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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홍해를 건너가려면
출애굽기 14:10-25
세 살 먹은 딸이 엄마와 함께 교회에 갔습니다. 성가대 찬양이 끝나고, 목사님의 설교가 아주 열정적으로 선포되는 은혜로운 순간에 갑자기 딸이 소리를 칩니다. "엄마! 쉬 마려워!"
엄마는 너무 창피해서 얼른 딸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의 오줌을 누이고 난 후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너 다음부터는 쉬 마렵다고 하지 말고 '노래하고 싶어요'라고 해라. 알았지"
며칠 뒤에 할아버지가 집에 다니러 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면서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손녀가 할아버지를 깨웠습니다. "할아버지, 노래하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한밤중에 노래를 하면 모두가 깰 것 같아서 손녀에게 이렇게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할애비 귀에다 대고 하렴."
우리가 운전을 하다보면 길을 잘못 들어서서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경우에 간판이 붙어 있는데 "NO EXIT", "나갈 길이 없다"라는 사인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나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 절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를 가장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은 자신이 살아갈 삶의 자리에서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일 것입니다. 노력하고 몸부림 쳐봐도 어떤 변화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을 때에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희망보다는 절망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이 땅의 청소년 뮤직 그룹을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HOT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들이 1996년에 "전사들의 후예"라는 곡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이 곡은 당시에 학교 폭력이 아주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가 되었는데, 청소년들이 피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던 그들의 심경을 대변함으로써 쉽게 십대들의 우상이 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정신적인 우상으로 군림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아 니가 니가 니가 뭔데 나를 때려" 가사의 중간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짓밟았어. 하나 남은 꿈을 다 가져 갔어. 길을 찾아 봤어. 아무 데도 없어" 길을 찾아 봤어 아무 데도 없어. 길을 찾아 봤지만 나갈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결의 전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길을 찾아 봤지만 나갈 길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인 14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여 바다와 믹돌 사이에 장막을 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다는 홍해 바다입니다. 그리고 믹돌이라는 말은 본래 망대, 탑, 요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애굽 사람들이 아시아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 효과적으로 이 요새를 사용해 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면서 그들이 바다와 믹돌 사이에 진을 쳤다는 것은 더 이상 빠져나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지역에서 캠프를 쳤을 때에 앞에는 홍해 바다요, 좌우에는 천연의 요새인 절벽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바로가 이 모습을 보고 저들은 완전히 갇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지금 꼼짝없이 갇혀 버렸습니다. 우리말에 사면초가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바로 군대의 칼에 찔려서 죽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공포의 순간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원망도 불평도 분노도 터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순간에 홍해를 가르셔서 죽음의 막다른 길로 여겨지던 홍해를 생명의 길로 바꾸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왔던 바로의 군대를 오히려 물 속에 수장시켰습니다. 더 이상 살아날 방법도 희망도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9절에서 그들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길을 찾아 봤지만 나갈 길이 없었던 그들이지만 절망의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오직 믿음 때문이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한 믿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건너가기 위해서 가졌어야 했던 신앙적 자세는 무엇이었을까요? 동일하게 우리가 10년을 준비하는 희망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앞에 조용히 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광야에 갇힌바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식이 들려옵니다. 바로가 군대를 거느리고 추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입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요, 양쪽에는 천연의 요새 절벽이 그들을 가두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그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본문 10절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눈을 들어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위에 미친지라. 이 모습을 본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이냐?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느냐?"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본문 13절과 14절 말씀입니다. 13절과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기에 보면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제발 조용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머물러 서 있어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위기를 느끼게 되면 그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몸부림은 스스로를 더 혼란시키고 절망스럽게 만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먼저 할 일은 가만히 있을 줄 아는 것입니다. 조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 속에서 살아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살아나려면 힘을 빼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에도 그 사람이 어떻게 해 보려고 몸부림칠 때에는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물 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이제는 포기했다고 여겨질 때에 다가가서 그를 안고 구출해 줍니다. 물 속에 빠진 사람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살기 위해서는 먼저 힘을 빼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을 주면 줄 수록 인생은 더 힘이 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빼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몸부림을 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힘을 좀 빼고, 주님 앞에 마음을 여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옆에 사람을 한번 보십시오. 힘 주고 사는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나…. 관상을 보시면서 옆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힘 빼고 살아요" 내가 아무리 하라고 말해도 절대로 옆으로 보지 않고 나만 째려보고 힘주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노는 것을 관찰해 보면 미성숙한 아이들의 특성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쉴새없이 움직입니다. 부산하게 돌아다닙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의 특성은 그냥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떠들고 부산합니다. 여기 가서 이 소리 듣고, 저기 가서 저 소리합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안고 사는 사람처럼 야단을 떱니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 아이들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른 아이들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들에게 가만히 있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에 이 가만히 있음은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활동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가만히 있음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안과 불평을 잠재우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여호수아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앞에 두고 엿새동안 한바퀴씩 돌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일곱째 되는 날에는 일곱바퀴를 돌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여기에서 '들레다'는 말은 '크게 소리를 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잡다한 개개인의 소리를 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안과 불평을 잠재울 수 있는 영의 침묵입니다. 우리의 잠자던 마음을 다시 일깨우는 성찰이고, 언어를 넘어선 말없는 침묵의 기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고통스럽고 답답한 환경을 만나 하나님 앞에 말보다 더 위대한 침묵으로 주님 앞에 마음을 내려놓고 가만히 있어본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뢰의 가장 중요한 영적인 연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훈련을 가리켜서 독거한다(solitude)라고 말했습니다. 독거,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독거의 시간을 가리켜서 퇴수한다, 로마카톨릭에서는 피정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피해서 조용히 있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 자기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나를 복잡하게 하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정신적인 거리를 두고 내 상황을 객관화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삶의 자세가 때로는 필요합니다.
여러분, 답답하거든, 혼란스럽거든 잠시 조용히 해보십시오. 너무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다니지 마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 내 삶의 주인 앞에 조용히 머물러 서 보십시오. 제발 입을 닫으십시오. 대신 마음을 여십시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스럽고 곤고하고 복잡한 문제의 환경만 집중적으로 보지 마시고 문제의 저 건너편, 환경의 저 건너편에서 여전히 나를 향해서 조용히 변함없는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또 다른 기적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미소를 바라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기에 앞서서 먼저 배워야만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떠들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몰려다니면서 소리치는 백성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삶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 앞에 조용히 머물러서는 것, 이것이 10년의 비전을 향하여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된 믿음은 주님 앞에 조용히 설 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한해를 살아가면서 주님 앞에 조용히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날마다 때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이 홍해를 건너 10년의 광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가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할 교훈은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단순한 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조용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용할 때, 잠잠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말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듣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가 너무 부산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켜보십니다. 잠시 일을 중단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잠시 말을 중단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에 무엇을 말합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궁극적인 소망이 있다. 하나님 안에 해답이 있다. 하나님 안에 구원이 있다. 그렇다면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에게 시간을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음성에 민감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만이 내 인생에 대답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귀 기울임인 것입니다. 들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대신 싸우겠다. 하나님의 싸움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 문제를 대신 담당하고 대신 일하겠다. 네가 가만히 있고 그것을 나에게 가져온다면 내가 대신해서 이 싸움을 싸워줄 것이며, 그리고 길을 열 것이라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길을 찾아봤지만 나갈 길이 없는 그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위로였을까요? 인간의 방법으로는 어떤 해결의 전망도 없는 그들에게 이 말씀은 얼마나 안식이었으며 소망이었을까요? 이 음성을 듣는 순간 그들은 절망을 넘어서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일하게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의 만지심과 치유하심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환경이 내 가슴을 조여오거든 제발 주님 앞에 머물러 서서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자주 펼치십시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때로 우리의 영혼이 잠잠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오늘의 상황 속으로 다가오셔서 말씀하실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린 폐인이 쓴 [듣는 기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말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듣는 것입니다. 내가 말을 한 것은 내 편에서 한 것입니다. 이제 응답을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저자인 린 폐인과 그의 친한 친구 몇 명이 듣는 기도를 연습하기로 결심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모여서 기도하면 힘껏 부르짖고 외치다가 "아멘"하고 가버립니다. 그런데 이들은 기도한 다음에 듣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로 합니다. 10분, 15분, 30분, 완전하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훈련과 동시에 그들은 놀라운 많은 일들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실제로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놀라운 사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잠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들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부부의 대화에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듣기 훈련을 하기 시작한지 어느 날 린 폐인의 친구였던 코니 보에나라는 자매가 마침 크리스마스 때가 되어서 쇼핑을 위해서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식품과 선물을 몇 가지 사고 카트를 밀면서 계산대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자기 안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가지 마. 멀리 돌아가. 앞으로 가지 마" 이 음성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잠깐 기도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음성입니까?" 그 마음 속에 어떤 평안이 왔습니다.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구나. 카트를 돌려서 제일 끝 편에 있는 계산대를 통과해서 막 요금을 지불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총소리가 났습니다. 보니까 자기가 나가려고 하든 계산대에서 총소리가 나고 피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자매는 내가 만약 이 듣는 연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이 위기의 순간에 내게 경고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영혼들에게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한 해를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 혼자 와서 부산하게 외치다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주 앞에 서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 소리가 아닙니다. 누구의 소리도 아닙니다.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닌 오직 주님의 소리입니다. 오직 주님의 음성에 민감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될 때에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산 증인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건너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년의 비전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신앙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계속해서 그냥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으셨다면 이제 그분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여러분,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한참 기도를 하고 있는데 기도를 중단시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야, 너는 어떻게 해서 계속 부르짖고만 있느냐? 내가 들었어. 이제는 내 말대로 할 때야. 부르짖지만 말고 이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보십시오. 홍해 바다는 아직도 앞에서 출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홍해가 갈라진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홍해 바다가 아직도 출렁이는데 앞으로 나가라는 것은 갈라질 것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지팡이를 든 채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이끌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내 밀었던 손, 그 손이야말로 믿음의 손이요 순종의 손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고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곧 순종이요 전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10년을 준비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구체적인 헌신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역사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멀끄러미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가 정한 약속의 비전을 향해서 구체적으로 헌신하고 몸부림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광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가 열릴 때마다 이따금씩 찬양을 하는 분들 가운데 한국인 소경 자매 한 분이 있습니다. 킴 윅스라는 이름을 가진 분인데, 이분은 6.25때 두 눈을 잃고 고아로서 미국에 입양이 된 분입니다. 미국에 와서 인디아나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세계적인 성악가가 된 분입니다. 이 분이 이런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인도하는 분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님, 앞에 층계가 있어요, 발을 올려놓으세요. 앞에 물이 있어요, 옆으로 피해 가세요. 사람들이 있거든요, 오른쪽으로 가세요.' 나를 인도하는 분들은 10마일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100m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나를 인도하는 그분들의 인도를 내가 신뢰하고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언제나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하고는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이 홍해를 건너가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바른 신앙생활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10년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1년 후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하루 후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 내게 말씀하시는 그분, 나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쫓아 믿음으로 순종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보면 나는 홍해 바다를 지나고 광야를 지나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달할 것을 믿습니다. 동일하게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3년 후에 될 10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이 비전을 향해서 당장 이곳에서 이루어갈 구체적인 헌신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이 하루를 위해서 헌신하고, 전도하고, 충성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십년의 역사를 우리들에게 안겨 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이 헌신과 전도와 충성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10년의 광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이 홍해를 건너야만 합니다. 이곳에는 사람의 소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고 답답함과 절망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는 잡족들의 소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언덕 위에서 구경만 하는 요나와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홍해를 어떻게 건너갈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홍해를 건너가기 위해서 어떤 신앙적 결단을 하셨습니까?
먼저 주님 앞에 오십시오. 잠시 그분 앞에 조용히 머물러 서 보십시오.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고통과 짐을 그분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이제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들려오거든 내 앞에 있는 홍해 바다가 아무리 깊고 넓은 불가능의 강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어나셔서 믿음의 한 걸음을 내 디디십시오. 순종의 한 걸음을 내 디디십시오. 헌신의 한 걸음을 내 디디십시오. 머지 않아 바람이 불어 올 것입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는 마침내 갈라 질 것입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에 길이 난 것을 여러분은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바로의 군대가 물결에 장사된 것처럼 우리를 괴롭히던 어둠의 세력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전진하는 놀라운 행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의 현장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절망과 두려움의 골짜기에서 거품처럼 올라오는 인간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다 멈추십시오. 그리고 주 앞에 서서 나를 향한, 우리들을 향한, 우리 가정과 직장과 사업을 향한, 그리고 내가 섬기는 영신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내 디디십시오. 그 걸음은 좌절과 절망의 홍해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인도하시는 신앙의 체험 현장으로 바꾸어 갈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무너뜨릴 것 같았던 홍해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홍해가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붙들고 이 한 주간도 헌신과 전도의 여정을 계속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꿈과 비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