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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가운데 희망인 그리스도
계 1:1-20 / 계강현 목사
지난여름 서울 관악구에 한 아파트에서 탈북민 모자가 숨진 채 몇 달 만에 발견되었는데, 집에 음식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봐서 아사로 죽었을 거라 추정하고 있다. 10년 전 탈북 해 우리나라에 정착한 엄마가 6살 난 아들과 살던 아파트는 임대아파트로 월세를 수개월 내지 못한 것으로도 밝혀졌다. 또한 성북구 네 모녀의 자살에 이어 인천의 한 임대아파트에서도 일가족 등 4명이 숨진 채 발견되는 등 최근에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가족이 모두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비극이 잇따르고 있다. 이달에만 세 번째, 올해 들어선 20건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지역사회와 고립되고 이웃관계에서 고립되어 복지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르겠고 우리도 교회 안의 교우들과 주위 이웃들을 잘 돌아봐야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자살로 죽는 비극보다 더 무서운 것은 많은 현대인들이 이미 절망감으로 죽어가고 있단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허무를 경험하며 산다. 절망으로 신음하며 권태로 몸부림치고 허우적거린다. 현대인은 ‘생존은 있는데 생명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지 않던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이 살던 시대에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몹시도 견디기 힘든 혹한기를 지나는 중이었다. 많은 성도가 포행자의 칼날 앞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는 단지 사람들의 오락거리로 전락해 짐승의 밥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은 투옥되거나 요한처럼 유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로마 황제의 집요한 박해 때문이었다.
티투스 황제가 젊은 나이에 아들 없이 요절하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30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황제가 선정을 베풀 경우에, 죽은 후에 신으로 선포해 숭배하는 전례가 있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와 형 모두 그렇게 사후에 신격화되었다. 사치와 향락을 좋아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도미티아누스는 죽은 다음에 신이 되는 것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스스로 신격화한 도미티아누스의 정책이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특징으로 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에게 즉시 반발하게 하였고, 그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무력으로 강제 집행했다. 그는 먼저 유대교 진영을 정조준 하여 로마시민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는 반유대교 법령을 발표 했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바치던 반 세겔의 성전세를 성전이 이미 파괴되었기 때문에(A.D.70년) 로마 시에 있는 쥬피터 신전의 유지비로 강제 도용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서 삼엄한 공포정치를 행했다. 유대교 진영과 함께 기독교 진영에 대한 핍박도 병행했다. 네로 치하에서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 시(市)에만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의 박해는 멀리 소아시아 지방에까지 미쳤다. 박해의 여파로 황제의 사촌이자 최고위직 집정관이었던 로마의 클레멘스가 순교 당했고 황제의 친척들과 고위직 간부들의 가족들이 순교 당했다. 이미 기독교가 황제의 가족에게까지 깊숙히 침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때에 사도 중에 가장 늦게까지 살아있던 사도 요한도 체포되었고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런 사정을 그는 v9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밧모 섬은 정치적, 종교적 중범자들을 유배하는 감옥 인데,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생지옥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요한은 96세의 노구로 낮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다. 96세면 망치하나 들 힘도 없을 텐데, 하루 종일 돌을 깨는 막장 인생으로 전락한 요한은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들었을까?
그래도 살 희망도 없이 돌을 깨며 절망에 빠져 사는 주위 죄수들에게 틈틈이 복음을 전하였다. 종종 믿게 된 사람에게 세례를 줄 때면 사도의 마음은 날듯이 기뻤다. 지금도 밧모섬 채석장에는 돌을 생산하고 있고, 요한의 세례터가 성지로 남아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동행하는 사도지만, 주어진 막노동과 주위 죄수들의 절망감과 남겨두고 온 교회에 대한 염려는 사도의 마음을 가끔 무겁게 했다. 그럴 때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을 것 같다. ‘두고 온 교회와 성도들은 잘 있을까?’, ‘이 상황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고난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차라리 주님이 나를 빨리 데려가시면 좋을 텐데.’ 요한 사도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때론 낙심되고 탈진되었을 것 같다. 이것이 단지 사도 요한만의 문제였겠나? 당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모두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다. 사도는 그럴 때면 노동을 마친 저녁 늦게 산 위에 동굴에 올라가 주님께 기도하며 독대하면서 주님이 하셨던 말씀과 장면을 떠올리곤 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곤 했다.
이런 요한에게 어느 날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셨다. 그가 그렇게 만나 뵙게 된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 말씀 때문에 요한은 고난 가운데서도 희망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요한계시록이란 설교편지를 통해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다. vv1-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시고 그리스도가 천사를 보내시고 천사가 요한에게 알려주시고 요한이 교회와 오늘 우리에게도 증언해준 계시이다. 그것이 요한이 경험하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희망의 메시지이자, 오늘 우리도 간직해야 할 희망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요한에게 희망을 던져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이었나?
1. 영원하신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사도 요한이 서문 부분인 v4과 v8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신 하나님에 관한 묘사는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이시다. 이 말씀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성부 하나님을 강조한 말씀이다. v8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부연하신다. 헬라어 알파는 영어의 A에, 오메가는 영어의 Z에 해당되는 알파벳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다. 그러니 그 뜻은 처음과 마지막이란 뜻이다. 사실 시작도 끝이 없어야 영원인데, 왜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유한안 인간세상과 관계된 표현이다. 영원부터 존재하시고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이 인류 역사와 우리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을 주장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안전한가!
그런데 여기서 ‘지금도 계시고(현재) 전에도 계셨고(과거)’와 보조를 맞추려면 문맥상 ‘영원히 계실 분(미래)’이라고 해야 맞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 사도는 ‘또 앞으로 오실 분’이라고 적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오시고 계신 분’, 혹은 ‘오시는 분’으로 변형시켜 사용한 것이다. 왜 요한 사도는 이런 변형을 시도했을까? 그것은 요한 사도가 여기서 하나님을 단순히 미래에 영원히 존재하실 분으로서 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영원히 존재하실 분이 역동적으로 현재에 침입하여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서다. 영원한 하나님은 영원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 영원의 복을 가지고 현재로 들어오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로서 vv5-6,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6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신 주님으로, 곧 다시 오신다. v7,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또한 v4b,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완전한 성령님을 가리킨다. 결국 삼위 하나님이 영원한 공동체를 이루시고 합력하여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베푸신다.
이와 같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며 다시 오실 주님이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주관하시고 주장하시고 계시므로 v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그 분이 보여주시는 계시를 기록하라 명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v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함께 나누며 지킬 우리가 복이 있는 사람이다.
흔히 계시록을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책으로 오해한다. 또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같은 재앙이 임하는 비관적인 종말의 책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는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재앙이 임한다. 그러나 계시록의 핵심은 죄악과 고난의 한 복판에서 교회가 어떻게 희망을 품어야 하고 전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주님은 거룩한 교회, 거룩한 성도들을 사용하셔서 거룩한 승리를 선포하게 하신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내내 등장하는 “이기는 사람은…”(2:7; 11; 17; 26; 3:5; 12; 21; 21:7)이란 표현은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를 기대하는 주님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석가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그의 계시록 주석에서 계시록의 키 구절을 11:15로 보고 있다. “… ‘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역사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 요한은 주님을 환상으로 뵙고 나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고, 그것을 나이 많아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본 것을 구술하면 제자 브로고로 집사가 편지로 적어서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전했다.
결국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라 강요했던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주후 96년 집사 장이던 해방 노예 스테파누스가 주인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암살을 통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죽자 원로원은 그를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기록말살형’이란 로마제국 시대에 원로원이 황제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극으로, 당시 기록을 남기기 좋아했던 로마인들의 역사기록에서 해당 황제에 관한 모든 내용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소아시아로 돌아오게 되고,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또 한 번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 교회가 승리하였으며 믿음의 성도들이 이긴 것이다. 이미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엘리트층까지 침투하여 있었고, 결국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될 정도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잠식했던 것이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 이 힘든 고난을 헤쳐 나올 길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감에 빠져있진 않나? 아니다. 역사의 주관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분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그럴 때 주님이 역사하신다.
2. 교회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이시다.
사실 요한을 비롯해서 초대 공동체는 황제의 박해 속에 예배와 집회와 전도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환란 가운데 처해있었다. 기독교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심각했다. 교인들도 다 흩어져 숨어서 모이고 있었다. 요한 사도마저 밧모 섬에 유배되고 보니 교회를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교회가 다 와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마치 오늘의 중국교회나 북한교회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중국이 최근 한국선교사를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는 기밀문서가 발견됐다. 많은 한국선교사들이 추방당했고, 한인교회들도 문을 닫고 있다. 북한교회는 그야말로 숨어서 예배하는 지하교회인데, 극심한 탄압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발각되면 간첩죄와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어 총살을 당하거나 무기징역에 처한다.
이런 처지의 요한에게 나타난 주님의 환상은 그의 오른 손에 일곱별을 쥐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다니시는 모습이었다. vv12-16을 읽어보면 주님의 모습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면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제사장의 모습을 띄고 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과 메시야적 인물에 대한 묘사를 그리스도에게 통합하여 적용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일곱별을 오른 손에 쥐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모습에 대해서 v20에 설명하길,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심부름꾼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그러신다.
이게 무슨 뜻인가? 주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버려둔 것이 아니라, 그 일곱 교회들 한가운데 서계신다. 2:1에 에베소 교회에게 쓴 설교편지에서는 “에베소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시다.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며 돌보고 계신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단지 소아시아 일곱 교회만 일까? 당시에 이 일곱 교회 외에도 소아시아에는 빌립보 교회도 있었고, 골로새 교회도 있었다. 여기 ‘일곱’이란 완전 숫자를 사용해서 온 교회를 뜻하고 계신 거다. 이걸 통해 요한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중심내용은 교회가 박해받는 당시에 여전히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붙잡고 돌보시고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메시지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 흩어진다 하여도 바로 전능하신 예수님이 교회 사이를 거니시고 교회를 지키시기에 결국 교회는 승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마귀와 악한 영들이 교회를 공격해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주님이 보호하신다.
또 예수님이 일곱별을 잡고 계셨다. 별은 무엇을 뜻하나? v20의 설명 부분에 ‘심부름꾼’이라고 했고, 관주에는 ‘천사’라고도 번역했다. 개역개정에서는 ‘사자’라고 번역했다.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개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임명받은 대표자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계 2장-3장에서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ooo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라는 문구를 반복하는데, 주님이 편지를 천사들에게 써 보내거나, 천사들에게 들려 보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해석이 옳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지도자, 목사를 세우시고 그 목사를 붙잡고 계시다. 나도 가끔은 사역하다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는데, 이 말씀을 생각하면 큰 위로와 용기가 된다. 여러분, 목장은 가정교회이고 초대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에 목자 목녀들도 사역하다 탈진되어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그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순간에도 우리 주님이 목자목녀들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다. 할렐루야!
엄마가 갓난아이를 잊어버릴 때가 있을까? 거의 없다. 졸면서도 애를 젖 먹인다. 그런데 나는 깜빡 졸다가 갓난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아기엄마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마치 아빠가 장난꾸러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가는 것 같아서 넘어질 때면 붙잡기 때문에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인 줄 믿으라. 부활의 주님이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는 교회 지도자와 성도가 패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3. 한 번 죽었으나 영원무궁하도록 살아계신 인자이시다.
요한 사도와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 주님의 환상과 말씀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요한 사도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우리를 이런 고난 가운데 처하게 놔두시고 계신 건가?’, ‘이런 고난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난 없이 평안하게 예수 믿을 수는 없을까?’ 주님이 그 큰 권능의 오른손으로 나를 붙잡아 주시는 데 왜 고통이 여전히 따르고 교회에 고난이 있나? 이것은 주님의 사역을 위해 일하다가 고난당해 본 사람들이라면 동일하게 갖는 질문이다. 왜 주님이 나를 통해 사역하게 하시고 큰일을 행하기도 하시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의 때를 허락하실까? 이 고난으로 인해 음부의 권세에 패배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 우리의 이런 질문과 의문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 고난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여기에 대해 그 일곱 금 촛대 한가운데 계시고 일곱별을 오른손으로 쥐고 계신 주님은 v13에 보니까, ‘인자 같은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많이 부르셨다. ‘인자’(人子)란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내 신대원 논문을 심사해주신 전 박영희 신학원장은 ‘인자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성경에서 ‘인자’란 단어 하나를 가지고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거다. 그만큼 ‘인자’란 단어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구약에서 인자는 바벨론 포로로 총리를 하던 다니엘이 장래에 관해서 번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환상 중에 계시하신 내용에 나온다. 단 7:13-14,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14 옛 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모습은 사람 같으나 그 권세와 능력과 영광은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하기 전의 모습으로서 영원한 나라의 권세를 가지시고 영원토록 왕 노릇하시는 인자이시다.
계시록에도 인자 같은 분의 형상은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띤 제사장의 모습이고,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이나 눈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같이 벌겋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러기에 그 형상을 본 요한 사도는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 죄인의 반응은 이와 같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영광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요한 사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다. vv17-18,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우리 눈에 띄는 구절은 ‘한 번은 죽었으나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있는 자다.’하는 부분이다. 그 영광의 성자 하나님이 한 번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셔서 영원무궁하도록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서계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주님이 현재 세세토록 살아있는 승리를 얻는 그 길이 바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라고 부각시켜 말씀하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통해 면류관을 얻게 되었다는 얘기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 고난을 통과한 이후에야 면류관을 얻게 된다. 고난 받는 공동체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동안 자물쇠로 굳게 잠겨 풀 수 없었던 고난의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을 거다. 세상에서의 고난은 절대자의 저주나 인과응보의 시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영원토록 승리하는 삶을 위한 영광의 관문인 셈이다.
그 모범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빌 2:6-11,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또 다른 인간 모범이 밧모 섬에서 마지막 계시를 받고 있는 요한이다. 요한은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으로 결코 손해 봤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그가 복음전하다 유배된 것은 인간적 관점에서 불행이다. 그러나 더 높은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이 고난으로 인해 이 세상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영광스런 주님을 대면하고, 인류역사의 마지막 계시를 직접 듣고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큰 영예를 안게 되었다. 그가 누린 엄청난 특권과 영광에 비해 밧모섬의 고난은 한낱 시시하고 견딜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그 고난으로 인해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을 누린 주인공이 되었다.
태국이란 나라는 우리보다 기독교 역사가 2배로 200년 넘지만 기독교 인구가 1%를 넘지 못한다. 그 이유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태국에서는 순교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손양원, 주기철 같은 셀 수 없이 많은 순교자를 냈다. 교회역사를 보면 터툴이란 교부가 말했듯이, 교회는 항상 순교자의 피 위에 더욱 든든히 세워진다. 고로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 아는가? 조개 속으로 모래알이 한 개 들어간다. 그러면 그 부드러운 조갯살이 거친 모래알 때문에 고통을 겪으며 몸의 진액을 짜내어 그 모래알을 싸고 견디며 고통을 참아낸다. 이렇게 여러 해가 가는 중에 그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생기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영원하고 영광스런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과정임을 안다면 참고 견디어야 하지 않겠나?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롬 8: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 한가운데서도 희망이다. 우리가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면 넉넉히 고난의 상황을 이겨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배후에는 역사의 주인이시요,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강력한 오른팔로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고난도 다 의미가 있다. 고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있다. 고난 뒤에 면류관인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과 승천과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으신 주님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난 가운데도 뒤로 물러나는 신앙이 아니라, 역사의 주권자, 교회의 주인, 인생의 고난조차 다스리시는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용기있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