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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강 너는 양을 아끼는가? 나는 예를 아끼노라!
1. 추기경
그 동안 대학순회를 했는데 모처럼 스튜디오로 돌아오니깐, 친정집이나 고향에 돌아온 거 같고, 기분이 차분해지고 좋다. 그래서 오늘도 재미있는 강의를 스튜디오에서 한 번 해 보겠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대로, 다음 주에는 우리 사회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추기경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해주시기로 되어 있다.
여러분들과 더불어 저도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가 200년이 넘었다.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는 사실 유교와의 투쟁 관계를 거쳐서 들어왔다. 유교의 핍박을 받으면서 들어왔는데, 오늘날 그 유교는 오히려 사라져가고 있고, 기독교는 이 땅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거 같다.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추기경님께서 이 자리에 오셔서 국민여러분에게 말씀을 해주시기로 되어 있다는 것은, 저로서는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되는 기회다. 국민 여러분들에게도 아주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추기경님은 어떤 종파라든가 종교를 떠나서, 이미 우리 국민과 더불어 거의 몇 십 년 동안의 역사를 지켜주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어른이시다.
추기경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제가 오셔서 말씀을 해주십사 하니깐, ‘논어를 말하는 자리에 내가 가면, 김 선생과 비교해서 상당히 초라하게 보일 텐데, 내가 그런 자리에 어떻게 가지? 나는 논어 몰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추기경 어른께서는 여기 와서 논어를 이야기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바로 추기경님이 일용지간에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 시대의 논어입니다.’라고 했다.
정말 그렇지 않나? 논어라는 책이 별게 아니다. 공자라는 노나라의 어른인 공자라는 사람이 그저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게 논어다. 논(論)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하신 것을 제자들이나 누가 기록해놓은 게 이렇게 논어가 된 것이다. 저는 추기경님이 여기에 와서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 시대의 논어라고 생각한다.
그런 훌륭한 분이 오셔서 논어를 설파해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더 없이 기쁘게 생각한다. 이번 주 강의는 추기경님을 모시기 전에 준비 삼아서, 목욕재계하고 차분하게 말씀을 듣는 전야제같이 조용히 강의를 해보려고 한다. 여러분들도 다음 주에 은혜를 듬뿍 받으시기 전에, 그 사전 작업으로 2,000여년의 시간이 격해 있지만, 공자님의 말씀이 어떠했는지 한 번 들어보기로 하겠다.
2. 시례야(是禮也)
15장부터 하겠다. 추기경님이 여기 오시기전에 이 장을 여러분들과 더불어 강의할 수 있게 된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
논어전편을 통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2개의 장이 있는데, 그 중 하나다. 제가 어려서부터 이 장을 읽으면서, 제 인생의 사는 스타일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저한테는 아주 굉장히 소중한 장이다. 이 장을 보면서, 우리 시대에 논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팔일편 15장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鄒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聞之, 曰: “是禮也.”
선생님께서 태묘에 들어가서 제사를 도울 때 일일이 매사를 물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추 지방 출신의 애송이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였는가. 태묘에 들어가서 매사를 묻는 구나.
선생님께서 그 말을 듣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이다.
공자는 노나라 곡부에서 태어났고, 노나라는 주나라의 적통을 이은 나라였다. 노나라는 주나라의 적통을 이었기 때문에, 주공을 모신 태묘가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이 태묘에는 일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못 들어갔다. 그래서 공자가 여기를 들어가서, 태묘의 제사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공자라는 사람이 아마도 대사부가 되어서 제사에 참석했다고 본다.
대사부가 되기 전에 공자라는 사람은 자신의 자서전적인 이야기에서, 15살이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이 학(學)이라는 게 실제로 이 사람에겐 예(禮)였다. 과연 인간의 예(禮)라는 게 뭐냐? 예를 알아보고자 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위정 4-
여기서의 學은 禮를 말한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禮)의 전문가로 큰 사람이다. 특히 제례를 관장하는 데 전문가였다. 그리고 예(禮)와 더불어 각 나라의 노래를 채집해서 오늘날 시경(詩經)이라는 것으로 남겨주는 훌륭한 일들을 했다.
그러니깐 이 사람은 대사부가 되기 전에, 예(禮)에 관해서는 공자한테 물어보라고 할 정도로, 예(禮)의 전문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드디어 태묘에 들어와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 기대를 했을 것이다. ‘대단한 예의 전문가인 공자가, 드디어 대사부가 되어서 오늘 우리 종묘에 참석을 했다. 어떤가 보자!’하고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그러한 자리였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공자가 제사에 참여했는데 매사를 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물었다. 사람들한테 ‘여기서는 어떻게 하는 거죠? 여기서 3번 절해요? 2번 절해요? 여기 올라가요? 저리로 가요?’ 계속 물었다.
子入大廟, 每事問.
그러니깐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하고 장관들이 와서 포진을 하고, 태묘에서 궁중예악이 벌어진다. 그리고 예(禮)의 최고 전문가인 공자가 와서 알아서 착착착착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지시를 하고, 뭔가 분위기가 쇄신될 줄 알았는데, 공자가 촌놈처럼 들어와서 ‘이리로 가요? 저리로 가요?’하고 계속 물은 것이다.
或曰:
여기서 공자를 비아냥거리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공자의 대사부라는 직위는 요새 말로 하면 법무부 장관에 가까운 것이다. 예를 들면 문교부 장관과 같은 사람이 공자를 비판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지목하지 않고 혹왈(或曰)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이라고 했다.
或曰: “孰謂鄒人之子知禮乎?
여기에서 추인지자(鄒人之子)라는 말을 썼다. 추(鄒)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지방관으로 벼슬을 했던 지방이다. 그 동네 사람이라고 해서 추인(鄒人)이라고 한 것이다. 추인(鄒人)이라는 게, 요새말로 하면 좋은 말이 아니다.
추인지자(鄒人之子)
추(鄒)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이 지방관으로 재임하였던 곳이다. ‘추 땅의 촌놈’ 정도로 경멸·비하하는 뜻이 내포된 표현이다.
‘추 땅의 촌놈이 예(禮)를 잘 안다고 소문이 난 놈인데, 누가 저 추인지자(鄒人之子)가 감히 예(禮)를 안다고 말하든가?’
或曰: “孰謂鄒人之子知禮乎?
‘저 놈은 예(禮)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아니냐?’ 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여왔던 거였다. 시시콜콜 물으니깐, 그랬을 것이다.
入大廟, 每事問.
‘여기가 어디라고? 태묘를 들어오기 전에 공부를 하고 들어왔어야지? 예(禮)의 전문가라면서, 이 태묘에 들어와서 시시콜콜 저렇게 다 묻고 앉아 있으니, 어떤 놈이 저놈이 예(禮)를 안다고 할 것이냐?’ 하고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공자가 한 유명한 말이 ‘시례야(是禮也)’다. 바로 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예(禮)다!’ 이게 아주 유명한 말이다.
3. 시례야(是禮也)의 3가지 해석
내가 이걸 왜 그렇게 좋아했냐? 공자가 태묘에 들어가서 묻는 모습에서, 나는 공자의 위대함을 발견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이 땅의 젊은이들은 어딜 가든 두려워할 게 없다. 물으면 된다.
공자가 ‘시례야(是禮也)’라고 한 말은 몇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내가 아무리 예의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내가 장관이 되어서 태묘에 처음 들어왔으면 물어야 한다. 예(禮)라고 하는 것은 상황상황에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지금 내가 새로 들어왔으니깐 당연히 물어야 한다.
우리 집에서는 2번 절하지만, 여기서는 3번 할 수도 있고, 4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 어떤 법칙이 있겠나? 그걸 내 멋대로 알고 자기 멋대로 하는 놈은 예를 모르는 놈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라고 하는 것은 상황상황마다 다 다를 수 있다. 고정불변의 예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처음 왔으니깐 우선 여기의 예(禮)를 알아야 하니깐 묻는 것이다. 그게 첫째 의미이다.
예라는 것은 고정불변의 절차적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황적(situational)이다. - 제1명제 -
두 번째 공자의 말씀이 뭐냐 하면, 예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을 비우고, 상대방을 존중해서, ‘이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묻는 것이 바로 예(禮)라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대접이다.
내 맘대로 내 지식을 가지고 오만하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다. 그것이 곧 예다.
나의 묻는 행위가 상대방에 대한 사려 깊은 정중한 태도이며, 그것이 오히려 예의 행동(courteous action)이다. - 제2명제-
3번째로 공자가 말하는 예라고 하는 것은 고정불변의 어떠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서로 묻다보면, ‘아!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겠군요.’라고 해서 그 예가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라고 하는 것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성되어 가는 것이다. 절대불변의 예라는 것은 없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공자의 사상이다.
예는 존재(Being)가 아니요, 생성(Becoming)이다. - 제3명제-
그러니깐 공자는 예를 말할 적에 어떤 고정불변의 진리가 있는 것처럼, ‘예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너희들은 이 예를 지켜야 한다!’ 이런 말은 공자 사상에서 안 통하는 것이다.
공자의 묻는다고 하는 것이 예라고 말은 내 일생을 지배했다. 나는 어디를 가나 물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하고 물었다. 묻고 또 묻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물었다. 공자가 이런 본을 보였기 때문에, 어디 가서 묻는 것은 죄가 안 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일본사람들하고 다르다. 일본은 사무라이들 사이의 경쟁심이 엄청나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 한문을 일본식으로 훈독하는 게 잘 안 되었다. 그래서 세미나에 들어가기 전에 훈독을 어떻게 하냐고 학생들한테 물으면, 일본 학생들은 ‘세미나에 들어가서 보자.’고 한다. 안 가르쳐 준다. 같은 학생인데도 세미나에 들어가서 대결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그 사람들은 옹졸하다. 안 가르쳐준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처럼 물으면 즐거워하고 잘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묻지 않아서 그렇지, 어디 가서 뭘 물으면, 한국 사람들은 좋아하면서 가르쳐 준다. 한국 사람들은 그런 면에선 정말 개방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깐 젊은 학생들은 어디 가서든지 묻고 배우면, 금방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한테서 묻고 배우는 지식처럼 오래 남는 게 없다. 책으로 읽은 것은 기억이 잘 안 된다. 그러나 선생님한테 물어서 배운 것은 평생을 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공자의 말씀인 ‘시례야(是禮也)! 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예다.’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명언이다.
지식은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4. 시구야(是丘也) 술이편 24장
그런데 공자는 항상 제자들하고 같이 사셨다. 공부를 같이 했다. 세미나도 같이 하고, 소요학파처럼 같이 다니면서 가르쳤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삼자(二三子)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우리 공자 선생님은 다 안 가르쳐주고, 항상 뭘 꼬불쳐두는 거 같다. 좀 솔직하게 다 가르쳐 주시지.’하고, 학생들은 선생님이 다 안 가르쳐주신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나도 도올서원에서 가르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삼자(二三子) : 직역하면 " 둘 셋 녀석"이라는 뜻으로, 『논어』에서 "너희들"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공자 당대의 구어(口語, colloquialism).
그래서 공자는 ‘너희들이 내가..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한다.
子曰 : “二三子! 以我爲隱乎?
‘나는 너희들 앞에서 아무것도 숨겨본 적이 없다.’
吾無隱乎爾!
여기서 무(無)는 부정사로 최후에 해석한다.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살면서 너희들한테 내가 뭘 숨기겠냐? 나는 너희들과 자고 먹고, 가르치고 너희들과 더불어 살면서 나는 숨긴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述而 24-
하시면서 제일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 나 짱구다!’였다
是丘也。
‘너희들은 내가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바로 너희들과 더불어 행하지 않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자. 봐라!! 이것이 나 공자다!’라고 한다. 시구야(是丘也)라고 한다.
공자라고 하면, 어떤 도덕적인 인격체로 굉장히 어마어마한 윤리의 완성인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공자라는 사람의 ‘이것이 나다!’라는 말 이상으로 한 인간이 말하는 실존적 고백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논어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말이 ‘시구야’라는 말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항상 자신 있는 게 뭐냐 하면, 뭐라고 나를 비판하든, 이 세상이 아무리 비판을 하든, 나는 자신이 있다. 이것이 바로 도올 김용옥이다.
나는 ‘시구야’라는 말처럼,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좋은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국회의원을 하든, 대통령을 하든, 사장을 하든, 어느 관공서의 장을 하든, 뭘 하든 좋다. 항상 이렇게 ‘시구야! 이것이 나다! 이게 내 모습이다! 뭘 더 이상 너희들에게 숨길 게 있냐? 더불어 살고 있다. 회사를 운영해도 직원들과 더불어 최선을 다했지 않냐? 이게 나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저놈 봐라. 저놈이 뭔 지식이 있다고, 전문가라고 그러냐? 뭘 그렇게 만날 묻고 앉았냐?’라고 했지만, ‘묻는 게 예다.’라는 말 한 마디로 더 이상 공자의 인격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다. 그야말로 더 이상 공자에 대한 해석이 필요 없는 것이다.
공자는 우리한테 ‘이게 나다!’라고 했다. 대학시절에 ‘시구야’라는 말 을 읽었는데, 난 논어에 그렇게 위대한 표현이 있는 줄 몰랐다. 그렇게 생생한 공자의 실존적 독백이 논어라는 책에 담겨져 있는 줄 몰랐다. 어렸을 때였지만, 나는 그 ‘시구야’라는 말 한마디에 펑펑 눈물이 나왔다. 그러면서 나도 이렇게 공자처럼 정직하게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 도올이다. 내가 여기 나와서 뭘 어떻게 하겠나?
하여튼 논어에서 시례야, 시구야, 이 두 마디는 정말 영원히 우리 가슴에 새겨야할 민족의 명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한 번 따라서 읽어보기 바란다. 시례야. 시구야.
是禮也 是丘也。
5. 팔이편 16장
16장
子曰 :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냥을 할 때는 사냥감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는다. 힘겨루기는 과(등급)를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예로부터의 오랜 관례이다.
내가 저번에 우리말 과녁이라는 것도 관혁(貫革), 가죽을 뚫는다는 말에서 왔다고 했다.
과녁 <-- 관혁(貫革) : 정곡(正鵠)의 가죽을 뚫는다.
그리고 과녁의 정가운데를 곡(鵠)이라고 한다. 이 곡이라는 게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공자 시대에는 화살을 쏘아서, 그 곡을 맞추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세기가 더 중요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공자 시대만 해도 전차전이었고, 갑옷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깐 갑옷을 맞히기만 해서 소용이 없었다. 사람을 죽이려면, 활을 세게 쏴서 가죽을 뚫어서 깊게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니깐 그 당시 전쟁에서는 어떻게 화살이 가죽을 뚫고 깊게 들어가느냐 하는 그 힘이 중요했다. 그러니깐 활쏘기는 점점 가죽 뚫기 경쟁이 되어 간 것이다.
공자에게 활쏘기라는 것은 군자의 예(禮)로서, 수신의 방편인데, 가죽 뚫기 경쟁만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 시대에 벌써 예악의 시대에서 패도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활쏘기가 사람 죽이기로 가는 것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가 있다.
즉 공자는 ‘활쏘기라고 하는 것은 가죽을 뚫는 것을 주로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한다. 불주피(不主皮)라는 것이다.
射不主皮
그러면서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어떠한 동일한 기준에 의해서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爲力不同科
같은 중량의 남자와 여자가 씨름을 한다고 여자는 당해낼 수가 없다. 그러나 지방분이 축적되어 있는 뚱뚱한 여자랑 건장한 남자가 차가운 얼음물에 들어가서 오래 견디기 시합을 하면, 여자가 이긴다. 여자의 에스트로겐 홀몬은 피하 지방을 많이 축적시킨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여자는 남자들보다 얼음물에서..훨씬 오래 견딜 수 있다. 얼음물에 들어가서 오래 견디기도 하나의 경쟁이다. 씨름만이 경쟁이 아니다.
즉 힘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 종류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부동과(不同科)라는 것이다.
爲力不同科
6. 올림픽
르카프라는 말을 아는가? 운동화 브랜드로 알고 있겠지만, 원래 이 말은 원래 올림픽과 관련된 것이다.
올림픽이라는 것은 과거에 희랍에 있었던 것이다.
올림픽 경기는 희랍의 올림피아에서 BC 776년 최초로 거행되었고, AD 393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희랍의 올림픽이라는 것은 전쟁국가 사이의 전쟁 게임으로 했던 것이다. 평화 시에 했던 옛날 희랍시대의 올림픽 종목은 전부 전쟁과 관련된 것이었다. 투창, 넓이뛰기, 달리기, 레슬링 등 5가지 종목을 했다.
달리기·넓이뛰기·원반던지기·창던지기·레슬링이 희랍올림픽의 최초 5종목이었다.
그러니깐 이것은 옛날의 전쟁 게임이었다. 이게 평화적인 체육 게임이 아니고, 전사들의 전쟁 기술을 게임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사실 올림픽이라는 것은 족보 자체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
그런데 희랍이 로마에 점령당하면서 올림픽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체육인도 아니었던 불란서의 훌륭한 교육자 꾸베라탱 남작이 인류평화를 위해서 근세 올림픽을 부활시킨다.
꾸베르탱(Baron Pierre de Coubertin, 1863 ~ 1937) : 불란서의 교육자. 희랍왕의 도움을 얻어 1896년, 아테네에서 최초로 근대올림픽을 개최했다. 최초의 IOC 의장(1896 ~ 1925).
그런데 꾸베르탱 남작이 올림픽기를 헌정하면서, 모토로 내세운 말이 라틴어의 ‘Citius, 더 빨리, Altius 더 높이, Fortius, 더 쎄게’였다. 이 말의 앞을 딴 게 CAF다. 거기다가 불란서의 정관사 le를 넣어서 르카프가 된 것이다.
Citius(더 빨리), Altius(더 높이), Fortius(더 쎄게)
그런데 근세에 만들어진 ‘더 빨리, 더 높이, 더 쎄게’라는 이 모토 때문에, 이것만 하다가 오늘날의 스포츠가 완전히 망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스포츠가 소수 스포츠 엘리트들의 경기가 된 것이다.
서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병폐가 된 것처럼 체육은 사람들의 놀이가 아닌, 기록 경쟁이 되어버렸다.
sports라는 말의 어원은 disport라고 해서, 일탈, 긴장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일상적인 긴장에서 일탈한다, 긴장을 푼다는 뜻이다. 즉 스포츠가 우리말로 하면 놀이다.
스포츠(sports)의 어원은 "disport"(긴장으로부터의 해방, 일탈)이다. 스포츠는 엘리트의 경쟁이 아닌 "놀이"가 되어야 한다.
대동제처럼 같이 노는 게 원래 스포츠인데, 지금은 ‘더 빨리, 더 높이, 더 세게’와 같은 경쟁만 하고 있다.
내가 용인대에서 교수를 해보았기 때문에 아는데, 지금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불쌍하다. 올림픽에 가서 1등을 하면 훌륭한 선수라고 박수를 치지만, 1등과 2등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저 메달 하나만 따면 영웅이고, 2등을 하면 아무도 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면, 운동한 보람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나?
지금 ‘Citius, Altiu, Fortius’ 때문에 전부 기록 갱신 경쟁만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기록이라는 것은 뻔한 것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세게’만 찬양하다가 인류는 파멸 위기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투포환 같은 올림픽 종목은 서양 사람들의 체격에 맞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올림픽 종목에 바둑이 있다고 하면, 서양 사람들이 따라오겠나? 그런데 우리는 서양 사람들의 체격에 맞는 희랍의 그런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마민족이기 때문에 양궁은 세계 최고로 잘 한다. 그건 양국이 우리 체격에 맞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니깐 올림픽 양궁에서 메달 수를 줄인다.
그렇게 올림픽은 서양의 엘리트 스포츠를 중심으로 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가 항상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이기기 어렵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지면 열등민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기에 지면, 어떤 열등의식에 빠지게 된다.
서양 스포츠는 최고의 악랄한 제국주의다. 전 세계 인민들에게 스포츠라는 기준을 대고, 서양인이외에는 저열한 민족이라고 서열화하는 것이다. 전 세계가 서양이 만든 기준에 따라 서열화시키는 것이다. 르카프의 모토에 따라서 줄을 세우는 것이다. 자기들이 만든 기준에 못 드는 민족은 열등한 민족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올림픽은 세계평화를 위하여 많은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경쟁, 상업주의, 획일적 기준에 의해 특수문화·민족의 우월주의를 강요하는 제국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엄청난 대공황의 시기였던 1936년에 있었던 베를린 올림픽도 히틀러가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했던 것이다. 아리안 민족인 독일 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민족인지 과시하기 위해서 올림픽을 개최했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손기정이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최고의 마라톤을 먹어버린 것이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1912 ~)의 승리는 단순한 체육사의 이벤트가 아니라, 서구민족 우월주의를 깨뜨린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기분이 나빠서 퇴장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올림픽을 정치적 선전으로 이용하려고 했는데 난데없는 동양인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손기정이 아니고 손기테이로 나왔다. 그래서 동아일보에서 일장기를 지운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의 동아일보는 그렇게 일본제국주의와 싸웠다.
축구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우리나라 국력이나 우수성이 절대 축구 실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서양 제국주의에 더 이상 놀아나면 안 된다. 우리는 이태리 축구에 상대가 안 된다. 제기차기 같은 우리의 게임으로 싸우면 모를까 상대가 안 된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못한다고, 열등한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운동 선수들은 귀엽게 봐 주어야 한다.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다 귀엽게 봐 주어야한다. 우리 민족의 체육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체육, 생활 체육이 중요한 것이다. 동네에서 건강하게 조기 축구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1등이다, 2등이다, 사실 이런 건 의미가 없다.
스포츠의 본질은 놀이며 해방이다. 엘리트 스포티즘의 경쟁을 지양하고 보편주의적 사회체육(communal athleticism)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자가 말하길, 활쏘기에서 신사적인 군자다운 게임을 해야 한다. 가죽을 ‘뚫느냐 못 뚫나?’와 같은 그런 르카프 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자는 오늘날의 올림픽을 까고 있는 것이다.
왜냐?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종류가 다른 것인데, 왜 그따위 바보 같은 경쟁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 아닌가? 내가 보기에 논어는 오늘날 우리 문제를 보는 데 있어서도 참신한 시각을 제시한다.
단지 엊그제께 이봉주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1등 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정말 우리가 축하해주어야 할 것이다. 내가 보스턴 마라톤을 잘 안다. 정말 난코스다. 그런데 거기서 1등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라톤은 최소한 르카프가 아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라톤 이상의 위대한 경기는 없다. 그런데 거기서 이봉주 군이 1등 한 것을 아주 축하한다.
인간의 다양한 재능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된다. 우리는 결과보다는 인간 노력의 과정에 대해서 찬미할 줄 알아야 된다. 결과만을 가지고 인간을 판단하지 말자.
우리 국민들은 체육인들을 너무 가혹하게 바라본다. 이런 습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메달리스트만 체육인이 아니다. 메달을 못 따도 훌륭한 체육인들이 많다. 생활체육이 존중되어야 하고, 건강한 체육문화 정립이 중요하다. 메달리스트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메달이라는 것은 서양 중심으로 조작된 아주 악랄한 것이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이랑 88올림픽 기록영화를 같이 찍었다. 그래서 제가 올림픽에 대해 깊게 안다.
7. 팔일편 17장
다음으로 들어간다. 17장이다. 굉장히 중요한 자공과 공자 사이의 이야기다.
子貢欲去告朔之犧羊.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자공이 매월 초하루에 희생양을 종묘에 바치는 고삭 의식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賜)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를 아낀다.
이것도 참 유명한 말씀이다. 곡삭기희양(告朔之犧羊)이 재미난 것이다.
여기 곡삭(告朔)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요새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여러분들은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며칠인지 알았을까? 지금은 달력이 있어서 알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다. 역(曆)이라는 게 있지만, 달력은 역하고 다르다. 옛날엔 달력이라는 것이 없었다.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주기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방송, 신문, 달력이 없으면, 그냥 자연의 변화를 보고, 세월을 알아야 한다.
자연 상태에서 하루는 알 수 있다. 밤과 낮을 알 수 있으니깐, 눈을 뜨면 하루가 지났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 한 달도 알 수 있다. 달을 보면 알 수 있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런데 1주일은 알 수 없다. 1주일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끊은 것이다.
7일을 1주로 삼은 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출발하여 로마인이 계승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AD 321년에 7일 1주 역법을 공식 채택했다.
옛날에 1주일은 없고 순(旬)은 있었다. 상순, 중순, 하순이라고 했다. 우리는 7일로 끊은 적이 없다. 10일로 끊었다. 우선 그런 것부터 알아야 한다.
순(旬)
10일을 한 단위로 생각하는 한자문명권의 역법.
그럼 1년을 달(月)로 알 수 있나? 모른다. 1년은 해(日)로 알 수 밖에 없다. 그건 좀 전문적이다. 동지와 동지, 하지와 하지, 춘분과 춘분으로 기준을 삼아 1년을 정한다. 보통 춘분을 기준으로 삼는데, 춘분과 춘분 사이를 1년으로 보면, 그건 태양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달(月)로 기준을 삼을 수 없다.
그런데 재미난 문제가 있다. 달은 한 번 차고 기우는 데 29.53059일 걸린다. 월은 달(月)을 보고 해야 한다. 그래서 ‘월’이라고 하는 것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the synodic month)는 29.53059일이다.
그리고 1년을 춘분과 춘분 사이로 보면 365.242199일이다.
태양이 동일한 고도에 있게 되는 춘분(vernal equinox)과 춘분 사이는 365.242199일이다.
그럼 달의 주기인 29.53059일에 12를 곱하면 354.36708일이 된다. 그래서 1년은 해(日)를 보고 정해야 한다. 달을 기준으로 하면 11일이 모자란다.
1년은 해(日)를 기준으로 하고, 월은 달(月)을 기준으로 하면 차이가 일어난다. 이 차이가 쌓여서 3년 정도 지나면, 한 달 정도가 된다. 그래서 4년에 한번씩 1달을 더 집어넣는 것이다. 그게 윤달이다. 그럼, 그 때는 13달이 된다. 옛날에는 그렇게 억지로 맞추었다.
하루가 지나가는 것은 자연 상태로 알 수 있다. 옛날에도 삭일(朔日), 즉 보름달이 뜰 때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매달 초하루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오늘이 한 달의 처음입니다.’하고 국민들에게 반포하는 제식을 지낸다. 그것을 곡삭(告朔)이라고 한다.
곡삭(告朔) : 매달의 첫날임을 국민에게 알리는 관공소의 제식. 임금이 종묘에 나아가 희생제물을 바친다. 이 때 "告"는 입성(入聲)으로 읽는다.
옛날에는 달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식 자체가 달력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명절의 의미를 모른다. 옛날에는 명절을 지내면서 시간의 흐름을 아는 것이었다. 한식이니 단오니 하는 것이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단오날에는 머리 감고,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면서, 오늘이 몇 월 며칠이라는 것을 감(感)으로 알았던 것이다.
달력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요새는 시계만 보면 다 알지만,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다.
옛날이 좋았다. 달 가는 줄도 모르고, 제사나 명절을 지내면서 살았다. 우리 어릴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살았다. 요즘 세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전을 읽어도 이런 내용을 모른다.
이때만 해도 곡삭을 지낼 때 양(羊)을 가져다 제사를 지냈다. 양을 죽여서 제사를 지냈다.
희양 : 곡삭의 제식에 바치는 희생 양. 중국고대에도 양이 제물로 쓰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것. 북방민족의 습관.
노나라의 문공은 공자보다 근 1세기를 앞선 사람인데, 그때는 매월 1일인 곡삭에 임금이 와야 했다. 임금이 와서 제식을 했다. 그렇게 사람들한테 오늘이 초하루라는 것을 반포했다. 그런데 문공은 게을러서 곡삭에 오지 않았다. ‘귀찮다. 너희들끼리 해라.’하고 안 갔다. 그 뒤로 점점 제식의 무게가 떨어졌다.
그래서 자공 시절에는 아마도 곡삭이 거의 유명무실해진 거 같다. 노나라의 곡삭이 중요한 제식인데도 불구하고, 유명무실해진 거 같다.
그래서 공자 말년에, 자공이 노나라의 높은 관리가 된 다음에, 곡삭에서 양을 제물로 쓰는 것을 없애고자 한다.
子貢欲去告朔之犧羊.
아예 곡삭 제도 자체를 없애자는 것인지, 비린내가 나고 번거로우니깐 양을 죽이는 것만 없애자고 하는 것인지는 애매하다. 또한 양을 제물로 쓰는 것이 없어지면 곡삭도 자연히 없어질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때 자공의 생각은 현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간소화, 생활화, 현실화하자는 것이다. 제도의 의미가 많이 없어졌으니, 이걸 없애자고 하는 것이다. 곡삭(告朔)의 희양(犧羊) 제도를 없애고 싶다는 것이다.
子貢欲去告朔之犧羊.
그러니깐 공자가 거기에 대고 하신 유명한 말씀이, ‘사(賜)야. 이 녀석아. 너는 그토록 양(羊)을 아끼느냐? 그 양이 그렇게 아까워서 그걸 없애려고 하느냐? 난 그 예(禮)를 아끼노라.’이다.
子曰: “賜也! 爾愛其羊, 我愛其禮.”
공자님 말씀에는 뼈가 있다. 지금 곡삭이 아무리 유명무실하다고 하지만, 그 예(禮)에 기능이 있고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그걸 왜 너는 그렇게 마구 합리화한다, 현대화한다, 현실화한다고 하면서, 싹 없애버리면, 이 사회 꼴이 뭐가 되겠냐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번거로운 절차 같지만, 중요한 예식이나 과거부터 내려오는 전통은 그대로 남겨두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사회에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 때가 많다. 그런데 그런 것을 무조건 싹 없애버리고, 합리화한다고 하는데, 이런 게 문제다.
정말로 없앨 것을 없앨 줄 알고, 간소하게 할 것은 정말 간소하게 하고, 남겨둘 것은 남겨두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문제에 대해 지방자치를 하면서 더 문란해졌다. 없애지 않아야 할 것을 없애고, 없앨 것은 안 없애고 있다. 한국 사회에 이런 혼란이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주석에 의하면, 사실 주나라에서 1년에 한 번 정월 초하루에 천자가 노나라에 와서 양을 바치는 예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곡삭은 단순히 노나라의 예(禮)가 아니라, 주나라에서 천자가 1년에 한 번 올 적에 양을 바쳤던 제식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런 설도 있다.
告朔, 謂天子之使來告正朔也.
周禮, 太史頒告朔于邦國.
餼羊, 禮賓之牲也.
정다산 선생은 이러한 설을 취했다. 이건 청나라의 유보남(劉寶楠)이라는 학자가 주장한 설인데, 정다산 선생은 유보남 이전에 이미 이 설을 말하고 있다. 그만큼 정다산 선생은 중국학자들보다 앞서 있었다.
‘아마 이것은 천자가 1년에 한 번 노나라에서 곡삭을 하는 특별한 예(禮)에 맞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정다산 선생은 이렇게 주(注)를 달고 있다.
周衰大史不復至, 有司猶畜其羊, 故欲去之. -茶山-
나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곡삭은 노나라에서 매달 지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옛날 문화를 생각할 적에 역(曆)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대인들에게 역(曆)은 삶의 질서를 의미했다. 역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역(曆)을 어떻게 만드느냐?’ 이것이 옛날 군주의 가장 큰일이었다. 옛날 치세는 역을 어떻게 설정을 하고, 역에 따라서 어떠한 제식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정치 중에서 가장 큰 대목이었다.
과거 전통사회에 있어서는 역(曆)은 정(政)의 본질이었다. 역(曆)은 곧 백성들의 삶의 질서(Order of Life)였다.
지금은 그런 게 별로 없는 거 같지만, 사실 지금도 우리는 역(曆)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절기에 맞춘 문화가 형성되어야 하고, 거기에 따라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 공자의 적나라한 모습을 말씀 드렸다. 묻는 것이 예라고 하는 말씀과 보이는 이대로의 모습이 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자공이 그렇게 유명무실화한 예(禮)를 폐지하려고 하니깐 ‘너는 그 양(羊)이 아까워서 폐지하려고 하느냐? 나는 그 예(禮)를 아끼노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우리 삶의 새로운 좌표가 생겨나리라 확신한다.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논어의 이러한 뜻을 깊게 반추하는 생활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