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경외심(출 3:1-12)
* 오늘은 우리 교회의 강령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경외심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경외(敬畏)란 공경할 경(敬)과 두려워할 외(畏)가 합쳐진 말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세 번째 행동강령은 “감사와 기쁨,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와 성례에 참여한다”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 강령은 예배와 성례의 기본 자세를 감사와 기쁨, 두렵고 떨림으로 규정한다. 감사와 기쁨은 별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두렵고 떨림에 대해서는 조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 개신교의 예배, 가톨릭의 미사, 불교의 예불, 유교의 제사 등 이름과 형식은 달라도 모든 종교의 예식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대상에 대하여 존경의 뜻을 담고 있다. 개신교의 예배는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을 의미하지만 단어의 본래 뜻은 예(禮)를 갖춰 절(拜)을 한다는 것이다. 절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는 불교일 텐데 한국 개신교에서 이 단어를 선점했기 때문인지 한국 불교는 예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우리가 절을 하지는 않지만 절의 기본 의미 중 하나는 상대에 대한 존경과 참회, 그리고 하심(下心)이다. 하심(下心)은 자신을 낮추는 마음으로 초월적이고 무한한 대상에 대해 경외심을 느낄 때 드러나는 마음 상태라 할 수 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절을 할 때의 마음 상태-상대에 대한 존경과 참회, 그리고 하심(下心)-로 우리가 믿는 초월적 대상 즉 하나님께 예를 갖춘다는 말이다. 그런 마음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경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기원전 9~2세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상이 만들어진 ‘축의 시대’라고 규정하는데 학자들은 그 씨앗이 기원전 13~12세기부터 뿌려졌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 인도에서는 힌두교, 이란에서는 마즈다이즘(혹은 조로아스터교), 소아시아에서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통한 그리스 정신의 발현,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유일신정신세계 진입 등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비록 초보적인 단계지만 원시성, 야만성을 벗어나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비로소 시작된 시기라 할 수 있다.
* 그 시기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양치기로 세월을 보냈다. 히브리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집트 궁정에서 자라면서 호의호식했던 그가 동족의 일에 간섭한 결과로 이집트 병사를 죽이고 미디안으로 도피해 사막의 별을 보며 40년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양떼를 몰고 가던 모세는 매일 다니던 길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사막의 떨기(가시덤불)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나무가 타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 초월적인 현상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가려하자 그 나무가운데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천둥소리처럼 물리적인 소리인지 마음의 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한 모세가 떨기나무에 다가가자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본문은 이 목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야기들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 이야기들을 수백 년 동안 입으로 전하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 기록으로 남긴 사람들이 민족의 영웅 모세와 하나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이토록 소박하게 설정한 이유는 뭘까?
*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은하수를 보며 경외심을 느꼈을 것이다. 사막에 다녀온 사람들은 사막 한가운데 섰을 때 인간의 시선이나 생각을 가로막는 인위적인 장애물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인간의 명상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인간은 절대적인 나약함 속에서 절대 자연의 무한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만 든다는 것이다. 아마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 주요 고등종교들이 사막에서 발생한 이유도 그런 사막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 그런데 모세는 자연의 장엄함이나 광활함이 아니라 평소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던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처음에 순수하게 시작했던 종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신을 특별하고 화려한 공간에 가두기 때문이다. 제도화된 종교들은 특정한 공간만이 거룩하며 그곳에서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현혹한다. 유대교의 화려한 성전이 그렇고, 기독교의 거대한 성당이나 교회가 그렇다. 이슬람교의 사원(모스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지난 40년 동안 지겹도록 다녔을 그 일상적인 장소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 이것이 출애굽기의 출발점에 대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최고의 가르침은 그 곳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하나님의 계심을 느끼는가 느끼지 못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미디안으로 쫓겨 와 40년 동안 광야에 살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던 모세가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때 바로 그가 서있는 그 장소는 일상의 장소에서 거룩한 장소가 바뀌기 된다.
* “산은 높아서 명산이 아니라(山不在高)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有仙則名). 물이 깊다고 신령한 물이 아니라(水不在深), 용이 있으면 신령한 물이다(有龍則靈)”라는 시가 있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크고 화려해야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좋은 교회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아무튼 모세는 일상 속에서 거룩한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경외심이다. 그리고 평소 무심하게 바라보며 지나쳤던 떨기나무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일상적인 공간이었던 곳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순간 거룩한 장소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거룩함을 드러내는 표시는 신(Sandals)을 벗는 행위이다. 우리에게는 별것 아닌 신을 벗는 행위가 왜 중요하게 언급된 것일까? 두 가지 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신은 인간의 타락된 품성과 행위를 상징한다. 즉 이는 일상의 행위를 통해 온갖 먼지나 때로 더러워진 신(->마음)을 벗으라는 말이다.
* 다음으로 신은 모세와 같은 유목민들의 매우 소중한 재산이다. 그 신을 벗으라는 말은 나 중심의 이기심을 버리라는 말이다. 신을 벗으라는 말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일상의 행위를 통해 더러워진 신(->마음)과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벗어버려야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 얻은 깨달음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서 있는 어떤 장소라도 거룩한 땅’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을 때 그는 비로소 민족을 이끌 지도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 지난주에 올바른 기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비는 간구(‘테에시스’와 ‘아이테오’)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 마음의 문을 하나님을 향해 열어놓는 기도(‘프로슈게’)의 차이를 설명했다. 성숙한 기도인 프로슈게가 “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일”(키르케고르)인 것처럼 진정한 예배 또한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또는 준비되는)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변화는 모세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신을 벗고 감사와 기쁨,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가능하다.
* 심리학에서 경외심이란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대상과 마주했을 때 솟아나는 온 몸의 전율 같은 감정을 가리킨다. 그 대상은 밤하늘의 은하수, 광활한 대자연, 형형색색의 오로라와 같은 대자연일 수도 있고 절망이나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고 인간승리를 일궈낸 사람들의 영웅적 이야기, 또는 감동적인 예술작품을 만났을 때도 경외심을 느낄 수 있다. 경외심의 대상은 한 가지만이 아니고 다양하며 사람마다 느낌의 강도가 다를 수 있지만 이런 경외심은 가슴을 벅차게 하는 감정을 넘어 친사회적(이타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경외효과 awesome effect)
* 지난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폴 피프 교수(심리학 및 사회행동학)는 경외심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후 개인에 대한 강조를 줄이는 방식으로, 자기 이익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번영을 증진하게 만드는 사회적 기능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264명의 피험자를 모집한 후, 그들을 크게 3그룹으로 구분해 대자연의 위대한 장관을 담은 BBC 다큐멘터리 <Planet earth>의 일부, BBC 코미디 프로그램의 아주 재미있고 놀라운 장면, 주방 싱크대의 사용법을 보여주었다.
* 실험 결과 타인에 대한 첫 번째 그룹은 다른 두 집단에 비해 스스로 작아지는 느낌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월등히 증가했다. 연구진은 신성한 경외감만이 아니라 다소 부정적인 경외감도 같은 효과를 가져오는지도 확인했는데 결과는 비슷했다. 화산폭발, 토네이도, 물에 떨어진 우유 한 방울의 확산 모습을 초당 5000장으로 찍은 비디오 등을 본 참가자들은 주방의 싱크대 사용방법을 본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 작아지는 느낌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월등히 증가했다. 결국 경외심은 사람들을 겸손과 배려와 친사회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감정인 것이다.
* 우리는 이런 경외심을 예배와 성례를 통해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예배당에 모여 드리는 행위만이 아니라 기원전 13세기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일상 속에서 만나는 거룩함을 체험하는 시간, 즉 창조세계의 모든 아름다움과 거룩함에 경외심을 갖고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들을 통해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일상의 번잡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스스로 작아지면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의 주변을 밝히고 신선함을 유지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