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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27:1-13절) 포도원의 노래 42. 美國에서는 심심찮게 토네이도라고 불리는 엄청나게 큰 회오리바람이 여러 사람들을 죽게 하고, 또 많은 가옥(家屋)들을 파괴시킨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이 회오리바람을 소재로 한‘토네이도’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바람을 멀리서 보거나 아니면, 바로 옆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용(龍)이 하늘로 용트림을 치면서 올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때에는 이 바람기둥이 둘일 때도 있습니다. 이때에는 두 마리의 용(龍)이 몸을 비비꼬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을 보면 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사람들이 용(龍)을 믿었으며, 두려워했는지를 이해가됩니다. 결국 그들이 용(龍)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거대한 회오리바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바다에 나간 사람들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돌풍에 휩쓸리면, 여지없이 죽음을 당하곤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것을 용(龍)이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자연(自然)이었습니다. 물론 요즘도 자연은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재앙(災殃)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느 누구도 용(龍)이 그렇게 한다고는 믿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자연 현상이 많이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든지, 아니면 예축할 수 있는 것이 되어 통제 가능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용(龍)은 이런 자연의 회오리바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용(龍)은 전 세계를 삼키는 악(惡)의 세력(勢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용(龍)을 죽이고, 그 백성들의 포도원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I.무서운 바다 괴물 리워야단 특히 고대 바벨론 신화에는 말뚝 신(神)이 바다 괴물 티아맛을 죽이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다 괴물 리워야단을 칼로 찔러 죽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27:I절)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니” 본문에서 우선 궁금한 것은‘리워야단’이란 괴물(怪物)의 이름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여러 성경 주석들이 이 이름의 정확한 출처(出處)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우리나라의‘단군’은 신화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내가 단군을 책망하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셔도 되느냐? 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묵시(默示)’가 가지는 특성입니다. 묵시라는 것은 말씀을 받는 하나님 백성들이 엄한 탄압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의사소통하시는 방식입니다. 즉 외부인들은 메시지의 의미를 전혀 모르게 하면서 내부인 들만 알게 하는 일종의 암호(暗號)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리워야단’이 실제로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리워야단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껍질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알맹이입니다. 마치 야구 시합을 할 때, 감독이 선수들에게 사인을 보내는데, 다른 편 선수들은 알 수 없게 이상한 몸짓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압제하는 나라나 세력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말을 하면, 그들이 보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상한 짐승에 대한 세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날랜 뱀 리워야단.‘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바다에 있는 용’이 그것입니다. 리워야단이 악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바다의 용(龍)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칼로 죽이겠다고 하시는 리워야단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대개 날랜 뱀은 앗수르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도를 끼고 흐르는 강 급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사실 앗수르가 다른 나라들을 정복해서 들어간 속도가 상당히 빠르기도 했습니다. 또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은 바벨론을 흐르는 강이 상당히 꼬불꼬불하기 때문에 바벨론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의 용(龍)은 애굽을 상징한다고 주장합디다. 제 생각에도 리워야단을 세상 나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특히 세상 나라 중에서도 악(惡)으로 세워지고, 악(惡)으로 통치되는 나라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경찰국가인 셈입니다. 즉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정권이 세워지고, 억압적으로 국민들을 통치하는 나라가 리워야단입니다. 대개 이런 국가들은 통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 왕(王)을 신격화(神格化)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벨론도 그랬고, 로마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 뒤에는 언제나 그렇게 하게끔 만드는 악(惡)한 영(靈)이 있습니다. 결국 이 뱀은 권력을 잡은 자들을 격동해서 스스로 신(神)의 자리를 찬탈(簒奪)하게 만드는 마귀와 부하 세력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용(龍)이 언급되는 데, 그 정체가 마귀라고 애기합니다. 계20:2절)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고대 세계를 떨게 만들었던 괴물(怪物)은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나라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용(龍)이었습니다. 용(龍)들은 한두 사람만 삼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와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 삼켰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이 앗수르라는 용(龍)에 삼키웠습니다. 또 유다는 앞으로 바벨론이라는 용(龍)이 삼킬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용(龍)들을 날랩고 꼬불꼬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변덕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욕심을 채우거나, 남을 공격하는 데는 그렇게 빠를 수가 없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다른 나라들을 공격하든지, 잡아먹어버립니다. 이미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이 리워야단 이라는 괴물(怪物)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괴물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괴물을 잡아 죽여서 배를 갈라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으며, 그 뱃속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꺼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7:1절)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니”여기서‘바다’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세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상(思想)을 주장하는 영(靈)의 본거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 용(龍)을 죽일 수 있을까? 이 뱀은 머리가 일곱 개이기 때문에 도저히 한 번에 죽일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그 본거지를 찾아 들어가서 용(龍)의 심장을 찌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놀랍게도 인간의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용(龍)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범죄가 마귀를 이 세상에 끌어들였습니다. 인간들이 용(龍)의 지배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가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내며, 인간의 마음도 바꾸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기만 하면 됩니다. 용(龍)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만 회복되면, 용(龍)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스스로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즉 늘어나는 부채(負債)로 압박을 받는 분도 있고, 불치병을 가지고 사투(死鬪)를 벌이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북한 동포들은 공산당 정권이 용(龍)처럼 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악(惡)의 올무, 이것이 곧 용(龍)입니다. 그것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인간 스스로는 거기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베풀어 주셔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선지자 요나가 바다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그 물고기는 곧 괴물(怪物)이요, 리워야단 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요나가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을까? 요나는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뱃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그 말씀을 붙들었고,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앞으로 얼마를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사는 이것입니다.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빠지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전적으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즉 말씀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리워야단의 배를 칼로 찔러 우리를 구출하십니다.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하나님을 신뢰(信賴)해야 합니다. 오직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만 붙들어야 합니다. 무서운 괴물(怪物) 리워야단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악(惡)한 상상의 산물인데, 사람들은 기회만 생기면 악(惡)한 짓을 합니다. 요즘은 특히 사이버 공간을 통해 가상(假像)의 세계를 실제로 있는 것처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허용하셔서 죄의 실체를 알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야 마귀가 얼마나 추악(醜惡)하고, 더러운지 똑똑히 눈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는 원래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있었고, 바벨론 같은 괴물도 사람의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괴물(怪物)이 되었습니까? 결국 인간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너무나 간섭하셔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불평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간섭이 없어졌을 때,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짐승이 될 수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Ⅱ.포도원의 노래 2-3절)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치 못하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신선한 믿음의 삶이 나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밤낮으로 지켜주고, 때때로 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때때로’는‘가끔’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당하게 필요한 때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농부들이 과일 나무를 키우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열매입니다. 사과나무 과수원에서는 오로지 사과만 원합니다. 포도원에서는 오직 포도만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방(國防)을 강하게 하는 것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영토(領土)를 비대하게 하는 것도 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오직 하나, 복음의 열매였고, 변화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의 가장 무서운 적(敵)이 무엇이었습니까? 밖에서 쳐들어오는 리워야단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怪物)도 아니었습니다. 4절)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포도원을 망치는 가장 무서운 적(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질레와 가시였습니다. 포도원 안에서 무성하게 생겨나는 가시와 잡초가 포도나무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포도원이라 하더라도 잡초(雜草)는 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밭에 있는 잡초를 아무리 뽑아도 잡초는 다시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뽑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로지 열매 맺는 일에만 열심을 내는 이것입니다. 열매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즉 생각이 변하고 성격이 변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욕심을 죽이고, 복잡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15:1절)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고,‘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면서, 2절)...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제거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고 가지를 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즉 필요 없는 잔가지는 다 잘라 버리고, 오직 열매만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3절)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매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울타리를 만들고, 또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속에서 자라는 가시나무와 잡초를 제거하지 못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포도원을 리워야단 이라는 괴물(怪物)이 삼키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 안에 있는 욕심이었습니다. 우리 밖에 괴물(怪物)이 있든지, 여우가 있든지, 군대(軍隊)가 있든지, 죽이려면 죽이라는 식으로 하나님만 의지했더라면, 리워야단 이라는 괴물(怪物)이 그들을 지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에 필요한 것은 목숨을 걸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신앙에 목숨을 걸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5-6절)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여기서‘내 힘을 의지하고’라는 것은 죄인이 심판을 받기 전에 제단에 달려가서 하나님 제단의 뿔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화친(和親)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나 혼자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해 낼 것 같은데, 그것을 모두 다 포기하고,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은 얼마나 바보스럽고 무능한 짓입니까? 전에 어떤 할머니께서 서양 여자들은 너무 게으르다고 욕하셨습니다. 직접 차 문을 열고 내리면 되는데, 왜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냐? 는 것입니다. 사실 곧바로 문을 열고 내리면,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나 교양(敎養)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교양 있는 여자가 되려면, 문을 열어 줄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누군가가 에스코트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뿌리가 뽑히게 되며 포도라고 하는 특별한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야곱의 뿌리’가 박힐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 나올 때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바벨론의 손 안에 들어갔을 그때입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것은 스스로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본성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성공적 삶이 아닙니다. 변화된 삶이요, 새로운 삶이며, 신선한 충격입니다. 언제 그것이 시작됩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나를 맡길 그때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끊임없이 죄 성이 발동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처리하느냐? 는 것입니다. 죄 없는 것처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달려가서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외부의 악(惡)의 세력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한 본성 속에서도 노래하신 포도원을 만들어내고야 마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어떤 죄악의 소굴에서도 아름다운 포도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순전히 의지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우리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합니다. 결국 죽음입니다. 믿음이란 죽음을 이겨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Ⅲ.버려진 포도원과 회복되는 이스라엘 7-8절)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은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은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치시더라도 앗수르나 바벨론 사람들처럼 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죽임을 당하는 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고, 유다 백성들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이나,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선지자는 그들의 철저한 멸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멸망과 유다의 멸망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적당하게’견책(譴責)하십니다. 피할 길을 주셔서 환란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막상 당하고 나면, 그런 대로 견딜 수 있게 해주십니다. 혹 이러다가 자식들 모두 다 굶겨 죽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막상 닥치면 또 다른 기쁨이 있어서 고통에 완전히 지배당하지는 않습니다. 그 기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십니까? 9절)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아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물론 야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다고 해서 속죄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 철저하게 과거의 죄와 단절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예)연인(戀人)이 헤어졌다고 합시다. 지금까지 만나온 시간이 있고, 정이 있기 때문에 입으로 헤어지자고 말한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돌아서면, 또 만나고 싶고, 또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헤어지게 하려면, 강제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성(靈城)을 위하여 텔레비전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면, 안 됩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더 보고 싶어집니다. 왜냐면 이미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하게 하신 것은 아세라 상(像)과 태양 상(像)으로부터 그들을 떼어놓기 위해서입니다. 태양 상(像)은 흰 횟돌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돌가루가 되는데는 7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고, 아세라가 하나의 나무에 불과하게 되는데, 그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왜 회개했는데, 당장 새로운 축복(祝福)을 주시지 않느냐? 고 불평하지만, 우리 안에 욕심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잠시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지, 돈이 생기면 당장 옷 사고 비싼 물건 사고하면서 사치스럽게 지낼 것이 분명합니다. 철저하게 죄와 단절되고, 과거와 단절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는데, 기나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10-11절)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견고하던 성읍은 폐허가 되어 송아지 한 마리가 나뭇가지를 뜯어먹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휴식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욕심을 억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강제 안식년을 주십니다. 즉 쉬지 않아 병이 생기면, 결국 병원에서 안식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바빠서 부부가 서로 얼굴을 보고 신앙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으면, 강제로 퇴직을 시켜서 하루 종일 얼굴을 보고, 신앙 이야기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이 백성이 지각(知覺)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물리적인 힘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로 통하면 왜 리워야단 같은 괴물을 끌어들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처음부터 말씀에 순종하고, 자기 욕심을 죽이면, 이런 흉한 날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욕심을 죽입니까? 그러나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60년이나 70년은 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영원히 버리지는 아니하십니다. 12-13절)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여기서‘창일하는 하수’는 유브라데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과일을 나무에서 마구 떨어트려 놓고, 냇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주웠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에 의해서 전 세계로 노예로 팔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에 떠내려가는 과일로 보십니다. 그 과실들을 다시 주워 담아서 바구니에 담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우리들도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속에서부터 가시와 엉겅퀴가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죽을 때까지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하려고 하는 일들을 잠시 중단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뽑아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딸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딸기 종자를 한번 냉장고에 넣어서 추위를 겪어야 결실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이라는 냉장고에 넣어서 겨울을 나게 한 후, 튼튼한 모종을 전 세계에 퍼트려서 온 세상을 포도나무로 뒤덮이게 했습니다. 우리 같은 가시덤불도 이 포도나무에 접붙여져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최악의 경우에도 하나님께는 선한 일의 과정이며, 그 최악을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굳게 주님을 의지하고, 내 속에 있는 무서운 죄의 뿌리들과 싸움을 합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惡)의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악(惡)의 세력을 억누르고 우리를 건져내실 하나님을 죽도록 의지합시다. 이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여기서 리워야단 이라고 불리는 뱀은 겉으로 드러난 악(惡)한 정치 세력이고, 그 뒤에는 바다의 용(龍)이라고 하는 엄청난 악(惡)의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날랩고 꼬불꼬불한 뱀이 앗수르나 바벨론처럼 이 세상의 욕심으로 정복하려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힘으로 압제하는 정치 세력이라면, 또 바다의 용(龍)은 이 세력을 뒤에서 조종하고 충동질하는 마귀요, 사탄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악의 세력이나, 마귀를 뱀이나, 용(龍)과 같은 파충류로 표시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파충류는 무조건 다 나쁜 생물로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에게도 어떤 이미지를 주셨습니다. 즉 사자나 호랑이는 용기를, 여우는 간사함을, 곰은 미련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사자는 자기가 용감한 것을 잘 모르고, 여우도 자기가 간사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모릅니다. 더욱이 곰은 자기가 미련한 것의 대명사로 쓰인다는 것을 알면 기분 나빠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미지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느낌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단 파충류는 피가 차갑기 때문에 사실 여부에 떠나서 사람들에게는 차갑고, 섬뜩하며 이중적인 악의 세력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한 사람과는 생물학적으로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고, 결국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여자를 유혹할 때, 뱀을 사용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독자)여러분, ☞ 본 카페를 이웃들에게 소개함으로 함께 하나님을 알아 갑시다. 찬송가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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