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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50살에 담약수의 왕양명 격물 비판(答陽明王都憲論格物)
2019년 7월 8일
* 왕양명은 47-50살에 강서성 감주에서 근무가 한가한 틈이 있으면 학생들과 열심히 토론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대학』의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토론하였고 맹자의 양지와 양능을 토론하면서 양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이전에는 격물을 많이 토론하였고 이후에는 양지를 들어 치지를 설명하였고, 50살에 소흥부에 돌아와서는 양지를 더욱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왕양명과 담약수 사이를 오간 사람들이 여럿이 있습니다만, 진광(陳洸, 1478-1534, 字世傑)이 중요한 소통역할을 하였습니다. 왕양명은 일찍이 격물을 주장하면서부터 담약수가 주장한 수처체인천리가 주자학처럼 외부 사물의 천리를 찾는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왕양명이 40대 후반에 격물을 주장하면서도 양지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양명이 격물에 관하여 쓴 서신을 담약수에게 보낸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담약수는 왕양명의 격물에 관하여 옳지 못한 점들을 비판하고 자신의 수처체인천리가 더 타당하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담약수는 서신에서 먼저 왕양명 격물에 관하여 네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동의하지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지적한 내용은 『(고본)대학』의 순서를 해석하는 잘못을 비롯하여 의미 해석의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담약수가 격물에 관하여 주장한 요점은 격물이 “이(理)에 이른다.(至其理)”고 해석하고 타당한 이유를 다섯 가지 들었습니다. 또한 지행(知行)이 병진되어야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담약수는 일찍이 내세운 수처체인천리(隨處體認天理)를 고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담약수는 아직 왕양명의 양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왕양명은 양지가 선천적 양지이며 타고난 마음에 있다고 주장하여 심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담약수가 왕양명의 격물을 비판한 글을 보면, 담약수는 정이천이 말한 “이(理)에 이른다.(至其理)”에 근거하여 자신의 격물을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뒤에 학자들은 담약수가 정주학과 양명학의 중간에 있는 과도기 학술을 주장하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담약수의 격물 해석이나 왕양명 격물 비판 모두 담약수가 왕양명에 대한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왕양명이 50살 소흥부에 돌아온 뒤 양지를 강조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서적을 읽는 글공부를 하지 말라고 일렀다고 합니다. 왕양명이 글공부를 무시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담약수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래서 왕양명 격물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왕양명 54살(1525)에 담약수는 「광덕주 유학 존경각 기념사(廣德州儒學新建尊經閣記)」에서도 왕양명이 글공부를 무시하였다는 점을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 참고자료 : 하곡학연구원, 「왕양명 54살에 담약수의 광덕주 유학 존경각 기념사(廣德州儒學新建尊經閣記)」 2019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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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약수(湛若水,1466-1560),「왕양명 격물에 보낸 답신(答陽明王都憲論格物)」(1521,왕양명 50살),『泉翁大全集』,卷三:
격물에 관하여 두 번이나 보내준 서신을 받고 저를 지극히 아낀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끝내 의문이 있는데, 의문을 품고도 따지지 않는 것도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따지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따지지 않는다면 학술이 끝내 올바르게 귀결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동학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왕사(王思,1481-1524,江西省 泰和縣人)는 ‘왕양명과 변론하여 가장 올바른 결론을 찾아내는 것은 선생(담약수)의 책임입니다.’고 말하였고, 방헌부(方獻夫,1485-1544,字叔賢,廣東省 南海縣人)도 ‘선생이 왕양명과 변론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변론하면 당신은 동의한 것을 좋아하고 동의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여,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남의 비판을 무시할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남의 비판을 무시하면, 자신이 성인이라고 여기고 남의 말을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왕양명 당신이 어찌 이렇겠습니까? 그래서 나 자신도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고 감히 변론해보겠습니다.
대체로 당신의 격물 주장에 대하여 제가 네 가지를 동의하지 못합니다.
첫째, 옛날부터 성현의 학술은 모두 천리(天理)가 요점이고 지행(知行)이 공부입니다. 『대학』에 관하여 당신은 격물의 격(格) 뜻이 바로잡는다는 정(正)이고, 물(物) 뜻이 발현된 생각(念頭)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둘째 단락에 있는 ‘성의(誠意)’의 의(意)가 발현된 생각이고 ‘정심(正心)’의 정(正)이 격(格)이 됩니다. 문맥의 뜻으로 보면, ‘격물’이 ‘성의’와 ‘정심’ 둘과는 중복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첫째입니다.
둘째, 첫째 단락에서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에 있는 정(定), 정(靜), 안(安), 여(慮)의 뜻이 순서대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둘째 단락의 다음 구절에서 수신(修身) 관점에서 격물과 치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둘째입니다.
셋째, 당신의 격물 설명에서 ‘생각을 바로잡는다.’고 설명하였는데, 생각이 바로잡혔는지 여부를 판단할 근거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와 도교는 허무(虛無)를 근거로 삼기에, 『금강경』에서 ‘감각기관이 상대하는 대상(聲香味觸法:相分)이 없어진 뒤에야 청정심(淸淨心)이 생긴다.(『金剛經』,第十品,「莊嚴淨土分」:不應住色生心,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應無所住而生其心。)’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제상(諸相)이 없어지고 모든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이 없어진 뒤에야 저절로 바르게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도 전국시기에는 자신들이 성인이라고 여겼는데, 어찌 자신들이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옳다고 주장하였겠습니까? 이들은 배우고 묻는 학습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옳다(正)고 여기는 것이 옳지 않다(邪)는 것을 배우지도 못하였고 자신들조차 스스로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들 스스로는 성인(聖)이라고 말하였지만 결국에는 짐승(禽獸)의 생활형태로 떨어졌습니다. 백이(伯夷), 유하혜(柳下惠), 이윤(伊尹)을 맹자도 성인이라고 평가하였지만 지나치게 막히거나(隘) 공손하지 않은 잘못으로 흘렀기 때문에 공자와는 달랐는데, 이들은 강학의 노력도 없고, 시종 일관된 논리의 실재도 없고, 지혜와 방편의 절묘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에 근거해보면 당신의 격물 설명도 다만 떠오른 생각을 바로잡으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셋째입니다.
가장 일찍이 학술을 논의한 자료들을 보면, 『상서、說命下』에는 은나라 고종에게 부열(傅說)이 ‘옛날 가르침을 배우면 얻을 것이 많습니다.(學於古訓,乃有獲。)’라고 말하였습니다. 『상서、周官』에서 ‘옛날 가르침을 배운 뒤에 관원이 된다.(學古入官)’고 말하였습니다. 『상서、대우모』에서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일러 말하길 ‘순수하게 하여 완전히 순수하게 하여야한다.(惟精惟一)’고 말하였습니다. 안연은 공자의 가르침을 서술하여 말하길 ‘널리 배우고 예(禮)로 귀결시킨다.(博文約禮)’고 말하였습니다. 『중용』에서 공자는 노나라 애공에게 ‘널리 배우고 따져서 묻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고 밝게 따져보고 믿음직스럽게 실행하십시오.(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라고 아뢰었습니다. 이 자료들의 결론은 지행을 병진시키고(知行竝進) 동등하게 서로 관철(同條共貫)시켰습니다. 당신의 주장처럼 다만 떠오른 생각들을 바로잡는 것이라면, 공자는 다만 ‘덕(德)을 닦지 않는다.(德之不修)’고 말하면 될 것을 ‘학술을 연구하지 않는다.(學之不講)’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또한 ‘말없이 이해한다.(默而識之)’고 말하면 될 것을 ‘배우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는다.(學而不厭)’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또한 ‘옛날 가르침을 믿고 좋아한다.(信而好古)’고 말하면 될 것을 ‘옛날 가르침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서 연구한다.(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자사(子思)가 『중용』에서 ‘덕성(德性)을 존양한다.(尊德性)’고 말하면 될 것을 ‘묻고 배우는 것을 설명한다.(道問學)’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공자가 연구하려던 것, 배우려던 것, 좋아하였던 것, 찾으려던 것은 무엇입니까? (옛날 가르침 고훈(古訓)입니다.) 이것이 제가 동의할 수 없는 넷째입니다.
이와 같이 『대학』의 내용을 따져보아도 동의할 수 없고 또한 옛날 성인의 주장에 비교해보아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확실하게 자신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반드시 따르기를 바라며, 심지어 성인이 다시 태어나시더라도 바꿀 수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는데, 어찌 당신의 밝은 이해력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반드시 무슨 장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주장은 대략 다섯 가지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격물을 ‘이(理)에 이른다.(至其理)’고 설명하는데, 처음에는 제가 생각해낸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나중에 이정(二程) 서적을 찾아보니 저보다 먼저 똑같이 설명하였습니다.( 『近思錄』,卷四,「存養」,제60조:“伊川先生曰:‘致知在所養,養知莫過於寡欲二字。’”) 이것이 첫째 타당성입니다.
『대학』 첫째 장절의 ‘지선(至善)에 이른다.(止至善)’는 것을 따져보니 바로 이런 뜻입니다. 첫 단락에서 ‘지지(知止)’부터 ‘능득(能得)’까지는 지행 병진(知行 竝進)을 말하는데, 지리(至理)와 공부(工夫)의 병진입니다. 이것이 둘째 타당성입니다.
『(고본)대학』의 둘째 장절에서 수신(修身) 관점에서 격물과 치지를 설명하는 것은 학자에게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셋째 타당성입니다.
『대학』에서 ‘치지는 격물에 있다.’고 말하였고, 정이천은 ‘치지는 길러야하는(養) 것이며 지(知)를 기르는 방법은 맹자(『孟子、盡心章』:養心莫善於寡欲。)가 말하였던 과욕(寡欲)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과욕을 함양하는 것이 격물입니다. 이것은 『(고본)대학』이 수신 관점에서 격물의 뜻을 설명하였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넷째 타당성입니다.
격물은 지(知)와 행(行) 둘을 포함하고 있는데, 옛날 성인들의 가르침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용』에서는 배우고 묻고 따지고 판단하는 것(學、問、思、辨)과 열심히 실행하는 것(篤行) 둘을 포함하였고, 『상서、대우모』에서는 정(精)과 일(一) 둘을 포함하였습니다. 공자는 박(博)과 약(約) 둘을 포함하였기에 옛날 가르침을 배우고 좋아하고 믿었으며, 수덕(修德)과 강학 둘을 포함하였고, 묵식(黙識)과 학불염(學不厭) 둘을 포함하였고,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 둘을 포함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종일관되게 말하였습니다. 맹자도 지언(知言)과 양기(養氣) 둘을 포함하여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옛날 많은 성현들의 가르침이 지(知)와 행(行) 둘을 포함하였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다섯째 타당성입니다.
다섯 가지 타당성을 당신은 하나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당신의 밝은 이해력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반드시 무슨 장애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격물을 ‘이(理)에 이른다.(至其理)’고 설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이(理)에 이른다.(至其理)’는 말은 천리를 체인하는 것(體認天理)입니다. 천리를 체인한다는 말은 지행(知行)을 포함하고 내외(內外)를 통합하여 말한 것이며, 천리에는 내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광(陳洸, 1478-1534, 字世傑)이 저에게 서신을 보내 알려왔는데, 당신은 저의 수처체인천리 주장이 마음의 밖에서 천리를 찾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고 합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저의 주장은 맹자가 고자를 비난하였던 것처럼 의(義)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것(義外)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천리에 내외가 없듯이 찾는 것(求)도 내외가 없어야합니다.
제가 말하는 수처(隨處)은 『대학』의 마음(心), 생각(意), 자신(身), 가족(家), 국가(國), 세상(天下) 모두를 대상으로 삼으며, 『주역』에서 말하듯이 마음이 대상들을 접촉하지 않았거나(寂)과 접촉하였거나(感) 두 가지 경우를 모두 포함합니다. 정명도 「정성서(定性書)」에서 말하듯이 접촉하지 않았을 때는 하늘처럼 넓어 공평하고(廓然而大公), 접촉하였을 때는 외물을 접촉하더라도 순응하는데(物來而順應), 적(寂)과 감(感)의 때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내 마음의 중정(中正:張載, 『正蒙、中正篇』:“不倚之謂中,得其理而守之、不爲物遷之謂正。”) 본체를 잠시라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본체는 실체이며 천리이며 지선(至善)이며 물(物)인데, 저의 주장이 마음 밖에서 천리를 찾는다고 비판하시는 것이 옳습니까?
치지(致知)는 이 실체, 천리, 지선, 물을 아는 것이고 바로 맹자의 말처럼 내가 타고난 양지와 양능이며 외부에서 얻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양지와 양능이 탁한 기(氣)와 길들여진 습관(習)에 가려지기 때문에 태어나서는 둔하고 성장하여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깨고 가려진 것을 걷어내서 양지와 양능을 깨우쳐 발현시켜줄 수 있는 옛날 가르침을 『중용』의 말대로 배우고 묻고 따지고 판단하고 열심히 실행하여합니다(學、問、思、辨、篤行). 양지와 양능은 외부에서 덧붙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주 적은 인위적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꿈을 꾸며 잠을 잘 때 다른 사람이 큰소리로 불러서 깨웁니다. 깨움은 잠자는 사람에게 외부에서 덧붙여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격물을 하면 외부에서 양지와 양능을 가져와서 덧붙이는 일이 없고, 『대학』에서 말하는 여러 과정도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그냥 마음을 지키려고만 하고, 배우고 묻고 따지고 판단하고 열심히 실행하는 과정(學、問、思、辨、篤行)을 하지 않는다면 양지와 양능을 깨우쳐 발현시킬 수도 없습니다. 설사 깨우쳐 발현시킨 것이 올바른 것(正)과 비슷하더라도 실제로는 틀린 것(邪)이며, 잘못되면 도교, 불교, 양주, 묵적이 될 것이고 잘되더라도 백이, 유하혜, 이윤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증참(曾參)이 오이밭 김을 매다가 잘못하여 오이 뿌리를 끊어놓아 말라죽자, 아버지가 큰 작대기로 등을 때려서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증참은 아버지를 피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正)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작은 매질을 받지만, 큰 매질은 도망가서 피하여야한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천리입니다. 똑같은 일이라도 증참은 아버지에 대한 효(孝)만 생각하였고 공자는 하늘이 내려준 생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여 서로 판단이 아주 다른데도 강학을 하지 말아야합니까? 공자에게 무엇을 배웠냐고 따져묻자, 공자는 ‘내가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마음을 배웠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자가 지극한 성인이고 천리의 극치이고 인의(仁義)가 순수하였지만 70살에야 마음을 따라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아주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도 어리석습니다.
당신의 총명함은 일반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정도이며 얼마나 총명한지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도 젊어서는 힘써 배우려고 하였고 배우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의 명예가 높고 관직도 높아서 세상 지식인들이 당신을 보고 따르려고 합니다. 당신이 학술을 신중하게 하고 올바르게(中正)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학술을 신중하게 하길 재삼 바랍니다. 그래야만 유가의 학술이 발전하고 밝혀질 것입니다.
현재 당신의 주장을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만, 저는 아직도 방향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한 당신과 사귄지 17년 동안(1505-1521) 당신이 깊이 아껴주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 있고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당신에게 충고하지 못한 죄인이 될 것이고 세상 후세 사람들이 나를 나무랄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분수를 모르고 물을 쏟듯이 모두 말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타당성이 있을 것이니 굽어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만약에 모두 틀리고 잘못되었다면 마땅히 비판하고 부정해주신다면 저도 앞으로 입을 다물겠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湛若水(1466-1560),「答陽明王都憲論格物」(1521,왕양명 50살):
『泉翁大全集』,卷三
兩承手教格物之論,足仞(『명유학안』:認)至愛。然僕終有疑者,疑而不辨之則不可,欲辨之亦不可。不辨之,則此學終不一,而朋友見責。王宜學(王思,1481-1524,字宜學)則曰:‘講求至當之歸,先生責也。’方叔賢(方獻夫,1485-1544,字叔賢)則亦曰:‘非先生辨之,其誰也?’辨之,則稍以兄喜同而惡異,是己而忽人。是己而忽人,則己自聖而人言遠矣,而陽明豈其然乎?乃不自外而僭辨之。
蓋兄之格物之說,有不敢信者四。自古聖賢之學,皆以天理為頭腦,以知行為工夫。兄之訓格為正,訓物為念頭之發,則下文‘誠意’之意,即念頭之發也,‘正心’之正即格也,於文義不亦重復矣乎?其不可一也。
又於上文‘知止’、‘能得’為無承,於『古本』下節以修身說格致為無取,其不可二也。
兄之格物訓云:‘正念頭也。’則念頭之正否,亦未可據。如釋、老之虛無,則曰:‘應無所住而生其心’,無諸相、無根塵,亦自以為正矣。楊、墨之時,皆以為聖矣,豈自以為不正而安之?以其無學問之功,而不知其所謂正者乃邪而不自知也。其所自謂聖,乃流於禽獸也。夷、惠、伊尹,孟子亦以為聖矣,而流於隘與不恭,而異於孔子者,以其無講學之功,無始終條理之實,無智巧之妙也,則吾兄之訓,徒正念頭。其不可三也。
論學之最始者,則說命曰:‘學於古訓,乃有獲。’「周書」則曰:‘學古入官。’舜命禹則曰:‘惟精惟一。’顏子述孔子之教則曰:‘博文約禮。’孔子告哀公則曰:‘學、問、思、辨、篤行。’其歸於知行並進,同條共貫者也。若如兄之說,徒正念頭,則孔子止曰‘德之不修’可矣,而又曰‘學之不講’,何耶?止曰‘默而識之’可矣,而又曰‘學而不厭’何耶?又曰‘信而好古’、‘(好古)敏求’者」何耶?子思止曰‘尊德性’可矣,而又曰‘道問學’者何耶?所講、所學、所好、所求者何耶?其不可四也。
考之本章既如此,稽之往聖又如彼。吾兄確然自信而欲人以必從,且謂聖人復起不能易者,豈兄之明有不及此?蓋必有蔽之者耳。
若僕之鄙說,似有可採者五。
訓格物為‘至其理’,始雖自得,然稽之程子之書,為先得同然,一也。考之章首‘止至善’,即此也。上文「知止、能得」為知行並進,至理、工夫,二也。考之『古本』下文,以修身申格致,為於學者極有力,三也。『大學』曰:‘致知在格物。’程子則曰:‘致知在所養,養知在寡欲。’以涵養寡欲訓格物,正合『古本』以修身申格物之旨為無疑,四也。以格物兼知行,其於自古聖訓:學、問、思、辨、篤行也。精一也。博約也,學古、好古、信古也,修德、講學也,默識、學不厭也,尊德性、道問學也,始終條理也。知言養氣也。千聖千賢之教為不謬,五也。五者可信,而吾兄一不省焉,豈兄之明有不及此?蓋必有蔽之者耳。
僕之所以訓格(格物)者,至其理也。至其理云者,體認天理也。體認天理云者,兼知行、合內外言之也,天理無內外也。陳世傑(陳洸, 1478-1534, 字世傑)書報吾兄疑僕隨處體認天理之說,為求於外。若然,不幾於義外之說乎?求即無內外也。吾之所謂隨處云者,隨心、隨意、隨身、隨家、隨國、隨天下,蓋隨其所寂所感時耳,一耳。寂則廓然太公,感則物來順應,所寂所感不同,而皆不離於吾心中正之本體。本體即實體也、天理也、至善也、物也,而謂求之外,可乎?
致知云者,蓋知此實體也、天理也、至善也、物也,乃吾之良知良能也,不假外求也。但人為氣習所蔽,故生而蒙,長而不學則愚,故學、問、思、辨、篤行諸訓所以破其愚,去其蔽,警發其良知良能者耳,非有加也,故無所用其絲毫人力也。如人之夢寐,人能喚之惺耳,非有外與之惺也。故格物則無事矣,『大學』之事畢矣。若徒守其心而無學、問、思、辨、篤行之功,則恐無所警發,雖似正實邪,下則為老、佛、楊、墨,上則為夷、惠、伊尹是也。何者?昔曾參蕓瓜,誤斷其根,父建大杖擊之,死而復蘇。曾子以為無所逃於父為正矣,孔子乃曰:‘小杖受,大杖逃。’乃天理矣。一事出入之間,天人判焉,其可不講學乎?詰之者,則曰:‘孔子又何所學?心焉耳矣。’殊不知孔子至聖也,天理之極致也,仁熟義精也,然必七十乃從心所欲不逾矩。人不學,則老死於愚耳矣。
若兄之聰明,非人所及,固不敢測,然孔子亦嘗以學自力,以不學自憂矣。今吾兄望高位崇,其天下之士所望風而從者也,故術不可不慎,教不可不中正。兄其圖之!兄其圖之!則斯道可興,此學可明矣。若兄今日之教,僕非不知也,僕乃嘗迷(述,『명유학안』:迷)方之人也。且僕獲交於兄十有七年矣,受愛於兄亦可謂深矣。嘗愧有懷而不盡口,將為老兄之罪人,天下後世之歸咎,乃不自揣其分,傾倒言之。若稍有可採,乞一俯察,若其謬妄,宜擯斥之,吾今可默矣。
謹啟。
참고자료:
『(古本)大學』: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知止而後有定,定而後能靜,靜而後能安,安而後能慮,慮而後能得。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修其身;欲修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物格而後知至,知至而後意誠,意誠而後心正,心正而後身修,身修而後家齊,家齊而後國治,國治而後天下平。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修身爲本。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
* 格物,至其理:
『朱子語類』,卷十五,「大學二」:
剡伯問格物、致知。曰:“格物,是物物上窮其至理;致知,是吾心無所不知。格物,是零細說;致知,是全體說。”時舉
郭叔雲問:“爲學之初,在乎格物。物物有理,第恐氣稟昏愚,不能格至其理。”曰:“人個個有知,不成都無知,但不能推而致之耳。格物理至徹底處。”又云:“致知、格物,只是一事,非是今日格物,明日又致知。格物,以理言也; 致知,以心言也。”恪
* 王思(1481-1524),字宜學,江西司吉安府泰和縣(今江西省泰和縣)人,明朝政治人物、進士出身。明朝吏部尚書王直曾孫。
正德六年,登進士,授翰林院編修。正德九年,因乾清宮火災,而上疏請求明武宗重整吏政綱紀。同年九月,再次上疏進諫,而被貶爲潮州三河驛丞。當時王守仁在贛州講學,王思跟從遊學。王守仁討伐朱宸濠叛亂時,檄令王思參贊軍務。
明世宗繼位後,王思被召回恢復官職,並充任經筵講官。嘉靖三年,因參與大禮議事件,王思與群臣在左順門哭諫,此後下詔獄,行杖刑,不久因病瘡發作去世。隆慶初年,追贈右諭德。
* 方獻夫(1485-1544),明朝廣東廣州府南海縣人,原籍莆田縣(今福建莆田市)。根據乾隆《廣東通志》中的《方獻夫傳》記載,方獻夫是遺腹子,自幼勤苦力學,不異寒暑,天聰勝人,弘治甲子魁於鄉,乙丑20歲進士,翰林庶吉士選榮歸。同年第一次上京,官吏部曆驗封文選諸司,主事員外郎皆稱職,發表關於“皇位繼承”的理論被認爲正確,從進士學位的七品官提升爲五品官之職,官至吏部尚書、太子太保、武英殿大學士,被尊稱爲“方閣老”。
* 陳洸(1478-1534),字世傑,號東石,民間稱爲陳國舅,潮陽縣貴山都貴嶼(今貴嶼鎮華美社區)人,貴嶼陳氏十二世。陳洸,字世傑,號東石先生,民間稱陳北科,明成化十四年(1478年)出生於潮陽縣桂山都貴嶼,明正德二年(1507年)中舉人,明正德六年(1511年)中二甲進士,授戶科給事中,正德八年(1513年)任吏科左給事中,奉旨管理全國官員升降,正德十一年(1516年)奉旨按查湖廣地方官員,嘉靖元年(1522年)禦封“紫閣名臣”,嘉靖三年(1524年)任大理寺少卿,嘉靖六年(1527年)任黃門侍郎、禦賜“黃門第”,嘉靖十年(1531年)因宦官專政,辭官還鄉,嘉靖十三年(1534年)在家中抑鬱而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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