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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색 : 눈꽃 거위와 바늘 거위
직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긴 습관이 있다. 내가 본 것을 직관적인 형태로 상상하는 습관이다.
이런 습관을 크게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인슈타인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것은 직관적 상상이다. 수식도 논리도 아니다.
이미 상대성 원리를 알아버린 뒤에 그걸 타인에게 설명 및 증명하기 위해 수식이나 논리가 필요했을 뿐이다.
하나 아쉬운 것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물리적 현상들은 너무나 많이 볼
수 있다. 문제집에 있는 물리문제는 풀면서 왜 일상생활에서의 물리적 현상은 해석하려 하지 않았던가?
물리지식이 논리와 수식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참 아쉽다.
내가 선생님이고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면 일상의 물리 문제들을 풀어보게 할 것이다.
이를테면 빛 알갱이나 소리 진동을 상상할 때가 있다. 빛과 소리는 일상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이므로 그걸
직관적인 형태로 상상할 기회가 많다.
빛 알갱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상상 속에서는 충분히 이미지화할 수 있다. 빛이 반사되거나 산란되거나
흡수하는 모습은 빛을 상상하는데 있어 기본적인 것이다.
직사광선을 들어오지 않는 방이 어떻게 환해지는가? 빛을 상상한다면 너무나 자명하다.
소리는 알갱이가 없다. 공기 진동일 뿐이다. 따라서 마치 호숫가에 돌멩이를 던진 것 같이 진동이 퍼져나간다.
따라서 상상 속에서 소리는 빛과는 전혀 다른 패턴의 모습을 보여준다.
빛과 소리를 직관적 상상할 수 있으면 빛의 일반적인 형태인 전자기파 역시 상상할 수 있다.
물리적 현상은 눈에 보이는 그 시점으로 상상할 수도 있지만, 거시적 혹은 미시적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문을 여닫는데 문의 경첩에서 쇳소리가 난다. 그렇다면 경첩이 진동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커다란 행성을 상상하고 그 겉에 공기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행성을 돌리는 상상을 한다.
서서히 돌리다가 점점 속도를 높여본다. 공기의 흐름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는만큼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을 하려면 알아야 한다. 상상을 하고 싶은데 걸림돌이 생기면 물음표가 생긴다.
그것은 앎에 대한 동기가 되어준다.
사람을 관찰할 때에는 사람에 관한 지식이 큰 도움이 된다. 아는게 많으면 그 스키마 덕분에 관찰할 수 있는
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사물을 관찰할 때에는 물리에 관한 지식이 큰 도움이 된다.
물리란 말 그대로 사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사물의 이치를 알면 사물을 볼 때에 관찰할 거리가 많아진다.
이렇게 스키마로 인해 관찰력이 높아지면 해당 분야에서 이해력도 집중력도 응용력도 기억력도 좋아진다.
책을 읽을 때에만 스키마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읽을 때에도 스키마가 필요하다.
그 중 주된 것은 심리학과 물리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적 형태로만 저장되어 있으면 곤란하다.
그런 식이면 일상생활에서 활용도가 매우 떨어지며 잘못 사용할 가능성이 크고 속도도 매우 느리다.
일상의 관찰이란 무의식까지 뻗어야함을 생각할 때 반드시 직관적 형태로 저장되어야만 한다.
무의식의 언어는 직관이기 때문이다. 마치 외국어를 모국어 번역을 생략한 채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의식적으로 모국어 번역이 꼭 필요하다면 원어민 같은 외국어 실력을 어찌 갖출 수 있겠는가?
사람과 사물의 본질은 직관적 형태이므로 직관적 상상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모국어 번역을 생략한 이해이다.
사람에 관한 지식... 심리학과 더불어 뇌과학적인 상상을 하는 편이다.
요새 특히나 더 그렇다. 관찰, 생각, 행동, 감정, 습관, 직관 등을 떠올릴 때 뇌의 특정 부위에서 전기자극이
번쩍하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직관적 상상은 새로운 통찰을 준다. 그러면서 체험한 흥미로운 것이
있다. 그건 자주 할수록 능숙해진다는 것이다.
직관적 상상을 자주 하면 직관적 상상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사람들이 도달하기 힘든 곳까지 올라서 통찰을 해낼 수 있었을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습관적으로 자주 하니 직관적 상상이 고도화된 것이다.
공학에 있어서 옛 우리 선조들은 두 가지 면에서 현재의 우리들보다 뛰어났다고 본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이 있는데 신라시대의 석굴암과 조선시대의 자연 속 건축물이다.
하나는 직관화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둘은 목적 이외의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그 목적 이외의 효과를 유용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석굴암의 24시간을 상상했더니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그 햇빛을 석굴암에 이용한다. 석굴암 주변의 공기 흐름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것과 조화를 꾀한다.
절을 지으려 상상했더니 그 상상 속에 자연경관이 보인다.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다.
유럽의 건물들을 보면, 그 마을 전체가 어떤 통일성을 갖춘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지붕 색깔이 모두 붉은 색이다. 거시적인 상상 관찰을 해볼 때에 중구난방의 색깔보다는 통일성을
갖추면 더 큰 미감을 느낄 수 있다.
유럽이 관광지로서 인기가 높은 이유 중 하나는 건축물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유명한 건축물이 아니더라도 그냥 일반적인 건축물조차 아름답다. 그 건축물 하나를 똑 떼어내
대한민국 시골 어딘가에 떨렁 갖다 놓으면 그닥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진다. 에펠탑 바로 옆에 강남의 대형빌딩을 똑 떼어내어 갖다 놔보자.
거시적인 상상관찰을 해볼 때에 흉물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언어적으로 생각하면 그 목적 하나만 눈에 띄기 쉽다.
그러나 직관화하여 생각하면 자연히 부수적인 것도 관찰이 된다. 따라서 이 두 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일때 ~하고 ~하면 ~가 된다. 이런식이 언어적 생각이다.
언어적 생각은 특징이 있는데 그건 일방성이다. 마치 사슬처럼 이어진 것이 언어적 생각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최종물도 1개이다.
그러나 직관적 생각은 다방적인 특성이 있다.
거미줄을 보면 정 중앙을 중심으로 방사형태로 퍼져있다. 이것이 무의식의 생각 즉 직관의 형태이다.
이런 점을 활용해 직관을 이용하기 위해 만든 필기법이 마인드맵이다.
줄글과 달리 마인드맵은 다방성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무의식과의 호환성이 높다.
직관화하여 생각하면 목적 이외의 효과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직관의 다방성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적 생각과 달리 직관적 상상을 통해 관찰하고 생각을 하면 다양한 관점에서 관찰하기 용이해진다.
항공기 조종사의 관점에서 서울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면 그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도시의 상하수도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관점에서 서울을 바라본다면 물줄기가 보일 것이다. 한강에 크고 작은 빨대들이 무수히 퍼져있다.
한강의 물이 빨대의 연결을 통해 어느 아파트 12층에 있는 샤워기로 나오고 있다.
흙바닥에서 농구를 하는 바람에 땀과 흙먼지로 뒤덮힌 소년의 피부를 씻기며 바닥에 떨어진다.
배수구로 들어간 물은 다시 여러 빨대들을 통해 한강으로 돌아간다.
언어적 생각과 달리 직관적 상상의 경우 현실을 변형하는 것이 용이하다.
상상에는 순수한 상상도 있지만, 현실 + 상상을 하는 수도 있다.
이를테면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사라져버리고 영상만이 홀로그램처럼 남아
있는 장면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현실 + 상상이다.
상상에 의해 변형된 현실은 더 많은 관찰을 할 수 있게 해주며, 그 와중에 유의미한 가치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언어를 몰랐던 시절이 있다. 바로 아기 때이다.
그 때에는 부득이 비언어적인 생각... 직관적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기 때와 근접한 시절일수록 언어적 생각보다 직관적 생각의 비중이 높다.
그 때문에 엉뚱한 생각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궁금한 것도 많다.
언어라는 것은 대용량의 생각을 빠르게 해낼 수 있게 돕는 유용한 수단이다. 그러나 언어는 고정관념을
만들고 사고를 경직시킬 위험이 큰 단점을 갖고 있다.
반면 이미지로 대표되는 비언어라는 것은 관찰을 통해 더 많은 질문을 만들어내고 방사형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며 고정관념을 깨버리는 유용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대용량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하기에는 유용하지 않으며 그 대상의 본질이 감각적인 것이 아닌 경우
생각하기 어렵다. 때문에 언어와 비언어는 병행되어야 한다. 언어는 비언어로 바꾸고 비언어는 언어로 바꾸는
습관을 가지면, 양자의 단점을 상호보완하고 장점에 시너지 효과를 더할 수 있다.
인간의 두뇌가 좌우로 나뉘어 있는 이유는 즉 좌뇌와 우뇌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원래 사람은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한 번에 딱 하나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예외가 있으니 좌뇌와 우뇌이다.
좌뇌는 언어적 움직임을, 우뇌는 이미지적 움직임을 담당하는 식으로 멀티태스킹하는 것이 가능하다.
선풍기의 예를 들어보겠다. (써놓고 보니 너무 길다. 그냥 skip 하자.)
전기에 모터를 연결하고 그 모터가 선풍기 날개를 돌린다. 그러면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이것이 언어적 생각이다. 선풍기의 목적인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금새 부수적 효과를 관찰해낼 수 있다. 220V의 콘센트에서 전기 알갱이 즉
전하가 쏟아져 나온다. 전선을 타고 흘러간다. 전선을 타고가는 동안에도 약간의 전하 손실이 있다.
전하가 모터에 들어간다. 모터내에 있는 자기력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힘을 만들어낸다.
이걸 상상하니 선풍기에 강력한 자석을 갖다대면 어찌될지 궁금하다. 모터가 만들어낸 힘은 미시적으로
보자면 균일한 힘은 아니다.
전기모터의 구조를 상상해볼 때에 힘의 강약이 번갈아 반복된다. 모터가 돌아간다. 모터의 둥그런 심이
돌아간다. 그 심에 선풍기 날개의 중앙이 연결되어 있다. 모터의 심과 그 중앙과의 맞닿은 면의 정지마찰
력이 약하다면 모터는 헛돌고 맞닿은 면과의 운동마찰력에 의해 열이 발생할 것이다.
선풍기 날개가 돌아간다. 선풍기 날개에는 원심력이 작용하고 바람과의 마찰력이 작용한다.
그 결과 선풍기 날개에 진동이 생긴다. 그 진동은 소리를 만든다. 그 소리는 공기진동을 통해 내 귀로
들어온다. 선풍기 날개의 회전속도에 따라 그 진동수가 달라진다.
진동수가 달라지면 내 귀로 들어온 선풍기 소리도 달라진다. 한편 선풍기 날개는 모터 심을 땅 쪽으로
누르고 있다. 모터 심은 아래쪽으로 더 많은 힘을 받는다.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면 모터 심은 그 질량
때문에 더 크게 요동친다. 모터 심 끝에 달린 선풍기 날개의 질량과 바람 저항 등 때문에 토크가 더 세게
걸리는 것이다.
모터심이 요동치니 모터에서 전기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는 양이 줄고 열에너지로 바뀌는 양이 늘어
난다. 진동은 열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빛이 하얀 색 벽면에 부딪힐 때에는 벽에 주는 진동이 약하다.
검은 색 변면에 부딪힐 때에는 더 큰 진동을 준다. 그 결과 검은 색 벽이 더 빨리 뜨거워진다.
모터 심의 떨림으로 인해 모터는 뜨거워진다. 열이 빨리 사라지려면 차가운 것과 접촉한 면적이 넓어야
함은 이미지적으로 생각할 때 자명하다. 모터의 열은 모터와 연결된 근처의 것들의 온도를 높인다.
마치 적외선 카메라로 보는 듯한 상상을 해본다. 모터 주변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 뜨거워져 있다.
아마 모터는 빨간색 그 주변은 노란색 그 바깥은 파란색으로 보일 것이다. 부채를 들고 부채질을 하는
상상을 해본다. 노란색이 부채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며, 빨간색은 다소 연해진다.
선풍기 날개도 역시 열을 받는다. 그러나 공기와의 접촉면이 넓어 열이 쉽게 날아가버린다.
이런 상상을 통해 시원함을 위한 선풍기는 실은 발열기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풍기는 열을 만들어 실내온도를 상승시킨다. 다만 보통의 경우 사람의 체온보다 실내온도가 낮기 때문
에 선풍기 바람은 시원함을 준다. 사람 바로 곁에 있는 공기는 생체 난로인 사람 때문에 온도가 높아진
채로 있게 된다. 그 공기를 밀어내고 더 낮은 온도의 공기를 곁에 두게 하는 것이 선풍기 바람이다.
주변에 낮은 온도의 공기가 있으면 몸의 열이 더 빨리 빠져나간다. 그 결과 시원해진다.
만약 실내온도가 50도이다. 그러면 사람은 생체 얼음이 될 것이다. 사람 주변의 공기 온도는 50도보다
낮아진다. 그 상황에서 50도의 공기를 선풍기 바람으로 보내면 더 덮게 느껴질 것이다.
선풍기는 시원한 바람을 보내는 기계가 아니라 뜨거운 바람을 보내는 기계가 된다.
이런 식으로 상상을 통해서 생각하면 단순히 시원한 바람이라는 목적달성에 필요한 효과...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수적 효과가 생김을 알 수 있다.
직관적 상상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유용하게 해준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세상을 이어준다.
직관적 상상은 재미있다. 그리고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관찰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해준다.
직관적 상상 덕분에 더 많은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사물이나 사람이 더 흥미로워진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직관적 상상은 무의식에게 더 많고 유용한 식재료들을 공급해준다.
그 결과 직관력이 높아지며 따라서 통찰력이나 창의력이 높아진다. 직관적 상상은 수많은 물음표를 만들어
준다. 그 물음표를 통해 방사적으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물음표 덕분에 그와 관련된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며 더 쉽고 깊게 배울 수 있게 된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전부 다 불필요하다. 사실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직관적 상상을 자주 해보고 직접 느껴
보면, 그 느낌이 직관적 상상습관의 유용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될 것이다.
직관적 탐색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진리를 찾거나 새로운 생각을 이어가는 데에는
다음 두 가지 탐색 방법이 있습니다.
전 생각할 때 이미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 이미지와 유사하게 도식화해보았습니다. 설명 길게 하지 않아도 이해되실 겁니다.
첫째로 논리적 탐색입니다.
징검다리 넘듯 논리적 탐색에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넘는거죠.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등의 철학자가 생각이 나는군요. 컴퓨터도 논리적 탐색에 따라 사고합니다.
두 번째는 직관적 탐색입니다.
먼저 직관에 의해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후에 그곳까지 논리적으로 연결합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직관형 과학자나 에디슨 같은 발명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모짜르트 같은 예술가가 떠오릅
니다.
창의력이 필요한 일은 대체로 직관적 탐색이 선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답이 직관적으로 떠오르고, 그 후에 그걸 남들에게 표현하거나 증명하기 위해 논리적 탐색을 거칩니다.
혹은 직관적 탐색 후 그 답을 감각적으로 느껴 좋은지 등을 판단합니다.
직관적으로 이미 답을 구해놓고 확신한 상태에서 논리적 증명을 위해 수년을 소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관적으로 이미 답을 구해놓고 그걸 아예 증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관은 무의식이요, 논리는 의식인데
사고력에 있어서 무의식을 의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죠.
참고로,
바둑은 이 두 가지 방법을 적절히 혼합하여 사고하는 스포츠입니다.
참고로,
현재 컴퓨터는 직관적 탐색을 하지 못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만 할 수 있습니다.
사슬과 나뭇가지
지식은 나뭇가지처럼 생겼다.
선line이 있고 선 중간 중간 가지branch가 갈라져 나온다.
직렬line과 병렬branch의 조합으로 이뤄진 것이다.
우리 뇌도 지식처럼
line과 branch로 이뤄져 있다.
신경세포, 즉 뉴런은 위와 같이 생겼다.
우측 하단에 보이는 것이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뉴런과 뉴런의 연결이 이뤄지는 시냅스이다.
1개의 뉴런은 수많은 뉴런과 연결될 수 있다.
그 뉴런들이 연결되어 아래와 같은 구조를 이룬다.
나뭇가지와 비슷하다.
뉴런의 핵을 중심으로 branch가 방사형으로 갈라져 나온다.
line과 branch로 이뤄진 것이다.
자... 그런데 사람이 의식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절차적이다.
1 → 2 → 3 → 4 → 5 → 6 → 7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그렇게 기억된다.
이걸 절차기억이라고 한다.
동시에 두 개가 갈라져 나올 수는 없다.
5 → 6
↗
1 → 2 → 3 → 4 → 7
1 → 2 다음에 3과 5를 동시에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런거다.
3과 5를 동시에 말해보라.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은 입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타 줄은 6 개이다.
다 끊어버리고 한 개만 남겼다.
그 한 개의 기타줄로 화음을 넣어보라. 불가능할 것이다.
한 개의 줄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음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line과 branch로 이뤄진 방사형의 지식 또는 뇌 속에 구조화된 기억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떠올려 생각할 수 있을까?
위와 같이 한 줄 그리기를 하면 될 것이다.
붓을 생각하면 된다.
5 → 6
↗
1 → 2 → 3 → 4 → 7
즉 위 숫자 순서대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1 → 2 → 3 → 4
이렇게 갔다가
다시 2를 떠올리고
5 → 6
↗
2
5와 6을 간 뒤에
5 → 6
4 → 7
다시 4를 떠올리고 7로 가야 한다.
branch가 갈라지는 지점을 다시 되짚어야 하는 것이다.
기타 줄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어떤 것을 떠올리면 그건 마치 소리와 비슷하다.
강한 소리가 났다가 점점 희미해진다.
그 뉴런이 활성화되었다가 점점 굳어진다.
1 → 2 → 3 → 4
4를 할 때에 2가 아직 남아있다면
5 → 6
↗
2
곧바로 5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2부터 다시 기타줄을 튕기고 5를 해야 한다.
4 → 5가 아니라
4 → 2 → 5 해야 하는 것이다.
컴퓨터의 데이터 구조도 이런 식으로 이뤄져있다.
데이터 자체는 방사형이지만, 그걸 호출할 때에는 절차적으로 호출해야 한다.
데이터 자체는 방사형이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은 절차적으로 사슬형태로 짜여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어진 것 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좀 더 하면,
쇼핑몰에서 매장들은 line과 branch의 조합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그 매장을 한 명의 사람이 모두 다닐려면, 한 줄 그리기를 해야 한다.
마치 이것처럼 말이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지만, 기왕 말한 김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보겠다.
5 → 6
↗
1 → 2 → 3 → 4 → 7
에서 숫자 한 개가 가리키는 것은 신경과학적으로 볼 때 무엇을 의미할까?
이걸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0.5초 동안 방사형으로 자극된 뉴런들의 총집합이다.
뉴런의 신호전달속도는 매우 빠른데 0.5초를 1 unit으로 단순화시키면,
0.5초 동안 자극된 뉴런들의 총집합이 저 숫자 1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 숫자 1개의 내부적으로는 방사형이다.
뉴런 1개 자체에는 정보가 없다.
뉴런의 연결 즉 시냅스에 정보가 있으며
0.5초 동안 순식간에 활성화되는 많은 시냅스가 모여 하나의 데이터를 이루는 것이다.
이 부분은 컴퓨터와 차이가 있다. 컴퓨터는 데이터 하나의 내부적으로도 직렬 형태이다.
그리고 그 최소 단위는 1 또는 0 이다. (on/off)
참고로
예외적으로 이 병렬 처리가 가능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직 개발 중인 양자 컴퓨터이다.
미래에 이것이 개발되면 커다란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마치 인류가 종이를 발명할 때처럼 말이다.
추측컨대... 이 양자 컴퓨터가 발전이 거듭되면 궁극적으로 컴퓨터가 스스로 학습을 할 수도
컴퓨터가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생명체의 DNA를 창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와서
세상의 지식도 기억이 들어있는 사람의 뇌도 line과 branch로 이뤄진 방사형이다.
( 참고로 이렇게 말한 것 자체도 1 → 2 → 3 → 4 → 2 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사형은 한 줄 그리기로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한 줄 그리기의 연결은 절차기억이 된다.
말하기도 마찬가지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한 줄 그리기이다.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 나뭇가지 형태이더라도 한 줄 그리기로 설명해야 한다.
음악도 춤도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한 줄 그리기이다.
그러나
1개의 단일 사진, 그림이라면 어떨까? 그림 한 개 자체는 방사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0.5초 동안의 뉴런의 방사형 자극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을 다 보려면 한 줄 그리기로 다니며 봐야한다.
그 그리기의 붓은 사람의 발과 눈이 될 것이다.
돌아와서
의식적인 생각은 한 줄 그리기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직관, 즉 무의식의 생각은 어떨까?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를 좀 해보겠다.
바다에는 부표buoy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해 떠있는 표시이다. 물이나 바람의 흐름에도 변동없이 동일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어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잔잔한 호숫가에 이런 부표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1000개를 띄워 뒀다고 해보자.
그리고 한 손에 돌맹이를 한 웅큼 쥔다.
그리고 호숫가에 돌맹이 뭉치를 냅다 던진다.
그러면 돌맹이가 물에 퐁당 빠지는 순간 그 주위로 파장이 일어 물을 매질로 하여 부표에게로 전파될 것이다.
그러면 부표는 그 물에 움직임에 따라 아래위로 진동할 것이다.
부표는 1개가 아니다.
수많은 부표가 동시에 출렁거릴 것이다.
물의 출렁거림이 약할 때에는 부표의 움직임이 전혀 없다라고 가정한다면,
이건 마치 무의식의 생각 즉 직관과 비슷할 것이다.
앞서 1 → 2 → 3 → 4 에서
숫자 1개는 내부적으로는 방사형으로 자극된다고 했는데
이 부분 역시 무의식의 생각, 즉 직관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돌맹이 1 한 웅큼을 던지고.... 2 다시 한 웅큼을 던지고.... 3 다시 한 웅큼을 던 지고...
이럴 때 숫자 1개는 내부적으로는 방사적 직관이지만, 외부적으로는 절차적 이성이다.
돌아와서..
무의식은 방사형 사고, 다차원 사고가 가능하다. 많은 line과 많은 branch가 존재한다.
의식은 절차적 사고, 즉 한 줄 그리기를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사형 사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어떨까?
한 줄 그리기로는 생각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의식의 이성적 사고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반드시 직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타 글에서 이야기 한 것들이 중요하다.
책을 읽을 때에.... 언어로 읽은 내용을 형상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감각적인 것은 무의식이 쉽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생각을 한 번에 몰아서 해결이 안되더라도
일단 하는데까지 했다가 잠시 묵혀두면...
다시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의식이 생각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밤새 풀리지 않던 문제가 잠을 자고 나니 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잠자는 동안 무의식이 방사형으로 사고한 것이다.
이전에 링크해서 포스트한 찌르레기 실험이 있다.
비슷한 종류의 정보를 입력하면 간섭 현상이 일어난다.
그 결과 잘 기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기억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잠시 뿌연 상태로 있는 것 뿐이다.
잠을 자고 나면?
마치 흙탕물에 흙이 가라앉아 맑은 물처럼 되듯 간섭 효과가 사라지고 기억이 난다.
(아마 기억되지 않았다면 뒤늦은 정보가 앞선 정보를 지운 것이 아니라 아예 뒤늦은 정보의 입력자체가 안된
것일 것이다. 이를테면 습관화가 일어나면 관찰되지 않는다.)
아마 그 이유는 무의식이 수면 중에 그 정보들을 정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정리작업은 한 줄 그리기로 할 수 없고 방사형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읽기나 듣기를 통해 정보나 생각을 받아들일 때에는 비록 읽기나 듣기가 한 줄
그리기이지만,
그 정보나 생각 자체는 나뭇가지 형태임을 염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꾸로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글을 통해 정보나 생각을 전달할 때에는
그 정보나 생각 자체는 나뭇가지이지만, 그걸 한 줄 그리기로 엮어야 함을 염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관련된 이야기를 좀 덧붙이자면,
세상은 동시다발적인 나뭇가지 형태이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사슬 형태이다.
한 사람의 눈에는 하나의 화면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집단, 즉 사회는 동시다발적이다.
100명으로 이뤄진 기업이라면, 그 속에 두뇌는 100개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세포 또한 동시다발적이다.
각 세포마다 독립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직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뉴런 즉 신경세포 역시 세포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장기 또한 동시다발적이다.
심장이 멈춘 상태에서만 뇌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뇌가 멈춘 상태에서만 위가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장기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인다.
비록 책에서 순차적인 언어로 배웠어도 그걸 동시다발적으로 형상화해야 한다.
그 지식의 본질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기계가 하는 일이 늘어남에 따라 기계가 할 수 없는
창조, 통찰 등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어떤 순간에만 어쩌다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매일 매순간 일어나고 있다.
무의식은 항상 생각하고 있기 떄문이다.
직관은 항상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걸 흔히 말하는 통찰이라고 말하려면 다음 두 관문을 넘어야하는 것 뿐이다.
하나는
마치 로또 추첨하듯
직관 즉 무의식의 생각이 의식에게 보여져야 하며,
둘은
그것이 가치있다고 평가되어만 한다.
나아가 남들도 그걸 통찰이라고 인정하려면,
말, 글, 그림, 음악 등의 표현물을 통해 표현이 가능해야 한다는
관문을 추가로 통과해야 하는 것 뿐이다.
직관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각성 중에는 이성과 직관이 병행되며,
수면 중에는 이성이 활동을 멈추고 직관만이 활동한다.
추가로... 통찰에 대한 필자의 가설을 덧붙여보겠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기타 줄을 튕기면 소리가 크게 났다가 점점 조그맣게 된다.
사람의 두뇌도 그러하다.
그래서 최근에 자극한 것은 커다랗게 자극된 지 오래된 것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걸 활성화라고 한다.
깊은 몰입은 한가지에 관해서만 계속하여 활성화시킬 때에 일어난다.
그 결과 그와 관련된 부분만 뜨겁게 달아오르는데 그 때 의식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활동을 좀 늦추고
슬로우 싱킹을 하면 그 대신 주의력을 무의식이 잔뜩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와 관련된 것들만 활성화되어 뜨겁게 달아올랐고
무의식에 대한 주의력 배분 정도(비유적으로는 컴퓨터 메모리)가 많아지면
무의식이 그 정보들을 가지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다차원적이고 직렬/병렬 혼합된 생각이다.
양자컴퓨터적인 생각이다.
그 생각 끝에 유의미한 생각 결과를 얻어내고 그리고 그 결과를 의식에게 내보이면,
이 순간 몰입의 저자 황농문 교수님이 말하는 깊은 몰입에 의한 통찰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여 숙성에 의한 통찰이 있다.
이건 관찰을 하거나 생각을 하고 놔두면, 그 관찰 및 생각 결과물들을 가지고 무의식이 휴식 중이나 수면
중에 생각 즉 직관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의식에게 보여주면 숙성에 의한 통찰이 떠오른다.
만약 그 통찰을 위한 부품이 1개가 모자르는 식이었다면...
문득 어떤 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순간에 그 자극이 나머지 부품이 되어 순간 번쩍 할 수 있다.
이것이 순간적인 통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고도화된 물리 이론 중 하나는 상대성 이론일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언어적 사고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직관적 사고로 통찰해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직관적 사고의 천재이다.
아마 앞으로 그와 같은 혹은 그걸 뛰어넘는 진리를 알아내려면, 직관적 사고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인류가 레벨1에서 레벨2로 올라가도록 만든 것이 언어이지만,
언어적 사고에만 갇히면 레벨3으로는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직관과 이성은 함께 조화를 이뤄야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vinci22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