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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장 17-22절. 애찬과 성찬에 대한 교훈. 요약설교
1. 예배의 질서에 관한 11-14장 중에서, 오늘 본문인 11장 17-22절은 ‘애찬’(愛餐: love feast)에 관한 교훈입니다.
2. 원래 초대교회 때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행할 때에, 먼저 ‘애찬’ (아가페: Agape)을 행하고, 그 후에 좁은 의미의 ‘성찬’을 행했습니다. (이상근 152쪽, NIV-SB p.1749, Blomberg p.228)
이러한 ‘성찬’(주의 만찬)은 ‘세례’와 함께 주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2대 성례’(sacraments)로서 유명합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이처럼 중요한 성찬을 그릇되게 행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 잘못이란 두 가지였습니다.
(1)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을 행할 때에, 부유한 성도들은 먼저 와서 배불리 먹고 취해 있었으며, 가난한 성도들은 늦게 와서 배고파했다는 것입니다.
(2) 부유한 성도들은 ‘애찬’을 많이 먹어서 배부르고 취해 있었기 때문에, ‘성찬’을 모독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3) 반면에, 가난한 성도들- 주로 노예 출신 성도들-은 뒤늦게 와서, 애찬에 참여도 못하고 배고픈 가운데서 ‘성찬’에 참예하면서, 성찬이 주님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떡과 포도즙을 많이 먹고 마셨습니다.
(4) 이처럼, 애찬식이 올바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성찬식’마저도 부자는 배불러서 성찬을 모독하고, 가난한 자는 배고파서 성찬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러한 신앙 문제 때문에, 바울 사도는 오늘과 다음 시간에 애찬과 성찬의 문제를 바로 잡아주는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이 ‘애찬’의 문제는 비록 식사 문제에 국한되는 문제보다는 더 심각한 교회의 분열 문제로 비화되고 있었습니다.
즉, 성찬식 문제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에, 분열과 다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11:18-20).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화목을 표상하는 ‘애찬’(Agape)의 의미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분열을 일으키는 그러한 애찬의 모임은 차라리 갖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17절.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로움이라.
5. 블롬버그(Blomberg)가 지적한대로(p.228), 바울은 보통 먼저 긍정적인 말이나 칭찬을 한 후에, 부정적인 말이나 책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어법(‘yes-but’ logic)입니다.
그런데, 오늘 ‘애찬’에 관한 교훈(17-22절)에서만은 칭찬하는 말이 없이 곧바로 책망으로 시작하여, 책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17절. 칭찬하지 아니 하노니 ---
22절. 칭찬하지 않노라.
6.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분열과 다툼’(18절의 σχίσματα: division, 19절의 αἱρέσεις: different opinion)을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18절의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절의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10절 이하에서는 동일한 ‘분쟁’이라는 헬라어(σχίσματα)를 사용하면서도, 사람을 중심한 분쟁은 하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올바른 신앙 사상을 위한 분쟁은 오히려 하라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19절).
그 이유는 가난한 성도들과 사회적 신분이 낮은 성도들의 항변과 주장이 정당했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본문에서 배울 교훈은 교회 생활에서 “성례나 성찬이나 애찬”과 같은 예식이나 행사도 중요하지만, 원래 그것이 제정된 정신과 취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몽테스퀴에도 ‘법의 정신’이란 책에서, 법이란 그 법이 제정된 취지가 더욱 중요하므로, 재판을 할 때, 법의 정신을 따라서 판결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애찬은 성도 간의 화목과 사랑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없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익보다는 오히려 해롭다고 했습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 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 ‘내가 명하는 이 일’이란 주의 만찬을 시행할 때 고린도 교인들이 행해야 할 규범들을 앞으로 20절 이하에서 명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너희의 모임’이란 교회- 당시에는 가정교회-에서 집회로 모여, 애찬을 나누고, 성찬식도 가지면서, 성경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예배형식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이 ‘애찬’은 보통 교인 각자가 한두 가지씩 음식을 많은 분량으로 가지고 와서, 뷔페 형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3. 그런데, 유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 함께 식사하는 것은 ‘하나 된 언약 공동체(동맹 예식)’임을 나타내는 대단히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다 같은 피’와 ‘다 같은 살’에 참여한다는 말씀 선포와, 기도와 찬양이 곁들여 드려졌습니다.
즉, 주님 앞에서 언약(맹약)의 공동체가 된다는 종교 의식적 형태의 식사였습니다.
4. 그래서, 같은 주님(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과는 ‘식탁 교제’를 하지 않았고, 성별 되지 않은 사람, 성별 되지 않은 시간, 성별 되지 않은 장소, 성별 되지 않은 음식, 성별 되지 않은 물건을 가지고는 ‘식탁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5.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는 말은 ‘성찬’이 주 안에서 하나 되는 유익을 주지 못하고, 부자 성도에 의해서 가난한 성도들이 멸시받고, 교회가 분열되는 손해를 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즉, 주 안에서 한 몸 됨을 기념하는 ‘성찬식’이 교회의 일치보다는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18절.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 ‘듣고’(ἀκούω)라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임을 볼 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 소식을 계속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아마 1장 11절에 기록된 ‘글로애의 집 사람들’-노예로서 상인들-로부터 계속 들었을 것입니다.
즉, ‘애찬 예배’로 모일 때마다, 가난한 성도들은 부유한 성도들로부터 배고픔과 멸시를 계속 당했던 것입니다(21-22절).
2. 그런데, 당시의 부유한 성도들은 이러한 차별대우를 당시 헬라 사회의 풍속에 따라 자연스럽게(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 내에서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골(gulf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은 깊어지고, 파벌 의식이 고착화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 계급 사이에는 사소한 문제 때문에도 감정적인 싸움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19절,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1. 본 절은 빈자의 부자에 대한 투쟁을 정당화시켜주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주님은 죄인, 병자, 빈자 등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고, 인간끼리의 화목(사랑)을 명령하셨으므로, 교회 내에서 ‘가진 자’(haves)가 ‘못 가진 자’(have-nots)를 박대할 때에는, '못 가진 자'는 당연히 항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이러한 편당과 항의는 정의를 위한 것이지, ‘공산주의자’와 같이 '무산대중'이 '유산대중'을 압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라.
20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1. ‘주의 만찬’(κυριακὸν δεῖπνον: Lord's supper)이란,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먼저 공동식사(애찬)를 하시고, ‘성찬’을 집행하시던 것을 가리킵니다(막 26장, 막 14장, 눅 22장, 요 13-17장 참조).
이처럼, 초대교회 당시에는 저녁에 애찬과 성찬을 거행했으나, 애찬(Agape)이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폐단을 가져오자, 2세기에는 ‘애찬’을 없애고 ‘성찬’만 아침에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성찬’은 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예식인데, 본 절은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거행된 성찬은 진정한 성찬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헛된 예배, 헛된 헌금 생활, 헛된 성례, 헛된 모임을 갖고 있지 않나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마 5:24)
3. 그래서, 본 절은 형식적인 애찬을 거행하면서 서로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 모여서 서로 분쟁하고 싸우려면 차라리 모임을 폐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말씀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2) 그러나, 이 두 가지 말씀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려면 열심히 모이고, 오히려 모여서 싸우고 분쟁할 것 같으면 차라리 모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일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화목 하는 것이 교회의 모임이나 일 자체보다도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21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1. ‘자기의 만찬을 갖다 먹으므로’란 말은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비꼬는 투로) 사용되었습니다.
(1) 즉, 실제로 고린도 교인들은 당시 헬라인의 풍습대로(NIV-SB), 애찬을 거행할 때, 교인 각자가 각각 음식을 가져다가 ‘가정교회’(house church)에 와서 같이 먹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부유하고, 사회적 신분이 높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교인(자유인 성도)은 좋은 음식을 많이 가지고, 일찍 와서 배부르게 먹고 취하도록 마셨고, 가난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노예 신분의 성도)은 늦게 와서 먹지 못하고 배고파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시대에는 법적으로 휴일제도가 없었으므로, 가난하고 예속된 신분을 가진 교인은 주일날 예배와 성찬에 참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토요일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조차, 사회적으로 부자 교인의 천한 교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사회관습 상 자연스럽고 당연시 여겨졌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신자는 이렇게 배고플 뿐만 아니라, 부자는 취한 상태에서 ‘성찬’에 참예함으로써, ‘성찬’(23-26절)마저도 욕되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고, ‘자기 만찬’이라는 것입니다. (not ‘the Lord's supper’, but ‘their own supper’: Blomberg. p.229).
그러므로, 진정한 애찬이 되려면, 그 애찬의 공동식사 속에 주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1.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너희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겠지만, 왜 집이 없길래, 교회에 와서 먹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가난한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히느냐?’는 뜻입니다.
2. 여기서는 부유한 성도들의 2대 죄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교회를 업신여긴 죄입니다.
여기서 부자들은 교회를 먹고 마시는 집으로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은 신성모독죄로서, 유대교 사회나 중세시대라면 ‘파문’ 처벌을 받는 중대한 죄라는 것입니다.
(2) 의도적으로 빈궁한 교인을 수치감 느끼게 하는 죄(trying to put to shame; Barret by Linguistic Key)입니다.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를 세상적인 신분으로 모독감을 주었으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 죄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도, ‘교회에서 가난한 형제를 부자보다 업신여김으로써,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최고한 법을 어긴 죄’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 먼저 교회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그저 순수하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회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을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하면, 반드시 말썽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일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는 것이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교회에서 봉사하되, 자기를 나타내지 말고, 오직 주님 앞에서 사랑으로 봉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