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작헌의(視學酌獻儀).진설(陳設). 시학(視學) 하루 전에 담당 관사에서는 묘전(廟殿) 및 학당(學堂)의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다. 상사국(尙舍局)에서는 그 소속 관원을 인솔하여 묘전 동문의 밖에 남향으로 대차(大次)를 설치하고, 또한 왕태자의 막차를 대차의 남쪽에 설치한다. 수궁서(守宮署)에서는 재신(宰臣)과 추밀(樞密) 이하의 막차를 국자감(國子監)의 문 안팎에 설치하되 모두 지형의 마땅함을 헤아려서 둔다. 〈시학〉 당일에는 집례관(執禮官)과 각문(閣門)이 어가를 수종하는 관리들의 반열[班]을 전각 아래에 평상시 조회를 보는 의식과 같이 마련한다. 담당 관리는 제기를 문선왕(文宣王)의 신좌(神座) 앞에 진설한다. 왼쪽의 변(籩) 하나에는 사슴육포를 담고, 오른쪽의 두(豆) 하나에는 사슴젓[鹿臡]을 담는다. 작(爵) 하나는 변과 두의 남쪽에 둔다. 희준(犧尊) 하나는 받침[坫] 위에 올려서 전상(殿上)의 전면부 기둥 동남쪽에 두는데, 국자[勺]를 추가하고 청주(淸酒)로 채운다. 향로(香爐)는 신좌 앞에 놓는다.나아가 배향위(配享位)와 종향위(從享位)를 진설할 때에도 각각 왼쪽의 변 하나에 사슴육포를 담고 오른쪽의 두 하나에 사슴젓을 담는다. 작 하나는 변과 두의 남쪽에 둔다. 공통적으로 상준(象尊) 4개를 진설하는데, 하나는 전상의 전면부 기둥 동쪽에, 하나는 전면부 기둥 서쪽에 두고 그 나머지 2개를 동무·서무에 나누어 두되, 모두 받침 위에 올리고 국자를 추가한다. 상사국은 또한 돈화당(敦化堂) 위에 왕의 좌석을 설치하는데,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서 중앙을 마주보고 남향하도록 한다. 그리고 소차를 왕좌의 동북쪽에 설치하고 왕태자의 좌석을 왕좌의 동남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설치한다. 강서관(講書官)의 좌석은 왕좌의 서쪽에 남쪽을 가까이하면서 동쪽을 향하도록 설치한다. 재신의 좌석은 왕태자의 뒤에 남쪽을 가까이하면서 서향하고 북쪽을 상석으로 삼도록 설치한다. 추밀의 좌석은 강서관의 좌석 서쪽에 설치하되, 재신의 좌석을 마주보면서 동향하고 북쪽을 상석으로 삼도록 한다. 또 시신(侍臣)의 좌석은 재신과 추밀의 뒤에 모두 2줄이 되어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북쪽을 상석으로 삼도록 설치한다. 각문(閣門)은 왕태자 및 신료들의 반열을 당 아래에 설치하면서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작헌(酌獻). 당일에 왕은 강사포(絳紗袍)를 입는다. 연(輦)을 타고 장차 국자감에 도착할 무렵 집례관과 본감(本監)은 학관(學官)·학생(學生)들을 아울러 길 왼편에서 받들어 맞이한다. 거가(車駕)가 임시 정차하는 곳에 이르면 집례관·감관(監官)·학관 및 여러 학생들은 모두 재배하고, 마치면 거가는 국자감 문으로 들어온다. 〈왕이〉 연에서 내려 대차에 들어갈 때에 집례관·태상박사(太常博士)·태상경(太常卿)은 대차의 앞에 서되, 서쪽을 향하면서 북쪽을 상석으로 한다. 각문은 왕태자 및 재신·추밀 이하 시종관들을 인도하고 본감의 장(長)·이(貳)와 함께 각각 들어와서 전각 아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또한 박사 이하 학관 및 여러 학생들을 전문(殿門) 안쪽으로 인도하여 모두 2줄로 북향하면서 동쪽을 상석으로 삼아 자리를 잡도록 한다.각문이 반열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리면, 태상경은 대차 앞으로 나아가 엎드린 다음 꿇어앉아서 작헌(酌獻)의 예를 행할 것을 주청하며, 아뢰기를 마치면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왕은 가죽신[鞾]과 도포를 걸치고 대차를 나온 연후에 태상박사와 태상경이 앞에서 인도하면 동문으로 들어갔다가 동쪽계단으로 올라가서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의 신좌 앞으로 나아가 북향으로 선다. 태상경이 재배할 것을 주청하면 왕은 재배한다. 통사사인(通事舍人)이 찬배(贊拜)하면, 왕태자 및 재신·추밀 이하로서 무릇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재배한다. 태상경이 향을 올릴 것을 주청하면 왕은 향불을 올린다. 근신이 도와서 술을 따르면, 왕은 선성(先聖)의 신좌 앞에 이르러 북향으로 꿇어앉아 올리는 것을 마치고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다시〉 태상경이 재배할 것을 주청하면 왕은 재배하고, 통사사인이 찬배하면 왕태자 이하 무릇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재배한다. 태상경은 앞에서 왕을 인도하고 동쪽계단으로 내려와서 대차로 돌아가도록 한다. 감관과 학관은 배향위와 종향위로 나누고 나아가서 〈위의〉 의식대로 작헌한다.시학(視學). 좌무(左廡)와 우무(右廡)로 나누어 작헌하기를 마치면, 태상경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예가 끝났음을 아뢴다. 왕은 옷을 갈아입고 대차에서 나온다. 태상경이 앞에서 인도하면 〈왕은〉 돈화당에 이르러 소차로 들어간다. 시신 및 감관·학관과 여러 학생들은 각각 당 아래에서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선다. 각문이 반열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리면, 왕은 소차를 나와서 왕좌로 올라가고, 의장·시위는 산호(山呼)한다. 마치면 각문의 관리들은 차례대로 왕태자 및 재신·추밀을 나누어 인도하고 들어가서 자리로 나아가 서도록 하며, 통사사인이 찬배하면 왕태자와 재추 이하의 무릇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재배한다. 각문사(閣門使)가 나아와 왕좌 앞에 이르렀을 때에 승지(承旨)는 내려가 왕태자의 오른쪽으로 나아가서는 서쪽을 향하여 선포하기를, “당에 오르십시오.”라고 한다. 〈이때〉 통사사인이 찬배하면 왕태자와 재추 및 시신들은 모두 재배한 연후에 좌우로 나뉘어 당에 올라가 각각 좌석의 뒤로 나아가서 선다. 시신으로서 당에 오르는 것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동랑(東廊)과 서랑(西廊)에 나누어 선다.사인이 강서관(講書官)을 인도하고 계단 아래로 나아가 북향으로 자리를 잡도록 하면, 각문사가 선포하기를, “당에 오르십시오.”라고 한다. 사인이 찬배하면 강서관은 재배하고 서쪽계단을 통하여 당에 올라가 좌석의 뒤에 가서 선다. 또한 감관·학관 및 여러 학생들을 인도하고 나아가서 북향으로 자리를 잡도록 한 다음에 사인이 찬배하면, 감관·학관 및 여러 학생들 모두 재배하고 동랑과 서랑에 나누어 서되 모두 북쪽을 상석으로 삼는다. 내시관(內侍官)은 서안(書案)과 아첨(牙籤)을 올리고, 집경관(執經官)은 경서를 가지고 조금 앞으로 나아가 서안 위에 올린 후 물러난다. 사인이 선포하기를, “각각 좌석에 앉으시오.”라고 하면, 위아래에서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재배하고 좌석에 앉는다. 강서관 또한 재배하고 좌석에 앉아서 강서를 마치면, 사인은 이르기를 “일어서도 좋습니다.”라고 한다. 여러 관리들은 모두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가 자리로 나아가서 서며, 사인이 강서관을 인도하고 배위(拜位)로 나아가 찬배하면 강서관은 재배한 다음에 걸어 나가서 치사(致辭)하고 물러나 자리로 돌아와서 재배한다. 무도(舞蹈)하였다가 다시 재배하기를 마친 이후에는 사인의 인도로 서쪽으로 나간다.다시 사인이 찬배하면 왕태자 및 재추 이하는 모두 재배한다. 반수(班首)는 나와서 하례를 올리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사인이 찬배하면 자리에 있는 관리들은 모두 재배하였다가 무도하고 또 재배한다. 감관·학관과 학생들 또한 이와 같이 하례를 올린다. 〈다만〉 절하기를 마친 이후에 학생들은 무도하지 않는다. 각문사는 왕명을 전하여 좌석에 앉아 차(茶)를 하사받을 것을 선포한다. 사인이 찬배하면 왕태자와 재추 이하의 여러 관리들 및 감관·학관과 학생들 모두 재배한다. 마치면 왕태자 이하 여러 관리들은 당 위로 올라가 각각 좌석 뒤로 나아가서 선다. 사인이 각각 좌석에 앉을 것을 칭하면 왕태자 이하는 모두 좌석에 앉는다. 차를 하사하는 것이 끝난 다음에 감관·학관과 학생들은 뜰아래 서서 차를 받는다. 사인이 인도하고 계단으로 내려와 자리로 나아가면, 사인이 찬배하고 왕태자와 재추 이하 여러 관리들 및 감관·학관과 학생들 모두 재배한다. 마치면 사인이 나누어 인도하여서 차례대로 퇴장하고, 왕은 왕좌에서 내려와 대차로 돌아간 다음에 여(輿)를 타고 대궐로 돌아가기를 올 때의 의식과 같이 한다.
2월[仲春]·8월[仲秋]의 정일(上丁)에 지내는 석전의(釋奠儀).재계(齋戒). 제향을 올리기 5일 전에 무릇 제향에 참여하는 뭇 관리들은 산재(散齋)하는 3일 동안 모두 정침(正寢)에 유숙하며, 치재(致齋)하는 2일 동안 하루는 본사(本司)에서, 하루는 제향을 올리는 곳에서 유숙한다. 본사가 없는 사람은 상서성(尙書省)에 유숙한다. 감관(監官)·학관(學官)·학생(學生) 및 태악서(太樂署)의 공인(工人) 모두 하루 동안 재계[淸齋]하는데, 감관·학관은 본사에서, 학생은 각 재(齋)에서, 악공은 태상사(太常司)에서 유숙한다. 산재하는 동안 업무는 이전과 같이 보되, 다만 문상과 병문안은 하지 않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며, 사형집행 문서에 판서(判署)하거나 형벌을 시행하지 않고, 더럽고 사악한 일을 거치지 않는다. 치재하는 날에는 오직 제향에 관련된 일만 행할 수 있으니, 그 나머지는 모두 중단해야 한다. 〈이때에〉 향관(享官)으로서 이미 재계하였으나 〈제향에〉 불참하게 된 자가 총괄하여 사무를 처리한다. 제향일 하루 전에는 여러 위(衛)에서 그 소속 군사들에게 명하여 미후(未後) 1각에 각각 그 규정된 기복(器服)을 갖추고 전문(殿門)을 지키게 한다.진설(陳設). 제향을 올리기 2일 전에 국자감(國子監)에서는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전각의 안팎을 청소한다. 수궁서(守宮署)에서는 헌관(獻官) 이하의 막차를 국자감에 설치하되, 지세의 마땅함을 헤아려서 한다. 태악령(太樂令)은 등가(登歌)의 악기를 전각의 계단 위에 진열하고, 헌가(軒架)의 악기를 전정(殿庭)에 진열하면서 모두 북쪽을 향하게 한다. 제향일 하루 전에는 담당 관원이 제기를 진설하는데, 모두 자리를 깔고 올린다. 선성(先聖)의 신위(神位) 앞에는 보(簠)와 궤(簋)가 각각 2개씩 진설되는데, 보는 벼와 기장[粱]으로 채워 왼쪽에 두되 기장이 벼의 앞에 오고, 궤는 메기장[黍]과 피[稷]로 채워서 오른쪽에 두되 피가 메기장의 앞에 오며, 〈이들은〉 나란히 앞에 놓인다. 등(㽅) 3개는 변(籩)과 두(豆) 사이에 있는데, 대갱(大羹)으로 채운다. 형(鉶) 3개는 등의 남쪽에 오도록 하여 갱으로 채우되 모활(芼滑)을 추가한다. 변 10개는 왼쪽에 진설하는데, 3줄이 되면서 오른쪽이 위가 되도록 차리며, 첫 번째 줄에는 마른대추·소금·건어포·흰떡을 놓는다. 두 번째 줄에는 사슴육포·개암열매·검은떡을 놓는다. 세 번째 줄에는 마름열매·감인(芡仁)·밤을 놓는다. 두 10개는 오른쪽에 진설하는데, 3줄이 되면서 왼쪽이 위가 되도록 차린다. 첫 번째 줄에는 미나리절임·죽순절임·처녑[脾析]·무절임을 놓는다. 두 번째 줄에는 부추절임·토끼젓[兎醢]·식해[魚醢]를 놓는다. 세 번째 줄에는 돼지갈비[豚拍]·사슴젓[鹿醢]·고기젓[醓醢]을 놓는다. 조(俎) 하나는 변과 두 사이에 두고 희생돼지[豕牲]를 올린다. 작(爵) 3개는 변과 두의 남쪽에 두되, 작마다 받침[坫]을 놓는다. 또한 두 하나를 조의 남쪽에 놓고 모혈(毛血)을 담아두며, 희준(犧尊) 2개 가운데 하나는 명수(明水)를, 하나는 예제(醴齊)를 담는다. 상준(象尊) 2개 가운데 하나는 명수를, 하나는 앙제(盎齊)를 담는다. 산뇌(山罍) 2개 가운데 하나는 현주(玄酒)를, 다른 하나는 청주(淸酒)를 담고, 〈이들을〉 2줄로 만들어서 전각 안 신위의 왼쪽으로부터 조금 남쪽으로 나아와 북향하면서 서쪽을 위로 삼게 배열하며, 국자[勺]와 덮개[羃]를 추가한다. 준(尊)에는 모두 받침을 두어서 작을 얹어둔다. 폐백을 담은 비(篚)는 준점(尊坫)이 있는 곳에 두며, 축점(祝坫)은 신좌(神座)의 오른쪽에 둔다. 선사(先師)의 배좌(配座) 앞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준과 뇌(罍)는 신좌의 왼쪽에서 동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위로 삼는다.또한 여러 종향위(從享位)를 설치할 때에 각각 변 2개를 왼쪽에 놓으면서 하나는 밤을 담아서 앞쪽에 두고 하나는 사슴육포를 담아 그 다음에 둔다. 두 2개는 오른쪽에 놓으면서 하나는 무절임을 담아서 앞쪽에 두고 다른 하나는 사슴젓을 담아 그 다음에 둔다. 조 하나는 변과 두 사이에 놓고 희생돼지를 올려둔다. 보와 궤도 각각 하나씩인데, 변과 두 사이에 나란히 앞쪽으로 두고서 보는 피로 채우고 궤는 메기장으로 채운다. 작 3개는 변과 두의 남쪽에 두고 작마다 받침을 놓는다. 종향위의 예기(禮器)는 전상(殿上) 및 동무(東廡)·서무(西廡)의 경우 모두 동일하다. 전상에 종향하는 동·서쪽 및 남쪽의 신위에는 각각 희준이 2개인데, 하나는 명수를 담고 다른 하나는 예제를 담는다. 상준도 2개인데, 하나는 명수를 담고 다른 하나는 앙제를 담아 모두 신위의 왼쪽에 놓는다. 동무·서무에는 각각 희준 4개를 두어서 2개는 명수를 담고 다른 2개는 예제를 담는다. 상준도 4개를 두어서 2개는 명수를 담고 다른 2개는 앙제를 담는다.나아가 세위(洗位)는 동쪽계단의 동남쪽에 북쪽을 향하도록 설치하는데, 뇌수(罍水)를 세위의 동쪽에 두고 비를 세위의 서남쪽에 두며, 사비(肆篚)는 수건과 작으로 채워둔다. 준·뇌·비·덮개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각각 준·뇌·비·덮개의 뒤에 자리한다. 봉례(奉禮)는 문외위(門外位)를 설치하면서 삼헌관(三獻官)의 자리를 동문의 바깥쪽 길 남쪽에다 마련하고, 분헌관(分獻官)과 집사자가 그 뒤에 오도록 한다. 감관과 학관은 헌관의 동남쪽에서 모두 2줄이 되어 북향하면서 서쪽을 상석으로 삼게 한다. 또한 삼헌관의 자리를 전정 동쪽계단의 동남쪽에 마련하고 분헌관과 집사자를 각각 그 뒤에 자리하도록 하되, 등급마다 자리를 달리하며 모두 2줄이 되어 서향하고 북쪽을 상석으로 삼게 한다. 어사(御使)의 자리는 동쪽계단의 아래에서 서향하도록 마련하고 영사(令史)가 그 뒤를 배종하게 한다. 감관·학관의 자리는 서쪽계단의 서남쪽에 두고 학생의 자리는 학관의 뒤에 모두 2줄로 두는데, 동향하면서 북쪽을 상석으로 삼게 한다.봉례의 자리는 악현(樂懸)의 동북쪽에 두고 찬자(贊者) 2인은 남쪽에서 조금 물러나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한다. 협률랑(協律郞)의 자리는 전상의 악거(樂虡) 서쪽에 동향으로 설치한다. 태악령의 자리는 헌가의 북쪽에 북향으로 설치한다. 헌관의 음복위(飮福位)는 전상 동쪽계단의 동쪽에 서쪽을 향하도록 설치한다. 그리고 망예위(望瘞位)를 전각의 동북쪽에 예감(瘞埳)을 마주보면서 서향하도록 설치한다. 또한 봉례와 찬자의 자리는 예감의 동북쪽에 남쪽을 향하면서 동쪽을 상석으로 삼도록 설치한다. 포시(晡時) 이후에는 집례(執禮)가 먼저 전정으로 들어가고, 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 이하 행사하는 집사관(執事官)들은 함께 모여서 의식을 연습한다. 알자(謁者)는 사업(司業)을 인도하고 찬인(贊引)은 어사를 인도하고 주방으로 가서 솥[鼎鑊]을 검사하여 잘 씻었는지 살피고 희생이 충분히 살쪘는지 살펴보도록 한 뒤에 다 함께 재소(齋所)로 돌아온다. 태관령(太官令)은 명수와 명화(明火) 취하는 것을 감독한다. 제향일에는 미명(未明) 15각에 재인(宰人)을 이끌고 희생을 도살하며, 축사(祝史)가 두로 모혈을 취하여 찬소(饌所)에 가져다두면 마침내 희생을 삶는다. 그 희생은 정좌(正座) 및 선사의 배좌의 조에 모두 왼쪽 절반[胖體]을 올리며 그 외에는 나머지 절반을 나누어 올린다.궤향(饋享). 제향일 미명 3각에 여러 향관(享官)들은 각각 제복(祭服)을 입고, 제향에 참여하는 여러 감관·학관·학생들도 각각 규정된 옷을 입는다. 교사령(郊社令)과 양온령(良醞令)은 각각 그 소속 관원들을 인솔하고 들어가서 준과 뇌, 그리고 폐백을 담는다. 태관령도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여러 변·두·보·궤를 채운다. 미명 2각에는 봉례가 찬자를 인솔하고 먼저 들어와서 자리로 나아가고, 찬인은 어사 및 축사·영사들을 인도하고 준·뇌·비·덮개를 담당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동문으로 들어가 계단 사이를 마주보고 2줄로 북향하되 서쪽을 상석으로 삼아서 제자리에 서며, 봉례가 이르기를 “재배”라고 하면 찬자가 그 말을 받아 전하여 어사 이하 모두 재배하기를 마친 이후에 각각 자리로 나아간다. 찬인은 어사와 축사들을 인도하고 동쪽계단에 이르렀다가 전상으로 올라가며, 어사는 위에서 청소를 진행하고 영사는 아래에서 청소하기를 마친 다음에 자리로 돌아간다.알자와 찬인은 각각 향관 및 제향에 참여하는 감관·학관 등을 인도하여 문외위(門外位)로 나아가고, 학생들은 모두 들어가서 문내위(門內位)로 나아간다. 태악령은 공인과 이무(二舞)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자리로 나아가되, 문무(文舞)는 악현(樂懸)의 북쪽에 들어가 늘어서도록 하고 무무(武舞)는 악현의 남쪽 길 서편에 서있도록 한다. 미명 1각에 알자는 사업을 인도하고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가 서도록 하며, 봉례가 이르기를, “재배”라고 하면 사업은 재배한다. 마치고 알자가 사업을 인도하면 〈사업은〉 단 동쪽계단에 이르렀다가 전에 올라가 위에서 청소를 진행하고 내려와서는 아래에서 악기 매다는 것을 진행한다.4)4) “아래에서 악현을 청소한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마치면 〈알자의〉 인도를 받아 자리로 돌아간다. 앞서 사업이 악기 매다는 것을 진행할 때에5)5) “악현에서 청소를 행할 때에”라는 해석도 가능하다.알자와 찬인은 각각 향관 및 감관·학관을 인도하고 차례대로 들어가서 자리로 나아간다. 서서 자리를 잡으면 봉례는 이르기를, “재배”라고 하고, 자리에 있던 뭇 관리들과 학생들 모두 재배하되 먼저 절한 자는 절하지 않는다.알자는 좨주(祭酒)의 왼쪽으로 가서 아뢰기를, “담당 관청에서 삼가 갖추었으니 청하건대 행사하십시오.”라고 하고는 물러나 자리로 돌아간다. 협률랑이 무릎을 꿇고 앉아 엎드렸다가 휘(麾)를 들고 일어서면, 공인이 축(柷)을 울리고 헌가는 고선궁(姑洗宮)의 「응안지곡(凝安之曲)」을 연주하여 세 번 완성하다가 휘를 눕히고 어(敔)를 두드리면 음악을 멈춘다. 봉례가 이르기를 “재배”라고 하면, 자리에 있던 여러 관리 및 학생들은 모두 재배한다. 축사는 각각 무릎 꿇고 비(篚)에서 폐백을 가져다가 준소(尊所)에 선다. 알자가 좨주를 인도하고 동쪽계단으로 올라가 선성의 신좌 앞에 이르러 북향으로 서면 등가는 협종궁(夾鍾宮)의 「명안지곡(明安之曲)」을 연주한다. 8월[仲秋]이라면, 남려궁(南呂宮)을 연주한다. 축사가 폐백을 좨주에게 건네면, 좨주는 북향으로 꿇어앉아 선성의 신좌 앞에 바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는 조금 뒤로 물러나 북쪽을 향하여 재배한다. 마치면 선사의 배좌 앞에 이르러 동쪽을 향하여 선다. 축사가 폐백을 좨주에게 건네면, 좨주는 동향으로 꿇어앉아 선사의 배좌에 바치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는 조금 뒤로 물러나 동쪽을 향하여 재배하는데, 마치고 난 뒤에는 등가를 멈춘다. 알자는 좨주를 인도하고 내려와서 제자리도 돌아가도록 한다.앞서 여러 관리들의 재배가 끝나면 재랑(齋郞)은 각자 모혈이 담긴 두를 받들고 동문 밖에 서 있다가 등가가 멈추면 모혈을 받들어 동쪽계단으로 올라간다. 축사는 계단 위에서 맞이하여 받은 뒤 각각 선성과 선사의 신좌 앞으로 나아가 올리고는 물러나 준소에 선다. 앞서 좨주가 올라가 폐백을 바칠 때에 태관령은 나가서 진찬자(進饌者)들을 거느리고 찬(饌)을 받들어 동문의 밖에 늘어서도록 한다. 좨주가 이미 폐백을 올리고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면 태관령은 조(俎)를 받들고 찬을 인도하여 들어간다. 조가 처음 문으로 들어설 때에 헌가는 무역궁(無射宮)의 「풍안지곡(豐安之曲)」을 연주하고, 찬이 계단에 도달하면 음악을 멈춘다. 축사는 각각 나아가서 꿇어앉은 채 모혈이 담긴 두를 거두어 재랑에게 주고, 재랑은 두를 받들고 나간다. 태관령은 동쪽계단으로 올라와 선성의 신좌 앞에 나아가 조를 바친다. 배좌의 축사도 일시에 조를 바친다. 마치면 찬이 올라오고, 축사는 계단 위에서 맞이하고 받아 각각 신좌 앞에 진설한다. 진설이 끝나면 태관령은 내려가 자리로 돌아가고, 축사는 준소로 돌아간다.알자가 좨주를 인도하면 〈좨주는〉 뇌세위(罍洗位)로 나아가 손을 씻고 닦으며, 재랑은 비로 작을 담아서 좨주에게 건넨다. 좨주가 작을 씻고 닦아 재랑에게 건네면, 재랑은 작이 담긴 비를 받아서 축사에게 준다. 축사는 비를 받은 뒤에 작을 꺼내어 준소의 받침 위에 놓는다. 알자가 좨주를 인도하면 〈좨주는〉 동쪽계단으로 올라서 선성의 주준(酒尊)이 있는 곳에 이르고, 등가는 협종궁의 「성안지곡(成安之曲)」을 시작하는데, 8월이라면 남려궁을 연주한다. 좨주가 받침에서 작을 집어 들고 축사가 덮개를 걷어내면, 좨주는 희준의 예제를 떠서 선성의 신좌 앞에 이르러 북향으로 꿇어앉아 작을 바치며,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조금 뒤로 물러나 북향으로 서면 음악은 중단된다. 축사는 축판(祝版)을 들고 신좌의 오른쪽으로 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읽는다. 마치면 등가가 연주된다. 축사가 축판을 받침에 올려놓은 다음에 좨주가 재배하기를 마치면 음악도 그친다. 다시 선사의 준소에 이르렀을 때에 등가는 협종궁의 「성안지곡」을 시작한다. 축사가 덮개를 걷어내면, 좨주는 예제를 뜨고 선사의 배좌 앞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작을 올리며,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 동쪽을 향해 서면 음악이 그친다.앞서 좨주가 작을 씻고 전에 오른 다음에 분헌관들이 따라 올라간다. 좨주가 배위에 작헌(酌獻)하기를 마치면, 낭야공(瑯琊公) 이하 및 좌무·우무에 분헌관이 작헌한다. 아헌과 종헌 역시 이와 같이 한다. 축사가 축판을 들고 선사의 배좌 오른쪽에 이르러 남향으로 꿇어앉아 축문 읽기를 마치면 음악이 연주된다. 축사가 축판을 받침에 올리고 좨주가 재배하기를 마치면 음악이 그친다. 알자가 좨주를 인도하고 음복위로 나아가 서향으로 서게 하면, 축사들은 각각 작으로 뇌(罍)의 복주(福酒)를 떠서 하나의 작에 합쳐둔다. 한 축사가 작을 가지고 좨주의 왼쪽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면, 좨주는 재배하고 작을 받아서 꿇어앉아 좨주한 다음에 술을 맛보고 작을 바친다. 축사들은 각각 조를 가지고 나아가 신좌 앞의 조육(胙肉)을 덜어 하나의 조 위에 합쳐둔다. 또한 변을 가지고 기장밥[黍飯]·피밥[稷飯]을 덜어 하나의 변에 합쳐두고는 차례대로 좨주에게 건넨다. 좨주는 받아서 재랑에게 건넨 다음에 작을 들고 그대로 마셔서 작을 비운다. 축사가 나아와서 빈 작을 받아 받침 위에 돌려놓으면, 좨주는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재배한다. 마친 이후에 알자가 좨주를 인도하고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게 하면, 〈이때에〉 문무가 물러나면서 무역궁의 「숭안지곡(崇安之曲)」을 연주하다가 물러나기를 마치면 음악을 멈춘다. 무무가 등장하면 헌가는 〈다시〉 무역궁의 「숭안지곡」을 연주하는데, 춤추는 사람들이 자리를 정하여 선 뒤에는 음악을 멈춘다.앞서 좨주가 장차 자리로 돌아갈 무렵에 알자가 사업을 인도하면 〈사업은〉 뇌세위에 이르러 손을 씻고 작을 닦아 재랑에게 건네고, 재랑은 축사에게 전해준다. 알자가 사업을 인도하여 선성의 주준(酒罇)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면, 헌가는 무역궁의 「무안지곡(武安之曲)」을 연주하고 무무를 시작하며, 향악(鄕樂)도 교차로 연주한다. 축사가 덮개를 걷어낸 뒤에 사업은 상준의 앙제를 떠서 신좌 앞에 이르러 북쪽을 향하여 작을 올리고는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조금 물러나 북쪽을 향하여 재배한다. 마치면 다시 선사의 배좌 앞으로 나아가 작헌하기를 위의 의식과 같이 한 후에 조금 물러나서 동쪽을 향하여 재배한다. 마치면 음악도 그친다. 알자가 사업을 인도하고 음복위로 나아가 서향으로 섰을 때에 축사는 각각 작으로 뇌의 복주를 떠서 하나의 작에 합쳐둔다. 한 축사가 작을 가지고 사업의 왼쪽으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면, 사업은 재배하고 작을 받아서 꿇어앉아 좨주한 다음에 그대로 마셔서 작을 비운다. 축사는 빈 잔을 받아 받침에 돌려놓고, 사업은 일어나 재배한 후 알자가 사업을 인도하면 내려와서 자리로 돌아간다.앞서 사업의 작헌이 장차 끝날 무렵에 알자가 박사를 인도하면 〈박사는〉 뇌세위에 이르러 손을 씻고 작을 닦은 연후에 올라가서 앙제를 바친다. 종헌은 아헌의 의식과 동일하게 한다. 음악이 그치면 내려와서 자리로 돌아가고, 분헌관들도 모두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며, 다음으로 축사들이 각각 나아가 꿇어앉은 채 두를 거두었다가 일어나서 준소로 돌아간다. 봉례가 이르기를, “사조(賜胙)”라고 하면, 자리에 있는 여러 관리 및 학생들은 모두 재배하는데, 이미 음복한 자는 절하지 않는다.송신(送神). 헌가는 고선궁의 「응안지곡」을 연주하고, 향악도 교차로 연주한다. 봉례가 이르기를, “재배”라고 하면, 자리에 있는 여러 관리와 학생들 모두 재배하며, 음악은 한 번만 연주하고 그친다. 알자가 좨주를 인도하고 망예위로 나아가면, 봉례는 찬자를 인솔하고 예감의 동북쪽으로 돌아 나아가 남쪽을 향하고 동쪽을 상석으로 삼는다.앞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절을 올릴 무렵, 축사는 각자 비를 들고 신좌 앞으로 나아가 폐백을 취하고는 서쪽계단으로 내려가서 폐백을 예감에 올려둔다. 마친 이후에 봉례가 이르기를, “묻어도 좋소.”라고 하면, 예감의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4인이 흙을 부어 예감을 반쯤 덮는다. 봉례가 예가 끝났음을 아뢰면, 알자와 찬인은 각각 좨주 이하 여러 향관들을 인도하여 차례로 퇴장한다. 앞서 예가 끝났음을 아뢰었을 때에 봉례는 찬자를 거느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찬인은 어사·축사 이하를 인도하고 모두 집사위(執事位)로 돌아가서 자리를 정하여 서도록 하며, 봉례가 이르기를, “재배”라고 하면 어사 이하 모두 재배한다. 마치면 찬인이 감관·학관·학생, 그리고 공인과 이무를 인도하여서 차례대로 퇴장한다. 그 축판은 재방(齋坊)에서 불사른다.
선종이 예부의 건의를 수용하여 국학의 벽에 72현의 초상을 그리게 하다 선종(宣宗) 8년(1091) 9월 경술 예부(禮部)에서 아뢰기를, “국학(國學)의 벽 위에 72현(賢)의 초상을 그리되 그 위차는 송(宋)의 국자감(國子監)에서 찬한 바 있는 이름의 차례에 의거하고 그 장복(章服)은 모두 10철(哲)을 모방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를 따랐다.
예종이 국학에서 선성과 선사의 신위에 헌작하다 예종(睿宗) 9년(1114) 8월 을묘 왕이 국학(國學)에 나아가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술을 따라 올린 다음 강당에 임어하여서 한림학사(翰林學士) 박승중(朴昇中)으로 하여금 대사성(大司成)을 가차하고 〈『서경(書經)』의〉 「열명(說命)」 3편을 강론하도록 명하였다. 백관 및 생원 700여 인이 뜰에 서서 강론을 듣고는 각각 가송(歌頌)을 올렸다. 〈왕은〉 어제시(御製詩) 한 수를 좌우에 보이고는 각각 화답시를 지어서 진헌하게 하였다.
충정왕 때 석전을 지내면서 최치원과 설총의 신위를 빼버리다 충정왕(忠定王) 3년(1351) 8월 정축 석전(釋奠)을 올릴 적에 당인(唐人) 임거(林巨)가 예법을 알지 못하여, 축판(祝板)에 오류가 생겼다는 이유로 별도로 판을 가져다가 성균관(成均官)으로 하여금 이것을 쓰게 하고는 왕에게 서압도 받지 않는 채 석전을 진행하였다. 〈또한〉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을 삭제하고 제향을 올리지 않았다. 희생도 본래 소 1마리와 양 1마리를 쓰지만, 소를 빼고 양 2마리를 사용하였다.
공민왕 때 문선왕의 소상을 숭문관으로 옮기다 〈공민왕(恭愍王)〉 16년(1367) 7월 경자 문선왕(文宣王)의 소상(塑像)을 숭문관(崇文館)으로 옮기면서 문무백관이 의관을 갖추고 시위하였다.
공민왕이 이색에게 문묘에서 석전을 지내게 하다 〈공민왕(恭愍王)〉 18년(1369) 8월 정묘 삼사우사(三司右使)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문묘(文廟)에서 석전(釋奠)을 지내도록 하였다. 신축년(辛丑年)의 파천 이후로 예문(禮文)이 끊기고 퇴락하면서 석채(釋采)의 의식이 법식에 맞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색이 그 잘못을 고찰하여 바로잡고 여러 생도들을 선발하여 집사(執事)로 삼아 3일간 의식을 익히도록 하니, 예법의 제도가 볼 만하게 되었다.
공민왕이 석전의 삭망제를 다시 지내게 하다 〈공민왕(恭愍王)〉 22년(1373) 3월 비로소 삭망제(朔望祭)를 다시 행하도록 명하였으니, 〈공민왕〉 10년에 남쪽으로 파천했던 이후 폐지하고 행하지 않다가 이제야 다시 거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