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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07. [역경의 열매] 류광열 <1-10> 선진 농업에 일찍 눈 떠… 28세에 고향서 큰 농장
1960년대 말 일본 농촌 견학하고 자극, 농장 성공적 운영… 외국서 연수 오기도
갈릴리농원 대표 류광열 장로가 경기도 파주시의 농원 뒤편에 있는 ‘카페 소솜’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일생의 꿈과 희망이 깃들어 있는 갈릴리농원에 서서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손에 잡힐 듯 펼쳐지는 지난 세월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진다. 지나면 모든 것이 추억이라고 했던가.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마저도 지금 생각하면 모두 주님이 예비하신 순간들이었다.
주님의 축복 속에 나와 우리 가정의 지경은 크게 넓어졌다. 상상하기 힘든 복을 받았다. 모든 게 주님이 주신 은혜의 산물들이다. 받은 복을 세어보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청년의 때,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건 농업이었다. 생명산업의 정수인 농업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생명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크다.
갈릴리농원과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비롯해 현재 건축 마무리 단계에 있는 교회까지 모두 경기 파주시 탄현면 방촌로에 위치해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공간은 모두 주님께 바쳤다. 이름도 ‘홀리랜드’다. 파주시 탄현면은 육신의 고향이자 영혼의 고향이다. 나는 1943년 2월 28일 탄현면 문지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이야 큰 도로들이 개통되고 LG디스플레이 같은 대기업의 생산시설이 입주해 주민도 늘고 서울과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내가 펄펄 날아다니던 20대 때 이곳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9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형제들이 모두 세상을 일찍 떠나 어린 나이에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외로웠지만 꿈이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를 그토록 흥분시켰던 농군의 삶을 살아가기로 서원하고 그 길에 들어섰다. 뜬금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자연과 벗하고 그 섭리를 깨달으면서 살도록 디자인하셨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빨리, 또 정확히 찾은 경우다. 1960년대 말 이미 농업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 20일 동안 선진 농업현장을 둘러보는 쉽지 않은 기회를 얻었다. 한국에선 여전히 소가 밭을 갈고 있는데 일본은 첨단 농기구가 논과 밭을 누비고 있었다. 심지어 냉동시설에 유통 시스템까지 갖춰져 있었다.
일본 방문은 농업인으로서의 사명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 가기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만 받은 상태였다면 일본의 첨단농업 현장을 견학한 후에는 한국의 후진농업의 수준을 끌어올려야겠다는 사명과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일본을 떠나 고향 문지리로 돌아온 나는 본격적으로 농장을 시작했다. 매년 나락 500가마니 넘게 수확했고 젖소도 50마리를 키웠다. 농사 짓는 일꾼과 소를 돌보는 목부 여럿과 함께 일했다. 일본에서 보고 배운 것 중 한국 토양에 맞는 것들을 선별해 적용했고 성공을 거뒀다. 영농후계자들이 나의 농장에 와서 훈련을 받았고 대만에서도 우리 농장으로 연수를 왔다.
농장을 경영하며 농군으로서의 참 맛을 느끼던 그 때가 고작 28세였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 [역경의 열매] 류광열 <1> 선진 농업에 일찍 눈 떠… 28세에 고향서 큰 농장
* [역경의 열매] 류광열 <2> 땅·물·공기 모두 주의 선물… 농업인으로 늘 감사
* [역경의 열매] 류광열 <3> 고생문 훤한 농사꾼에게 시집온 아내
* [역경의 열매] 류광열 <4> 잇단 성공에 교만해지자 하나님의 회초리가…
* [역경의 열매] 류광열 <5> 알거지서 기사회생… 상복에 장로 직분 영광까지
* [역경의 열매] 류광열 <6> "예수님 향기 전하기 위해 노력"… 갈릴리호수서 다짐
* [역경의 열매] 류광열 <7> 농원을 '홀리랜드'로… 산책로와 카페·갤러리 조성
* [역경의 열매] 류광열 <8> 72세, 갈릴리교회 건축 새 비전 품다
* [역경의 열매] 류광열 <9> 누구나 언제든 와서 기도하는 열린 교회로…
* [역경의 열매] 류광열 <10·끝> 교회서 석양 보노라면 저절로 "오늘도 감사합니다"
약력=△1943년 경기도 파주 출생 △전국새농민회 11·12대 회장 역임 △새농민종합상, 국민포장, 은탑산업훈장, 대통령표창 수상 △제4회 장한한국인상 경영인부문 대상 △갈릴리농원 대표 △삼성교회 원로장로
***[역경의 열매] 류광열 <2> 땅·물·공기 모두 주의 선물… 농업인으로 늘 감사
양식으로 대통령 3명에게 훈장 등 받아 / 초창기부터 축복… ‘신천장어’ 특허등록
류광열 장로는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할 때면 늘 조용한 곳을 찾아 두 손을 모은다. 류 장로가 기도를 드리고 있다.갈릴리농원은 흔한 장어식당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이곳이 육의 양식과 영의 양식을 모두 채울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농원 안에는 두 곳의 식당과 카페 ‘소솜’이 있다. 많은 정성을 기울여 건축하고 있는 교회도 곧 완공 예정이다. 농원에서 1㎞ 떨어진 곳에는 대규모 장어 양식장이 있다. 나와 우리 가족은 이곳 전체를 ‘홀리랜드’라고 명명했다.
나는 매일 한결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갈릴리농원을 드나드는 손님들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지고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게 해 달라고 말이다. 나뿐 아니라 직원과 가족 모두 같은 마음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에 장어가 있다. 일찍이 농업에 투신한 내가 누렸던 큰 축복은 해외의 선진농업 현장을 견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본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덴마크 프랑스 스위스 이스라엘 호주 등 농업 선진국을 방문하면서 꼼꼼하게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다. 귀국해서는 늘 공부했다. 한국에 적합한 농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이스라엘의 수질관리 농법과 덴마크와 스웨덴의 선진 양식법이었다. 해외에서 얻은 노하우는 양만(養鰻) 사업을 시작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됐다.
장어양식을 시작한 해는 1985년이었다. 그동안 하던 농사와 축산업을 정리한 뒤 시작한 장어양식은 초창기부터 성공가도에 들어섰다.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많은 돈도 벌었다. 가정도 편안했다. 양식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고 노무현 대통령 때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장어양식을 한 덕분에 상복이 터진 것이다. 2005년에는 갈릴리농원이 양식하는 장어를 ‘신천장어’라는 이름으로 특허등록도 했다.
나는 장어양식에 성공한 사업가지만 내 정체성은 농업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최첨단 여과식 양식시스템을 개발해 깨끗한 민물장어 양식에 성공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갈릴리농원 양식장에서 자라는 장어는 오늘도 무항생제 양식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깨끗한 장어가 우리 농장에서 자라고 있다는 자부심이 크다.
일생을 자연 속에서 주님이 주신 환경에 기대어 살고 있는 나는 우리나라의 농촌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특히 전국새농민회 회장을 하며 돌아본 우리나라 농업 현장을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
지면을 빌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는 후배 농업인들이 용기를 가지고 생명산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응원을 전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전할 말이 있다. 농업인이라면 땅과 물과 공기 모두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늘 기도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부족한 저를 복음의 위대한 역사 중 작은 조각으로 사용해 주옵소서. 주님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만을 믿고 그 길만 따르는 종일뿐입니다. 사용해 주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역경의 열매] 류광열 <3> 고생문 훤한 농사꾼에게 시집온 아내
어지럼증·불면증 시달리던 아내 교회 다니며 기도하자 병세 호전
부인 홍인순 목사는 2015년 1월 10일 예장합동중앙 총회 산하 총신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 안수식 날 류 장로가 홍 목사와 포즈를 취했다.삼성교회 협동목사인 아내 홍인순 목사와는 1970년 결혼했다. 홍 목사가 22살 때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고생이라고는 몰랐던 아내가 고생문이 훤한 농사꾼에게 시집을 온 것이었다. 결혼할 때 나는 세상 말로 꽤 잘 나갔다. 매년 나락 500가마니를 수확했고 젖소도 50마리를 길렀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나야 늘 하던 농사였고 목축이었지만 아내는 달랐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시집와서 논으로 밭으로 축사로 다니며 쉴 틈 없이 일해야 했다. 처음에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무척 힘들어했다. 지금도 고마운 것은 불평 없이 모든 어려움을 인내했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무섭다고 했던가. 꽃 같기만 하던 아내도 점차 시골생활에 적응해갔다. 곱던 손은 투박해졌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일들도 척척 해냈다. 농장 직원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농사꾼이 돼갔다.
나와 아내가 구슬땀을 흘리는 만큼 농장 경영은 잘됐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까지 연수생이 찾는 성공한 농장으로 자리 잡았다. 아내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변곡점은 1979년 전국새농민회종합상 대상을 받은 직후였다.
자꾸 어지럽다고 했다. 해가 지면 어지러운 증상이 더 심해졌다. 불면의 밤이 시작됐다. 잠들지 못하는 아내는 날카로워졌고 살이 빠졌다. 전국의 용하다는 병원과 명의들을 모두 찾아다녔지만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나도 고통의 나날이었다. 무려 3년 동안 편히 잠을 자지 못했던 아내는 곧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혼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내게 시집 와서 고생만 한 아내가 너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어릴 적 성탄절마다 선물을 받겠다고 들락거리던 삼성교회에 마음이 끌렸다. ‘그래. 이제 남은 건 기도뿐이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오랜 기간 투병하면서 날카로워진 아내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거듭 이야기해 1984년 1월 15일 삼성교회의 문을 열었다. 그날의 행복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성도들은 진심을 다해 환대해줬고 아내의 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해줬다. 기적은 바로 그날 일어났다. 아내가 깊은 잠에 빠진 것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온다. 교회에 출석한 바로 그날 3년 만에 깊은 잠에 들다니…. 내가 주님만을 향해 살게 된 이유가 바로 이날 우리 부부가 경험한 기적에 있다. 잠을 자지 못해 생긴 병이 숙면을 취하자 점차 사라졌다.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병세는 호전됐고 결국 건강을 되찾았다.
삼성교회에 출석하면서 늘 생각했다. 돈벌이에만 관심을 갖고 살던 나의 완고한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하나님이 아내를 움직이신 것이라고 말이다. 아내가 그토록 아팠던 것이 결국 우리 부부와 가족 전체를 그리스도인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나와 함께 삼성교회에서 장로로 사역하던 아내는 201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또한 주님의 은혜다.
***[역경의 열매] 류광열 <4> 잇단 성공에 교만해지자 하나님의 회초리가…
3년 연속 폭우로 양식장 무너져 빚더미에… 남은 장어 좌판서 팔다가 장어식당 착안
갈릴리농원은 연간 60만명이 넘는 손님들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세를 타는 식당으로 자리 잡았다.20대 후반에 시작한 농장은 물론이고 1980년대 중반 야심차게 도전했던 장어양식도 초반에 큰 성공을 거뒀다. 또래보다 일찍 성공한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 고작 36세 때 파주시농촌지도자회장이 됐다. 감사보다는 교만이 가득했던 삶이었다. 아내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피지도 못하고 오로지 성공의 달콤함에 빠져 있었다. 더 많이 갖기 위해 고민했지 거룩한 삶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파주시농촌지도자회장을 지낸 뒤부터는 지역 유지가 됐다. 정치권에서도 꾸준히 유혹을 해 왔다. 흔들렸다. 정치권의 유혹과 사업 성공 사이에 매몰돼 있던 시절, 하나님이 날 치셨다.
환란은 1996년 8월부터 시작됐다. 그해 장마와 태풍이 겹쳐 오면서 파주와 문산 일대가 물바다가 됐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는지 하늘이 열린 것 같았다. 전 재산이었던 양식장이 멀쩡히 남아있었을 리 없었다. 양식장은 반파됐고 자식처럼 아끼던 장어들은 물길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물론 한 번의 실패로 주저앉을 내가 아니었다. 양식장은 빠르게 복구됐고 새로 구입한 치어들도 잘 자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야속하게도 1997년과 1998년 연이어 폭우가 내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연거푸 3년에 걸친 폭우는 나와 내 가족의 피눈물이 됐다.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매 순간 죽음을 생각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머리 누일 곳도 모두 사라졌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삶이 이랬겠구나 생각했다. 탈출구가 없었다.
설상가상 97년 말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가 무너지면서 이자율이 급등했다. 부채가 60억이었는데 이자율이 25%까지 치솟았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었다. 형편없이 망가진 양식장에 가보니 물길에 쓸려 내려가지 않은 장어가 남아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남은 장어를 가져다가 손질해 현재 갈릴리농원이 있는 자리에 좌판을 깔고 등산객들을 상대로 판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등산객 한 무리가 우리 장어를 구워 먹는 걸 봤다. 그날 이후 장어를 사서 바로 구워먹는 등산객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장어 식당을 해볼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천막을 치고 화로를 한 개만 설치한 허름한 식당을 차렸는데 그 화로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장어를 먹겠다고 기다리는 줄은 점점 길어졌고 화로의 숫자도 함께 늘어났다. 기세를 몰아 2002년에 갈릴리농원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숨도 못 쉴 정도로 망했던 나의 사업이 장어 식당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던 갈릴리농원에 현재 연간 60만명이 넘는 손님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은 것인가.
교만했던 나, 정치권의 유혹에 흔들리던 내가 더 기고만장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고난을 주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날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 극심한 고난 중이던 1999년 삼성교회 장로로 세워주셨다. 신앙 안에 굳게 서라는 하나님의 사인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역경의 열매] 류광열 <5> 알거지서 기사회생… 상복에 장로 직분 영광까지
장어 식당에 손님들 밀물처럼 몰려… 최첨단 시설 장어 양식장 다시 시작
류광열 장로(왼쪽)의 가족이 삼성교회 예배 중 특송을 하고 있다.3년 동안 이어진 물난리로 알거지가 됐던 나는 우연한 계기에 장어 식당을 열어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촌구석까지 찾아오는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상복도 터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각각 은탑산업훈장과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장한 한국인 대상과 무궁화 대상도 연이어 받았다. 고난을 이겨낸 시골사람을 세상이 인정해 줬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온 가족이 길바닥에 기대어 장어 몇 마리 팔아 생활할 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내가 한때 성공한 사업가이자 농업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전국을 다니며 나의 성공담을 이야기하고 후배 농업인들에게 용기를 주려 했던 내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 부끄러웠다. 불현듯 찾아온 낯선 가난, 60억 부채와 높은 금리 속에서 매 순간 죽음을 생각했던 그 시절 나를 건져준 것은 기적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일이 아니었다. 바로 삼성교회 장로가 된 것이었다. 그야말로 인생의 밑바닥에서 헤매던 시절 장로 직분을 받은 나는 인생 중 어떤 부귀영화와도 견줄 수 없는 감격을 경험했다. 1992년 초라했던 삼성교회를 헐고 595㎡(180평) 규모의 새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앞장섰을 때의 감격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실패를 경험해야 더 성숙한다고 했던가. 욥과 같은 막장에 떨어져본 경험은 훗날 나와 우리 가족 모두가 신앙생활을 할 때 좋은 자양분이 됐다.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신앙인의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2002년 본격적으로 시작한 갈릴리농원의 일상은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시작해 그 속에서 마무리됐다.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대절해 찾을 정도로 유명해져 대기번호표를 받아서 3시간씩 기다리곤 했다. 3년 동안의 수해로 양식업에 다시 도전하는 게 두려웠지만 신앙 안에서 용기를 내 재도전하기로 결정했다. 과거의 실패는 내게 큰 지혜를 줬다. 아무리 큰 비가 내려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양식장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갈릴리농원의 성공을 기반으로 최첨단 장어 양식 시스템을 도입했다. ‘3무 정책’이 그 중심에 있었다. 무항생제와 무소독, 무균 양식장을 통해 명품 장어를 키운다는 것이 골자였다. 항생제 대신 미생물을 이용해 찌꺼기를 분해하고 깨끗한 수질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정성껏 기른 장어는 ‘신천장어’라는 이름으로 특허등록까지 했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했고 남들보다 일찍 실패를 경험하면서 나는 몰라보게 단련됐다. 일상 속에서 감사가 넘쳤고 주님이 나를 이 땅에 왜 보내셨는지에 대한 확신도 생겼다. 주님은 나를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쓰시길 원하신 게 아닐까.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주님. 제 삶을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전해질 수 있게 인도해 주옵소서. 갈릴리농원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이 심길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제가 더욱 겸손하고 순종하는 종이 되게 해 주옵소서.”
끝으로 고난 중 욥이 했던 위대한 신앙고백을 떠올려 본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역경의 열매] 류광열 <6> “예수님 향기 전하기 위해 노력”… 갈릴리호수서 다짐
서울서북노회 장로 부노회장 맡아… 노회회관 확장·장학재단 설립
류광열 장로가 2013년 10월 예장통합 서울서북노회 창립 30주년 기념대회에서 노회원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2004년 이스라엘에 갔을 때였다. 갈릴리호수에서 성찬식을 마친 뒤 삼삼오오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세상이 온통 황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까지 더해지면서 환상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옆에 있는 아내의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아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늘 수고 많아요. 감사할 게 참 많네요.” “모두 부인과 아이들이 어려운 시절 잘 견뎌준 덕입니다. 부인의 격려가 큰 힘이 돼요. 더 힘차게 삽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게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에요.”
갈릴리호수에서 나눴던 대화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 그 자리가 바로 갈릴리 호수 아니던가. 장로가 된 뒤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하는 버릇이 생겼다. 일종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게 주님이 주신 축복이었다.
기도할 때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장면들이 있다. 아내의 이유 없는 불면증이 교회 출석 이후 깨끗이 나은 일, 3년 동안의 물난리로 재산을 모두 잃었다가 재기한 일 등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노회와 교단 봉사에 집중하게 된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고 온 2005년부터였을 것이다.
“장로님, 서울서북노회 고양·파주·연천 지역 장로회 회장을 좀 맡아 주세요.” 2006년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선배 장로가 삼성교회의 상회(上會)인 서울서북노회 지역 장로회 임원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네, 잘 섬겨 보겠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은 한도 끝도 없으며 하면 할수록 살필 일들이 더 생긴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다. 2009년엔 서울서북노회 장로 부노회장에 선출됐다. 어깨가 점점 무거워졌다.
노회 임원이 된 뒤 참석했던 첫 번째 임원회가 잊히질 않는다. 당시 회의에서는 서울서북노회 창립 30주년 기념대회에 대한 안건들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서울서북노회가 노회회관 확장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임원들 모두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또 노회 장학재단 설립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도 부탁 드립니다.”
부노회장이던 나는 당시 노회장이던 정성진 거룩한빛광성교회 목사가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날 이후 나와 노회 임원들은 노회원들과 함께 노회회관 확장과 장학재단 설립을 위해 구슬땀을 흘렸고 마음을 모아 기도했다.
2013년 10월 한소망교회에서 서울서북노회 창립 3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나는 노회장이면서 30주년기념대회 대회장 자격으로 노회원들께 이렇게 인사했다.
“창립 30주년을 맞은 서울서북노회가 중요한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우선 노회 회관을 확장 이전했고 노회 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앞으로 노회의 사업이 날로 확장되고 미자립교회 목회자 가정이 자녀들의 학비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앞으로도 노회원들이 힘을 하나로 모읍시다. 모든 게 노회원들의 사랑과 관심 덕분입니다.”
교회를 섬기면서 인생이 얼마나 보람 있고 의미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기쁨’. 바로 예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꿀 같은 달콤함이다.
***[역경의 열매] 류광열 <7> 농원을 '홀리랜드'로… 산책로와 카페·갤러리 조성
자연 속에 주님의 임재하심 느끼게… 영육의 양식 제공 목표… 전도지 비치
삼성교회 교우들이 2013년 10월 갈릴리농원을 방문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류광열 장로가 기도하고 있다.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방촌로 삼성교회는 내겐 '신앙의 못자리'와 같은 곳이다. 삼성교회를 섬기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12년 5월 27일 주일이었다. "주님, 55년 동안 삼성교회를 통해 파주시 탄현면 일대에 복음의 향기가 전해지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도 주님이 인도해 주옵소서."
이날 삼성교회는 창립 55주년을 맞아 기념예배를 드렸다. 나는 삼성교회 55년사 편찬위원장으로서 마이크를 잡았다.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향수가 아니라 미래를 지혜롭게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경륜, 은총을 깨닫고 이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삼성교회 55년사를 발간하게 됐습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시골교회 장로로 교회를 섬긴 것만으로도 벅찬 일인데 모(母)교회의 교회사 발간위원장을 맡은 건 큰 기쁨이었다.
인생 중·후반기를 지나면서 신앙은 나를 세우는 기둥이자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됐다. "성공을 위해 달음질친다고 하나님을 잊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늘 주님 안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기로 해요. 사업을 하고 있지만 그건 주님의 일을 잘 하기 위한 방편이에요."
아내 홍인순 목사와 나는 요즘 늘 이런 대화를 하며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통해 나의 삶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겸손을 배운다.
갈릴리농원은 평범한 식당으로만 둘 수는 없었다. 어느 날부터 식당을 찾는 수십만명의 손님들이 복음의 황금어장에 들어온 전도 대상자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불현듯 마음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이렇게 많이 보내주는 데도 왜 전도하지 못하느냐."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과 같이 마음 깊숙이 박혔다.
식당 입구에 전도지를 비치한 것도 이 생각이 든 뒤였다. 겨우 이 정도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얘들아, 난 이곳 갈릴리농원을 '홀리랜드'로 꾸밀 작정이다. 우리 가족 모두 이 일을 위해 힘을 모으자.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쉼을 얻고 가길 바라고 있다. 우리가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여기 오는 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니."
세 명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홀리랜드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다. 이미 아내와는 상의를 마친 뒤였다. 육의 양식인 장어와 더불어 홀리랜드를 통해 영의 양식을 부어주자는 소망을 품게 된 것이었다.
결정을 내린 뒤에는 식당 뒤편에 카페 '소솜'과 갤러리를 만들었다. 갈릴리농원 전체의 조경공사도 해 아담한 산책로도 조성했다. 손님들이 밥만 먹고 서둘러 돌아가지 않고 자연 속에서 쉬고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시골에 이렇게 근사한 공간이 있었네요" "점심 먹고 산책하며 쉬었다가 저녁까지 먹고 갑니다" "신앙생활 하시나 봐요. 저도 교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감사하면서도 더욱 겸손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주님. 파주의 갈릴리농원에서 이웃을 섬기고 기도하면서 주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고 싶다.
***[역경의 열매] 류광열 <8> 72세, 갈릴리교회 건축 새 비전 품다
88세에 꿈 말하는 日 농장주 만나 충격… 은퇴 생각 접고 ‘주님 일 하겠다’ 다짐
갈릴리농원 대표 류광열 장로(왼쪽)가 카페 소솜에서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장로님. 카페 이름인 ‘소솜’이 무슨 뜻이에요?” 갈릴리농원에 이런저런 건물들이 들어선 뒤 많은 분들이 유독 ‘소솜’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 그때마다 난 “소솜은 내 삶의 이야기입니다”라고 했다. 순 우리말인 소솜은 세찬 소나기가 내린 뒤 활짝 갠 눈부신 순간을 말한다. ‘내 삶의 이야기’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좌충우돌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기억해야 할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이기도 하다. 영원한 실패와 좌절은 없다는 희망이 이 단어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2014년 어느 날 갈릴리농원 뒷산에 올랐다. 산 위에 올라오니 온 세상이 고요한 느낌이었다. 갈릴리농원을 내려다보니 오후 3시가 넘었는데도 계속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연중무휴인 농원에는 영업시간 동안 손님이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 감사한 일이다. 이 자리를 홀리랜드로 조성하겠다고 기도한 뒤 시작한 ‘그랜드 플랜’도 얼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계획했던 것들이 마무리 된다고 생각하니 나를 돌아보게 됐다. 어느덧 72세가 됐다. 20대 청춘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믿기질 않았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제는 손주들 재롱 보고 교회봉사 하면서 여생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하며 하산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전화 한통이 왔다. 전국새농민회 사무실이었다. 이 전화가 내 인생 마지막 도전의 출발점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새농민회입니다. 이번에 일본 농림수산성이 새농민회 전·현직 임원들 몇 분을 초청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 일대의 농장을 견학하는 일정인데요. 동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굳이 이 나이에 무슨 견학인가. 후배들에게 양보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입에선 “한번 가봅시다”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게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도착한 곳은 홋카이도의 한 농장이었다. 홋카이도에서도 가장 좋은 농장으로 평가받는 그곳은 대표가 72세 때 땅을 구입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내가 그곳을 방문했던 2014년에 88세이던 회장은 연로했지만 눈빛이 살아있었다. 안광(眼光)이 느껴질 정도였다. 금융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회장은 70세가 넘어서야 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6600㏊를 샀고 당시 550㏊의 개발이 완료된 상태였다. 농장이 그림과도 같았다. “눈이 많이 내리는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농장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하는 감탄이 나왔다. 그때 그 농장의 회장이 했던 발언이 잊히질 않는다. “저는 이 땅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낙원을 만들고 싶습니다. 관심 가져 주십시오.” 이제 ‘겨우’ 72세였던 내가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내 앞에서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낙원을 만들겠다’는 사람의 나이가 88세 아니던가. 충격이었다. 그 순간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결심했다. 죽는 날까지 주님의 일을 하겠노라고. 당시 일본에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이 바로 ‘갈릴리교회’를 건축하는 동력이 됐다. 큰 꿈을 꾸니 주님께서 건강도 주셨다. 아직 시력도 좋고 귀도 잘 들린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역경의 열매] 류광열 <9> 누구나 언제든 와서 기도하는 열린 교회로…
갈릴리교회 늦어도 내달 초 완공, 나무 한 그루 고르는 일조차 심혈
갈릴리농원 대표 류광열 장로가 지난 21일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방촌로 갈릴리교회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세상에서 가장 좋은 농장으로 만들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일본 홋카이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인 노신사의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계속 떠올랐다. 녹화된 영상이 반복 재생되는 듯 선명했다.
그분은 72세 때 엄청난 비전을 꿈꿨는데 나는 같은 나이에 편안하게 살 생각을 하다니 몹시 부끄러웠다. ‘주님. 저도 이대로 끝낼 수 없겠습니다. 용기와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세요.’ 머리는 복잡했지만 입으로는 계속 기도하면서 출국장을 빠져 나왔다.
홀리랜드로 돌아왔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겠다는 마음으로 꾸민 공간이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집이 없었다.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정한 뒤에는 묵묵히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다.
예배당이 들어설 장소는 홀리랜드에서 가장 양지 바른 곳으로 정했다. 어느 곳에서도 교회가 보이는 장소였다. 교회 이름은 ‘갈릴리’로 지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인 베드로의 활동무대가 갈릴리호수 아니었던가.
살아오면서 많은 집을 지어왔지만 교회는 그동안 지었던 집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여 짓기로 결정했다. 교회 건축과 함께 홀리랜드의 조경 공사도 하고 묵상을 위한 산책로도 조성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꿨다. 갈릴리농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왔다 돌아가는 꿈이었다. 늘 보는 장면이라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교회를 짓는 중이어서 그런지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었다.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우리 집에 오는 많은 분들이 모두 전도대상이라는 의미 아니겠어요”라고 했다. 마치 “너는 왜 보내주는데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니”라는 주님의 음성 같았다.
갈릴리교회의 방향성이 정해졌다. ‘일주일 내내 사용할 수 있는 교회로 만들자’. 우선 70명 직원들이 주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는 친교의 공간이 되도록 하고 누구든 예배당에 들어와 기도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크리스천 가수와 배우들도 언제든 와서 공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공연장도 만들기로 했다. 일산과 파주 지역을 조사를 해보니 가수와 배우들이 꽤 많이 산다는 걸 확인했다. 이들이 무대에서 주님이 주신 재능을 뽐내고 이를 보는 우리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언제든 교회 공간을 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다짐을 교회설계에 모두 담았다. 늦어도 다음 달 초 완공되는 갈릴리교회는 찬양과 말씀이 살아있고 기독문화가 숨 쉬는 공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건축 과정에서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 건축의 매 순간마다 정성도 기울이고 있다. 교회 마당에 심을 소나무를 고르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주님의 집을 소홀하게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에 묻어있는 이곳은 하나님의 집. 주님 숨결이 가득한 곳,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길이 여기 모든 이들에게 머무는 이곳은 하나님의 집. 주님 사랑이 가득한 곳, 주님 옷자락 이곳을 덮으시고 주님의 얼굴 우리에게 보이소서. 이곳에 소망이 있으리라. 주님의 교회 다스리소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소서. 이곳은 하나님의 집.”(CCM ‘하나님의 집’)
***[역경의 열매] 류광열 <10·끝> 교회서 석양 보노라면 저절로 “오늘도 감사합니다”
수해로 인한 3년 고난은 ‘산 신앙교육’… “모든 것을 주께 맡기라” 자녀들에 강조
갈릴리농원 대표 류광열 장로(앞줄 오른쪽)와 가족들이 2015년 5월 삼성교회 창립 기념주일을 맞아 교회 본당에 모였다.나는 주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나의 부족한 모습을 돌아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믿는 자로서 부끄럽던 때였다. 죽음의 기로에 설 정도의 고난을 겪고 나서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았다. 지금 돌아보면 수해로 인한 ‘3년의 고난’은 내게 ‘산 신앙교육’의 시간이었다. 그 시절의 아픔이 없었다면 나는 어느 정치인의 유혹에 넘어가 적성에도 맞지 않는 정치를 하다 더 큰 절망을 경험했을 수 있다. 주님께서 작은 고난으로 큰 고난을 피하게 하셨다고 생각하니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살면서 터득한 지혜는 또 있다. 무엇을 결정하든 주님께 물어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나와 주님의 연결고리가 든든할 때만 주님과의 소통이 가능하다.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도 가져야 한다. 그 믿음이 결국 기도의 응답을 부른다.
나와 내 자녀들은 한동네에 모여 산다. 주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의 결실인 자녀들과 떨어져 살기 싫은 마음에서다. 아들 셋에 며느리 셋, 손주들까지 합치면 18명의 대식구다. 어린 손주들과 뒹굴며 살다보니 ‘할아버지’를 찾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나는 이 아이들을 보며 “주님이 이 아이들을 위해 디자인하신 재능을 부모들이 발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즘 젊은 부모들을 보면 교육열이 무척 뜨겁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드시면서 모두 공부 잘하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는 아이들로 만들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 아이에게만 심어준 재능, 바로 주님이 디자인하신 그 아이의 본 모습이 있는 법이다. 나는 농사꾼으로 살라고 디자인된 사람이다. 평생 자연 속에서 살라고 만들어 주셨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한 행복한 사람이다.
신앙의 가정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 또한 자녀들을 키우면서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마치 내가 다 한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에 빠지는 순간, 매너리즘에 매몰되는 것이다. 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 속에 놓인 작은 조각이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재를 마치면서 눈물의 기도로 나와 우리 가족 모두를 든든히 세워준 아내 홍인순 목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홍 목사의 신앙과 의지, 지혜가 없었다면 난 3년 수해를 딛고 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갈릴리교회가 세워진 뒤 홍 목사는 본격적으로 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나는 교회의 ‘자원봉사 관리소장’으로 아내의 사역을 도울 예정이다.
갈릴리교회 건축을 돌보는 일이 요즘엔 하루의 시작과 끝이다. 교회의 야외 테라스에 서서 석양을 바라본다. ‘주님, 오늘 하루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말씀을 묵상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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