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 숲길
사려니 숲이 걷고
나도 걷는다.
숲길이 내게로 오고
나는 사려니 숲에게 안기러 달려간다.
숲이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 가슴 깊은 곳 사려니 숲이 살고 있다.
제주 조천읍 1112 길에 있는 사려니 숲길을 걸으며 중얼거려 본 말이다. ‘사려니’ 라는 말은 ‘산의 안’이라는 뜻으로 ‘솔 아니’라고도 한다. 제주 관광 책자에는 ‘신령스러운 곳’이라고도 설명하고 있으니 그 의미가 확실하지는 않은 것 같다. 제주 방언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온 말이라고 한다. 초겨울 관광객들이 뜸한 때를 틈타 제주를 찾았다. 김포를 출발하기 전부터 제주에 강풍 예보가 있었다. 공항이나 음식점도 썰렁하고 길고 긴 한라산 길에도 인적이 별로 없다. 관광 도로 조차 한가하기가 벼 벤 들판 같다. 가는 곳마다 넘쳐나던 사람들이 이렇게도 없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삶이 내가 정한 길로만 가게 되는 게 아니듯, 여행도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날 때 더 의미 깊은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예보와는 달리 생각보다 바람이 순하고 춥지도 않아 마음껏 활보하기에 딱 좋은 사흘의 여행이 되었다. 하늘에는 눈 싸라기가, 바다에는 새하얀 파도가 넘실거리다가도 구름사이로 태양 빛이 쏟아져 내리고, 하루에도 몇 번을 뒤집어엎으니 제주 날씨는 변덕쟁이다. 그래도 비 오는 제주도 즐기고, 눈 내리는 해안의 낭만도 만끽하고, 바람 부는 모습도 즐기니 일석 몇 조의 날씨의 변화를 맛보게 되었다. 답답한 서울공기가 몸에서 다 빠져나간 느낌이다. 바람은 강한데 향기롭고, 파도는 높은데 정겨웠다. 맨살로 하얗게 치솟다가 부서지는 파도의 장관을 넋 놓고 올려다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자연이 저희끼리 축제 하는 모습을 우리만 보자니 아깝기까지 하다. 밤새워 눈이 내리려나, 초저녁부터 내리던 눈이 자정이 지나도 내리고 있다. 함박눈 사각거리는 소리가 사랑의 세레나데인가,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종일 눈밭의 숲길을 마음껏 걷고 또 걸어보리라.’ 고 작정하고 일찌감치 사려니 숲에 도착했다. 수십 번 제주를 오고 갔어도 무엇이 그리 바빠 허둥거리며 쫓아 다녔는지 이 아름다운 숲을 이제야 찾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해안 도로와 숲길만을 도보 여행하리라는 계획을 세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달랑이는 배낭을 메고 왔기에 마음이 깃털 같다. 여행은 언제고 가벼운 차림이 좋다. 마음과 몸의 의지가 되는 사람과 뒤늦은 나이에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인생에 더 없는 행복이다.
내겐 어머니 같은 언니가 있다. 곡식이며 김장을 해마다 바리바리 안겨주는 언니에게 가끔 성의를 다하여 여행비를 맡아 모시듯 함께 길을 떠날 때가 있다. 내 흠이 많아 실수를 연발해도 그러려니 인정해 주고 뒤 태, 앞 태 옷매무새 고쳐주며 머리 모양마저 다독여주는 언니다.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데 내 언니는 더 유별난 것 같다. 언니와 손잡고 여행을 가면 마음이 고향집에 온 듯 편안하다. 자잘한 일들을 언니가 챙겨주니...
숲 속을 들어서기도 전에, 제주 1112 길 이정표 옆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삼나무 길이 펼쳐져 있다. 언젠가 하룻밤 묶었던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웅장한 쉔부른 궁전이 생각났다. 성곽을 빼곡히 둘러싸고 신비의 역사를 자랑하던 곳에 이런 나무숲이 드넓게 있었던 것 같다. 또 한 번 추억의 한 페이지를 보는듯하여 설렌다.
수 천, 수 만 그루의 삼나무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12월 중순인데도 둥치에 아직도 초록의 이끼가 선명한 채, 맑은 물이 방울방울 떨어질 것 같은 싱싱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반들거리는 삼나무 가시 잎에 눈이 하얗게 쌓여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눈에 푹푹 빠지면서 탄성을 질렀다. 길옆으로 어느 동물의 발자국이 한 줄로 이어져 있다. 밤새 내린 눈길로 한라산 동물들이 아침산책 나왔었나보다. 고라니 일까, 노루일까. 아니면 아기 사슴 아침먹이 찾던 어미 사슴이었을까. 졸 참, 때 죽, 편백나무가 사이사이 숨바꼭질 하듯 이어진다. 수령이 50년 정도 라는 데 누가 이곳에 삼나무를 이토록 많이 심어 놓았을까. 가도 가도 삼나무 길이다.
제주는 바다와 한라산에만 바람이 많은 게 아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소나무 한 그루처럼 육지 아래 매달려 온갖 풍상을 견뎌낸 섬이니 유배지로 바람 된 사연도 많을 것이다. 귀양길에 오른 귀재들의 한이 한라산 꼭대기까지 박혔기에 돌들마저 시커멓게 뻥뻥 구멍 뚫렸나 보다. 일본의 침략에 무참히도 쑥대밭이 되었다가, 제 민족 살 베기 전쟁 6.25니 4.3 사건으로 제주는 피비린내의 도살장이 된 곳이 아닌가. 제주 도민의 20%인 5만 명이 살육 당했고, 특히나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다. 불바다가 되어 한라산 밑 온 마을이 재가 되고, 남은 건 한라산 자락에 뒹구는 무수한 시체와 타다 만 나무와 잿더미였다. 못 다한 제주민의 핏빛 사연들이 구슬피 울부짖는 분노의 섬. 그 곳에 심겨졌던 삼나무 숲 15킬로미터 ‘사려니’ 숲은 그래서 한 맺힌 사연도 많은 곳이다. 그 사연 하도 깊고 많아 삼나무 모두가 온몸이 시퍼런 이끼로 멍이 든 것 같다, 겨울임에도 여름처럼 녹색이끼로 숲속은 사방이 진 초록의 장관을 이룬다. 그나마 어린 생명들이 엄마 품에서 죽음을 당한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먹먹한 가슴에 눈발이 앞을 가린다. 슬픔인 듯, 안도의 숨인 듯, 바람도 눈발도 잠시 숨을 멎는다. 고요한 숲은 내 숨소리 발자국 소리조차 소음이다. 가끔 눈 쌓인 가지 위에 까치 날개 짓만 적막을 깨운다.
엄마와 함께 잠든 어린 생명들이 반 백 년 방풍림 되어 ’사려니’ 마을을 사수한 것일까. 한참 동안 삼나무 기둥을 보듬어 안고 그 숨소리를 귀에 대고 들어 보았다. 삼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눈 뭉치 떨어지는 소리가 아기의 울음인양, 어미의 신음인양, 간간히 알 수 없는 여운이 되어 들려오고 있다.
붉은오름 지나는 삼나무 길 ‘사려니’숲. 하얀 눈밭 속에서 까치가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