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憲廟 尹膺善 成載璜 崔鍾駿 有碑 鄭虁和 有碑 尹滋一 有碑 金在鶴 善治 鄭紀承 勤農興學 洪肯謨 柳敎祚
★高廟 李賢器 尹秉成 善政 李寅赫 金洛鉉 愛民興學 申泰榮 善治 李周弼 善政 李徹愚 有治績 鄭東箕 著治聲
李宰夏 有茂績 金蘭圭
★ 建陽 金熙元
★ 光武 安璋遠 金商弼 李根榮 金璜鎭
★ 隆熙 李載宅 權重萬 朴敏夏
★大正三年移管金泉郡
■가계
■이력
1870사도봉사, 1872효창원직장, 1873전설별제, 사복주부, 1874건원릉령, 1877사직령, 1878장릉령, 정릉령, 1880명릉령
1881지례현감, 1885함평현감, 석성현감, 1886시흥현령, 1888경산현령, 1888함평현감, 1891풍기군수,
■기록
○승정원일기 2885책 (탈초본 133책) 고종 18년 3월 7일 기사 28/33 기사 1881년
李周弼爲知禮縣監
○승정원일기 3023책 (탈초본 138책) 고종 29년 윤 6월 11일 정묘 16/21 기사 1892년
吏曹啓目粘連, 觀此全羅道暗行御史李冕相書啓....咸平前縣監李周弼段, 訟非賂錢則不成, 勒奪農牛百餘, 專出肥己, 加捧需價五兩, 不念窮歲〈毒〉捧私債, 姜[飢]民, 不免杖下之魂, 任房之改差, 惟視賂之多少, 似此鄙貪之無厭, 不可以已遞而勿論是如爲白乎
○지산유고 : 止山遺稿 저 이기찬 (李起璨 , 1853 ~ 1908) 義兵將 止山 李起璨先生의 倡義 日記
▶丙申年(1896년) 二月 十六日
知禮李周弼來見. 以其子不堪運粮 縷縷懇辭之際 邑人三四十突入陣中 稱以渠亦倡義 以主將無人來迎 周弼云而其實困我也. 乃責之曰 名以士子而越犯義陣禮乎. 托以迎將 强迫登壇義乎. 必是 宰與周弼 謀所以害我 驅民犯陣者也. 旣知其不能沮義 而辭窮自退然. 昇乎數百年 民不知兵 兵不鍊戰 本陣士卒 魂奪魄礻+虎 復稍稍而集士曰 歸而募兵 兵曰, 有寇在垣鎭定不得矣.
이월 십육일 知禮에서 李周弼이 와서 접견하였다. 그 자식이 運粮(운량)을 감당하지 못한 까닭으로 자세하고 간곡하게 말을 하는 즈음 邑人(읍인) 삼사십 명이 진중에 돌입하여 그 사람이 또한 창의한 것을 칭찬하며 주인이 거느린 사람이 없으니 맞이하러 왔다고 하니. 周弼(주필)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진실로 나를 곤란하게 하는구나." 라고 하여,
이에 꾸짖어 말하기를 "명망 있는 사림의 자제들이 義陣(의진)을 범한 것이 禮(예)인가?"라고 하니,
"등을 밀어 장수를 맞이하고 억지로 다그쳐서 단에 오르는 것이 義인가?" 하였다.
필시 邑宰 李在夏와 李周弼은 나를 해칠 것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몰고 와서 義陣(의진)을 범한 사람이다. 이미 義兵(의병)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서 말을 마치고 스스로 端雅(단아)하게 물러났다.
나라가 태평한지 수 백년 백성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고 군사들이 전투를 훈련하지 아니하여 本陣(본진)의 士卒(사졸)들이 혼을 잃고 두려워하며 다시 점점 줄어들기에 군사를 모아놓고 말하기를 "돌아가서 군사를 모병 하라."라고 하니 병졸이 말하기를 "도둑이 담장 안에 있으니 진압하여 평정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였다.
▶丙申年(1896년) 三月 初七日
初七日 副長前郡守 李周弼來見 參謀將前參奉 曺奭永來見 前後助用軍需代錢 不滿千金 鄙吝如此
삼월 초이레 副長(부장) 前郡守(전군수) 李周弼(이주필)이 와서 접견하였다. 參謀將(참모장) 前參奉(전참봉) 曺錫永(조석영)이 와서 접견하였다. 앞뒤에서 도와주어서 사용한 군수대전(軍資金)이 千金(천금)을 넘지 않으니 인색함이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