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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식(金良植, 1931년 1월 14일~2025년 1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인도학자이기도 한 그녀는 인도의 시인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여러 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해 왔다.[1]한-인도 문화협회를 통한 문화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인도 정부 로부터 인도 민간인 최고 훈장인 파드마 슈리를 받았다.[2]서초문인협회 회장,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여성문학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한 그녀는 현재 인도박물관 관장 및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의 고문을 맡고 있었다.
초이 김양식의 시와 타고르
김상환(시인/문학박사)
1. 초이初荑 김양식金良植에 대하여
어느 봄날, 복사꽃 살구꽃이 더없이 아름다운 경산 와촌의 음양리에는 고요한 절집(삼화사, 회주: 원학스님)과 찻집‘다연산방’이 있다. 이 집에 들면 세상사, 인간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가시는 느낌이다. 그리고 건물 한 켠에 조촐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초이문학관이 문득, 낯설다. 초이 김양식(1931~2025, 본명: 金惠晶)은 올초 향년 94세의 일기로 작고한 원로 여성시인이다. 수필가이며 번역문학가로, 다인茶人이자 인도문화애호가로 살아온 그녀가 말년에 잠시 기거한 바 있는 절집에서 인생과 예술, 정신과 문화를 뜨겁게 사랑했던 한 사람의 삶과 문학을 돌아본다. 그녀는 서울 종로구 내수동 50번지에서 태어나 숙명여고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석사학위(논문: Rabindranath Tagore 詩에 나타난 印度哲學思想-우파니샤드를 중심하여)를 취득하였다. 작가 박완서, 한말숙과 동창이기도 한 그녀는 어린 시절 오빠로부터 안서와 지용의 시, 그리고 타고르의 시를 접하며 자연스레 시에 눈을 뜨며, 이후 열정적으로 문학적-문화적 삶을 향유하게 된다. 1969년《월간문학》에 시〈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그녀는 작고하기까지 다수의 저역서와 작품집을 간행한다. 그로 인해 현대시인상, 국제펜문학상, 세계시문학상(Muse Of World Poetry award) 등을 수상한다. 뿐 아니라, 한국타고르문학회를 설립하고 인도박물관장을 역임하며, 인도 최고 권위의 시민훈장 중 하나인 파드마 슈리(Padma Shri)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2. 초이의 시와 세계
초이의 시는 전통 여성들의 삶과 정서를 소박하게 그리는 데서 출발하지만, 점차 자연과 인간, 자아와 시간에 대한 주제로 확장된다. 이는 결국 생사에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시간 속에서 명멸하는 인간사에서 생명의 근원적인 것에 닿아 있다. 개인과 사회 역사, 민족의 부침浮沈 속에서 자연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찰나적 존재로서 인간은 어떻게 불멸에 이르며, 영원에 가 닿을 수 있는가, 등에 대한 사유와 방법은 전통 서정과 서사, 극적인 방식, 아포리아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된다. 다음은 초이의 데뷔작이다.
먼 시절
외롭게 흘러버린 세월이어도
시방은 눈만 감고 흔들리고 있어라
모두 모오두 한 아름 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
내 또 한번 죽어
다시 풀꽃이 되어
서럽게 숨죽인 풀잎이 되어
그 풀잎 위에 내가 누워
풀꽃을 따서…
생각하면 철없던 세월이어도
시방은 눈만 감고 흔들리고 있어라
곱게 스미는 情이얼랑
입 맞춰 멀리 아주 머얼리 보내고
풀꽃은 내 가슴 얼리는 슬픔이어도
잔물결처럼
하늘 가득히 발돋움하고
휘감기는 바람 내음 껴안고 서서
내 왼통 죽어 다시 풀잎이 되어
그 풀잎 위에 내가 누워
풀꽃을 따서
-「풀꽃이 되어 풀잎이 되어」전문
소박한 감정과 언어로 먼 시절을 소환하는 이 시에서 자연(풀잎/풀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다. 풀을 매개로 우리는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을 잇게 된다. 딴은, 생성과 과정으로서 비커밍becoming의 이 시는 자연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환기한다. 게다가 실존의 근본범주인 시간과 자아의 경계 속에서 시의 본래와 면목을 돌아보게 된다.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의 부정적 드러냄이 시의 존재 방식이라면, 이 시에 나타난 그리움[sehnsucht]의 정서는 슬픔의 신비로, 울음에서 울림의 장으로 화한다. 시간의 흐름과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자아의 심리는 피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이자 조건이다. 마음과 사물의 조응에서 야기되는 이 시에서 우리는 서정시의 본질과 속성을 본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예지로서, 먼 것들의 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한 아름 풀꽃-경전이다. 잡화엄이다. 다음의 시편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상관 관계를 다루고 있다.
겨울로 가는 나무등거리처럼/ 자꾸 까칠해지는 나의 육신// 물든 잎들은 시나브로 날려/ 끝내 남는 것은 앙상한 가지인가// 한해는 그냥 이처럼 지나가는 것/ 거슬러 오를 수 없는 당신의 섭리// 어느 시골 허술한 간이역에서/ 나는 그 텅빈 막차를 탈 수 있을까// 빛바랜 훈장처럼 줄줄이 늘어선/ 겨울로 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오늘/ 나는 그 막차를 탈 수 있을까?
-「겨울로 가는 나무」전문 ①
山하늘에
별 하나 솟고
찡하니 피어나는
솔가지 지핀 연기 내음에
쫓기듯 새끼 짐승들이 숲속에 숨은
눈 쌓인 山허리가 진하게 빛바뀜하여
千尋 물길 속의 水心으로 잠기는 무렵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속 깊은 곳에
나는 한 알의 외론 차돌로 빠져가서
劫으로 山에 사는
山귀신 헛기침을
내가 듣는다
-「山마을 저녁」전문 ②
추녀 끝 풍경 소리/ 오월 단오 창포꽃/ 흑단 같은 검은 머리/ 참빗질로 틀어 올린 어머님 낭자의/ 칠보매죽七寶梅竹 빛 고운 은비녀인 듯/ 칠보화접七寶花蝶 빛 고운 뒤 꽃인 듯// 오색 五色 나비인 양 창포꽃 피네/ 물안개 여울에 창포꽃 피네
-「오월 단오 창포꽃」전문 ③
①에서는‘겨울나무’가 아니라, 겨울로‘가는’나무다. 이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란 실재reality다. 그런 운행運行이나 행역行易으로서 시야말로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간이역 같은 삶은 말그대로 머무는 곳이다. 인간-시인이 곧 머무는 존재라면,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지상에서 시적으로 머물게 마련이다. 이 경우‘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방식을 의미한다.“거스를 수 없는 당신의 섭리”와“막차”의 이미지도 우리가 운행의 섭리를 받아들였을 때 갖게 되는 텅 빈 충만이다. 막차로라도 (영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②에서 산마을의 저녁은 빛의 바뀜 현상이다. 하여 그 어둠 속에 깃들어 있는 산과 마을 위로 별빛이 내린다. 어린 짐승이 그렇듯, 나는 고요한 수심에 잠긴다. 그것은 더이상의 두려움이 아니라 미처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이다. 외로움의 절대이며, 산알이며, 겁劫의 시간이다. 아니, 산귀의 헛기침을 듣는 순간이다. ③에서 어머니는 꽃과 나비의 형상은 물론,“추녀 끝 풍경 소리”를 닮아 있다.“흑단 같은 검은 머리”와 참빗질의 그녀,“칠보매죽七寶梅竹 빛(의) 고운 은비녀”는 영락없는 전통적인 여인상의 표본이다. 그런 한폭의 그림-한국화 같은 이 시의 저변에는 어머니의 부재가 가로놓여 있다. 아름다운 슬픔이다. 정경情景이 어우러진 시에 비해,「春三月」(“간 밤, 내 꿈에/ 山木蓮 흰 꽃이 활짝 피었더니// 알묏집 개피떡에/ 冠岳의 쑥국새 울음 소리가 새로 들려 오더니// 맵시나는 떡맛에 팥개피 속엔/ 샛빨간 루비 한 알이 박혀오네”)의 경우는 발화자의 정서는 약화된 편이다. 미당의 시「알묏집 개피떡」에 화답하는 이 시는 빛과 소리, 맛이 일품이다. 다음 시는 어떤가?
문을 열면 눈이 오겠지
잿토끼 뛰고 참새 날겠지
모든 날것의 깊은 포근함으로
또 한 길이 열리겠지
다 버리고 오던 길, 길목의 여울
돌돌 말아 덮어온 저녁
말 못하고 듣지도 않고
고무신만 뽀얗게 닦아온 밤
목숨 붙은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 누운 곳에
고무신만 하얗게 걸어가겠지
밤새 또 눈이 오겠지
-「겨울 僧房」전문
눈 내리는 산사와 겨울밤의 정취가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검은빛이다.‘겨울 僧房’에서‘겨울’이란 시간과‘승방僧房’이란 공간은 지극히 아름답고 시적인 데가 있다. 겨울 저녁이 문학적 시간인 것은 안[內]을 염려하는 계절이어서다. 그리고 경계의 경지로서 끝과 시작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그런 회상과 성찰의 시간에 부합하는 것으로 절집과 승방은 가장 내면적인 장소로서 깊고 아득한 심연으로서 깨침이 있다. 찾는 이가 드문 산사에서 느끼는 감정과 언어란, 이처럼 고요하고 근본(“제 자리”)을 향하게 마련이다. 시인의 마음과 영혼이 귀하고 중한 것은“모든 날것”과“목숨 붙은 모든 것”을 향한 때문이다. 닫힌 열림으로서 그의 방은 길의 다른 이름이다. 비어있음의 마음 뿐인 승방. 섬돌 위 고무신에 고요한 달빛이 내리면, 밤새 흰눈이 내릴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일종의 아포리아 같은,“마치 강가 뽀얀 모래밭에 남겨놓은 물새들의 발자국”같은 2행시들이 있다.
-한 마리 새 날아간 빈자리에/ 저토록 표표히 풀려나는 젓대소리여.(「한 마리 새」)
-생각은 언제나 생각으로 멈추고/ 찬비 젖어드는 싸늘한 길 위에 흩어진다. (「생각은」)
-내게 띄운 저 어린아이의 슬몃한 눈길에/ 어느새 몇 겁의 바람은 스쳐가네.(「내게 띄운」)
-저 맑은 시냇물은 누구 위해 흐르며/ 저 하늘의 꽃구름은 누구 위해 흐르는가 (「누구를 위해 흐르는가」)
-마음 속에 진정한 깨달음이 있다면/ 가난은 슬프거나 아픈 것이 아니다 (「깨달음」)
3. 타고르 시와의 만남
한편, 인도를 여행하고 인도 철학-문학을 공부한 초이에게서 R.D.타고르는 빠트릴 수 없는 텍스트이다. 어린 시절 타고르의 동시집『초승달』을 읽고 시를 쓰기 시작한 그녀는 후일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세계로서 모든 것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며 시의 세계를 확장시킨다.「시성詩聖 타고르님께 띄운 편지」에서도 타고르에 대한 그의 편애가 잘 드러나 있으며, 타고르의 대표시집『기탄잘리』를 번역하면서 그가 쓴 서문(『기딴쟈리-신께 드리는 송가』)을 보면,“삶의 애수와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청정한 마음의 평안한 기쁨의 음률이 온통 물결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세계는 그의 시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일생동안 나의 노래로 당신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나를 인도한 것은 나의 노래였습니다. 노래로 나는 세상을 찾고 더듬으며 나 자신을 느껴왔습니다. 내가 배웠던 모든 것들을 가르친 것은 바로 나의 노래였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길을 보여주었으며, 내 마음의 수평선 위에 떠오른 수많은 별들을 나의 눈 앞에 펼쳐서 보여주었습니다.나의 노래는 기쁨과 고통의 신비스러운 나라로 하루 종일 나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행의 끝에 이르는 저녁이 되면 그 노래는 어떤 왕궁의 문으로 나를 데려다 줄까요?
-「기탄잘리」101번
이처럼 노래에는, 한 편의 시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담겨 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사랑이며 가장 고요한 침묵이다. 타고르는 말한다.“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그 기다림의 실체는 다름아닌 노래라면, 노래의 집과 길이라면 왜 모든 쓸쓸한 것들은 집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가? 노래는 사랑하는 나의 임이며, 나의 지남指南이다. 나의 생명, 나의 느낌이다. 그리고 노래는 현존재dasein로서 인간이며, 실재의 숨은 깊이를 말한다. 노래는 내 마음의 수평선, 그 위에 떠오른 뭇별들이다. 노래는 나의 가르침과 배움의 원천이다. 그것은 무한한 차이를 생성하는 것과 존재의 재창조를 위한 끝없는 여정이다. 이는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창조적 활동이다. 노래는 기쁨과 고통이 중첩된 미스떼흐-신비이다. 노래는 현지우현 중묘지현(玄之又玄 衆妙之門, 노자 도덕경 1장)으로서 현에 이르는 길이다. 그 노래의 시, 노래의 책이「기탄잘리」인 것을. 초이의 경우 역시 일생동안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로서 노래의 당신을 찾아다닌 셈이다.
4.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남는 문제
초이初荑라는 말에는 처음의 자연과 생명, 시혼이 있다. 1세기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초이 김양식과 그의 문학예술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의 시와 세계를 일별하면서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란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도합 2,000수에 가까운 그의 시에는 다양한 무늬와 결이 존재하며, 전통적인 문이재도文以載道로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서 시와 삶의 의미역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문학, 그리고 앎과 삶에 대한 열정이다. 초이 김양식의 시에 나타난 타고르와 인도미학, 여성시의 전통 등에 대한 좀더 깊고 구체적인 분석은 별도의 기회를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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