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욥, 하나님께 개기다
본문 : 욥기 ?:?
I. 여는 말
1. 문제제기
1) 지난 주 요약으로 시작할까?
지난 주, 욥기는 네 잘못 아니야, 라고 고난 당하면 스스로 자책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우리에게 네 잘못 아니라고 다독이고 토닥여 주는 책이라고 했다.
2) 하지만, 중요한 진실 하나를 애써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구 잘못이냐’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당하는 고난이 내 잘못인 경우와 내 잘못 아닌 경우로 구분된다고 지난 주 말했는데, 욥의 경우, 그럼 누구 잘못으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3) 욥기는 신성불가침의 경전이지만, 역으로 신성모독적인 책이기도 하다. 하나님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설교 주제/논점에서 좀 벗어나는 듯 하다. 다시 볼 것>
2. 주장 제시 혹은 핵심 : 욥기는 소극적 차원에서 ‘네 잘못 아니야. 자책하지마, 죄책감에 빠지지 마’라는 위로만 하는 책이 아니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개기고, 대들고, 뻗대고, 지랄해도 된다’는 책이다.
II. 본문 설명
1. 욥의 친구들 반응에서 시작하자.
1) 그들은 욥의 말에 대해 갈수록 거칠고, 강압적으로 회유하고 설득하고, 나중에는 죄인 만들기 프로젝트를 가동시킨다.
2) 왜 그런가? 그들이 보기에 욥은 자신이 무죄하다고, 무고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보기에, 욥은 ‘하나님, 당신이 내게 이런 부당한 고난을 주셨다’고 항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그런 감정과 반응을 보여주는 구절을 한 두개 인용할 것.
2. 그럼 욥이 어땠길래 친구들이 저리도 광분해서 욥에게서 없는 죄를 찾아 내려고 하는 걸까?
1) 욥은 한편으로 자신이 무죄하다고, 이런 고난 받을 만큼 죄 지은 것이 없다고, 친구들이 득달 같이 달려들어서 자기를 죄인 만드는데, 나는 그런 죄인 아니라고 호소한다. 자신의 의로움과 정당성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내려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위로를 얻고자 한다.
2) 하지만, 그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항의한다. 당신이 왜 내게 이런 고난을 허용하시고, 묵인하시고, 방관하시느냐고 따진다.
3) 그 언어가 거칠다. 경건하기 그지 없는 친구들에게 욥의 날 것 그대로의 언어들, 박미라가 말한 “미친 년 발설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화들짝 놀라서 펄쩍 뛴다. 예쁘게, 착하게, 우아하게 말하지 않는 욥의 언어가 그들의 전통적, 인습적 언어 관행을 깨드리기에 그들은 참지 못한다.
4) 그 논리도 거칠다. 욥의 논리를 따르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즉, 욥이 무죄하고 무고하다면, 그럼 욥이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옵션이 없다. 하나님 외에는.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기에 죄 없는 자에게 고난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보이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당신의 선한 백성에게 이유 없이 고난을 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하면서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 고난을 주는 악한 하나님으로 만든다. 그래서 친구들은 길길이 날뛰는 것이다.
5) 욥이 소극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무고를 항변하는 구절
6) 욥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하나님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
3. 결과
1) 42장에서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욥에 대해서도 잘못 말했다. <간단하게 설명할 것>
2) 그래서 욥의 손을 들어주면서, 욥에게 사죄를 청할 것,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는 엄중한 경고를 날린다.
3) 물론, 욥에 대해서도 주의를 준다.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은연 중에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폭풍 속 연설의 핵심은 욥의 한계와 경계를 보여주는 말로 가득 차 있다.
4) 결론 : 하나님께 개기고 대든 욥의 손을,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욥이 이겼다고, 옳았다고 말씀하신다.
III
1. C. S. 루이스가 <헤아려본 슬픔>의 그 유명한 문장을 그대로 읽어줄 것. 그리고 이 말이 누구의 말인지 물어볼 것.
2. 바로 그가 20세기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인 루이스이다.
<흠, 맥락을 살펴서 사용할 것>
3. 내 이야기를 조금할까?
IV
그러면 왜 욥은 이리도 하나님께 지랄 발광을 하고, 그것을 성경은 용인할까요? 이를 위해서 히브리적 사유와 헬라적 사유를 대결해 보려 한다. 그러면 보인다.
1. 헬라적 사유 : 시시포스 신화와 특히 프로메테우스 신화 : 인간에게 유익을 끼쳤는데도 도리어 신의 진노를 사서 영원히 고통 받는다.
2. 히브리적 사유 : 신에게 저항한 사람들이 도리어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1) 대표적인 경우가 ‘야곱’이다. <내 안의 야곱 DNA>. 그리고 요나, 예레미야, 하박국, 시편 등이 그렇다.
3. 차이 : 신관 혹은 신론의 차이
제우스는 자기에게 저항하는 자를 무참하게 가혹하게 탄압하지만,
여호와는 자기에게 저항하는 자를 도리어 믿음이 좋은 자로, 칭찬한다.
로흐만의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냐>(현대신서)를 소개할까?
V. 하나님이 아버지인가, 아저씨인가?
1. 질문 : 중년 여성들에게 묻는다. 친정 엄마에게 존댓말을 하는가? 거의 반말 비스무리하게 하지 않는가?
2. 그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3. 그러나 왜 그렇게 하는가? 간단하다. 엄마니까.
4. 도전
엄마 아빠에게 하듯이 하나님께 대들고 개기고, 뻗대본 적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은 아저씨이다. 이웃집 어른이다.
만약 있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은 아빠!
5. 내 이야기 :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에서, 그리고 <욥, 까닭을 묻다>에서 나는 하나님께 지랄 발광을 떨었다.
왜?
간단하다.
하나님은 내 아빠니까.
아빠니까, 아빠에게 가서 울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빠 하나님은 다정한 분이시라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하나님이시라서, 그런 아들을 두었던 아빠라서, 우리 심정을 잘 알고 잘 받아주신다.
6. 다시 도전한다.
하나님께 한 번도 개겨 본 적이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쩌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빠 하나님’으로 영접한 적이 없다고 조심스레 말할 수 있다. 그냥 종교적 신, 초월자일뿐이다.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을 수 있다.
7. 나는 우리 하나님이 참 좋다.
내 지랄 발광을 받아주는 하나님, 그리고 잘 했다고, 괜찮다고, 얼마든지 하라고, 더 해도 된다고 말해 주는 하나님이 너무 멋지고 좋고, 감사하고, 그야말로 엄지 척이다.
마무리는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