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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시간
김정미
네게브 사막은 고대 아랍상인들의 향료루트였다. 그곳은 오후 5시가 넘으면 어둠이 찾아든다. 끝도 없이 걸어야 했던 그들에게 달은 삶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었으리라. 그 환한 불빛 따라 침묵해온 그들의 이야기들이 달빛아래 하나 둘씩 수런거린다. 달빛이 시간의 물결로 출렁일 때마다 달의 심장소리가 고요히 두근거리는 밤. 나또한 생의 한 가운데를 지날 때 어머니가 머물렀던 달의 시간과 만날 것이다.
어머니가 새 아파트로 이사 가는 날, 자개장을 놓고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무늬로 얼룩진 덩치 큰 장롱을 어머니는 새 집으로 가져가고 싶어 했다. 아침 일찍부터 마당 한 가운데로 끌려 나온 장롱에서 뜻밖에도 내 유년의 시간과 만날 수 있었다. 까만 열 두자 가슴을 열어 십장생을 풀어 키우던 어머니의 낡은 자개장, 그곳은 어머니 삶과 우리들의 유년이 고스란히 머물러 있는 내밀한 공간이다. 그래서 굳이 새 아파트에 낡은 자개장을 가져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머니를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새집 안방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장롱을 보고 어머니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새 것들에 치여 낡거나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변해가는 것들은 어머니의 자개장 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는 아득해져 가는 기억의 문을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온 집안을 쓸고 닦아 우리 집은 늘 반질반질 윤이 돌았다. 그것은 결벽증에 가까운 어머니의 성정 탓이었다. 주말이면 어머니는 어린 딸들에게 대청소를 하게 했다. 그 중에서 안방에 줄지어 서 있던 가구들을 닦는 일은 번번이 내 차례가 되곤 했다. 가구들을 닦는 일은 무척 지루했다. 하지만 책임을 다하는 동안 지루함을 극복하는 요령을 나름대로 터득할 수 있었다. 햇빛을 잘라먹고 자란 은빛 조개껍질을 정교하게 박아 놓은 자개장무늬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반짝 거리는 다양한 무늬들마다 이야기들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일이 늘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꾀가 나고 지루해지면 슬금슬금 요령을 피웠다. 그럴 때 마다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이던 내 마음을 몰라주던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어머니를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었다. 그래서였는지 오롯이 홀로 떠 있던 자개장의 달무늬가 어린 내 눈에 쓸쓸해 보였다.
긴 머리와 함께 치맛단에 레이스가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우리는 또래아이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어머니만의 사랑표현방식은 가끔 우리들을 곤혹스럽고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모든 집안일과 올망졸망한 딸 넷을 반듯하게 키우는 일은 모두 어머니의 보람이었다. 아들 없는 것에 대해 늘 못마땅해 하던 할머니로부터 어머니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할머니의 집요한 아들타령에도 꿈쩍없이 네 딸과 어머니를 끔찍하게 여기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빛나는 태양이었던 듯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아버지가 계셨기에 어머니가 마음 놓고 세상과 부딪칠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 그 빈자리를 어머니는 10년 넘게 홀로 지키고 있다. 세월과 함께 점점 작아지는 어머니의 마른 등에서 사막의 바람 냄새가 난다. 딸들의 생을 밝혀 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과 달리 날로 여위어가는 모습이 낯설다. 딸들의 안위와 무사를 염원하는 어머니의 등은 다름 아닌 쓸쓸한 시간의 무덤인지 모른다. 그 시간을 홀로 마주하고 있는 어머니의 주름진 손 안에는 반질반질 윤이 도는 염주가 쉼 없이 구른다. 더 이상 세상과 맞설 수 없는 어머니는 지금 무엇을 소망하고 있을까.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내 삶을 비추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처럼 나또한 우리 아이들을 품은 달이다. 누군가를 위해 조건 없이 달이 되는 것, 그 시간과 만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밤하늘 모서리마다 시간을 뒤적이는 달의 숨소리가 들린다. 시간 속에 달이 들어 있다. 달이 간직한 기억들이 달무리로 뜬다. 어머니가 심어 놓은 달의 시간은 내 생을 꽃처럼 피게 한다. 그렇게 나 또한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삶의 수레를 손질하는 생의 뜰에서 달을 품은 어머니와 닮아간다. 그렇게 어머니가 걸어갔던 그 달의 시간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아픈 비늘을 터는 새들처럼 달빛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기 시작한다. 달빛 고인 길목 따라 자박자박 어둠을 휘젓는 바람이 분다.
부채의 말
사물의 한 가운데로 들어서는 일이 곧, 사유의 시작이다. ‘보다’라는 말 속에는 단순히 ‘보다’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보는 ‘보는 지점’을 넘어 사물이나 현상을 판단하는 방향이나 지시를 품고 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의 세계까지 통찰하는 힘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연한 마주침에서 뜻밖의 나를 만나고 세상을 만날 때가 있다.
무더위가 들끓는 8월이었다. 전철을 기다리는 시간만큼 후덥지근한 공기도 점점 늘어났다. 도착지는 제각기 다르지만 더위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서로 닮아가고 있었다. 찌푸린 얼굴 가득 더운 지하 공기가 끈적이게 달라붙었다. 무더위 때문에 전철이 실고 올 냉기가 점점 간절해지기 까지 했다. 더위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쉼터인 나무 의자에 하나 둘 앉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옆 빈자리에 노부부가 다가와 앉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노인이 일어서더니 가방에서 부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노인은 아내를 향해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부채 바람에 순한 얼굴로 그림처럼 앉아있는 아내의 무심한 표정은 남편의 다정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 얼굴과 이마에 흥건한 땀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부채를 든 주름 가득한 손. 그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까지 부채의 바람이 불어왔다. 내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흔들렸다. 내 쪽으로 불어오는 부채의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어야 하는지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지 순간 고민이 되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말을 건냈다.
“할머니께서는 참 좋으시겠어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미소를 지은 채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그저 무심히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많이 아파요. 이 사람이, 참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부부의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고 지금 같은 모습이라도 함께 해주어서 다행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부채의 바람을 타고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픈 할머니께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그 순간 바랬다.
삶이란 바다를 항해 할 때 어디 순풍만 있을까. 거센 폭풍 앞에서 함께 잘 견뎌준 시간만큼 부부는 때론 뿌리 깊은 나무로 더 단단해진다. 자신의 아픔보다 먼저 함께 해준 아내를 생각하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그때를 훌쩍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들. 좀 더 지혜롭지 못했던 순간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존재는 좌절 속에 드러나기도 한다. 좌절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초월할 수 없는 비극은 없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수없이 허물고 짓기를 반복했던 남편의 사업으로 힘겨움에 몰락하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이젠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면 고된 하루를 견디지 못한 채 코를 고는 남편의 지친 모습. 어느 새 흰머리가 늘어나고 굵어진 이마의 주름에서 가장의 무게가 읽혀졌다.
서로의 부채가 되어주는 일. 더울 땐 서풍을 불러오고 삶이란 불씨가 가뭇하게 사그라들 때 그 불씨를 다시 붉게 타오르게 하는 힘. 그것이 부채의 아름다움이 아닐는지. 우연히 만난 노부부의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시간과 마주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주는 일. 그것은 서로에게 시원한 나무 그늘이 되어주거나 햇살이 되는 일이다. 전철역에서 내가 마주한 노부부와의 짧은 만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게 남은 시간을 지연 시킬 수 있는 일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피어날 내 삶의 이야기는 온전히 내 몫일 것이다.
또 다시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고 있다. 외눈박이 눈으로 누군가의 등불이 되어주는 골목의 외등처럼 우리 부부 또한 서로를 비쳐 주는 등불이거나 부채가 되어줄 것이다. 삶이란 언덕을 함께 오르는 힘. 그것은 기대란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아주는 일이다. 완전하지 않은 모습을 조금씩 완성해 가면서 등을 두드려주며 지켜봐 주는 눈. 그 눈빛이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아닐까.
비껴가는 계절 앞에서 꽃들이 피고 지듯 어떤 것이든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은 없다. 나는 천천히 전철역을 빠져 나왔다. 세상은 여전히 희망의 편이고 곧, 초록 세상이 올 것이라고 내게 귀띔하는 부채의 말. 그 말을 따라 나는 휘적휘적 삶의 숲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와플 굽는 여자
와플을 굽는 여자의 등이 동그랗다. 그녀의 미소가 와플을 담은 봉지 속으로 쏟아진다. 그 봉지 속으로 누군가 잃어버린 희망 한 봉지도 따라 들어간다. 집 앞 마트에서 와플을 굽는 여자. 와플을 재촉하는 줄 선 손님들 앞에서도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런 그녀는 이 천 원짜리 와플을 굽는 게 아니라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가치를 굽고 있는 중이다. 상처 입은 이들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듯 봄 햇살이 반짝인다.
주말이어서 그런지 대형마트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는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가 가득한 와플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플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게 앞은 긴 줄이 이어졌다. 길게 늘어 선 사람들 시선이 모두 여자에게 쏠렸다. 갈색 페라도 모자를 눌러 쓴 작은 몸집의 여자는 와플 기계에 반죽을 붓고 구워진 와플을 꺼내는 동작을 반복했다. 다 구워진 와플에 여자의 부지런한 손길 따라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딸기잼이 듬뿍 발라졌다. 주문한 와플봉지를 하나 둘씩 받아 든 사람들이 총총히 마트 밖으로 사라졌다.
봄 햇살이 페라도 모자를 쓴 여자의 흰 목덜미에 남실거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내 차례가 오기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여자의 부지런한 손놀림에 집중했다. 순간 한결 같이 여자 입가에 가득한 미소를 보았다. 바쁘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얼굴표정이 굳어질 법한대도 여자는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난 여자에게서 와플이 든 봉지를 받아 들었다.
“바쁜데도…. 그 미소 참 보기 좋아요.”
나는 미소 가득한 그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꼭 말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따뜻한 미소를 지니고 살기엔 결코 녹녹치 않은 삶이라고 말한다. 얼마의 시간을 더 보내고서야 욕망에 눈먼 삶이 투명해 질 수 있을까. 니체의 말처럼 양심이라 믿고 있는 것이 실은 보편성을 잃은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의 소리는 아닌지…. 지금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소유와 무소유가 공존하는 세계. 슬픈 우리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을 향해 탁발을 나선 승려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四聖渧(사성제)이다. 사성제는 글자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의미한다. 고통, 집착, 소멸, 방법, 즉 苦集滅道(고집멸도)로 정리될 수 있는 네 가지 가르침이다. 우리마음에는 불가피하게 고통이 찾아온다. 그 고통의 원인은 바로‘집착’에 있다. 즉 마음의 고통은 결과이고,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집착만 사라진다면 고통이 사라질수 있을까. 소멸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열반’이다.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내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 평화라는 것이 성공을 통한 삶의 안정과는 분명 다르기에 비우고 비우는 일 자체가 나에겐 고통이다. 열반은 커녕 마음을 비우는 일 또한 내게는 쉽지 않다. 와플을 사서 돌아오는 동안 그녀는 내게 깊은 생각의 숲을 거닐게 했다.
행복하고 아름답고 건감사하다는 건 자신의 삶을 존엄하게 여기는 일이다. 하루치 밥값이 와플기계에서 벌집무늬로 구워지는 동안 주말인데도 늦은 퇴근을 서두르는 젖은 발자국들. 상처 입은 날개를 터는 새처럼 이 천 원의 달달한 희망이 달처럼 구워지는 봄 밤. 그 하루가 천천히 익어가고 있다. 어디선가 달을 보며 희망을 소망하는 이들의 와플 굽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난 마트에서 만난 여자처럼 고소하고 달달한 희망을 굽고 싶다. 자박자박 봄길 밟는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아카시 나무 아래 새들의 그림자가 내려앉는다. 내 서늘한 정수리에 은빛 햇살과 함께 아카시 꽃잎들이 흰밥처럼 쏟아진다.
누에의 잠
낡은 사진첩을 펼친다. 오래 잠들었던 시간을 여는 동안 내게 성큼 걸어들어 온 발자국 하나. 청소년 시기, 같은 시공간의 경험이 동창이라는 울타리를 만든다. 그 울타리 안에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수많은 얼굴이 피워내는 이야기는 서로 다른 모양새만큼 다양하다. 따뜻한 인연의 울타리를 기둥 삼아 동창들끼리 서로 우정의 꽃을 피울 수 있게 한 주인공. 그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은 일 년 전이었다. 어색한 안부를 대신한 짧은 몇 마디가 전부였지만 그 후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겐 더 남아있을 줄 알았다. 두 번의 만남이 그 친구와의 전부가 될 것이라고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참석한 동창회였다. 친구들 앞에서 애써 나는 태연한 척 했지만 덩그러니 놓인 빈 그릇마냥 어색했다. 밥상 앞에 놓인 젓가락만 애꿎게 만지작거렸다. 그런 내게 그들의 밥상 안으로 들어오게 해 준 친구가 있었다. 오랜 암 투병생활에도 불구하고 밝은 모습으로 늘 긍정이란 단어가 이름 앞에 덧붙여진 까닭을 그때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17년 동안 항암치료를 반복하면서도 주변의 사소한 일까지 챙겨 온 열정 가득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따뜻한 밥상 앞에 앉아 맛나게 밥 한 끼 먹으면 그 뿐인 것을…. 그 밥상 앞에 앉기 까지 살다보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두 번째 동창회에 참석하던 날. 간에서 위, 척추까지 암이 전이 됐다는 말을 담담하게 말하는 그 친구를 향해 나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 참 멋지다.”
내 갑작스런 악수와 말 한마디에 빙그레 웃던 깡마른 얼굴. 그 담담한 웃음에서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긴 고통의 시간을 짐작할 뿐이다. 때론 다 하지 못한 말과 미처 나누지 못한 시간들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언제나 늘 기회가 남았을 것이라는 기대 아닌 기대. 다음이라는 보류는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 또 다른 시간과 마주하게 한다.
며칠 후, 4층 암 병동 중환자실에 그 친구가 누에와 같은 깊은 잠에 빠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누에는 고치의 시간이 지나면 날개의 시간을 갖게 된다. 친구들과 낚시를 가기로 한 주말 오후 그 친구는 캄캄한 잠 속에 갇혀 버렸다. 하다만 일상을 중환자실 침대 아래 내려놓은 채 너무 오랜 잠을 자고 있었다. 누가 친구의 잠을 저리로 옮겨 놓은 것인가.
우리는 그 친구가 오랜 잠에서 얼른 깨어나길 바랬다. 금방이라도 이름을 부르면 깨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되어갈 때 그 친구와의 세 번째 만남은 장례식장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렇게 먼 세상으로 서둘러 친구를 떠나보내야 했다. 장례식장은 문상객들로 가득 했다. 그동안 그 친구가 세상에 뿌려 놓은 따뜻한 인연이란 씨앗이기도 했다. 장례식장을 가득 매운 자리에 정작 주인공은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을 뿐이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다들 모르는 표정들이었다. 흘러간 시간의 무게만큼 가장의 무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동기들의 등이 쓸쓸해 보였다. 누군가는 애써 슬픔을 덜어내기 위해 시시껄렁한 농담을 습관처럼 하려 들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술잔을 말없이 입에 가져갔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위로는 어떤 것일까. 왜 우리는 그토록 열심히 살아야 했을까. 왜 아프면서도 괜찮은 척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17년 동안 죽음의 문 앞을 수없이 드나들며 그 친구가 소중하게 여긴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떠난 후 남은 가족이 쓸쓸하지 않게 모든 인연에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던 그 친구의 말을 생각했다. 혹, 친구들과 바쁘게 보내느라 정작 자신의 가족들을 쓸쓸하게 하진 않았을까.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해 가족에게 먼 곳을 떠난 지금쯤, 미안해하고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놓는 일 뿐이었다. 조문객들이 놓고 간 꽃송이만큼 남겨진 이들의 슬픔도 늘어날 것이다. 남겨진 슬픔의 무게가 더 무거운 것인지 떠나는 슬픔의 무게가 더 깊은 것인지 가늠 할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을 기억해야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첩을 덮고 밖을 나오니 가을 밤바람이 제법 찼다. 달빛 젖은 얼굴이 바람을 등지고 토닥토닥 서로의 등을 두드리고 있다. 아픈 마음을 다독이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괜찮은 척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괜찮지 않은 삶이 더 이상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은 바로 불투명한 삶속에서도 날개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고통에 압도 되지 않는 성숙한 영혼을 갖는 일은 날개를 잃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잊지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든다.
아파트 담장 안에 대추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대추 한 알이 붉어지기까지는 천둥과 벼락 그리고 수많은 달밤을 지나야 가능한일이다. 고치속의 날개는 자신을 뚫고 나와야 비로소 날개를 갖는다. 아픔과 고통 수많은 삶의 언덕을 오르내리고 나서야 자신의 삶을 보게 되는 눈을 갖게 되는 것처럼… . 그러나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만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괜찮지 않은 삶이면 또 어떠한 가 그 또한 저마다 세상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 뜨거운 이유가 될 것이므로.
제라늄
“아가야 너는 천사구나”
친정어머니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그 말에 나는 그만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다.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며느리 몫을 다하지 못한 까닭이다. 어머니는 뇌졸증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다. 작년 겨울 화장실에서 넘어지신 이후론 침대에 누워 계신다. 불행은 폭풍처럼 몰려오는 것인지 치매까지 겹쳐 기억 또한 온전하지 않다. 불행중다행인 것은 어머니 기억이 따뜻한 계절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봄 햇살이 환하다. 꽃잎이 봄바람에 잠시 출렁인다. 삶은 마치 강물로 흘러가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길과 같다. 그 길은 몸 안쪽부터 뜨거워지다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날개처럼 가벼워지다 햇살이 되고 시간의 경계를 넘어 空이 된다. 그 삶의 간극 속으로 날아가는 날개 따라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는 중이다. 봄바람에 하르르 하르르 제라늄이 베란다에 꽃잎을 떨군다.
꽃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님은 봄부터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종일 아픈 아내를 화초 다루듯 보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안방 유리문을 열면 방안 가득 붉은 꽃들이 핀다. 아버님은 많은 꽃들 중에 왜 제라늄 화분을 갖다 놓으신 걸까.
작년 겨울, 스페인 코르도바 옛 거리를 걷던 시간이 겹쳐졌다. 오밀조밀한 거리와 소박한 건물들 사이로 메스키타 주변을 걷다보면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마주친다. 하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유대인 거리 후데리아 골목은 비좁아 마치 미로에 든 느낌이다. 뒤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어머니의 기억은 종종 길을 잃곤 한다. 한 번 갇히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늪, 어머니는 지금 어떤 시간의 발자국을 찍고 있는 것일까. 하얀 발코니와 벽마다 걸린 다양한 장식 파티오엔 온갖 꽃들이 화분에 걸렸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은 1492년 카톨릭 왕들의 억압에 그 고장을 떠나게 되었다. 내일 돌아올 줄 알고 집, 현관 열쇠까지 챙겨 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사암으로 쌓아올린 돌담과 돌계단엔 그들의 아득한 시간이 멈춰있는 듯했다. 어머니의 기억이 꽃으로 다시 필 날을 위해 아버님은 베란다 가득 꽃들을 키우고 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건물 벽마다 매달린 토분들. 그 토분 속에 뿌리를 내린 제라늄. 마당을 가질 수 없던 유대인들이 꽃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창가나 베란다에 화분을 매달아 놓고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벽마다 꽃들이 올망졸망한 꽃잎을 피우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햇살과 바람을 먹고 자란 허공의 꽃들. 그 꽃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읽으려 애썼던 것일까.
어제와 오늘이란 시간의 벽과 벽 사이 어머니는 조금씩 시드는 중이다. 베란다에는 꽃들이 찬란하다. 누구에게나 꽃이던 때가 있다. 그 꽃 같은 시절이 어느 덧 삶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어머니의 붉은 시간들도 시들다 곧, 바람처럼 가벼워 질 것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고 말한 어느 소설가처럼 움켜 쥔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안타까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에겐 제 몫을 다 하지 못한 자식도 꽃이고 천사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커피열매를 분쇄기에 갈기 시작한다. 에디오피아 남부지방의 붉은 열매 예가체프 커피 향이 가득하다. 먼 이국까지 깊은 향기를 품고 온 열매는 비로소 그윽해진다. 태양 아래서 온몸으로 견뎌 얻은 몇 그램의 뜨거운 커피향이다. 제라늄도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먼 이곳까지 왔듯이…. 어머니께서도 아프고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깊은 시간과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또 다시 나를 부른다. 거실은 알 수 없는 울림으로 깊숙하다. 한 방울씩 진한 커피 방울을 떨어뜨리는 커피드립 과정이 끝나가고 있다. 커피 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빗소리가 난다. 베란다엔 여전히 제라늄이 붉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는 제라늄의 강한 생명력처럼 어머니도 조금만 더 우리 곁에 있어달라고…. 나는 어머니 귓가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제랴늄 꽃들과 커피 향이 집안에 가득 피어나고 있다.
김 정미
*약력
2008년 전국공모 동서커피문학상 은상
2009년 <계간수필 >등단
2015년 〈시와소금〉시 등단
2016년 산문집『비빔밥과 모차르트』
시집『오베르밀밭의 귀』 『그 슬픔을 어떻게 모른 체해』
2017년 <춘천문학상>
2016년 2021년 강원문화재단 2017년 춘천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예
*주소: 강원도 춘천시 스포츠타운길 501 센트럴파크 푸르지오 103동 10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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