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손선지, 정문호 성인이 태어난 지석리(支石里)성지
지석리성지(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368-1 忠化面 支石里)는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부여 임천면(林川面) 출생 손선지 베드로와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두 성인의 시성비가 있는 곳이다.
<지석리성지>
손선지(孫善智)는 1820년 임천의 괴인돌 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손달원(孫達元)은 예비 신자였으므로 모태 신자는 아니었으나 유아세례를 받았고 아버지로부터 교리와 독실한 신앙생활을 배웠다.
손선지 베드로는 성품이 온순하고 덕행이 알려져 16세 때 샤스탕신부(1803년~1839년)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대전교구 홈페이지>
샤스탕 신부(Jacques Honoré Chastan 한국명 정아각백, 鄭牙各佰)는 1803년 프랑스 마르꾸에서 출생, 1827년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중국에 파견 후 1837년 앵베르(Imbert) 주교를 따라 서울에 잠입했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홍주목(洪州牧)에서 체포되어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3명의 궁녀, 2백여 신자와 함께 한강변 모래사장에 있는 새남터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1925년에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손선지 베드로 성인>
손 베드로는 전주 대성동(大聖洞. 현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完州郡 所陽面 新元里)의 교우촌으로 이사해 1남 1녀를 두고 담배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회장인 그의 집은 공소로서 신자들을 가르치는 선교지였고 기도처였다.
병인박해가 시작되던 1866년 ‘12월 3일 주일 미사가 끝나고’, <위키 백과> ‘12월 5일 저녁기도를 마쳤을 때’ 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아내에게 뒷문으로 해서 도망치라고 권하니 아내는 딸 데레사와 함께 가까운 밭으로 피해 달아났다. <가톨릭 사전 등> 그는 담배장사로 가장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 나자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팔이 부러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게 되었으나 그는 평온하게 모든 고통을 견디며 오히려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했다.
손선지는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德津區 鎭北洞)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순교자들은 진북사 앞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다. ‘이듬해 1867년(고종 4) 정월 그믐날’ 손선지의 맏아들 손순화는 정문호, 한재권의 가족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천호성지에 안장하였다. <향토문화전자대전 - 천호성지 天呼聖趾> ‘처형된 지 3일이 지난 후’에 교우들이 시체를 형장 근처의 용마루재에 묻었다. <한국순교자 103위 성인 - 손선지 약전>
손선지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여의도 집전 미사에서 시성되었다. 손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체포되는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정문호는 1801년 손선지와 한 고향인 임천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지석리성지 기념비에는 1802년생으로 새겨져 있다.> 한 고을의 현감을 지내기도 하였지만 고향에서 세례를 받은 뒤에는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박해가 시작되자 여러 지방을 방랑하며 피신하다가 손선지가 있는 전주 대성동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년 12월 초(또는 12월 3일) 체포되어 손선지 등 다섯 명과 함께 수감되었다.
12월 13일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사형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기도드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함께 끌려가던 조화서 베드로에게 "오늘 저희는 천국의 과거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날입니다." 라고, 순교를 과거 급제에 비유하며 기뻐하였다고 전해진다.
숲정이에서 참수된 정문호의 시신은 오사영에 의해 용마루재에 묻혔다가 이듬해 1867년 3월 6일 그의 아들이 손선지 베드로의 시체와 함께 전주 근처의 막고개로 옮겼다고 한다.
정 바르톨로메오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여의도 미사에서 시성되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다.
<지석리성지-기념비와 제단>
지석리성지 주변에는 손선지 성인의 친척들이 살고 있는데, 후손인 손유신이 부지를 희사하여 1988년 12월 13일 두 성인의 치명 122년에 맞춰 기념비를 세웠다.
<고인돌>
우리나라 각지의 고인돌이 있는 마을들에는 지석리라는 이름이 많다. 지석리성지에 붙어있는 팔충사 경내에도 고인돌이 있다. 지석리에 있는 5기의 고인돌 중 3기가 이곳에 있다.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전라도 경상도 등에 분포된 남방식 고인돌(또는 기반식 고인돌-碁盤式=바둑판식) 이다. <고고학사전> <팔충사>
지석리성지가 2차선 도로를 따라 휑뎅그레하게 자리 잡았고 그 끝자락에 기념비와 제단만 있어서, 이곳만 순례하기에는 좀 싱겁다는 느낌을 이 고인돌과 팔충사(八忠祠)가 메워준다.
팔충사는 백제의 계백을 비롯한 흥수, 성충, 복신, 도침, 혜오화상, 곡나진수, 억례복유의 8충신과 황산벌에서 항전한 5천 결사대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부소산에 있던 삼충사의 옛 건물을 1980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경내에 기념비가 1기, 담장 밖에 3기의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매년 9월 무렵에 8충신과 5천 결사대의 구국충절을 기리는 팔충제를 지낸다.
<팔충사 경내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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