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이병교 레오(1813〜 1879)
o 다블뤼 신부, 리델 신부의 복사. 드게트 신부 댁 주인
o 1813년 서울 차동에서 출생. 이후 경향 각지로 이주함
o 1879년 충청도 공주에서 체포되어 서울 우포도청에서 병사로 순교
이병교(李秉敎) 레오는 서울 차동(車洞, 일명 수렛골,현 서을 중구 순 화동 • 의주로)에서 태어났으며,23") 자는 ‘덕경’ (德敬)이었다. 어렸을 때 부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으며, 1836년 초에 입국한 모방(P. Maubant, 羅 베드로) 신부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23” 또 1845 년에 입국한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신부에게 성사를 받 고 복사로 활동했으며,230 231 232) 최지혁(崔智嚇, 요한) 등 여러 교우들과 교류 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6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 교가 입국하자, 레오는 홍봉주(洪鳳周,토마스)의 집에서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에는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신부의 복사도 하였고, 조선에 입국하는 여러 선교사들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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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우포도청등록』, 기묘(1879) 4월 1일. 그의 고향은 경기도 포천 고약리 로도 나온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354번 :『병인치명사적』권6, 45쪽). 또 후자의 기록들에 그의 이름인 것처 럼 기록되어 있는 ‘량아 는 그의 세 례명 레오〔良伊〕의 한자 사음(寫音)을 한글로 적은 것이다.
231)『병인치명사적』권6, 45〜46쪽. 여기에는 레오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경기도 광주에서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도망했 다는 내용이 나온다.
232)위와 같음.『우포도청등록』(1879년 4월 1일)에는 1849년 무렵에 내포 손(孫) 씨 집에서 다블뤼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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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병교 레오는 박해를 피 해 여러 해 동안 숨어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가산을 모두 잃어 어 렵게 지내면서도 신앙생활만은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1868년부터 레오 는 최 지 혁 요 한 등 과 함 께 선 교 사 영 입 을 위 해 노 력 하 였 고 , 그 결 과 1876년 5월 8일(음력 4월 15일)에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신부 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빅토르) 신부가,1877년 9월 24일(음 력 8월 18일)에 리델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오는 1877년에 상경하여 드게트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고, 이후 리델 주교와도 상봉하였다. 당시 그는 충주 서촌의 방축리 (坊築里, 현 충북 음 성군 생극면 방축리)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진잠(鎭岑, 현 대전시 유성 구 원내동)으로 이주하였다.234)
1877년 8월(음력) 최지혁 요한이 진잠에 살던 이병교 레오에게 연락 하여 드게트 신부가 거처할 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자, 레오는 용인 공 수동(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독성리)에 집을 마련하고 교우들 과 함께 드게트 신부를 모셨다. 이로부터 얼마 뒤 드게트 신부는 레오의 아들 이경빈(李景彬, 요한)을 복사로 삼아 교우촌 순방을 떠났고,233 234 235> 1878년 초에는 리델 주교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후 레오는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공주의 서림촌(西林村)에 집을 사서 살게 되었다.236) 그리고 얼마 뒤에는 드게트 신부가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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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우포도청등록』, 1879년 4월 1일 :『좌포도청등록』, 1866년 10월 6일.
234)〈리델 주교가 형 루이에게 보낸 1876년 5월 14일자 서한〉, 파리외방전교 회 고문서, Vol. 580, p. 86 :〈블랑 신부가 누이에게 보낸 1876년 5월 19일자 서한〉,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Vol. 580, p. 109 :〈리델 주교가 파리 지도자들에게 보낸 1877년 10월 3일자 서한〉, 파리외방전교회 고문 서,Vol. 580, p. 238 :『우포도청등록』,1879년 4월 1일.
235)펠릭스 클레르 리델 지음, 유소연 옮김,『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살림, 2008, 68〜69쪽.
236)『우포도청등록』, 1879년 4월 1일. 공주 서림촌은 다른 기록에 공수원(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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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함께 생활하였고, 1879년 5월 16일(음력 윤3월 26일)에는 밀고자 를 앞세운 경포와 공주 포교가 그곳으로 들이닥쳐 신자들을 체포한 뒤, 드게트 신부와 레오, 김덕빈(金德彬,바오로), 이용헌(李容憲,이시도 르) 등을 서 울 포도청 으로 압송하였다.23”
체포된 직후 레오는 집안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보도록 했고, 서울로 압송될 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 함께 가던 아들 요한이 만류하자, 레오는 “내가 다른 때에는 생명이 아까워 서 못했지만, 지금은 무서울 것이 없다. 주님의 명으로 이렇게 체포되 어 서울로 가니 즐겁다.”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아들에게는 도망을 권 유하였다.
이내 서울 우포도청에 도착한 이병교 레오는 문초와 형벌 중에도 교우 를 밀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만 번을 죽는다 해도 오랫동안 봉행해 온 천주교를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 다. 그런 다음 옥에 갇혀 2개월 여 동안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으 며, 거기에 병까지 얻어 고초를 겪다가 1879년 8월 8일(음력 6월 21일) 에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66세였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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煩院) 새터(현 충남 공주군 우성면 용봉리)로 나온다(『우포도청등록』, 1879년 4월 1 • 9일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 리 번호 55번).
237) 〈드게트 신부 약전〉,『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I』, 함경도천주교회사간행사 업회,1995, 60쪽 :『병인치명사적』권2, 20〜21쪽.
238)〈드게트 신부가 델페슈 신부에게 보낸 1879년 11월 21일자 서한〉,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 Vol. 580, p. 740 :『우포도청등록』, 1879년 4월 1일 :『병인치명사적』권6, 49〜50쪽.『치명일기』(정리 번호 354번)에는 레 오의 순교일이 8월 7일(음력 6월 20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