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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정란과 주제 모색
개화기 시조가 본격적으로 창작되고 대중 매체에 게재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12월 1일 이후의 일이다. 이때는 일제의 국토 강점으로 인해 개화기가 마감되는 때를 2년도 채 남겨 놓지 않은 때로서, 개화기 전기간을 두고 볼 때는 그 마지막 시기이자 매우 짧은 기간이다. 이 해 12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의 <사조(詞藻)>란에 <애국심(愛國心)>이라는 제목으로 시조가 게재되었는데, 초장, 중장, 종장으로 행을 나누어 기록하였다. 이후 대한매일신보에는 폐간될 때까지 일부 날짜를 제외하고는 매일 한 편씩 게재되었으며, 해외 언론매체인 신한민보, 대한민보 둥에는 일제 강점기에도 간헐적으로 게재되어 그 장르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 <사조>란이 생긴 것은 시조 게재와 동시의 일로서, 처음부터 고정란과 일대일의 관계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개화기의 매체들이 그 사상적 경향과 발행 목적을 달리하면서도 문학에 높은 관심을 보인 점에서는 공통이고, 대체로 “사조”, “문원”, “문단” 등의 이름 아래 시를 고정적으로 게재하였다. 한시가 주류였으며, 고유시는 시사의 상관물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비문학적 제목, 이를테면 단평, 만평, 촌평, 기담, 평론 같은 난에 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의 사조란은 시조 전용 문예란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개화기 시가 장르 중에서 시조가 특히 강한 장르 의식 아래 창작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일이다. 매체별로는 대한매일신보가 단연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을 싣고 있는데, 폐간될 때까지 400 수 정도가 여기에 수록되었으며, 그 다음이 대한민보로 136편이 수록되었다. 잡지에는 통틀어 기십 편이 실리고 있어서 대조적인 양상을 보인다. 시조 장르가 매우 규격적이고 보편적임에 비하여 이 장르를 수용한 매체는 극히 제한적이다. 특히 민족지로서의 성향이 강한 매체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이 시조의 장르 관습과 이념과의 밀접한 관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시조의 주제도 강렬하며, 시국 의식과 함께 몇 가지 주제군으로 나뉜다.
(1) 시국에 대한 탄식
이미 을사늑약이 맺어지던 때에 나라를 잃었다고 선언했던 지식인들이었지만 힘겹게 국권회복운동을 펼쳐 오면서 차츰 힘의 원천이 백성에게 있음을 인식하였다. 뒤늦게나마 절대다수의 사람에게 익숙한 시조 장르를 발견한 것은 이와 관계가 깊으며, 이 장르를 통해 특정인이 아닌 “동포”들에게 시국의 위중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차호라 대한 동포들아 이내 말씀 들어보소 삼천리는 금수강산이요 이천만은 금수 대우로다 어찌타 금수강산 생긴 몸이 금수 대우. <면금수(免禽獸)>. 대한매일신보 (1908. 12. 29).
초장에서 동포들을 불러 내 말을 들으라고 외치는 것은 계몽가의 태도이며, 민요나 고전 시가의 상투적 표현이기도 하다. 중장에서 강산 곧 국토는 금수강산 그대로인데 이천만 곧 모든 동포는 금수 대우라고 하였다. 종장에서는 어찌하다가 금수 대우를 받게 되었느냐고 되묻는다. 탄식이기도 하고, 이대로 있어서 되겠느냐는 충동이기도 하지만, 시국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였다. 백성이 금수이니 설사 백성이 아닌 지배자들이라도 똑같이 금수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느껴진다. 여기서 <혈죽가> 단계보다 더 진행된 형식상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음수율의 증가 현상이다. 개화기 시조의 음수율이 전대의 것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3음절 또는 4음절 위주의 자연율이 유지되며, 또한 그것들이 차례로 교체되는 양상도 그러하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다음절화의 경향이 뚜렷해지며, 이것이 특징적 변화로 보인다. 위에 예시한 작품에서 보듯이, 초장의 둘째 음보, 중장의 둘째와 넷째 음보, 종장의 둘째 음보가 각각 전대의 기준 음수율보다 많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상이 특정 음보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나거나, 전체적으로 모든 작품에 두루 나타나거나 하는 고정된 양상은 아니다. 따라서 이 다음절화는 일종의 음수율 제약의 해이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형식적 제약을 벗어나더라도 정보의 전달을 더 뚜렷하게 하려는 의도가 드러난 것이며, 신문의 독자층이 다양하다는 사실과 계몽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에 기인했다는 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뒷산에 떼구름 일고 앞내에 안개 낀다 바람 불어 진서리 칠지 눈이 올지 비가 올지 급하다 잠자는 동포들아 일어나소. <풍운기(風雲起)>. 대한매일신보 (1909. 4. 3.)
이 작품은 시국 상황을 더 절실히 드러내었다. 초장에서는 뒷산과 앞내에 구름이 일고 안개가 끼는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를 제시하였다. 낯익고 정든 마을에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에 더욱 감각적이다. 중장에서는 춥고 험한 기후의 변화를 예견하여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런데 구름이든 안개이든, 진서리가 치든 눈비가 오든 그것은 마을의 백성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는 천재지변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장에서 백성들에게 일어나라고 한 것도 대응을 촉구하기보다 피하기를 다그치는 느낌을 준다. 자연의 천재지변은 신의 소관이듯이 세상의 재변은 당연히 통치자의 책임이라는 전제가 있으므로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강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2) 내부 인물 비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대부분 초기에 한학을 수학하고 뒤이어 신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식의 폭이 넓고 시각이 열린 지식인들이었다. 시국에 대해서도 이들은 분석적이고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내부의 부정적 대상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자주 하였다. 그 대상은 주로 무능한 통치배와 부패한 관료, 완고한 지식인 등 구시대적 인물들이었다.
남산에 늙은 여우 언덕 밑에 은신하여 일시 방심 제 못하고 피흉취길 애만 쓰니 아마도 부간부폐 간신배는 여우 후신 <조요경(照妖鏡)>. 대한매일신보 (1908. 12. 13.)
늙은 여우가 사는 남산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서울 남산이다. 예로부터 학문하는 선비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양반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남산의 언덕 밑에 은신한 늙은 여우란 곧 정면으로 나서지 않는 늙은 관료나 지식인을 자처하는 원로들이다. 이들은 정국의 변화에 따라 청국, 러시아, 일본, 서양 등 여러 외세를 옮겨가면서 유리한 위치를 취해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시도 방심하지 못한 채 화를 피하고 이익만 취하는 무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원로들이 물러나고 젊은 관료들이 장악하여도 그러한 행태는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간에 붙었다가 폐에 붙었다가 하는 간신배들이 모두 여우의 후신이라고 비판하였다.
청루에 노는 손들 너도 동포 일분자라 국세 위급 이 시대에 풍류로만 놀단 말가 진실로 회과자책할 양이면 국민자격 <탕자계(蕩子戒)>. 대한매일신보 (1909. 1. 28.)
구시대 인물만이 아니라 신식 문물도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을 통하여 서양식 연회가 소개되어 궁중을 비롯한 귀족들의 놀이판이 자주 벌어지고, 민간에도 각종 오락장과 극장, 일본식 기생 놀이 등이 성행하여 젊은이들까지 놀이판에서 돈을 낭비하는 풍조가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세의 위급함은 잊어지고 오락도 침탈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수 없었다. 종장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자책하면 국민 자격을 가진다고 하였으니, 달리 말하면 그러한 놀이가 국민의 자질을 상실하는 일이란 점을 지적한 것이다.
(3) 침탈자에 대한 울분과 적개심
을사늑약 이후, 특히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들이 규모를 정비하고 전쟁을 선포하여 무력항쟁이 이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적 군사력의 균형은 깨어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들 특히 지식인들이 직접 무력 항쟁을 한다는 것은 실제로 매우 어려웠다. 그렇다고 궁극적으로 무력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은 무력 전쟁의 시기와 전략을 어떻게 가져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으므로, 상무 정신과 적개심을 강조하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
대장부 이 세상에 무슨 사업 급선무인고 십년에 갈아둔 칠척검이 서릿날에 녹이 난다 뉘라서 일성벽력에 저 적병을 <장부사(丈夫詞)>. 대한매일신보 (1908. 12. 10)
제재는 간명하고 주제는 선명하다. 십년 동안이나 갈아둔 칼날에 녹이 슬 지경이니 빨리 저 적병을 베어 죽이고 싶다는 울분과 충동을 나타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내가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칼은 갈아 두었으니 누군가가 단번에 저 적병을 베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장부인데, 이 노래는 대장부를 기다리는 작품이다.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시대 인식과, 현실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계몽을 통해서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는 이 시기 지식인들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4) 희망과 권고
계몽의 궁극적 도달점은 희망을 제시하고 그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상황 인식이나 울분 또는 비판도 결국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따라서 어떤 주제에도 이미 권고가 포함되어 있다.
초당에 춘수족하니 창외일색 더디도다 대몽선각 저 고사는 매학으로 벗을 삼나 진실로 번연개도할 양이면 광제창생 <초은곡(招隱曲)>. 대한매일신보 (1908. 12. 8.)
완고한 구지식인은 주된 비판의 대상이지만, 때로는 권고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초장이 보여주는 것은 양반 선비들의 일반적 모습이다. 초가집을 짓고, 세속에 욕심이 없다고 하면서, 늦도록 봄잠에 빠져서, 햇살이 비치는 것도 모르는 것을 태평성대의 군자라고 강변해 온 것이다. 중장에서 보듯이 꿈을 깨고도 하는 일은 고작 매화나 감상하고 학이나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이를 고사(高士)라고 칭송하곤 한다. 종장에서는 그러한 생각을 번연히 바꾸어야 창생을 널리 구제하는 선비 본연의 책임을 할 수 있다고 권고한다. 지도층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근대적 수양으로 백성들을 지배하던 선비들의 교양이 더는 쓸모가 없으므로, 그 점을 깨닫고 백성을 널리 구할 수 있는 참지식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학도야 학도들아 학도 책임 무엇인고 일어 산술 안다 하고 졸업생을 자처 마소 진실로 학도의 저 책임은 애국사상 <학생지남(學生指南)>. 대한매일신보 (1908. 12. 9.)
전형적인 권고이다. 대상은 젊은 학도이고, 내용은 애국사상이다. 이 시기 시가의 여러 장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계몽의 장치이다. 그런데 중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급진개화파 계열의 작품과 차별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구학문에 심취하고 자기의 생각이 다 옳은 양하는 구지식인들이야 당연히 비판의 대상이지만, 새로운 지식인 수학과 외국어 지식을 가진 이들을 비판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일본어와 산술을 안다고 하여 학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여기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가 애국사상임도 말하였다. 이는 당시에 만연한 얼개화꾼 또는 경박한 친일파 청년들을 경계한 것이다. 이처럼 개화기의 시조는 고시조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당대의 양식으로 재편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중적 음악 양식에 맞추어 형식의 변환을 수용하기도 하고, 정보와 주장을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음수율의 제약도 상당히 벗어나면서 계몽의 효과를 극대화해 간 것이다.
3) 민요형의 실험
개화기 시조의 정립 과정에서 나타난 음보율과 음수율의 특징은, 음악과의 관련하에서 규범화하면서 율격이 탈규범화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전대 시조 전통을 어느 쪽으로든 극대화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장르 특성의 강화라는 의의를 가진다. 특히 음악적 측면에서 시조창은 가곡창에 비해서 대중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장한 정가(正歌)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창법이 대중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음악적으로 새로운 양식을 모색한 과정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민요형 시조이다.
떼많은 송사리, 흐응. 병魚쥰치 흥. 日辰을 가리어, 회쳐셔 먹을까, 아. 어리화, 좋다, 흐응. 知和者 좋구나, 흥 <불시효(不時肴)>. 대한매일신보(1909.2.16).
왜 아니 가느냐, 흐응. 너 왜 안 가노, 흥. 의형님 솜씨에, 不如歸 되리라, 아. 애구지구, 흐응. 成禍가 네로다, 흥. <불여귀(不如歸)>. 대한매일신보(1909.2.17).
위의 작품들이 시조로서 보여 주는 형식적 변화는 파격이다. 전대의 시조에 비해서도 그렇거니와, 동시대의 시조에 비해서는 그 파격성이 더욱 부각된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파격은 조흥구의 첨가이다. 시조의 전통은 조흥구나 여음의 개입을 배제한 채 장르의 폐쇄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시조의 발생 과정에서 그 이전의 여음을 가진 시가 장르가 영향을 주었다 할지라도, 여음을 배제하는 데서 시조는 그 특성을 확보하였다. 그런 만큼 개화기에 이르러 조흥구를 첨가한 것은 시조가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는 과정으로서의 의의가 매우 크다. 두번째로 드러나는 특징은 음보율의 변화이다. 의미를 가지지 않은 조흥구인 “흥”, “아” 등을 제외하면 각 장이 4음보로 구성된다. 전통시조의 각 장은 물론 4음보를 철저히 유지하였다. 개화기에는 종장의 둘째 음보가 과다 음절이기는 하지만 3음보로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장의 네 음보가 평면적 음수율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전통시조의 4음보로 회귀한 것은 더욱 아니다. 종장의 처리가 전통시조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통시조의 종장은 첫음보의 3음절 고정과 둘째 음보의 다음절화에 의한 음보간의 변화가 미적 장치인데, 변형시조에서는 평면적 구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셋째는 음수율의 변화이다. 개화기 시조의 음수율은 대체로 다음절화 현상을 드러낸다. 이는 시조창의 가사이면서 설명적 진술과 주장을 강조한 데서 온 제약의 해이 현상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런데 변형시조에서는 오히려 음수율의 과소음절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4조는 물론 보이지 않고, 3․4조의 기본 율격마저 거의 유지되지 않는다. 3․3조를 중심으로 하여 2․3조, 나아가 2․2조에까지 음절수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음수율상의 파격이 가장 심한 곳이 종장이다. 전통시조의 종장 둘째 음보는 5음절을 기준으로 그 이상으로 늘어났고, 개화기 시조에서는 그것이 더욱 늘어나 두 음보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변형시조에서는 그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5음절 이상이던 둘째 음보가 2음절로 줄어든 것이다. 위와 같은 작품이 음수율과 음보율에서 시조의 전형을 상당히 벗어나 있어서 과연 시조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도 일게 하지만, 3장 구조의 정형성은 굳게 유지하고 있다. 3장 이외의 분장 가능성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초 중 종장이 시조 의미구조의 전형을 나타낸다. 곧 초장과 중장이 병렬 또는 진행으로 짝을 이루고, 종장이 이것을 받아 의미를 종합한다. 변형시조의 종장이 위의 예에서 보인 것과 유사하게 유형화한 것은 이러한 구조를 더욱 잘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위 장르의 파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따져 볼 차례이다. 작품들이 확연히 보여 주는 양식상의 특징은 민요의 수용이다. 나아가 민요와 시조의 습합이라고 해도 좋다. 이것이 어떻게 가창되었는지 단정할 근거는 없지만, 일견 흥타령류의 민요곡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일한 구조를 가진 여러 작품이 가창에 대한 언급 없이 게재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한 곡조에 얹히었음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그 곡조가 독자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것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문에 게재되었다는 점에서 전민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이때 선택될 수 있는 곡조는 민요이며, 특히 지역적으로 보편성을 가장 가지기 쉬운 경기창 계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요 수용으로 인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기법은 언어의 생생한 생명력을 살린 풍자성이다. 위에서 예시한 작품 중 첫 수의 초장은 매국노 “송병준”의 이름을 보잘것없는 생선의 종류인 “송사리, 병어, 준치”의 첫 글자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중장에서는 그 자가 중심이 된 친일 단체 “일진회”를 앞뒷구의 첫 자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생선을 회쳐서 먹겠다는 말을 하면서 이것을 다시 조합하면 송병준 같은 일진회 사람들을 회치듯이 갈갈이 찢어 죽이겠다는 무섭게 경고한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그러한 일이 얼마나 좋은지 흥겨워하면서 독자의 호응을 구한다. 뒷작품에서는 이등박문과 이완용 의형제를 소재로 삼아서, 어서 돌아가라는 경고를 초장에 드러내었다. 중장에서는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돌아가지 않음만 못하다(不如歸)고 다시 말한 뒤, 종장에서는 결국 재앙을 이루는(成禍) 데로 귀결된다고 하여 침략자와 부왜자를 동시에 풍자하였다. 그런데 시조 장르 자체의 전환에 가까운 이러한 시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대한매일신보에 한정되어,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게재되다가 다시 단형시조로 돌아온 것이다. 변형시조는 이 신문에 시조가 실리기 시작한 약 두 달 뒤인 1909년 2월 9일부터 3월 24일까지 사이에 29편이 거의 연속적으로 실렸으며, 그 뒤 간헐적으로 한 편씩 실려서 전체로서는 34편이 된다. 연속으로 게재되는 시기에도 가끔씩 단형시조가 그 자리에 실려서, 크게는 같은 장르라는 의식 아래 지어졌음을 드러낸다. 변형시조는 전통 장르의 한계를 최대한 넓히면서 개화기 문학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양식이다. 시대적 요구인 대중화를 지향하여 민요와 습합하였으며, 이것이 시형의 규제를 벗어나는 데로 나아갔다. 그러나 여타의 장르가 전통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 신흥 장르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른 데 비하여 시조는 전형에로 회귀하는 양상을 드러내었다. 여기서 개화기 시가의 일반적 지향, 곧 새로운 양식의 모색과 모색된 양식의 전형화라는 지향 중 시조가 단형시조라는 전형으로 집약되는 구심력을 확인하게 된다.
4) 장시조의 약화
개화기의 장형시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장르적 특성이 약화되면서 전대에 비해 현저히 쇠퇴해 가는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후기 서민의식의 성장과 가곡의 다양한 변주곡 파생에 부응하여 발달한 장시조는 대상을 보는 태도와 시어 구사에 있어서 근대성에 접근하였을 뿐 아니라, 시적 구조면에서 얼마간 자유시의 경향을 확보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것이 장시조 전체를 규정하는 특징은 아닐지라도, 평시조에 비하여 새롭고도 강렬한 장르적 지향이었음에 틀림없다. 개화기가 조선조의 사회 체제와 의식 구조를 극복하고 근대적 체제와 의식을 지향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전대의 장시조가 보여 준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만하다. 그런데 실상은 그와 상반된 경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이념 수용에 대한 시조의 장르 관습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강한 이념의 시대에는 평시조로 일관하다가, 후기에 들어 성리학적 이념이 이완되면서 장시조가 발달하였다. 개화기에 여러 이념이 갈등을 일으키는 동안 시조는 약화되었다가, 개화기 후기의 이념적 통일을 기반으로 시조가 융성하면서 또다시 단형시조 절대 우위의 경향으로 회귀한 것이다. 개화기 장형시조의 실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첫째, 작품수의 감소 현상이다. 개화기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시조 542수 중 장시조는 54수로서 전체 작품의 1할 정도이다. 이는 전대에 비해서 장시조가 현저히 감소한 모습이다. 고시조 중 장시조는 2할에 가깝다. 단순히 수치상의 비율로도 차이가 있거니와 실제로는 그 폭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고시조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평시조만 지어지다가 영정조 이후에 장시조가 지어졌기 때문에, 평시조와 장시조가 동시에 지어지던 후기만 문제삼는다면 장시조의 비율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를 감안하면 개화기에 이르러 장시조가 급격히 쇠퇴한 것은 분명히 하나의 특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형식상 장형화의 둔화이다. 전대의 장시조가 보여 준 형식상 장형화의 양상이 여러 가지로 달랐기 때문에 이를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엇시조와 사설시조로 양분한 것이 보편적 분류법이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문학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 주지 않기 때문에 장시조로 통합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들 중 소위 사설시조는 평시조에 비해 현저히 길어지면서, 그 사설도 서술적이거나 극적인 구조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개화기 장형시조는 단형시조와 비교하여 장르나 구조상의 차이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단순히 서술 대상의 성격이나 모습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길이만 길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장형시조 중에는 창작 방법상 전대의 장시조를 개작하여 그 구조적 특성을 살린 작품이 몇 편 있기는 하지만, 순수한 창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보면 장시조로서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저 건너 萬里城은 秦始皇의 遺跡이라 二世而亡할 줄은 모르고 傳之萬世無窮토록 누리고자 蒼生들을 몰아다가 塗炭中에 赴役하며 더구나 焚詩書 坑儒生하여 百方으로 肆虐터니, 壹朝에 咸谷關門 擊破後에 阿房宮까지 灰진中에 드단말가 지금에, 前轍이 昭昭커늘, 뉘가 또한. <전철감(前轍鑑)>. 대한매매일신보(1909.7.20).
개화기의 창작 장형시조 중에서는 제일 길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중장이 진시황의 탐학과 패망을 읊고 있으나, 서술할 대상이 많아서 길어진 이외의 구조적 장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음보수의 증가 방식에 있어서도 2음보 배수 단위로 증가하는 장시조의 일반적 규칙이 약화된 채 산문화하였다. 이러한 산문화는 단형시조와 장형시조에 두루 나타나는 율격 현상이다. 실제로 위의 작품처럼 장형화하지 않은 많은 작품에서는, 단형시조의 음수율이 해이된 작품과 장형시조의 장형화가 적게 이루어진 작품 사이에 하위 장르 구분이 애매해지는 상황이 자주 생길 정도이다. 셋째, 종장의 처리이다. 장형시조의 종장 끝음보도 단형시조와 마찬가지로 줄어든 채 정형화하였다. 장시조이기 때문에 종장이 길어진 작품이 많아서 그 음보수가 일정하지 않고, 따라서 반드시 한 음보가 줄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길어진 종장의 마지막 부분이 홀수 음보로 읽힌다든지, 종결형 어미가 아닌 명사나 부사로 끝나서, 개화기 단형시조의 종장 끝처리와 일치한다. 결국 장형시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화기 시조의 특징은, 한 장르의 구심점을 향한 정형의 강화 현상이다. 장형시조가 개화기 시조의 하위 장르로 정립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단형시조의 한계 가까이로 쏠려 들어가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시기에 따른 변화에도 반영되었다. 개화기에 시조가 지어진 시기가 비록 2년 미만의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그 초기에 비해서 후기로 갈수록 장시조의 비율이 더욱 줄어드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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