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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99회.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2001.01.20.)
99회 :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방송일: 20010120 조회수 : 5857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99회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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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둘 무덤 F.S 5 경기도 파주의 해주 최씨 선산-.
# 홍랑 무덤 21 이곳에는 뜻밖에도,
조선 선조 시대의 기생 홍랑이 묻혀있다.
(* PAUSE/ 최경창 무덤 FIX되면-)
바로 위편에 보이는 또하나의 무덤은,
한 사대부와 그 부인의 합장묘다.
# 홍랑비석 15 기생 홍랑이, 명문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묻혀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함께 자리잡고있는 이 두 개의 무덤에는,
어떤 사연이 얽혀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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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 무덤 배경 - )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묻혀있는 기생 홍랑-. 뭔가 부자연스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 PAUSE)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조선 시대,
기생은 노비나 다름없는 천민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기생 홍랑은 어떻게, 명문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그것도 부부 합장묘의
바로 아래 묻힐 수 있었던 걸까요?
(* 바뀐 배경/ MC, 걸어들어오면서- )
그 사연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된 것은,
무덤 근처 비석에 새겨져있는 한편의 시좁니다.
(* 비석 솟아나오고- / 비석 보면서 읊어준다 )
"묏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듯한-, 귀에 익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임에게 보내는 간곡한 사모의 정을 버드나무 가지에 빌어 표현한 이 시조는,
얼마 전까지 고등학교 국어 고문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죠.
(* 무덤 쪽 가리키면서-)
바로 저 무덤의 주인인 홍랑이 지었다고 알려져있는데요.
과연 홍랑은 왜-, 누구를 위해서 이 시를 썼던 것일까요?
오늘 <역사스페셜> 은 엄격한 유교적 질서와 내외법이 존재했던
400년 전의 조선 시대-. 제도와 신분의 한계 속에서
한 여인이 겪어야 했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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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 연시에 담긴 사연을 찾다
# 학고재 찾아가는 PD 7 (* 흘리고-)
# 책 펼치고... 15 지난해 11월, 조선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연시로 꼽히는 홍랑의 시 원본이 공개됐다.
# 홍랑시 펼치는... 18 (* 현장음 잠깐 듣다가-)
홍랑의 시가 실려있는 이 서첩은,
근대 한국 최고의 서화 감식안으로 꼽히는
위창 오세창의 집안에 내려오던 것이다.
INT 학고재 사장 ------------------------------------
"공식적으로는 처음이었죠. 이전에 가람 이병기 선생이 위창 오세창
선생... 전문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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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람 발문 (T 13) 15 이 서첩에는, 1936년 가람 이병기가 썼다는
발문도 수록돼 있다.
(* 이하 현장음/ "을해년 겨울에 가람이 썼다는
말씀... 이 도장은 이병기 인이라는 도장입니다.")
# 그들의 친필 T.S 20 여기서 가람은, 홍랑의 시가 친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한편, 이 시의 내용과 표현이
"한 보배"와 같다고 평가했다.
# 서가 PAN (국문학 전사) 24 이같은 내용은 1956년 편찬된 가람의 저서
"국문학 전사"에도 그대로 담겨졌다.
이를 계기로, 홍랑의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렸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고하 문예관 14 (* 잠깐 흘리고-)
그렇다면 가람 이병기를 비롯한 국문학자들이
홍랑의 시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INT 최승범 교수 -------------------------------------
"묏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도치법을 쓴거죠.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이별의 시들이 많죠. 하지만 이만큼
멋지고 낭만적인 작품은 흔치않다는 생각입니다. 이별이라는게
슬프고 애틋하고 한데, 눈물짜고 이러는게 아니고 묏버들 한가지를
꺾고 또 이 노래 한수를 곁들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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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해어화사> 5 (* 인터뷰 받듯이- )
홍랑이 그처럼 사랑했던 사람-. 그는 과연
누구일까?
# 책 내용 T.D 19 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조선 해어화사"에는, 홍랑의 사랑에 관한
짧은 일화가 소개돼 있다. (* PAUSE)
조선 선조 때의 시인, 고죽 최경창-.
바로 그가 홍랑의 연인이다.
#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14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가 확실치않은
홍랑의 시가 조선 중기 것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최경창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INT 이상보 교수 -------------------------------------
"홍랑의 묏버들 가려꺾어 시조를 아주 높이 평가한 분들중에서는
돌아가신 은사 무애 양주동 선생을 꼽을수 있는데... 한사나이로서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의 애틋한 감정을 받았으니 그따위 벼슬이
무슨 상관 있겠느냐. 벼슬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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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방곡 등 시 내용 DISS. 12 이번에 공개된 서첩에는, 그동안 알려져있던
홍랑의 시뿐 아니라, 최경창이 홍랑과의 사랑을
통해 남겼다는 세편의 시도 함께 수록돼 있다.
# 又에서 서문으로 PAN 16 게다가 고죽은 이 서첩의 말미에, 홍랑과
나눴던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직접 기록해
놓았다. 두 사람의 사랑을 그 자신의 손으로,
분명하게 확인해준 것이다.
# 책 세워놓고 홍랑 시로 Z.I 16 400년 전, 간곡한 사모의 마음을 담아
연인에게 보냈던 홍랑의 시-. 그 몇줄의
문장 속에 담겨있는 애틋한 사연이,
지금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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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 최경창 문집, 병풍 모양으로 만들어진 배경/ 홍랑 시 앞에서 멘트 )
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서첩의 주요 부분들입니다.
내용을 좀 볼까요?
(* <번방곡> 앞으로 이동해서 멘트)
홍랑의 시조 옆에 보이는 이것은, 고죽 최경창이 홍랑의 시를 받아본 후에
직접 한문으로 옮겨놓은 "번방곡"입니다.
홍랑에 대한 고죽의 각별한 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 MC, <송별>앞으로 이동해서 멘트)
그리고 바로 여기-, 홍랑의 시에 화답해서 최경창이 보냈다는 두편의 시가
있습니다. <송별>이란 제목인데... 한번 읽어볼까요?
(* <송별> 앞으로 돌출 / 보면서 멘트 )
"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보내며 자신으로 여겨달라 했던 홍랑의 시에,
고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있죠.
(* <송별> 들어가고/ MC, "서문"앞으로 이동하면서- )
이처럼 이번에 공개된 이 서첩에는 고죽 최경창과 기생 홍랑,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사랑과 이별의 정한이 깊게 배어있는데...
그가운데서도 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 최경창의 기록, 앞으로 돌출 )
홍랑과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최경창 자신이 직접 서문 형식으로 써놓은 것인데요. 바로 이 기록을 따라
되짚어본 두 사람의 만남과, 첫번째 이별까지의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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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 홍랑과 최경창의 만남, 그리고 첫 번째 이별
# 영암 마을 전경 12 (* 잠깐 흘리고-)
전라남도 영암군-. 이곳에서 고죽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 후손 집 F.S 16 당대 이름난 학자였던 박순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일찍부터 탁월한 문장을 보였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INT 최재형(고죽의 15대손) --------------------------
"고죽께서 여기 살고 계실 때 왜란이 나니까 배를 타고 서호강
으로 갔는데... 고죽이 갖고 있던 옥피리를 불어서 왜병이 그
소리를 듣고 저 배안에는~ 귀신신자 사람인자 신인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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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연/ 글쓰는 모습 14 이런 최경창이 과거에 합격한 것은 1568년.
홍랑을 만나 사랑한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났을 때였다.
# CG/ "癸酉秋余以北道評事赴幕" 16 최경창이 남긴 기록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1573년 가을에,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부임했다는 내용이다.
# 지도 CG 14 (* 한양 CG 뜨면-)
그가 부임한 곳은 함경북도 경성-. 서울에서
천리길이 훨씬 넘는 변방이었다.
# 경성 자료 화면 30 고려시대부터 여진족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던 경성은 국방의 요지였고,
옛부터 많은 군대를 두고 있었다. 최경창은
이곳에 북도평사, 다시 말해 병마 절도사의
보좌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 PAUSE 짧게 주고-)
당시 서른 넷의 최경창에겐 이미 처자가
있었지만, 경성에 부임할 때는 혼자였다.
# 규장각/ 조광국 13 조선 시대의 기녀와 양반의 관계를 연구해온
조광국 박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INT 조광국 선생님 ----------------------------------
"변방에 가족을 데려가지않고 혼자 가는 이유는, 변방은 군사지역
입니다.그래서 군사활동에 전념할수 있도록 가족을 동반하지않았습
니다.그대신에 변방 사졸들에게 배치되는 기녀가 있었는데
그 기녀들을 가리켜서 방직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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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전 <점고> 15 판소리 <춘향가>에는, 변사또가 남원에 부임
하자마자, 기생들을 모두 집합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점고"라는 풍습이다.
# 자막 나오기 시작 21 (* "우선옥이 춘홍이~"까지만 듣고-)
당시의 기생들은 모두 "관물"이라고 해서,
관아에 속해있는 노비나 다름없었다.
(* 이하 현장음/ "~ 예 등대허였소")
# "예 등대허였소" 하면 바로- 15 "점고"는 이같은 기생들이 모두 제 구실을
하고 있는지 철저하게 관리하기위한
제도였는데, 이 자리에는 기생들은 물론
그 지방의 관리들도 모두 참석하는게
관례였다.
INT 안길정 선생님 ----------------------------------
"관아에서 일하는 모든 기생들을 불러다가 일제히 점고하는 그 자리
에서 아마 만날수있었고... 관리들이 일제히 나와서 소집 점검을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기생과 관리가 자연스럽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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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시 교하면 13 최경창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에는,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또다른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INT 최재후 (고죽의 15세손) -------------------------
"오랑캐를 지키러 나가셨다가, 거기원님이 홍랑을 데리고 같이
약주를 대접하는데... 그때 주거니 받거니 시를 읊는데, 홍랑이
우리 할아버지 시를 많이 읊더래요. 그래서 누구 시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니까 고죽 선생의 시를 좋아한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웃으면서 내가 경창이라고, 내가 고죽이라고.. 하셨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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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죽집> 21 사실 고죽 최경창은 당대의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 등과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문장으로
~ 고죽집사 CG 불렸다.
특히 당시에 뛰어났는데, 율곡 이이는
그의 시를 가리켜 "청신준일"하다고까지
평했을 정도였다.
# 밤/ 집 외경 14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 그들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고죽은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 기록 CG 18 홍랑이 자신의 처소인 경성 병영에 따라와
함께 지냈다는 내용인데... 관기의 신분이었던
홍랑이 최경창과 함께 사는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 군부대 F.S 9 이에 관해서 실록에는, 조선시대 변방에서의
기녀 풍속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세종 18년의 내용이다.
# CG/ <세종실록> 17 "군사들이 가정을 멀리 떠나서 추위와 더위를
두번씩이나 지나므로 일상의 사소한 일도
어려울 것이니, 기녀를 두는게 합당하다"-.
당시 변방의 부대에 기녀가 사는게
일반적이었음을 명시한 것이다.
INT 안길정 선생님 ---------------------------------
"기생들이 제일 많았던 곳이 군사기지. 두 번째가 관아였습니다.
술과 노래를 제일 많이 제공하고요."
INT 조광국 선생님 ---------------------------------
"방직기가 했던 일은 바느질, 빨래, 이런 군대들의 수발을 맡아
주었고 심지어는 잠자리까지... 변방 군대와 방직기는 현지에
있는 처라고 할까요.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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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 25 변방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던 최경창에게 있어,
홍랑은 어떤 존재였을까-.
비록 기생 신분이지만, 문학적인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던 홍랑이었다.
두 사람이 단순한 연인 사이를 넘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시와 풍류를 나눌수
있는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INT 조광국 선생님 ---------------------------------
"양반은 기녀들이 천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재색을 겸비
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했고... 시를 나눴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인 교감도 할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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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 서있는.. (이별 이미지) 13 그러나 지방 관리와 기생의 사랑에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다. 관리의 임기가
끝나면, 사랑도 지속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 CG/ 최경창 기록 21 경성에서의 임기를 마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서, 두 사람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 멘트 이어집니다)
고죽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홍랑은
경성에서부터 쌍성까지 며칠 길을 마다않고
따라온다. 그러나 이별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INT 조광국 선생님 ----------------------------------
"조선시대 기생은 노비였기 때문에 해당지역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갈수 없었습니다. 소유권이 해당지역 관청에 있었죠...
기생과 관리의 사랑은 많았지만, 지방을 벗어나면 사랑도 계속될
수 없는게 현실이었습니다. 최경창의 경우에도, 최경창이 북도평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홍랑을 데러갈수없었던 것도 그 이유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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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G/ 최경창 기록 20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계속해서 적고 있다.
(* PAUSE/ 한글 자막 뜨기 시작하면-)
"나와 이별한 뒤, 홍랑이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지어 보내왔다."
#자료/ 고개 42 이별의 슬픔속에 혼자 경성으로 돌아가면서,
홍랑은 마음이나마 고죽곁에 머물기를 원했을
것이다. (* PAUSE )
서울로 떠나간 고죽에게 적어보낸 시 한 수-.
여기에 홍랑이 담은 것은, 그렇게 간절하고도
지극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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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 관아의 동헌 모습 배경/ 계단 위쯤에 서서- )
조선시대에 기생은 공물, 혹은 관물이라고 불렸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의 물건... 관아에 속해있는 존재란 뜻이죠.
이것을 증명해주는 사료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생들의 명부인, 기안입니다.
(* 기안 나온다 )
이것은 조선 후기, 전라 감영의 기안인데요.
백로향 43세, 초산옥 삼십육세, 초궁월, 월궁아... 이렇게 40대에서부터
10대까지, 관아에서 관리하는 기생들의 이름과 나이가 세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 기안 들어가고 MC, 계단 내려오면서 멘트 시작)
이들 기생은 모두 이곳, 관아에 속해 있으면서, 연회는 물론 각종 접대에
동원돼야하는-, 일종의 관노비였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삶은 그 지방의 관리들과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였죠.
(* 한번 끊어가야 될 듯- )
조선시대 여염집 여성들에게는 "일부종사"가 절대적인 도덕관념이었지만,
기생만은 예외였고, 누구도 기생에게 의리나 절개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부임해왔던 관리가 머물다 떠나가면 또다른 사람이 찾아들기 마련이었고,
그러면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게 기생들의 보편적인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성에서 함께 겨울을 보낸 최경창이 서울로 떠난 뒤에
홀로 남겨진 홍랑-. 그녀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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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 사랑은 파직을 불렀다
# 궁궐 F.S 12 선조 9년인 1576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 CG/ 선조 실록 20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않고, 북방의 관비를 불시에
데리고와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일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 양반 집 외경 18 이때는 최경창이 경성을 떠나온지 벌써
2년이나 지났을 무렵이다. 그런데 이미 이별한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이 상소의 내용은,
~ 기록 화면까지 멘트 겹침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기록 CG - 글씨 나올때 21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을해년에 내가 병이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홍랑이 이 소식을 듣고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
# 글쓰는 모습 24 단지 병석에 누운 고죽을 걱정해 찾아왔던
홍랑의 행동이, 파직으로까지 비화된 이유-.
그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있었다.
최경창은 자신의 기록에서, "그때 양계의 금이
있었고 국상때였다"고 적고 있다.
(* PAUSE)
# "양계의 금" 기록 30 양계의 금-,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한다.
(* PAUSE)
~ 지도까지 멘트 당시, 양계는 중국과 접경한 변방이었고,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번성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양계인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 다른 지방
사람과 결혼하는 것조차 금할 정도였다.
# CG / 國恤 16 (* "국휼" 글씨 나오면-)
더구나 당시는, 명종비 인순왕후가 죽은지
1년이 채 안됐을 때였고,
사회의 분위기도 평소와는 달랐다.
INT 조광국 선생님 ----------------------------------
"허균의 경우에는 국상 기간에 기녀와 관계해서, 파직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강상을 어그러지게하는 일... 삼강오륜을 깨뜨
리는 일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홍랑의 경우도 마침 국상기간이었습
니다... 심지어 동인과 서인의 당쟁기간이었기 때문에 정적의
좋은 표적거리가 됐던 것입니다."
-----------------------------------------------------
# 양반 집 외경 11 이같은 상황 속에서, 최경창을 찾아 서울로 온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고까지 비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 <북새곡> 22 조선 시대 문헌에는,
"관리들이 아름다운 기녀를 모두 빼가서
관아에는 못생긴 기녀만 남았다" 는 내용이
여러 차례 나온다. 당시에 성행했던
"대비정속"이란 풍습을 풍자한 것이다.
# 실록 내용 CG 25 관아의 사유물인 기녀를 빼내려면,
다른 여자를 대신 채워놓아야했다.
이것이 바로 "대비정속"인데, 조선 시대에는
이와 관련한 문제가 끊이질 않았다.
(* PAUSE) 그러나 실제로, 기녀의
"대비정속"에 관련된 양반이 벌을 받는
경우는, 많지않았다.
INT 조광국 선생님 ----------------------------------
"기녀의 경우에 대비정속은 불법이었습니다. 만약 허용했다면 양반
들이 너도나도 할것없이 빼돌렸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편법
을 동원해서 빼돌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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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쟁 이미지 재연 14 "대비정속"은 법으로 금지돼있었지만,
실제로는 흔한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
벌을 받을 수도, 아닐수도 있었다.
(* PAUSE) 문제는 당쟁이었다.
# 문집/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24 최경창은 당쟁의 중심인물은 아니었지만,
당대 서인의 막후 실력자였던 구봉 송익필과
교분이 두터웠다.
때문에 동인과 서인의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자유로울수 없었고, 홍랑의
일은 좋은 표적이 됐던 것이다.
# CG / <선조 실록> 19 선조실록은 최경창의 파직을 이렇게 적고있다.
"최경창은 원래 당인이 아니었으나
조정의 요직에 있는 관리들 가운데 선배들이
많아, 그에 대한 논란이 특히 심했던 것이다."
INT 최승범 교수님 ----------------------------------
"말하자면 문관으로서 크게 현달할 수 있는 분인데, 함경도쪽으로
두 번이나 가셨죠. 불행했던 분이 아니냐... 당신이 가진걸
제대로 펼칠수 없었던 불행했던 분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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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는 모습 16 (* 잠깐 흘리고-)
결국 최경창은 파직당했고, 홍랑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고개 16 경성에서 이별한 뒤 2년만에, 병석에 누운
최경창을 찾아왔던 홍랑-. 그 짧은 재회는
최경창의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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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 기본 세트 + 최경창 실루엣 배경 )
고죽 최경창-. 그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문장가로 꼽혔지만,
그 벼슬길은 이처럼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숙종 대에 이르러
이조판서로 추서됨으로써 후대의 인정을 받습니다.
(* <고죽집 >놓인 테이블 솟아나오고/ MC 집어들면서 멘트 )
이것은 최경창의 사후에 출간된 <고죽집>입니다.
우암 송시열이 서문을 썼군요.
"내가 젊었을 때 고죽의 시사를 듣고보니, 과연 근세에 뛰어난 가락이었다" 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서문에서 우암은 고죽의 시뿐 아니라 그 사람됨까지도 크게 평가하면서,
율곡 이이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한번 읽어볼까요?
(* MC 멘트 따라서 CG 나온다 / 율곡 부분 모필)
"율곡상이빙상소이칭공 개기청고지절인유소불심"
율곡선생이 말하기를, 고죽은 그 성품이 깨끗하고 하는 일마다 선이 되는
사람이니, 그 청고한 절조는 사람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 송시열 부분 모필)
또 송시열 자신은 "이인암시이내반이 시이암인"
"사람 때문에 시를 가린다더니, 도리어 시 때문에 사람이 가리워졌구나" 라는
말로 고죽의 문장과 성품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 모필 없어지고- )
이렇게 당대의 학자, 문인들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고고한 성품을 지녔고,
또 파직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여인을 사랑한 고죽 최경창.
그리고 파직과 이별,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욱 꿋꿋했던 홍랑의 사랑-. 그 계속되는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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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 세 번째 이별 "죽음, 그 후의 이야기"
# 영암 사당 앞 F.S 4 (* 흘리고-)
# 동계사/ 절하는 모습 23 홍랑의 일로 파직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았고, 선조 9년인 1583년
마흔 다섯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명문가에 태어나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가
로서는, 쓸쓸하기 이를데없는 죽음이었다.
# 고죽 시비 (홍랑시 & 번방곡) 13 그것은,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역시,
이승에선 계속될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홍랑은, 고죽과의 이 마지막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 블랙 PAN <회은집> 10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은 문집, <회은집>
에서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의 행동을 이렇게
적고있다.
# CG/ 회은집의 내용 14 "고죽몰후 자훼기용수묘" 즉, 고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INT 최재후 (최경창 15세손) --------------------------
"할아버지들한테 전해오는 얘기로는... 3년이란 세월을 움막짓고
3년이란 세월을 움막을 짓고 세수도 안하고 머리도 안빗고...
그 마음이 얼마나.. 자손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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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무덤 DISS. 18 (* 음악)
# <춘향전> 민화 20 <춘향전>에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춘향이
옥에 갇히는 대목이 나온다. 노류장화와 같이
누구나 꺾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기생이,
주위의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수절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 <회은집> 23 이런 상황속에서 고죽의 무덤을 지키기위해
홍랑은,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냄으로써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다.
(* PAUSE) 홍랑이 신분의 한계 속에서도
절개를 지킬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INT 조광국 선생님 -----------------------------------
"조선시대에는 일부종사가 여성들의 큰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녀가 남편을 두는 것은 금지였고, 수절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강계지방 무운은 수절하기위해서 허벅지에
쑥뜸질을 해서.. 얼굴을 훼손하면서까지 수절했다.. 다른 남자
의 접근을 막았던 경우는 독특한 경우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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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은집> 39 <회은집>은 계속해서 이런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 CG 나오면-)
"난리가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시를 지고
피난하여, 병화를 면하게 했다."
(* PAUSE)
3년상을 마치고도 무덤을 지키던 홍랑은
홍랑은, 전쟁이 일어나자 어쩔수없이
피난길에 오른다. 고죽이 남긴 시들을
모두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 <고죽집> 12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이었던 고죽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게된 것은, 이같은 홍랑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INT 최재형 (고죽의 15세손) -------------------------
"이 시집이 되기까지 홍랑의 공이 아주 컸습니다. 홍랑이 수집한
시가 대부분 여기 실려있고, 그래서 이 고죽집 만들 때 공이 컸던
석자영 그 선조께서 시를 모으면서, 홍랑이 모은게 거의 대부분이
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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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PAN 무덤 21 (* 조금 흘리고-)
홍랑이 죽고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준다.
# 후손들 절한다 13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대를 이어 전해왔고,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예를 갖춰서 홍랑의 묘를
돌보고 있다.
INT 최재후 (고죽의 15세손) -------------------------
"얼마나 갸륵하십니까. 할아버지를 그렇게 사모하시고 그리워하고..
옛날에 영태리에 있을 때는 고죽할아버지 상에 잔만 갈아썼어요.
그런데 여기로 모시면서 상도 하나 장만하자... 그래서 우리가
우리가 성묘할 때 꼭 여기와서 음복을 합니다. 여러 일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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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랑 무덤 18 기생 홍랑-. 그녀가 신분의 차이와
죽음의 이별을 극복하고 이처럼 고죽의 곁에
머물게된 것은, 후세의 마음까지도 감동시킨
그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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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 화랑 분위기 배경/ MC 걸어가면서- )
기생에 대해서, 우리가 흔하게 갖고 있는 이미지는 어떤 걸까요? (* 멈추고-)
이곳에는, 조선 시대 기생을 소재로 그린 풍속화들이 몇점 걸려있는데요.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겠습니다.
(* 이동/ 신윤복 그림 돌출)
이것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 화가인 혜원 신윤복의 그림입니다.
당시에 흔하게 벌어졌던 술자리의 풍경인데... 한쪽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앳띤 모습의 기생을, 양반이 품에 안고 있습니다.
사대부의 노리개처럼 여겨졌던 기생의 이미지가 드러나 있죠.
(* 이동/ <봄나들이> 돌출)
이번 그림은 혜원의 또다른 풍속화, "봄나들이" 입니다.
양반가 젊은이들이 기생을 말에 태우고, 호위하듯 걸어가고 있군요.
당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향락적인 생활과, 그 한 축을 이루고 있던
기생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 이동/ <기녀> 돌출)
이 그림의 기생들은, 몸단장에 열중하고 있죠. 아름답지만, 동시에
그만큼 사치스런 존재였던 기생의 일면을 포착한 듯 합니다.
(* 그림 모두 들어가고- )
규방에 숨어 외출조차 자유롭지못했던 여염집 여인들과 달리, 비교적 자유롭고
미색을 갖췄기 때문에, 여인을 소재로 한 풍속화에서 주로 모델이 됐던 기생-.
하지만, 그림속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홍랑의 삶과는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당대 문장가였던 최경창의 사랑을 받을 만큼 시적 재능이 풍부했고,
사랑을 지키기위해 자신의 얼굴은 물론 일생을 희생함으로써 어느 열녀 못지
않은 절개를 보여준 기생 홍랑-. 그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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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 홍랑은 누구인가? & 조선시대 기생의 생활
# 기생관련 서적들 12 조선시대 기생의 풍속이나 그 일화를 다룬
책에는,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가
어김없이 실려있다.
# "홍원기" TS 13 그러나 이 책들 어디서도, 홍랑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눈에 띄지않는다. 그저 홍원
태생 기생이란 한 마디뿐이다.
# <회은집> 18 홍랑과 최경창의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는 <회은집>-. 여기서도 홍랑에 대한
설명은, "홍원기 홍랑은 절개를 사랑하고
자색이 아름다웠다"는 한 구절에 불과하다.
# 서고 PAN 안길정 14 사실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기생 개인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 생활이나 풍속에 관한 자료도, 극히 드물다.
INT 안길정 선생님 ----------------------------------
"기생들하고 사랑을 나누는 얘기는 많지만, 기생들의 일생이 어땠
는가... 어떻게 지내고 교육받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알려진게 거의 없습니다. 관아내에 중요한 시설인 교방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도 상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그것은 유교 윤리와 사대부들의 윤리 의식 때문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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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장각 22 현존하는 조선시대 문헌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는 규장각-. 이곳에는, 조선시대 노비들의
명부인 "노비안"이 일부 남아있다.
이가운데 전라 감영의 노비안 속에서는,
기녀들의 명부인 "기안"이 일부 포함돼있다.
# 기안/ 이름으로 Z.I 34 관아에 속한 신분이던 기생은 누구나,
이 기안에 의해 철저한 관리를 받았다.
함경도 지방의 관기였던 홍랑 역시, 기안에
이름이 올라있을 것이다. (* PAUSE)
(* 멘트 이어집니다)
그러나 현재 규장각에 남아있는 기안은, 조선
후기- 그것도 몇몇 지방의 것에 불과하다.
홍랑의 이름은 결국, 찾을 수 없었다.
# 이미지 재연/ 홍랑, 절하는... 15 그렇다면 최경창과 만났을 당시, 홍랑의
나이는 몇이었을까? 이를 짐작해보기
위해서는, 당시 기생들의 일반적인 나이를
알 필요가 있다.
# 기안 16 이것은 전라 감영 기안의 일부다. 12, 3세 정도
의 어린 기녀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이들을
가리켜 "동기"라고 불렀다.
# <평양 감사 환영도> 18 그러나 기안에 올랐다고 해서, 바로 기녀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우선 관아에서
각종 잔신부름을 돕는 한편, 기생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던 교방에서 각종 소양을 배웠다.
INT 안길정 선생님 ----------------------------------
"사진이나 과거의 그림들을 보면 아주 어렸을 때, 10살 채
넘지않았을 때부터 관아에 들어가 소리도 배우고... 접대하는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정황증거들이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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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천한유도 20 기녀로서 본격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것은,
보통 열여섯살 정도-. 이때부터는 관아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나 연회에 불려나가야했고,
때로는 양반의 수청도 들어야했다.
INT 조광국 선생님 ----------------------------------
"30세가 넘으면 기녀에서 물러나는데 퇴기라고 합니다. 50이
되어서 기역에서 면제됩니다. 소시적에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데 20대 이전의 나이... 16세 근방의 나이로 추정할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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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랑 도는.. 15 비록 많지않은 나이였지만, 당대의 문장가였던
최경창과 시를 나눌 수 있었던 홍랑-. 그녀가
이같은 교양을 갖출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춤추는 기생들 30 조선시대에 기생은 "여악"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은 기생의 본래 역할에서 나온 말인데,
궁중이나 관아의 연회에서 흥을 돋구는 사람을
뜻한다.
때문에 서울의 기생들은 "장악원"에서,
그리고 지방 관아의 기생들은 교방을 통해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배웠다.
주로 양반 계층과 어울려야했던만큼, 문장과
서화를 익히는 것도 중요했다.
INT 이배용 교수님 ----------------------------------
"기녀들의 교육은 엄격해서 해마다 2월에서 4월... 격일로
진행하는데 가무나 당비파는 필수였고,가야금이라든가 해금이라든가
등 전공악기도 한가지 이상 습득하게해서 전문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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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속도 22 이같은 소양을 바탕으로 사대부와 어울렸던
기생들은,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겼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조선시대 시조 3천수
가운데 여성이 지은것은 90여편-. 그가운데
대부분은 기생의 작품이다.
INT 문정희 선생님 ---------------------------------
"조선남성의 시가는 임금을 사랑하는 연군가나 백성을 가르치겠다고
읊조리는 훈민가 일색이에요... 기생의 시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
사랑스럽고 비극적...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구요. 진정한 소양을
갖추고 있어 격조도 있습니다. 아주 탁월한 문학성을 갖는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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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창 무덤 30 당대 최고의 풍운아였던 허균이 부안 기생
매창을 사랑한 것이나, 개성 명기 황진이가
수많은 학자 문인들과 교류했던 것은
기생들의 문학적 소양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준다.
양반가의 남자만이 유일한 문학계층이었던
조선시대에, 기생들은 웬만한 시인가객
못지않은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것이다.
INT 이배용 교수님 ----------------------------------
"관동지방의 기녀들은 송강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을 잘 불렀고, 함흥
지역 기녀들은 용비어천가를 잘 읊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재능
있는 기녀들... 오늘까지 전승돼왔음이 많았을 볼 때 그들의
예술보존자로서의 역할도 인정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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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생 풍속도 28 비록 천민 신분이지만 재색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던 조선시대 기생-. 그들은 사대부 문화의
한 축을 이루면서 양반과 풍류를 나눴고,
이들과의 사랑을 통해 수많은 애정시가를
남기기도 했다.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솔직하게 읊은 기생의
시는, 우리 여류 문학사에 중요한 의미로
남아있다.
# 양반 아저씨 1S 14 사대부와 당당하게 풍류를 나누고,
자유롭게 사랑했던 조선 시대의 기생-.
그래서 선비의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라
불려왔다.
# DISS./ 글쓰는 홍랑 8 최경창의 연인, 홍랑 역시
바로 그런 해어화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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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 사대부의 정원 이미지 / 마루쯤에 걸터 앉아서 멘트 )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 이같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당나라의 현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 일어나서 걸으면서 -)
천하제일의 미색으로 손꼽히는 양귀비와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오른쪽에는 백련화, 즉 하얀 연꽃이요. 왼쪽에는 바로 말을 알아듣는 꽃,
해어화로구나."라고 양귀비를 가리켜 읊었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것입니다.
선비의 말을 알아듣는 꽃, 그래서 꽃중의 꽃으로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생,
해어화-.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홍랑의 삶은 보여주고있습니다.
죽은 고죽을 위해 무덤을 지키고, 일생을 수절한 홍랑-. 그녀가
해주 최씨 집안에 받아들여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보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홍랑의 사랑은 이것으로 끝을 맺고 말았을까요?
우리는 홍랑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그녀가 고죽과의 사랑을 통해 세상에 남긴
또하나의 흔적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할수 있었습니다.
바로 두 사람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만약 사실이라면, 그는 대체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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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 홍랑의 후손을 찾다
# <회은집> 9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 이야기를 비교적
소상하게 적고있는 <회은집>.
# 기록내용으로 Z.I 13 그가운데 취재팀의 관심을 끈 것은 마지막
대목이다. 홍랑과 최경창이 "유일자", 즉
아들 한명을 두었다는 것이다.
# 도로 트래킹 14 이 기록이 과연 사실일까-. (* PAUSE)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팀은 해주 최씨
대종회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 PD, 들어가고- 12 (* 문앞까지 가면-)
이곳에서는, 지난 90년에 만들었다는
해주 최씨 대동보를 보여주었다.
# 족보 내용 15 여기에는 최경창이, 장남 집과 차남 즙-
두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쪽이 홍랑의 아들인지는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 후손 1S 14 (* 현장음)
족보에도 나타난게 없고... 문헌에도 안나오고...
심증만 있지 확답을 드릴수가 없네요.
# 파주시 후손집 찾아간다 8 그렇다면 최경창의 무덤 근처에 살고있는
후손들은 어떨까-.
# 후손들과 얘기& 족보 8 기대를 가져봤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인터넷 사이트 글올리기 17 그래서 이번에는 인터넷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 PAUSE) 해주 최씨 종친회의 홈페이지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린 것이다.
# 인천가는 고속도로 트래킹 13 며칠만에 최경창의 직계후손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이하 흘리고-)
# 족보 2 (* 흘리고-)
# 후손과 PD 얘기 12 최경창의 13대 종손인 그는, 1867년 고죽의
5세손이 만들어 대물렸다는 족보를 보여
주었다.
# 최경창 이름으로 Z.I 55 (* 현장음)
부친은 수자인자... 따님은 이성록에게 시집을
가시고.. 차남은 즙...
# "즙" 손으로 가리킬 때 이 족보에는 최경창의 둘째 아들, 즙이 "서자"
라고 표시돼 있어, 그가 홍랑의 아들임을
짐작하게 했다.
기후라고... 자손이 없어서 대가 끊겼다고
돼있는데 서자들은 다 그렇게 기록... 그 이후에는
나온게 없어요.
# 1919년 제작 족보 12 또다른 족보에도 최경창의 둘째아들 즙이
서자임을 확인할수 있었지만, 그 후손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 후손과 얘기 8 1961년의 족보에서부터, 비로소 즙의 후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최경창 이름으로 Z.I 14 (* 현장음)
서자란 의식 때문에 족보만드는 일에 관여도 안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 1990년 제작 족보 14 그리고 최승일씨가 마지막으로 꺼내놓은
족보에는, 즙의 후손이 1975년생까지 나타나
있었다.
# 후손과 얘기 6 (* 현장음)
연락은 못하고..? 찾을수도없고? 예
# 족보로 Z.I 14 홍랑의 아들이 즙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 후손이 현재까지 이어지고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에 관해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 눈내리는 무덤 24 (* 흘리고-)
기생 홍랑-. 그녀는 재색을 겸비한 기녀였고
평생동안 한사람에 대한 절개를 잃지않은
열녀이기도 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위해 일생을 걸줄 알았던
여인이었다.
# 시 자막 나오면- 40 (* 잠깐 흘리고-)
짧은 만남과 오랜 헤어짐 속에서도
서로를 저버리지않았던
기생 홍랑과 고죽 최경창-. 그들이 시 속에
담아 보냈던 그 지극한 사랑은
400년의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 이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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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 ST 2의 문집 병풍 배경 )
겉으로 보면, 짧은 시 몇편과 한편의 글이 적혀있을 뿐인 이 낡은 서첩-.
여기에는, 기생 홍랑이 평생을 걸어 지켰던 사랑과 삶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입니다.
쉽게 만나 쉽게 사랑하고 또 그렇게 헤어지는 지금의 세태에서 보면,
홍랑의 사랑이 조금은 답답하고 미련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지독하다"고까지 표현할수 있을 정도로
한 사람만을 가슴에 품었던 기생 홍랑-. 그녀의 한결같은 마음은
고죽의 사랑으로 보답받았음은 물론, 후손들의 존경까지도 가능하게 했죠.
(* 배경 바꿔서 두 사람 무덤 모습 걸린다)
서른 네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물과 6개월 남짓-.
그리고 두 사람이 겪어야했던 것은
끝없는 기다림과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긴 이별과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사랑과 절개를 잃지않았던 기생 홍랑-.
그녀의 영혼은 400년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내내 최경창과 함께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