도 없으며 나옴도 없고 숨음도 없어서 언제나 법륜을 굴린다. |
어떤 사람이라도 이 법문을 알아 얻으면 부처의 지혜와 자연스러운 지혜와 스승 없음의 지혜가 앞에 나타나리니, 이 법은 출몰이 없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연히 출몰이 없는 지혜를 저절로 얻게 될 것이요, 뜻에 두어 생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
온갖 권교(權敎)의 법문이 온통 그 안에 있나니, 일시에 말한 것이로되 모든 권교가 법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3세가 없기 때문이다. |
저마다 자신의 소견에 의하여 한량없이 다르다. 이 일승교에서는 바로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적의 설법이로되, 만약 정(情)에 의거하면 이것은 맨 처음 성불할 적의 설법이요 만약 지혜에 의거하면 처음과 마지막이 없는 설법이다. |
그러므로 알라. 성불과 설법은 한 생각을 여의지 아니한 것이니, 『화엄경』에서 “비목 선인(毘目仙人)이 선재의 손을 잡자, 즉시 선재는 스스로 그의 몸이 시방의 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같이 많은 세계로 가서 열 부처님 국토의 작은 티끌 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에게 도착했음을 보았고, 그 부처님 국토와 그 대중의 모임에서 모든 부처님의 상호가 갖가지로 장엄되었음을 보았으며, 내지 혹은 백천억의 말로 할 수 없이 말로 할 수 없는 부처 세계의 작은 티끌 수 같이 많은 겁(劫)을 지나기도 하였다. |
때에 그 선인이 선재의 손을 놓자 선재동자는 이내 자신의 몸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음을 보았다”고 한 것과 같다. |
이것으로도 본래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몸은 시방에 두루하고, 아직 한 생각 동안을 여의지 않고서 억 겁의 때를 겪는 줄 알 것이다. |
본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으나 멀고 가까운 세계는 역연하며, 한 생각도 옮아가지 않으나 길고 짧은 때는 완연하다. 종경(宗鏡)에 의지하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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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써 이 글을 소화하겠는가. 만법이 모르는 결에 귀착되리니 끝내 따로의 뜻이 없다. |
[문] 성품 없는 도리는 한가지라 일시에 성불한다면, 어떻게 삼승의 사람들이 부처를 볼 적에는 거기에 차별이 있는가. |
[답] 마음에 따라 느낌이 나타나며 영상(影像)은 같지 아니하다. 제 업(業)이 다를지언정 부처에 다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물을 보면서도 갑자기 네 쪽으로 나누면, 모두가 자신의 소견은 다른 것이다. 같은 보배 그릇이면서 밥 빛깔은 같지 아니하나 다른 이의 업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
그렇다면 전체의 마음이 바로 부처요 전체의 부처가 바로 마음이며 곧 진여의 마음이 바로 법신불이다. 또한 법신은 모양이 없고 참 성품은 형용이 없다. 모양과 형용조차 오히려 없거니, 어떻게 차별되겠는가. 모두가 비춤과 그림자가 같지 않다 함을 스스로가 알 것이다. |
마치 5백의 바라문이 재 몸[灰身]을 보고서 믿음을 내고, 구사라 장자(劬師羅長者)가 석 자[三尺]를 보고서 발심하며, 무변신(無邊身)보살이 상계(上界)를 다했는데 남음이 있고, 소성(小聖)에서 머[문]범부가 장육(丈六)을 보는데 끝없는 것과 같다. |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부처님께서 부왕에게 아뢰고서 아난에게 명하기를 ‘나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두루 갖춘 몸매를 모두 나타내리라’고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대중이 다 함께 일어나서 여래를 살펴보게 하되 정수리로부터 발의 수레바퀴 몸매까지를 순서대로 살펴보게 하고, 다시 발의 몸매로부터 정수리까지를 거스르며 살펴보게 하시자 낱낱이 몸 부분이 똑똑하면서도 분명하기가 마치 거울을 가지고 자기 얼굴을 보는 것과 같았었다. |
그런데 나쁘고 착하지 못한 마음을 낸 이거나 부처님의 금계를 깨뜨린 이에게는 형상이 순전히 검어 마치 재 묻은 사람처럼 보였고, 5백의 석자(釋子)에게는 재를 바른 사람으로만 보였으며, 어느 천 비구에게는 붉은 흙빛으로 보였고, 우바새 16인에게는 검은 코끼리의 다리 빛으로 보였으며, 우바이 24인에게는 마치 먹덩이처럼 보였고, 비구니들에게는 마치 백운처럼 보였으며, 우바새와 우바이인 어떤 이들에게는 쪽빛으로 물들인 청색처럼 보이기도 하였는데, 사부 대중들은 슬피 울었고, 또 석자들은 머리를 쥐어뜯고 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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