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요즘 근황을 말씀해 달라
방송도 하고, 콘서트도 하고, 해외 공연도 다니는데, 얼마 전에는 중국을 다녀왔다. 두만강 축제라고 있는데, 연길과 도문이라는 도시에서 러시아, 중국의 소수민족, 한국인들이 모이는 문화예술 교류축제 개막식에서 노래했다. 마음이 짠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비가 있는 두만강이 뒤에 있는 곳이었는데, 건너편에는 북한군 초소도 보이고 북한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아오지 탄광도 보였다. 그날 거위의 꿈을 부르는데, 서울에서 ‘같은 하늘 아래 있구나’라는 막연한 느낌과는 다르게, 거기는 진짜 내 눈에 보이는 같은 하늘 아래 있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었다.
Q_실제로 만나보니 굉장히 젊어 보인다. 외모 관리도 그렇고 자기관리를 잘하시는 것 같다
목이나 피부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하는 것 같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 노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정도로 관리하고 있다.
Q_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있었다면
가장 큰 인생의 전환점은 딸을 낳았을 때인 것 같다. 그전까지는 모든 것이 제 위주로 돌아갔고 저만을 위한 삶이었다면, 자식을 낳고 난 다음에는 제 아이한테 ‘이런 엄마가 돼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가 인생에 대해 생각도 많이 했던 시기였다. 아이를 낳으니 그냥 ‘보통 여자’가 되더라. 연예인으로 사는 삶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를 낳으면서 엄마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집도 그냥 집이 아니라 친정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고….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따라온다고 하는데,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Q_‘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하는데, 따님이 아주 똑똑하고 성격도 긍정적인 걸 보면 잘 키우신 것 같다. 대한민국의 엄마들은 따님의 ‘공부 잘하는 비법’에 대한 관심이 클 것 같다. 특별한 자신만의 교육법이 있나
의외로 그런 게 없다. 저는 아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샘플을 보여주는 역할만 했던 것 같다. 단 한 번도 밀어붙이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설명과 조언은 해주되 아이를 강제로 끌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딸아이가 공부하라는 소리 안 하는 게 더 부담스럽다고 할 정도다.(웃음) 믿고 맡겨놔도 잘하는 아이가 있고, 못 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건 아마도 아이들의 성향마다 다른 게 아닌가 싶다. 저희 딸이 그런 면에서 밝고 열정적인 성향을 가진 것 같다.
Q_부모로서 볼 때 현 우리 사회 교육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특히 올해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부모 된 입장에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너무 공부만 하니까 막상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할 나이가 되면 체력이 뒷받침이 안 되는 것 같다. 경험을 통해서 응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아이들에게 경험의 기회가 많지 않은 게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그 나라에 이어온 관습 같은 것들이 하루 이틀 만에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서서히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해밀학교’라는 다문화 아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보통의 학교처럼 빡빡하게 공부시키지 않고, 아이들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보통 학생들은 명문대학 입학과 대기업 취직이라는 한 방향을 가는데, 대기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라 곳곳에 중소기업들이 있어서 대기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과 길이 다른 곳에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가 모여서 하나를 이뤄낸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Q_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인데, 구체적으로 해밀학교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해밀’은 ‘비가 온 뒤에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무슨 일만 하면 비가 온다.(웃음) 개교식 날에 비, 눈, 바람, 해를 다 봤다. 저희는 비가 오거나 눈 오는 것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그냥 일상이다.(웃음)
학교가 문을 연 지 1년이 넘었고, 현재는 23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상주하는 교사와 교직원이 총 10명이고, 12명의 강사가 강의를 하러 온다. 때때로 주변에 근무하는 군인들도 와서 여러 과목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기본 과목을 가르치고 그 외에 일어 중국어, 한국어 교실이 따로 있다. 아이들의 어머니 중에 언어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4개 국어를 가르쳐주고 있다. 또 가수 진미령 씨는 꼬르동블루(Le Cordon Bleu, 프랑스 요리 전문학교)를 나왔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요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음악은 저희 콘서트팀의 코러스 리더가 가요로 음악의 이론, 발성을 가르친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제 동요는 안 좋아한다.(웃음)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씨가 한 기타회사에 얘기해서 학생들에게 기타를 하나씩 선물했다. 그래서 우리 학교 아이들은 기타를 다 연주할 줄 안다.
Q_다양한 자원과 재능기부자들의 지원으로 학교가 운영되고 있어서 아이들의 경험의 폭이 넓을 것 같다
리치몬드 제과점 회장께서 직접 빵 만드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적도 있고, 학교가 홍천에 있는데 서울에 와서 뮤지컬 공연도 가고 전시회도 가끔 간다. 한 번은 신화가 학생 전체를 초대해서 콘서트를 경험하게 해줬는데, 공연에 가기 전 학교에서 콘서트와 관련된 직업을 가르쳤다. 음악연주가, 음향, 홍보, 포스터 컴퓨터 그래픽, 조명 등 다양한 직업군이 모여서 신화라는 팀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콘서트가 신화라는 팀만의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무대가 만들어져야 신화가 올라가는 것이고, 조명이 비쳐져야 그들이 화려하게 보이는 것이고, 연주하는 사람들의 기량도 좋아야 신화가 노래할 수 있도록 받쳐줄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아이들이 콘서트에 가서 즐기면서도 누군가 조명을 비쳐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관람하더라. 이런 경험을 통해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소통한다. 이러한 경험은 아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Q_다양한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어서 참 이상적인 학교의 모델인 것 같다. 학교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나
학년마다 20명으로 제한을 두고 있다. 우리 학교가 다문화 아이들도 있지만, 일반 아이들도 많은데, 요즘은 일반 아이들이 더 많이 문의하고 있어서 조율 중이다.
Q_학교를 세워야겠다는 꿈은 언제부터 갖게 됐나
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지인에게 10~15년쯤 전에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분이 ‘진짜 해냈네!’라고 하더라. 오래전부터 지속해서 학교를 세우는 꿈을 키워온 것은 아니고, 제가 사랑받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생각은 늘 해왔다.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일들을 경험했다. 최근에도 교황님까지 만나면서 ‘도대체 내 인생이 어떻게 남들이 겪어보고 싶어 했던 것을 다 겪고 이럴 수가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저 같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안 좋게 될 수도 있는데 좋게 됐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일선에서 후배들하고 같이 노래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그래서 무언가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양로원을 할까도 생각했고 연말에는 보육원 방문을 하는데, 보육원을 해야 하나 고민을 몇 번 했었다. 그러다 2010년 한 라디오에서 다문화 아이들의 고등학교 졸업률이 27%밖에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게 제 가슴에 꽂혔던 것 같다. ‘이게 내가 해야 될 일인가? 그렇다면 왜지?’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제가 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오더라. 그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정체성에 대해서 힘들어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정체성을 찾는 데 도움을 주고 그 아이들이 인생을 걸어갈 때 같이 걸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학교를 열게 됐다.
Q_아무래도 인순이 씨 역시 같은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공감대가 더 잘 형성될 것 같다
그렇다. 제가 아이들과 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 엄마, 아빠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을 때 아무래도 제가 옆에 있어주면 편하게 느끼고 마음을 잘 연다. 다른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천천히 다가가지만, 저는 처음부터 아예 툭 터놓고 ‘나는 아빠가 미국사람인데, 너는 엄마가 중국 사람이라 많이 다르지 않네? 나는 많이 다르지?’라고 다가가니까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대하더라.
Q_해밀학교 아이들의 나이에 인순이 씨가 느꼈던 사회적 차별과 지금은 어떻게 많이 달라진 것 같나
많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가진 문제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문화 아이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아무리 마음을 열고 세상이 바뀐다고 해도, 아이 스스로 갖는 생각이나 상황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그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고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녹아서 살 수 있도록 자기정체성을 찾아줘야 한다. 해밀학교를 만들면서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겠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냥 아이들이 정체성을 찾고, 흔들리더라도 많이 흔들리지 않고, 돌아가더라도 많이 돌아가지 않게끔 하면서 한국인으로서 곳곳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굳은살을 만들어 주자는 게 목적이었다. 뛰어난 사람을 육성하는 영재학교가 아닌, 사람을 만드는 ‘사람의 학교’가 되는 것이 목표다.
Q_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보다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드나
많이 변화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끼리 하는 총회가 있는데, 잠은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일어나고, 어떻게 공부를 하고, 외출은 어떻게 할지 등 학교의 규칙을 아이들이 직접 만들고 있다. 맨 처음에는 아이들이 경험이 없다 보니 잘 안 됐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만들어서 지키고, 안 지켜지면 다시 안건으로 올라오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정말 성장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
Q_경쟁 위주의 교육, 사교육 과열 속에서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은 기회와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교육 현실에서 큰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해밀학교는 사교육 열풍이 과한 우리 사회에 ‘학교로의 귀환’을 독려하는 좋은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다. 해밀학교 아이들은 문화예술 수업 외에도 목공예도 하고 닭도 키우고, 소규모의 농사도 짓는다. 올해는 옥수수 농사를 지어서 150만 원을 벌었다. 순이익은 그것보다는 적겠지만, 후원해 주시는 분들한테 선물을 보내드리기도 했다. 농사를 통해서 씨를 심고 잎이 나고 수확하고 팔려나가는 것까지 보고 돈이 얼마가 남는 것까지 본다. 기다림도 배우고, 아이들이 직접 심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걱정도 해보면서 농부의 마음도 알고,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었는지도 알게 된다.
Q_따님한테도, 해밀학교 아이들에게도 문화적 경험을 많이 해주셨는데, 아이들 교육에 문화가 주는 영향력은 어떤 건가
나라 간의 경계선은 이제 ‘문화 경계선’이라 볼 수 있겠다. 김치, 된장찌개를 먹고 아리랑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인이 될 수 있는데, 해외에서 자란 교민들을 보면 한국에 대한 문화를 잘 모르는데 한국 사람이 될 수 있겠나. 이처럼 문화가 주는 영향력은 엄청나고, 자기정체성도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화는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많이 된다. 또 아이디어 사회인데, 문화를 경험하면 다양한 아이디어를 갖는 데 도움이 된다. 국어를 배워서 시, 소설도 쓸 수 있는 것처럼 하나를 경험해서 다양하게 발전해나갈 수 있다.
Q_재능으로 학교 교육에 동참해 주시는 분들 외에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는 분들도 많나
아직은 많지 않고, 제가 많이 부담하고 있다.(웃음) 우리 사회가 이 아이들을 한국 아이로 받아들이고, 같이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로 인해 상처받은 아이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 그냥 마음의 문을 열어달라고 해도 되겠지만, 큰돈이 아니더라도 후원으로 연결돼 있으면 더욱 자연스럽게 지속해서 관심을 두지 않겠나. 일반 학교는 수준이 어느 정도 중간쯤 아이들 중심으로 공부를 가르치고, 말이 어눌하거나 학업을 못 쫓아가는 아이들까지 세심하게 끌고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의 교육에 많은 분이 동참해 주셨으면 한다.
Q_앞서 언급한 것을 보면, 노인·다문화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같은 여성으로서 우리 사회 여성장애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제가 어렵게 자라서 그렇겠지만, 사회 약자와 소수자에 일부러 많이 관심을 많아진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게 된 것 같다. 저는 당연히 장애인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사회 주변을 보면서 누군가를 특별하게 보기보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장애인이나 다문화 사람 스스로 ‘장애인’, ‘다문화’라는 딱지가 떨어지기 원하면서 사회에 요구할 때 장애인, 다문화를 강조하는데 그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관상은 첫인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첫인상이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계속 그 모습으로 보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부정적 인식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장애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인 면을 많이 보고 생각하면 좋겠다.
Q_오디션 프로에 장애를 가진 지원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잠시 감동의 인물로 화제가 되곤 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지속적인 활동도 어렵고 사람들의 관심도 금세 사라진다. 그런 것을 볼 때 우리 사회에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나 소수자들이 연예계에 진출하기 어렵지 않나 싶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장애인에 비해 비장애인 수가 더 많다. 그런데 비장애인들도 도전해도 잘 안 된다. 그래서 장애인이라고 국한해 생각할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한다. 스티비 원더도 음악성으로 곡을 잘 만들고 하니까 전설이 되지 않았나. 우리나라에서 그만한 사람이 없다. 예전에는 이용복 선배님이 계셨는데, 그때는 심지어 우리나라가 장애인에 대해 더 많이 배타적일 때였는데도, 인정받았다. ‘장애인인데 실력이 이 정도다’라고 해서는 어디 가서 발을 못 내딛는다. ‘장애’가 빠지고 그 사람의 실력만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음악이나 노래실력이 뛰어나면 더 이상 그 사람의 외모는 보지 않는 것처럼, 음악이나 노래를 정말 잘 하면 그 사람의 배경을 보지 않는다. 너무 냉정하게 얘기하는 것 같지만, 현실이 그렇다. 실력을 길러야 한다.
Q_K-Pop(케이팝, 한국 가요)이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한국 가요계의 대선배로서 요즘 한국 가요에 대한 음악적, 문화적 견해를 듣고 싶다
잘하고 있다. 매력이 있기 때문에 뜨는 거라 생각하고, 선배로서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연예인은 관심을 먹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것이 바로 ‘트랜드’라고 생각한다.
Q_‘트랜드’라고는 하지만 음악적인 깊이가 없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에 맞는 깊이다. 지금은 미디엄 탬포인데, 제가 데뷔할 때는 그 템포로 격렬한 춤을 췄다. 하지만 지금은 리듬이 아닌 BPM이 엄청나게 빠른 곡에 춤을 춘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게 빠른 곡이다. 또 우리 세대에는 발라드를 하면 가사가 별로 많지 않았다. 여백이 있었다. 반면, 지금은 말이 다 들어간 게 발라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고 좋아하는데, 정도(程度)가 어디 있겠나. ‘뭉크’라는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가치를 높게 측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니라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발전하고, 그 발전한 기술력을 음악에 더하면서 지금의 음악이 됐다.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줘야 한다. 대신에 장르가 부족한 것은 섭섭한데, 트로트나 팝발라드, 락, 가스펠, 재즈 등 다양한 장르가 비슷하게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Q_앞으로 음악 작업이나 그 외에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이 있는지. 향후 계획을 말씀해 달라
(가수에게) 모든 장르가 잘 맞아야 한다는 것보다 어떤 장르든 즐기고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해봐서 아니면 내려놓으면 된다. 어린애들이 뜨거운 것을 자꾸 만지려고 할 때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뜨거운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아이들도 그 다음부터는 만지지 않는다. 그와 같이 우리도 안 해도 되고 해도 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앞으로 꼭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꿈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이거 해보고 싶다’ 할 때 바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요즘에는 앨범을 내는 것도 싱글앨범으로 한 두곡 낼 수 있으니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이제는 음악 작업이나 앨범 내는 것 등이 더 이상 꿈에 그치는 시대는 아니다.
콘서트 일정은 계속해서 있고, 11월에는 미주 콘서트도 있다. 10월 말에는 홍천 해밀학교에서 축제가 있다. 그리고 학교 부지로 주변에 있는 폐교를 매입했는데, 내년에 지어서 후년에 이사를 갈 예정이다.
Q_세월호 사건 등 올해는 유독 대한민국에 슬픈 일들이 많아서 국민들이 많이 침체돼 있다. 인터뷰를 보는 독자들에게 힘을 더해줄 수 있는 응원의 메시지를 부탁드린다
사실 용기를 내라고 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는 상황이지 않나. 그래도 굉장히 힘들고 우울한 단어가 많이 나왔던 요즘에 교황님께서 오시면서 ‘화해’와 ‘사랑’과 ‘용서’와 ‘희망’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 같아 감사하다. 힘내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