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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어요. (사이.) 다음날, 니 같이 데리고 자니. 이게 썩어빠진 세상이 아니고 뭐람. 난 다 부시고 말테야! 산산이! 가루가 되게!
미꾸리: (클레오파트라를 꾹
희숙: 그건 못해!
철힌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로 퇴장하려 한다.
클레오파트라 행장을 챙겨 가지고 자기의 집에서 나온다.
크레오파트라: 벽돌! (하고 부른진: 언니가 노래를 부르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만들어 불렀죠. 예를 들면, 눈물의 씨앗이 뭘 뜻하는지 몰랐으니까, 그저, 누아네 시앙시라고 부르면서 애듯한 표정을 지었어요. 언니는, 내 이상한 발음을 고쳐주려 애썼지만, 언니보다 더 억센 사투리가 입에 베어 영 잼병이었죠.
(잠시, 회상한다. 언니는 이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진: 또 한번은, 이런 말싸움을 한 적도 있어요. 그때, 언니는 열 아홉 살이었고, 나는 일곱살이었죠. 나는 나뭇잎을 나뭇이 파리라고 읽었어요
(탁자에 걸터앉아 책을 펼쳐들고 아이 목소리로 읽는 진. 언니는 노래를 끝내고 계속 레이스 뜨게질을 한다.) 나뭇 이파리가 동동 떠내려갑니다.
언니: 자, 진아. 따라해 봐. 나. 뭇. 잎.
진: 나. 뭇 자, 따라해. 나뭇잎이 동동 떠내려갑니다. 나뭇 이파리가 동동 떠내려갑니다.
언니: 아니야. 나뭇 이파리가 아니라 나뭇잎.
언니: 그래. 나뭇잎 나뭇 이파리가 동동 떠내려갑니다.
진: 나뭇 이파리가 동동 떠내려갑니다.
(진, 까르르 웃는다.)
언니: 아니, 아니야. 나뭇잎이 동동 떠내려갑니다.
진: 나뭇 이파리가 동동 떠내려갑니다.
언니: 나뭇 이피라니까! 나. 뭇. 잎!
진: 나. 뭇. 잎!
언니: 자, 다시 읽어
진: 나뭇이……. 파리가 동동 떠내려갑니다.
언니: 저기 봐. 감나무에 달린 저걸 뭐라 하지?
진: 나뭇 이파리
언니: 나뭇 이파리 책에선 나뭇잎이라고 해.
진: 저건 나뭇 이파린데
언니: 언니가 서울말 쓰랬지? 촌스럽게 나뭇 이파리가 아니라. 나뭇잎이야. 나뭇잎!
진: (고집을 부린다.) 나뭇 이파리!
언니: (뜨게질 감을 팽겨치고.) 나뭇잎!
진: 나뭇 이파리!
언니: 나뭇잎!
진: 나뭇 이파리!
언니: 나뭇잎!
(진과 언니는 서로 노려본다. 언니는 슬픈 표정으로 일어나, 무대 뒤로 걸어가 울음을 터트린다 우물을 덮은 뚜껑을 슬프게 내려다본다.)
진: 내 고집을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의 고집은 하늘이 무너져도 나뭇잎을 나뭇 이파리로 우겨됐던 거죠. 언니는 목이 쉬었고, 목이 쉬도록 가르쳤는데도 여전히 나뭇잎을 나뭇 이파리로 말하는 내 앞에서, 결국 울고 말았어요. 언니……. 참, 순진했어요. 지금은 나뭇잎과 나뭇 이파리를 구별할 줄 알지만, 그때는 나뭇잎과 나뭇 이파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지요. 누구나 나뭇잎을 나뭇 이파리로 발음했기 때문에 나뭇잎이 나무 시파리가 될 수는 없었던 거죠.
(잠시 생각한다.)
진: 문자를 믿을 수 없었던 원시시절이었다고 말할까요? 어쩌면, 문자가 싫었는지도 몰라요.
(바바리를 벗는 진. 무대 뒤의 언니 모습은 희미하게 비친다. 언니는 편지를 쓰고 있다.)
진: 언니는 사랑을 했죠. 남몰래 우는 것도 보았어요. 그때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사랑은 무섭게도 언니를 앗아갔어요.
(진이 우물로 걸어나온다. 언니는 편지봉투를 들고 나간다.)
진: 여기 이 우물 속에 언니가 있어요. 달 밝은 밤에 언니는 우물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으까요? 월남에서 죽은 애인을 생각했을까요? 그의 영혼이 빛이 되어 떠돌다가 여기 우물 위에 앉았을 때 언니는 그를 본거지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그를 따라 우물 속으로 들어간 거지요. 우물 속에 내려가면 어딘가 새로운 세상과 통하는 통로가 있을 것만 같아요. 길고 아늑한 통로로 금붕어 떼와 헤엄치는 언니를 상상했어요 죽음은 나에게 환상을 주었고,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던 나는 우물만 보면 빠지고 싶은 욕망을 견딜 수 없었어요.
(우물의 낡은 나무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며 소리한다.)
진: 아……. (소리가 울려 나온다.)
진: 아……. (음을 넣어 소리한다.)
진: 아아아.……. 아아……. (소리가 울려나온다.)
진: 아아……. 아아아
(귀를 기울인다……. 침묵……. 바람소리……. .)
진: 언니와 함께 우물이 메워지고, 나는 종종 여기 우물 속에 들어가 개구리를 잡곤 했어요. (진은, 우물 속에 들어간다. 우물위로 푸른 조명이 떨어지면서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꽃잎이 우르르 떨어진다. 우물 속에서 진이 어렸을 대의 목소리로 말한다.)
진목소리: 나뭇잎이 동동 떠내려갑니다. 청개구리 한마리 잡았다. 나뭇이파리가 동동 떠내려 갑니다. 비단개구리 한마리 잡았다. 나뭇잎이 동동 떠내려 갑니다. 문디개구리 한마리 잡았다. 나뭇이파리가 동동 떠내려 갑니다 문디개구리 한 마리 잡았다 남수이파리! 나뭇잎! 나뭇이파리! 나뭇……. 잎! 나뭇……. .이파리! 나뭇……. 이파리!
(놀리듯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어린이 진의 목소리. 사이. 칭얼칭얼 우는 어린 진의 울음……. 조명이 어두워진다. 우물 속에서 진은 정사각 등을 하나 하나 꺼내 놓는다. 물방울 떨어지는 음악이 흐른다. 등롱에는 태어나, 갓 태어나 죽은 아기, 갓난아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스무개의 등롱이 바깥에 놓여지면, 개구리처럼 배가 불룩한 진이 임부 복 원피스를 입고 우물에서 나온다.)
진: 여기 스무개의 슬픔이 있어요. 한동안, 고향집에 오지 않은 이유 슬픔 때문일지도 몰라요. 슬픔을 박살내기 위해 여기 고향집에 왔는지도 몰라요.
(등롱 하나를 들어 무대 위에 건 뒤 다시 등롱을 가지러 가는 진 언니가 촛불을 들고 들어와 진이 달아놓은 등롱에 불을 붙인다. 진은, 계속 등롱을 무대 위에 건다.)
진: 언니와 나는 배다른 자매였어요. 우리에겐 엄마가 없었죠. 언니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계모에 대해 말해줬어요.
언니: 계모는 헨젤과 그레텔을 굶어죽게 하려고 숲에 버리게 했어. 백설공주의 계모는 독이 든 사과로 죽이려 했고, 콩쥐의 계모는 하녀처럼 일만 시켰어
진: (등롱을 건다.) 우리들의 계모……. 아버지의 여자들이 바로 우리들의 계모였죠. 여자들을 한 달을 넘기지 못했죠.
(언니는 불을 붙인다.)
진: 언니는 이상한 미신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요강을 깨는 거죠. 아버지와 여자가 밤새 사용한 요강을 아침에 치우는 척 하다가 슬쩍 개트려 버리는 거죠. 어떤 날은 내가, 어떤 날은 언니가…….
언니: 남녀간의 정을 떼려면, 밤새 사용한 요강을 깨는 게 최고야
진: 그게 들어맞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여자들은 떠났죠. 그리고 이상한 일도 일어났어요. 누구의 장난인지 모르지만, 아니, 정말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보인다고 했어요.
(무대 막 뒤로 여자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언니와 진은 돌아본다.)
진: 누더기를 입고 눈물 흘리는 여자. 그들은 모두 그 여자가 무서워 살지 못했지요. 아버지가 다정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살았을지도 모르죠. 간혹, 여자들 중엔 곰 같은 여자, 소같은 여자들이 있어서 나타나거나 말거나 살기도 했지만, 아이를 낳으면 모두 죽어버렸어요. 더 살아 봤자 희망 없다는 걸 알고 그들은 떠났어요.
(진은 두개씩 등롱을 들어와 건다.)
진: 언니는, 엄마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언니 엄마가 미쳐서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었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언니는 내게 이런 말을 했어요.
언니: 사람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자살을 할 수도 있어.
진: 무슨 뜻일까……. 언니는 자살했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진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빈 등롱 하나를.) 마지막에 우리는 서로 버림받았다고 느꼈어요.그 느낌이 우리 자매를 연결해주었는지도 몰라요. (의자에 앉는다.)
진: 어쩌면, 아버지도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집에는 언니와 나 둘뿐이었죠. 아버지는 도시에 새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일년이 지나면 어김없이, 여자 아기의 시체를 들고 나타났어요.
(언니는 마지막 등롱에 불을 밝힌다.)
진: 이 등롱들은 그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가 만든 것이죠.
(등롱을 둘러본다.)
진: 저, 빈 등롱은 누구거지? 저건, 저건…….
(갑자기 공포를 느끼는지. 언니는 등롱 사이를 몽유병자처럼 돌아다닌다.)
진: 어느 날, 언니는 등롱을 보고 말했어요. 나는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날로 돌아가 언니와 아버지가 마주치지 않도록 했을 거예요. 영원히 말예요. 영원히!…….
(언니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중얼 거린다. 머리를 묶은 레이스수건이 떨어지고, 머리는 멋대로 풀어헤쳐진 상태다.)
진: 언니는 말했어요. 온 몸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작은 중얼거림으로 말했어요. 쉬지 않고, 주절주절, 결코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처럼 질기디 질기게 말했어요.
(언니는 밤새 나돌아다닌 사람처럼 몸을 떤다.)
언니: 아버지는 팔자에 아들이 없어요. 칠성줄이 강해서, 아들이 붙을 수가 없어요. 헛된 욕심 치우고 아버지, 그만 죽이세요.
진: 아버지는 갑자기 화석처럼 굳어졌어요. 눈동자만은 불처럼 활활 타올랐고, 시커먼 구름때가 하늘을 뒤덮듯 새카맣게 일그러졌어요.
(심호흡을 하는 주문을 외듯이 침착하게.)
언니: 여자 애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너무 많은 아이들을 죽였어요. 아버지가 지은 죄를 내가 받을 것이고, 내가 죄의 댓가를 치루는 것을, 아버지가 보게 될 거예요.
(진은 언니에게 봉투를 건네준다.)
진: 아버지는 봉투를 언니에게 주면서 말했어요. 그래, 벌써 댓가는 치뤘어…….
(봉투를 얼어 보는 언니는 새파랗게 질리며 뛰쳐나간다.)
진: 무섭도록 고요한 저녁이 였어요. 아버지는 등롱에 불을 붙이며 말했죠. 베트공이 니 언니 약혼자를 죽였다. 베트공이 뭔데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언니가 떨어트린 레이스 수건을 들어 냄새를 맡는다.)
진: 언니는 그날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지 않았고, 자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새……. 누군가 비명을 질렀죠.
(푸른 조명이 물 무늬처럼 무대를 뒤덮는다.
진: 우물에서 건져진 언니는 너무 차가워서 내 손이 얼어버릴 것 같았어요. 나는 언니가 추울가 봐 꼭 껴안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언니에게서 떼어놓았죠. 언니는 너무 추워! 언니가 너무 춥단 말야!
(진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는다.)
진: 나는 울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언니가 죽었는데도 울지 않는 나를 꼬집었죠.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어요. 정말로 울어야 할 때 울 줄 모르는 나는 정말로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웃어야 할 때 웃지 않는 것처럼, 행복해야 할 때 행복할 수 없는 거처럼, 감정의 불구였어요. (자신의 팔로 몸을 감싼다.)
진: 얼마나 차가웠을까. 언니가 빠진 우물은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우물이었었는데…….
(우물 속에서 푸른빛이 뿜어 나오고 모든 조명이 꺼진다.)
진: 아버지는 어린아이가 놀 정도의 공간만 남겨두고 우물을 메웠어요. 그리고 거기에 등롱들을 넣어 두었지요. 아버지는 이 집을 떠나 읍내로 이사를 했고, 집은 세입자가 자주 바뀌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휴가를 보내려는 나 외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빈집이 되었죠. 달리 올 사람도 없지만, 집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소라고동처럼 윙윙 울면서 말예요.……. 우습구나. 내가 떨군 것이 고작 너 하나뿐이라니. 하하.……. 아버지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아, 한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은 집이죠. 아버지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어떤 기대도 걸지 않았으니까요. 잘난 딸 열보다 병신 아들 하나가 낫다는 말이 아버지 믿음이었고, 나 또한 바꿔볼 생각도 안 했죠. 아버지는 나를 먼 친척이 하는 의상실 시다로 보낼 생각이었죠. 떠나기 전 날, 아버지는 선심쓰듯 물었어요. 너는 뭐가 될 셈이냐? 대학에 다니고 싶어요. 고등학교도 안 다닐 너가 무슨 대학이냐. 착각하지 마라. 너가 뭐 대단한 인물인줄 아느냐, 대학은 가서 뭐 할 생각이냐? 결혼도 않고? 허파에 바람든 신여성 될테냐? 저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아버지. 아버지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어요 시인? 거렁뱅이가 아니예요! 그럼, 시인은 이슬만 먹고 산다냐? 됐어. 내가 잘 생각했구나. 너는 옷 만드는 거나 열심히 배워. 아버지! 나는 시인이 되고 싶다고요! 시인! 아버지는 얼굴을 두 손에 묻었어요. 그렇게 한참을 계셨죠. 손가락에 들린 담배는 길게 재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나는 그 재가 언제 떨어질지 지켜보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대로 얼어붙은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았어요. 고개를 들었을 때 아버지는 울고 난 사람처럼 눈자위가 붉어 있었지요. 아버지의 눈길은 상당히 지쳐 보였고, 할아버지처럼 힘없이 투명해서 슬퍼 보였어요. 아버지는 쇠잔한 노인처럼 천천히 말했죠. 너무 못 배워도 사는 게 힘들지만, 너무 배워도 사는 게 힘들단다. 너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다니. 힘들구나.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삶은 이상만으로 사는 게 아니지만, 이상이 사라지면, 네 언니처럼 죽음밖에 ……. (우물에서 나비가 날아오른다. 진分이 우물에서 옷감을 꺼내들고 나와 단추를 단다. 진分은 짧은 뉵컷에 진이 입었던 남방에 청바지차림이다. 진은 손을 뻗쳐 나비를 잡으려고 무대를 서성인다 진分은 새로운 옷감을 우물에서 꺼내 또 단추를 단다. 그때마다 나비가 날아오른다. 진分은 빠른 손놀림으로 계속해서 단추를 단다.)
진분: 옛날, 일곱 왕자는 계모 왕비의 마술에 걸려 백조가 됩니다. 막내 공주는 오빠의 마술을 풀기 위해, 가시넝쿨로 만든 실로 옷을 짓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봄여름 갈 겨울 없이 옷을 만듭니다. 가시는 공주의 얼굴을 긁어놓았고, 공주 머리는 가시덤불처럼 자랍니다. 마녀로 오인 받은 공주는 화형 장으로 끌려가고, 마지막 일곱 개의 옷이 만들어진 순간, 공주는 비로소 모든 사람의 오해를 풀게 됩니다.
(진分은 옷을 정리한다.)
진분: 이야기는 늘 여기서 끝나.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말야. 동화란 다 그렇게 끝나니까 이상할 것도 없어.
진: 일곱 왕자의 마술이 풀린 뒤 공주는 어떻게 살았을까?
진분: 공주는 여전히 옷을 짓지. 굵은 손가락은 가시를 그리워하고, 궁전보다는 가시덤불을 편안해하지.
진: 의상실의 시다 생활은 일년만에 종을 쳤습니다. (진分은, 우물에 옷들을 넣고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아 책을 본다. 진은 탁자 위에 앉는다. 이후 진分과 진의 대사는 탁구공처럼 빠르게 오간다. 둘은 하나이고, 때로는 분리된다. 조명은,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진: 마술에 걸린 자매들을 위해 옷을 짓는다고 생각했지. 태어나자마자 빨간 알몸으로 싸늘한 땅속에 묻힌 아기들
진분: 언니는 왜 우물 속에 빠졌을까?
(진分은 책을 덮는다.)
진: 원래 피가 그런 피라고, 아버지가 말했지만, 언니 모계로 타고 흐르는 이상한 유전자 핑계로 죄책감을 벗어나려 했던 건지도 몰라. 아버지는 이제 어떤 죽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인간 같았지.
진분: 두 번의 전쟁을 거쳐왔지만, 살아난 사람답게, 여전히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이상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는지도 몰라. 그가 죽으면, 그 뒤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공허가 영원히 아버지를 삼켜 버릴 거라는 생각, 아마도 그런 생각이 아버지를 공포에 떨게 했는지도 몰라.
진: 무엇이 아버지 맘을 변화시켰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의상실 시다 생활을 그만 둔 나를 계속 공부시키기로 마음먹었죠.
진分: 집에 돌아 온 나는 폐병을 앓았어요. 의상실의 먼지가 폐를 갉아먹었던 거지요. 고된 일과 짧은 수면시간도 한 몫 했죠. 열에 들뜬 시간.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는 생모에 대해 말해줬습니다
진: 주문진 바닷가 교회에는 일곱 아들을 둔 목사 부부가 산단다. 아들 복이 터진 목사 부인이 바로 네 생모다.
진分: 예수쟁이 남편은 니 생모가 처년 줄 알지. 그러니 넌 절대 찾아가선 안돼!
(파도소리.)
진: 어머니…….
진分: 낯설지만 이상한 평온을 주는 이름.
진: 열에 들뜬 밤마다 환청아…….
진: 쉬이…….
진분: 쏴아아…….
진: 쉬이…….
(바하의 미사음악.)
진分: 어느 날, 아버지 몰래 기차를 탔습니다.
진: 주문진에는 교회가 있었지만, 일곱 명의 아들을 둔 목사부인은 없었습니다.
진분: 무섭도록 파란 바다가, 저녁 하늘빛을 받아 배추 색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진: 사람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바다에 비유하죠. 바다같이 넓은 어머니의 사랑. 모성은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부는데 어째서 내 어머니는 어름바다같이 냉정할까
진분: 순간, 분노가 일어났어요
진: 나는 텅 빈 바다에 소리쳤죠
진분: 절대로 안 찾을거야! 절대로 안 찾을거야!
(파도소리 점점 멀어진다. 진과 진分은 앉은 채로 꼼짝 않는다 천둥이 치는 소리. 바람소리 무대 위의 등롱이 일렁이며 흔들린다.)
진: 여기 이렇게 앉아 비가 몰려오는 것을 보았었죠. 아버지는 내 묘 자리까지 알아두었고요. 눈이 내려도 그자리만, 동그랗게 녹는, 양지바른 곳이죠 나는 죽고 싶지 않았어요. 살고 싶지도 않았고요. 욕망도 좌절도 없는 텅 빈 공간 속에 떠 있는 느낌이었어요. 지옥도 천당도 아닌 연옥. 빛도 바람도 없는 권태의 늪. 나를 일으킨 것은 폭풍이었어요.
(천둥과 함께 휘몰아치는 비바람소리 진分은 벌떡 일어나 먼 곳을 본다.)
진: 조용하던 정오에 모든 소리들이 멈췄지요. 개미도, 벌레도, 나비도, 잠자리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 들판 끝에서, 뿌연 흙먼지가 일더니 차가운 실바람이 어느 순간 내 볼을 스쳤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서늘한 바람이었어요 나는 계속해서 그 한 점을 바라보았죠. 작은 흙먼지는 점점 다가왔어요. (진分은 두 팔을 벌린다.)
진: 거대한 흙벽을 이루면서, 비 무리를 이끌고, 흙 냄새를 이끌고, 순식간에 덮쳐버렸죠. 나는 비에 흠뻑 젖었어요. 내 발은 흙탕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요.
(진分은 활짝 웃는다.)
진分: 나는 살아있어! 나는 살아있어! 살아있다!
진: 나는 살아있어.
진분: 살아있어!
진: 살아있어.
진分: (소리친다.) 살아있다!
(진分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진: 하루종일 산으로 들로 취한 듯이 흘러 다녔죠. 들국화가 필 때쯤, 공기의 빛깔도 달라지고, 밤이 오기 전 마을의 안개 빛도 달라지죠 투명한 실개천엔 별이 떨어지고, 전등을 켜지 않고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죠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나를 살린 것은, 나를 기른 것은, 나를 품어준 것은 자영이었어요.
(진分은 매화꽃을 진에게 던지고 까르르 웃으며 나간다.)
진: 나에게 모성이 있을까요? 오래 전부터 생각했어요. 나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좋은 어머니란 어떤 것일까?
(흰 옥양목 기저귀 감이 든 바구니를 꺼내든다. 기저기를 갠다.)
진: 나는 냉정한 어머니가 될까봐 두려웠어요. 사실은, 누구보다도 내가, 내 자신이, 아이를 버릴까봐 무서웠어요. (사이.) 나는 다시 말해……. 패배자인지도 몰라.……. 여기, 이렇게 다시 돌아왔어.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라 맹세했지. 그런데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어……. 어쩌면, 내 몸을 분재처럼 다루었는지도 몰라……. 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배를 만진다. 태동이 느껴진다. 진은, 움찔한다. 거의 공포에 가까운 표정.) 아니야. 아니……. 지금은 아니야. 편안하게 너를 기다리고 싶었어. 기습적으로 쳐들어올지는 몰랐지 난, 너를 죽이려 했어. 널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이를 낳는것이 뭘 의미할까. 수도 없이 나를 설득했지. 나는 인형을 구하는 소녀가 아니야. (사이.) 솔직히 말하자면, 널 죽일 수도 있었어. 10분이면 된다는 군. 나는 최면상태에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않을 거야. 그게 훨씬 너에겐 편할 거야. 이런 엄마를 보고싶니? 이렇게 엄청난 일을 고백하는 이 엄말? 아니야. 나는 알고 싶어. 내가 어떤 엄마가 될지. 거부하지 않을 거야. 너를. 삼신할머니가 그날, 내게 좀 더 관대했더라면, 나는 이성을 차리고, 널 가지는 걸 보류했을 거야.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을 단념한 뒤에 너를 가지리라곤 상상도 안 했어. 이 모든 것이, 세상에, 서른 세 살이 된 여자의 변명이라면 믿겠니? 성교육을 못 받아서일까? 콘돔? 그건 남자가 사용하는 거지. 내가 억지로 싫다는 남자에게 그걸 끼울 수는 없지. 욕망? 다만, 누군가의 심장소리를 듣고 싶을 뿐이야. 그 뿐이야. 그뿐이라구. 그뿐!……. 내 성욕이 잘못 된거니?……. 나는 아직도 일곱 살일까? 내가 서른 세살의 여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 여자……. 참, 불순하다는 생각을 했지. 그렇지 않다면, 참, 가련하다는 생각. 모든 게 잘못된 것 같아. 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아니야 우물 속에서 혼자. 오래오래 울고 있는 아이. 바로 나란다. (진은, 몸을 웅크린다. 관객은 근가 울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너는 내게 말하는구나. 나를 위로하는구나 내게 안심 하라는구나 어쩌면, 너는 태어나기도 전에 어른이 되었나보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가 여길 온 것은 정화되기 위해서야. 깨끗한 몸으로 너를 낳기 위해서야 여기는 절대 신성한 곳은 아니지. 많은 여자 애들이 죽은 곳이지. (매화꽃을 주워 화병에 꽂는다.) 분명한 건, 내 어머니는 나를 혼자서 낳았다는 사실이야. 혼자서, 태를 끊고, 나를 씻었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나를 낳았어. (숨을 몰아쉰다.) 고통이 오기 전에 이슬이 내린다고 하지. 학교 가는 길에 나는 양말을 신지 않았어 이슬이 운동화를 적셔놓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런 이슬이 아니야. 아기는 이슬로 엄마에게 신호를 보낸다지? (고통을 느끼지만 미소짓는 진.) 엽서 같아. (숨을 몰아쉰다.) 후. 후. 후. 후. (일어나려 한다. 다시 주저앉는다.) 너무 늦은 걸까? 이럴 때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어. 염라대왕이 휴갈 보내주면 조겠는데.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휴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귀신들이 무섭지도 않을테고 말이야. 죽는 것도 훨씬 덜 무서울텐고……. 후후후 (진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다가 딸꾹질을 한다.) 누구는 밭 메다가……. 애를 낳았다……. (딸꾹질.) 누구는 길에서……. 낳았지……. 후우욱……. 후우……. (딸꾹질을 멈출 수 없는 진.)
(조명이 어두워지며 등롱의 불만 밝다. 무대 뒷면의 커튼이 열리고 후면전체에 거울이 드러난다. 거울을 통해, 등롱의 수가 더 늘어나 보인다. 진이 앉은자리만 푸른 조명을 받는다. 푸른 조명은 물 무늬처럼 무대를 떠돈다.……. 진이 서서히 신음을 한다. 진은, 입술을 앙 다물고 신음을 참는다. 그러나, 딸꾹질은 멈추지 못한다.……. 진分이 끝이 종처럼 생긴 촛불 끄는 막대를 들고 등장하여, 등롱의 촛불을 하나하나 꺼나간다……. 진의 딸꾹질과 신음의 간격은 더욱 짧아진다. 진分이 마지막 남은 무늬 없는 등롱의 촛불을 끄는 순간, 아주 가늘고 여린 갓난아기의 첫 울음이 터진다. 동시에 텅 빈 어둠 속에서 음악이 흐른다.)
제3부
두 개의 조명이 떨어지면, 가면을 쓴 배우1,2가 서 있다.
가면은 젊은 여자 얼굴로 현대적이다.
배우1: 어머니가 되는 일은 신성하다고? 신성하죠. 하지만 먼저 내가 짐승인걸 깨달아야 할 것요. 동물. 암컷……. 이성은 일단 보류해야 해요.
배우2: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돌아가면서 찔러대는 통에 죽을 지경이었어. 문이 30프로 열렸다니 40프로 열렸다니, 무슨 암소가 애 낳는거 마냥, 엄살부리지 마세요. 힘주지 마세요. 명령하면서, 윽박지르면서…….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이 고통에 실신할 지경이었으니 자존심이고 뭐고 엄마만 부르면서 울었어.
배우1: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수술이나 할걸. 자연의 이치대로 따르다간 죽을 것 같았죠. 의사를 붙들고 수술해달라고 매달렸어요. 그랬더니 촉진재를 놓아 주대요. 빨리 낳게 하는 주사 말예요.
배우2: 모든 게 후회됐어. 결혼이며 임신이며……. 앨 낳아도, 보고싶지도 않았어.
배우1: 모성요? 처음부터 모성을 느꼈냐고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저 애가 내 앤가……. 이 정도?
배우2: 처음 애기를 봤을때, 여전사 같았어. 내 삶을 구원해줄 여전사 말야 마취제 맞은 뒤로 아무 것도 기억 못하니까요. 다만, 회복되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 애 볼 생각도 없었어요. 그러니 모성을 느낄 새도 없었죠 뭐.
배우2: 분만실로 옮긴지 1분도 안돼 낳았어. 대변 누듯이 한번 끄응 하니 숙 나오는 거 있지. 의사도 내가 쉽게 낳았대.
배우1: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해요. 아이가 나올 때 머리모양이며 피묻은 얼굴 까지도요. 난,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배우2: 간호사가 얼굴을 보라고 아이를 내밀었어. 나는 고개를 돌렸지. 보고 싶지 않았어. 그 애가 미웠으니까. 젖도 물리지 않았어. 아이는 황달이 있어서 모유를 먹지 못했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예 젖을 물릴 생각도 없었지만, 한번 물려볼걸 하는 후회가 조금 나아 아이는……. 태어난 지 삼일 후에……. 어딘가 입양되어 신생아 실에서, 곧장 떠났어.
배우1: 나는 에정 일보다 일찍 낳았어요. 산후휴가가 고작 한달 이니 어떡해요? 의사도 여름휴가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촉진재 맞고 놨어요. 어쨌든 아기는 한달 만에 부산 시댁에 맡겼어요. 어쩔 수 잇나요? 나도 집에서 애나 키우고 싶지만, 남편 월급으로 어디 살 수 있어야 말이죠. 한 달에 한 번 서울서 배행기 타고 애 보려 가요. 돌이나 지나야 놀이 방에 맡기죠. 그렇게 어린 애를 남한테 맡기기도 그렇고……. 모성이요? 몰라요. 너무 바빠서 모성이고 뭐고 정신없어요. 애 장래를 생각해서 돈을 버니까 그게 모성 아닌가요?
배우2: 6개월 부터 돌까지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그때부터 엄마를 알아보고 엄마를 좋아하니까요. 아이는 키우면 정이 들어요. 모든 새끼들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것이 무긴가 봐요. 그러니,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강하다잖아요. 그러고 보면 모성도 정성 들인대로 생기는 거 아닌가요?
배우: 나는 애를 셋이나 나았어요. 지금이 네번째 임신인데 낳을때마다 기부니 달라요. 카톨릭 신자라서 생기는 대로 낳아요. 적성에도 맞아요. 애 낳는 거 말예요. 낳고, 도, 낳고,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자꾸 낳고 싶어요. 전생에 여왕 개미였나봐요.
배우: 친정엄마는 25년 동안 애를 낳았지만, 할 일 다 하셨어. 하긴, 그게 어디 기르는 건가. 사육하는 거지.
배우: 그냥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어요. 부모님은 내가 비만이라고 생각해요. 임신한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죠. 처음엔 나도 몰랐어요. 골목에서 한번 성폭행 당했을 뿐인데……. 아기는, 그냥, 변기통 에 떨어졌어요. 그리고……. 또 아기가 나왔어요. 자꾸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수도 벨브를 눌렀어요. 아기는 너무 커서 내려가지 않았어요.
(짧은 암전과 음악 무대는 1부와 같은 바이다. 커튼과 가리개로 공간이 미로처럼 분리되어있다. 어둠속 에서 노트북의 화면만이 보인다. 자판을 두드리는 진의 뒷모습 옆에는 유아용침대가 있고, 그 위에 모빌이 늘어져 있다. 음악이 끝날때 쯤, 진은 자판을 멈추고, 펼쳐둔 일기장을 넘긴다. 진은 다시 자판을 두드린다. 그때, 가리개 위에서 의자에 앉아 시집을 읽는 진分의 모습이 드러난다. 진分은 긴 생머리에 짧은 원피스 차림이다. 진은, 자세를 멈추고 화면을 들여다본다.)
진?: 이 슬픈 사연을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허황 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음이고 만물의 본체는 외양대로 만은 아니란다. 인생은 실제! 인생은 진지한 것! 무덤이 그 목표는 아니야. 너는 본래 흙이라. 흙은 돌아가리라. 이것은 영혼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우리가 가야할 곳. 혹은 가는 길은 향락이 아니고 슬픔도 아니며 내일의 하루하루가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인생이라.
(일기장을 들고 돌아선다.)
진: 옛집에서 짐을 챙기다가 발견했는데, 열네살 적에 쓰던 일기장 이예요. 여기 시가 있어요. 힘들때 마다 외웠어요. 옛날에 사진관에서 자주 애용하던 시이기도 하죠. 나뭇잎이나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에 배를 그리고 그 위에 증명사진과 시가 있는거 말예요. 단골로 등장하는 시가 바로 이 시예요. 약간 유치하다고 생각될지 몰라도, 열네살 소녀를 살게 한 시죠.
(진分이 가리개 뒤에서 중얼거리며 시를 외운다. 시집을 가슴에 안고, 하늘을 보고 시를 외우고, 다시 책을 보고 확인하면서 서성거린다. 진은, 일어나 유아용 침대 안을 들여다본다.)
진: 어젯밤 꿈에 나는 옛집을 다녀왔어요. 우물뚜껑이 열리며 언니와 스무명 의 아이들이 나왔어요. 그들 뒤로,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우물물이 넘쳐났어요. 언니와 아기들은, 둥글게 손을 잡고 붕 떠올라, 커다란 금붕어로 변하더니 내 품에 쑥 덜어왔어요. 금붕어를 안고 보니, 바로, 이 애였어요.
(진, 모빌을 흔들어 본다. 멜로디가 울린다.)
진: 남자들은 군대 다녀 온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처럼 늘어놓길 좋아하죠. 마찬가지로 여자들도 출산한 경험을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용사처럼 말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견딘 사나이로서 긍지를 가지고 약간 과장되게 유격훈련을 말하듯이, 얼마나 오랜 시간 진통을 견뎠는지에 대해 말하죠. 아이를 낳은 후 마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용사를 맞이하듯 진정으로 맞이하는 여인네들의 말없는 환대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어머니가 되는 고통스런 의식을 치른 자에 대한 존중이었습니다……. 생명을 낳은 자에 대한 존중……. 왜 이런 은근한 유대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을까요? 합리적인 살인기술을 배우기 위해, 육체와 정신이 분해되는 과정을 거친 여자는 무얼 느낀 것일까요?
(가리개 뒤에서 서성이던 진分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본다.)
진: 우리는 서로 영혼 깊은 곳에 어떤 상흔이 생긴 것을 보는 게 아닐가? 평생 지워지지 못하는 문신과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어미는 이제, 모든 것을 두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지.
진分: 작은 벌레, 아기 돼지, 어린 염소, 강아지, 송아지, 참새새끼…….
진: 소리 없이, 드러나지 않게, 이 작고 연약함, 거품 같은 존재, 누구의 보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를 위해, 세상의 어둠과 맞선 자의 막막함.
(멜로디 음악이 끊기면, 다시 모빌을 건드린다.)
진: 후루룩 후루룩……. 나는 눈을 감고 이 소리를 들었어요. 한없이 길고 긴 탯줄이 빠져 나가는 소리를요. 간호사가 아이를 보여줄 때, 엄마가 ? 여기 있지? 하고 생각했어요. 정신착란일까요? 아이는 엄마얼굴을 닮았었어요…….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얼굴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어요. (사이.) 다음날, 간호사가 아이를 데려 왔을 때, 이 앤 누구죠? 하고 말했어요. 아이는, 먼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 같았죠. 아이에게 나는 어떤 감정도 생기지 않았죠. 다만, 낯설고, 어색하고, 힘겹고, 두렵기만 했어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멜로디가 끊긴다. 진은 다시 모빌을 흔들어준다.)
진: 간호사가 불러서 가보니 아이는 울고 있었어요……. 엄마가 보고싶대요 한 엄마를 원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예요. 귀저기를 갈려고 하는 순간, 나는 보았어요. 배꼽. 아이의 배꼽을요. 보라색 소독약이 묻은 길고 검은 배꼽의 상처, 배꼽을 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어요……. 이 애도 상처를 받았구나. 나만 아파한 게 아니었어. 이애도 혼자 아파하고 있었던 거야. (사이.) 우리는 함께 고통을 치루었구나. 세상에 태어난 댓가를 치루듯이 배꼽의 상처를 받은거야……. 내가 예전에 받은 상처의 흔적을 간직하듯이 태어남으로 해서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당해야 하니. 이제 그 첫 단계로 너는 배꼽의 상처와 싸우는 거야. 나는 처음으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사이.) 네 아픔을 엄마는 이해해. 곧 사라질 고통이니 조금만 참아.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흑진주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죠. 얼굴을 익히려는 것인지 눈동자에 나를 담고 꼼짝하지 않았어요. (진은 꼼짝 않고 관객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맡기는 무방비한 상태로 두개의 눈동자가 나를 봅니다.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어요. 누가 뭐래도 이 애는, 내 몸에서 나온, 아이라는 사실을요. 아무도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굳이 천년만년 종이에 기록하지 않아도 말이지요 그러니 굳이 자취나 흔적을 남길 필요가 없는 거지요. 아이 얼굴을 보면서 불안하게 자신의 닮은 점을 찾는 그를 보았습니다. 왜 그는 탐색하듯이 아이 얼굴을 훑어보는 걸까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발가락이 닮았네?……. 가여웠습니다. 이상하게도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온전히 나 혼자만의 아이 같아서 미안했는지도 모릅니다. ……. 우리는, 다시 시작된 걸까요? 그 사람은 한달 만에 여행객들과 네팔로 떠났어요. 우리의 관계가 변할 것 같지는 않았어요. 다만, 비로소 지금에야 그를 놓아준다는 사실이죠. (사이.) 나는 남자에게 열등감을 가져야 한다고 세뇌 당했는지도 몰라요…….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실은, 서로서로 느끼는 지도 몰라요. (모빌의 멜러디가 끊긴다.) 너무 오랫동안 깊은 늪에 있었어요. 아이가 바로 나를 끌어올렸어요. (검푸른 조명으로 어두워진다.) 무방비 상태의 어린 시절 상처는, 내 탓이 아니야. 나는 너무 오래, 나를 비난했어. 내가 태어난 것까지, 나를 비난해야 했지. 내 책임은 처음부터 없었어! 죄책감에 시달릴 이유도 없었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를 용서해.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와진 거야. 이제 다시는 나를 지배할 수 없어!
(진은, 가리개 뒤에 앉은 진分을 향해 앉는다.)
진?} 너가 죽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얘기할까? 열 일곱 시간의 진통을 견디면서 내가 누굴 불렀는지 아니?
진分: 누구지?
진: 엄마
진분: 엄마?
진: 엄마!
진분: ……. 엄마…….
진: 내 울음소리는 서른 세살의 여자가 우는소리가 아니었어. 내면에 숨어있는 아이. 자라지 않은 채 늘 울고 있었던 아이. 너무 일찍 늙어 시들어버린 아이, 바로 너가 우는 소리였어.
진분: 누구?
진: 길 잃은 아이. 바로 너
진분: 바로 나란 말이지?
진: 그래, 나는 너야.
진분: 너는 나야?
진: 그래, 너는 나야.
진분: 내가 너라면…….
진: 내가 너라면?
진분: 보내줄 거야.
진: 보내준다고?
진分: 날 잊을 수는 없겠지? 지 잊을 수는……. 없겠지.
진분: 넌, 나를 지을 수가 없어
진: 누구나 과거를 지을 수는 없지. 다만,
진分: 다만, 뭐지?
진: 새로 시작할 용기는 가질 수 있어.
(진과 진分사이에 긴 가로선 조명이 비친다. 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무대조명은 푸른 조명으로 어두워진다. 가리개가 서서히 걷혀서 거울이 드러난다. 거울 앞에 진分이 앉았던 의자가 있다. 의자에는 진分이 입었던 원피스가 사람처럼 앉아있다. 진이 원피스를 목에 댄 채 의자에 앉을 때, 무대 앞쪽에서 짧은 숏컷의 진分이 등장하여 노트북 앞에 앉는다. 진分은 마치 깊고 깊은 심연의 바닥을 내려다보는 듯 꼼짝 않는다. 진分은 화면의 글자를 읽는다.)
진分: 나는 여러분을 봅니다. 여러분 속에 숨어있는 작은 아이 행복한 아이 외로운 아이 슬픈 아이 상처 투성의 아이 소리 없이 우는 아이 …….
(진이 앉은 의자가 서서히 돈다. 아주 작게 음악이 흐르고, 진은 고개를 떨구고 R 짝 않는다. 조명은, 검푸른 물 무늬로 변하면서 어두워진다. 그 속에 한 점으로 사그라질 때까지 진은 검은 시체처럼 꼼짝 않는다. 음악이 흐르면서 암전.)
막
홍동지는 살아있다. 김광림
나오는 사람들
홍동지
놀음바치들
왕
맹대장
왕비
재간이
시녀 장
이쁜이
내관
악사들
박사
검둥이
잡종
도깨비들
전령
아이
몸종1, 2
눈물
시녀들
망치
제일막
1. 세 도깨비
(세 도깨비가 하늘을 날고 있다.)
아이: 인간의 세상…….
눈물: 으흑, 으흑 (구역질을 한다.)
망치: 다 때려 부숴라. 싸워라. 죽어 없어져라.
눈물: 으흑, 으흑……. 그만해두어, 냄새가 나잖아?
아이: 홍동지는 어디 갔지?
눈물: (구역질을 멈추며) 홍동지?
아이: 그래, 홍동지.
망치: 저기 영노 좀 봐. 잘한다. 잘해!
아이: 홍동지를 찾자. 홍동지, 홍동지!
눈물: 홍동지가 어딨어?
아이: 강하나 건너 산두개 너머…….
망치: 홍동지?
아이: 그래, 홍동지. 가자, 강하나 건너 산두개…….
눈물: 강하나 건너 산두개. (세도깨비 날아간다.)
2. 이시미막
(놀음바치들이 궁전뜨락에서 꼭두각시 놀음을 연습하고 있다. 맹대장은 마을 사람, 재간이가 박첨지, 그리고 이쁜이는 홍동지 인형을 놀린다.)
마을사람: 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봐.
박첨지: 에이 오라질것. 이승에서 못 살면 저승에서 살지, 네밀……. (이시미 있는데로 가까이 가서 때리려고 하다가 이시미에게 얼굴을 물린다.) 어, 어, 어, 아야 야……. (이시미에게 물린채로) 아이고 여보게…….
마을사람: 거 잘 됐다. 네에밀.
박첨지: 아이고 여보게, 조카 좀 불러주게
마을사람: 조카가 누구야?
박첨지: 우리 홍동지.
마을사람: 여, 산너머 뒨둥이. (홍동지 등장한다)
홍동지: 똥노, 똥노.
마을사람: 똥은 웬 똥이여, 빨리 나와 썩을 놈아!
홍동지: 가만있어 밥 좀 먹고.
마을사람: 아, 저놈의 자식이.
홍동지: 왜 그리 찾소?
마을사람: 너 외삼춘 하나 있잖아?
홍동지: 응. 우리 외삼춘인지 무언지 하나있지.
맹대장: (인형을 놓으며 이쁜이에게) 소리하고 인형이 따로 놀아. 이렇게 바싹잡고 자 기 몸 놀리듯 하라구! 몸하고 인형 소리 모두 한가지가 되어야해. 다시 들어가세. (홍동지 등장 장면부터 다시 연습하는데 내관 등장한다.)
내관: 여기들 있었는가?
맹대장: (인사하며) 나리.
내관: 잘 돼가는가?
맹대장: 지난 겨울에 영감이 꼴깍해서 새루 사람을 뽑았는데 이것들 때문에 죽겠습니다. (이쁜이에게) 인사드려라. 내관 나리시다.
이쁜이: (인사하며) 이쁜이라고 합니다.
내관: 으응 (맹대장에게 새끼 손가락을 펴보이며) 자네 요건가?
맹대장: 원 나리두…….
내관: 폐하께서 이번 잔치때 자네들 노는거 보시겠다고 기대가 크시네.
맹대장: 걱정입니다.
내관: 걱정은 뭘. 하는만큼 하면 되지. 오실 시간이 됐으니 가서 기다리세. 인사 미리 올려두는게 좋지.
3.영노
(잡종과 검둥이를 대동한 왕이 새파랗게 질린 채 숨을 헐떡이며 등장한다.)
왕: 망할것들이 모두 어디가 자빠져 있는거야? (이때 내관을 앞세우고 광대패들 등장한다. 왕을 보고 모두 그 자리에 엎드린다.)
왕: 이것들은 뭐냐?
내관: 놀음 바치들이옵니다.
왕: 놀음바치? 광대패거리 말이냐?
내관: 그러하옵니다. 내일 모래 잔치때 쓰려구 불렀는데 폐하께 인사 올리려구…….
왕: 인사구 나발이구 지금 난리났다. 야. 박사오라고해.
내관: 네잇. (밖에다 대고) 박사 듭시라신다아.
왕: 장관 이자식은 뭘하고 자빠졌나? 왕이 다 죽다가 살아났는데두 술 처먹구 농탕 질만 치면 되는줄 아나부지? 이봐. 애들 풀어가지구 장안의 술집 샅샅이 뒤져 서 붙잡아와. 안들으면 팔목아질 비틀어 갖구라도 끌고 오라 그래.
내관: 네잇. (퇴장한다.)
(박사등장.)
박사: 부르셨습니까?
왕: 오, 박사. 이거 큰일 났소.
박사: 무슨일 입니까? 폐하.
폐하 서정 시찰을 하고 오는 길에 듣도 보도 못하던 괴물을 만났소. 용도 아니고 매구도 아닌 것이 키는 열척이 넘은 데 내 평생 그렇게 못생긴 얼굴은 처음 봤소. 이 놈이 그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집이고 담벼락이고 다 때려부시면서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먹는데 꼬리로 감아 죽이고 발바닥으로 눌러 죽이고 주둥이로 물어죽이고……. 잠깐 사이에 동네 하나를 쑥밭을 만듭디다. 나 오늘 그놈한테 밟혀죽을뻔 했수. 얘들 아니었으면 지금……. 어이구……. (울먹이면서 흰둥이의 손을 잡고 잡종의 등을 두드리며) 얘들아, 안 그러냐?
박사: 폐하. 그 괴물은 영노라는 놈입니다. 선조때의 일로 압니다만 그 놈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사흘 밤낮을 쉬지앟고 지랄을 부리다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옵니다. 그놈의 지랄을 막으려다 군사 수백과 민간인 수천이 죽고 다쳤다는 기록이 있사옵니다. (이때 내관과 함께 전령이 뛰어들어와 왕앞에 엎드린다).
왕: 무슨일이냐?
전령: 장관께서…….
왕: 팔목아지를 비틀어서 끌고 오라는데 뭣들 하는거야?
전령: 서거하셨습니다.
왕: 뭐라구? 장관이 뭐?
전령: 서거하셨습니다.
왕: 내 그럴줄 알았다. 그놈 그렇게 맨날 술만 처먹으니 제명에 못죽지. 그래 장례는 술집에서 치뤄준다더냐?
전령: 그게 아니옵고…….
왕: 안이고 밖이고 시원스럽게 얘기해봐.
전령: 네. 그러니까 말씀 여쭙자면 장관께서…….
왕: 그래, 장관께서
전령: 그 괴물한테 당하셨습니다.
왕: 무어라구? 정말이냐?
전령: 네 정말입니다.
왕: 자세히 말해봐라.
전령: 네 그러니까 장관께서 서정시찰을 하시던 중…….
왕: 그래 술집을 순방하던 중.
전령: 네. 그러니까 그렇게 하시던 중 마을 어구에서 그 괴물을 만나셨습니다. 장관은 괴물 앞에 우뚝서시더니 동네 아이 꾸짔듯 이노옴 하고 호통을 치더군요. 이놈이 장관님도 몰라봤는지 아니면 호통소리를 미처 못들었는지 호통이 끝나기도 전에 그대로 공격을 가하더군요. 장관은 피하실 겨를도 없이 그냥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왕: 술이 고주망태기가 됐으니 피할 겨를도 없었겠지. 그래, 어떻게 당했다던가?
전령: 그러니까…….
왕: 그러니까는 필요없고 물려 죽었어, 밟혀 죽었어, 채여 죽었어?
전령: 그것은 자세히 알수 없으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계신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 했습니다.
왕: 가까이 가서 확인 했단말이지?
전령: 가까이는 못가고 먼 발치서 확인 했습니다.
왕: 야, 이놈아, 가서 확인을 해야지. 저 멍청한 놈 저거……. 빨리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보고와.
전령: 네. 알겠습니다. (퇴장한다.)
왕: 저런 놈이 무슨 전령이라구 ……. (혀를찬다.) 그래 박사, 어찌하면: 좋겠소?
박사: 지금으로선 뾰죽한 수가 없습니다.
왕: 그럼 그냥 이렇게 당하고 앉았잔 말이야? 아차. 내 정신. (내관에게) 가서 시녀 장을 모시고 오너라.
내관: 네잇. (퇴장한다.)
왕: 무슨 묘안이 없단 말이야?
박사: 죄송합니다.
왕: 이거 어떡하지?
박사: 제놈이 아무리 불학무식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