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낙지와 잠퉁이 / 조미숙
올 1월에 서울에 다녀왔다. 1주일쯤 넉넉하게 일정을 잡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볼 요량이었다. 하루는 윤동주 문학관에서 출발하는 인왕산 둘레길을 걸어 볼까 했는데 망설이다 포기하고 그냥 동네 피부과에 갔다. 새끼발가락이 아파 걷기 불편하니 냉동 티눈 치료를 받았다. 그때는 멀쩡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너무 아팠다. 소염진통제를 하나 사 먹고 견뎠다. 할 일이 없어지자 어릴 적 동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이래저래 소원해진 친구들을 가뭄에 콩 나듯 보는데 다들 바쁜가 보다. 겨우 약속을 잡았다.
두 친구는 나한테 한마디씩 한다. 어쩜 그렇게 다짜고짜 만나자고 하느냐고, 서울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지 모르냐고, 아무튼 지방 사람들은 너무 게으르다는 일련의 훈계를 했다. 대책 없는 게 내 성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게으르다고 일반화할 게 뭐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난 게으르다. 늘낙지(행동이 낙지처럼 느린 사람, 사투리)에 잠퉁이다. 어려서부터 무수히 듣던 말이다. 행동도 말도 생각도 느린 데다 잠도 많다. 갓난아기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엄마가 재워 놓고 밭일을 다하고 들어오도록 세상모르고 자니 행여 잘못됐나 확인까지 했다. 언니들은 나에게 어떻게 애 낳고 살림하고 살지 걱정했다. 제일 자신 없는 일이 쓸고 닦고 치우는 거지만 어찌 됐건 난 아이 세 명을 낳아 길렀다.
잠을 아껴가며 아등바등 열심히 산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시간은 흘러 이제는 챙겨야 하는 아이들은 곁을 떠났다. 큰딸이 함께 살고 있지만 내 손이 많이 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귀찮아한다. 게으른 습성은 이제 제힘을 발휘하는 시기를 맞은 것이다. 맘껏 게을러졌다. 나이를 먹으면 없어진다는 아침잠이 더 늘었다. 아직 젊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아침마다 침대가 나를 놔주지 않는다. 우리는 한몸이 되어 뒹군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서 떠지지 않는 눈으로 냉장고를 뒤진다.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꺼내 든다. 우적우적 먹고 나서 핸드폰을 뒤적거려 본다. 포인트를 주는 앱에서 클릭하거나 유튜브 생방송을 보고 있으면 슬슬 식곤증이 몰려온다. 침대를 벗어난 지 채 몇 분도 안 됐는데 눈꺼풀은 천근만근이 된다. 쥐약이다. 내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잠자는 것이다.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다. 잠 귀신에게 홀렸다. 한껏 게으름에 취한 내 생활은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신선놀음이다. 이러다가 소가 되지는 않겠지!
그렇게 자고 나도 하루 종일 졸리다. 마음먹고 책을 펼치면 그것도 어느새 수면제다. 내 머리에 이상이 왔나? 왜 맨날 이러지? 미칠 것 같았다. 기면증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러다가 치매에 걸리지는 않을런지. 누가 나에게 마법의 가루를 뿌리나? 병든 닭처럼 졸다가 하루가 간다.
봄이 왔다. 나도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 요즘 관심사는 오직 노년의 건강한 삶이다. 인지능력도, 기억력도 한없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몸이 건강한 게 우선이다. 서울 아산 병원 노인내과 정희원 교수의 유튜브 강연과 그 외 노화에 관련된 것을 챙겨 보고, <운동의 뇌과학>, <건강의 뇌과학> 등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지금부터 투자해야 한다.
요즈음은 새로운 습관을 들이느라 정신이 없다. 노화라는 손님을 조금 더 천천히 맞이하려고 열심히 운동한다. 공원에서 하는 생활체육은 아직 기다려야 하고 헬스장에 가는 것은 돈이 무섭고 해서 유튜브 보면서 근력과 유산소 운동을 따라 한다. 가능하면 만 보도 채우려고 하고, 요가와 명상까지 해 내느라 나름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아침 요기 뒤에 쏟아지는 잠에 패배하며 느꼈던 쓰라린 자책감도 사라지고 좀 더 나은 내가 되는 것 같아 뿌듯해진다.
매일 똑같이 완벽하게 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목표로 한 항목은 채운다. 지난번에 한 달 가까이 된 것 같아 보건소에 인바디 검사를 하러 갔는데 여전히 과체중이었고 근육량도 보통이란다. 조금은 달라졌을 거라 잔뜩 기대하고 갔건만, 숫자는 나를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그래도 요즘 세로토닌(신경전달 물질의 하나로 감정 조절에 기여한다.)이 풍부하게 나오는지 행복하다. 확실히 운동은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같다. 먹고 자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내가 참 좋다.
큰딸이 공부하느라 밤늦게야 들어온다. 딸은 나보고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 자라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내가 사랑이 넘쳐서가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면 그 시간이다. 아이가 자러 들어가고 나도 침대에 누워서 책 좀 읽다 보면 새벽 1시쯤 된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젠 자야지.
첫댓글 노년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시는 점이 참 보기 좋습니다. 지금 노력하는 만큼이 노년의 자신의 모습이겠지요.
고맙습니다.
저랑 비슷하시네요. 하하. 닉네임도 송게을로 바꿀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고, 선생님은 직장 다니기도 바쁘잖아요.
어디가 게으르시다는 건지.
저의 하루를 보여 줘야겠어요. 하하.
아이들 건사하는 것이 제일 힘든데,
그러면서도 글도 멋지게 쓰는 분이 왜 이러실까?
저는 늘낙지는 아니고 잠퉁이는 맞습니다. 그래도 아이 셋을 건강하게 키웠으니 잠퉁이에게 박수를!
그렇죠? 이래 봬도 전 애국자이니. 하하!
저도 '건강의 뇌 과학' 읽고 있어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지더라구요. 대단하시네요 저는 지금 봄이 오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사시잖아요? 멋진 봄날이 올 거예요.
마지막 문장에서 양심이 좀 찔립니다.
저도 같은 처지의 작은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스터디카페서 공부하고 오는 딸을 늘 기다리지 못하고 자 버리거든요.
다음 날 후유증이 너무 커서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부지런히 읽는 선생님은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 백수잖아요. 선생님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어디 있다구요.
우와, 선생님의 다른 모습이네요. 엄청 활동적이고 부지런해 보이시거든요. 하하. 또 다른 매력이 드러난 글 잘 읽었습니다.
하하! 놀기를 좋아해서요.
저는 밖에서 힘 다 쓰고 집에 오면 최대한 편안하게 게으르게 지냅니다. 고쳐질까요?
당연하죠. 저는 백수건달이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요.
일하면 핑계거리가 많아 늘어집니다.
제 생각에도 선생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네요. 그래도 아이 셋 낳아서 길렀잖아요. 늘낙지, 잠퉁이 재미있습니다.
하하! 예쁘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들을 기숙사로 보내니까 너무 편하더라고요. 잘 주무시는 것도 복입니다.
하하! 그 맛 알죠.
기본 욕구에 충실하다 보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