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에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답을 찾기 위해 숙고할수록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가면을 쓰고 사는 것 같다.
양스위엔은「당신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나요」에서 "우리는 각자 '서사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서사적 자아는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성, 행동, 태도, 감정, 생각 등이 모두 합쳐진 개념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신의 표현과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자기표현을 일정 기간 계속하면 서사적 자아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표현을 쉽게 할 수 있다.
하루 생활 중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시간은 많지 않다. 은퇴 후에는 시간이 나면 시골집에 간다. 시골집은 방이 세 개인데 두 개는 보일러방이고 한 개는 온돌방이다. 날씨가 쌀쌀하거나 방이 눅눅하면 군불을 땐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하거나 소죽을 끓이던 시절에는 따로 불을 땔 필요가 없었다. 보일러가 보급되고 가전제품으로 음식을 요리하는 요즘은 군불이 필요하다. 살다보면 군더더기 같은 인생을 살기도하고 군식구들과 군음식을 먹기도 한다.
수확을 마친 옥수수대, 들깨, 가지, 고추 줄기를 말려 놓았다가 불쏘시개로 쓴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면 그 나름의 향기를 머금은 연기가 난다. 불이 달아오르면 장작을 올려놓는다. 아궁이의 불은 날름거리다가 굴뚝용 흡출기를 작동하면 부넘기를 넘어 고래로 쑥 빨려 들어간다. 가져온 고구마 두 개를 알루미늄 포일에 싸 놓고 불꽃에 맞추어 장작을 넣는다. 불이 춤추고 아궁이 앞이 따뜻해지면 부지깽이로 무엇이든지 그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불놀이가 된다.
이때부터 나만의 시간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도 시간이 남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비교해 본다. 가장으로서의 모습도 생각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몇 개의 가면을 쓰고 말이다.
마음의 가면은 자아와 다르게 행동할 때 나타나며 얼굴을 감추거나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을 때 가면을 쓴다.
"직업상 이런 행동은 옳지 않아. 하지만 하고 싶어"
"남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그런데 하고 싶어"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잘 안되네"
"이건 조직을 위해서 꼭 해야하는 일이야. 약간의 희생은 필요해"
"나는 바로 가고 싶은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많은 선택과 물음이 있을 때마다 환경에 맞는 얼굴로 살아왔다. 진심이든 아니든 간에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적당한 표정과 웃음으로 살아온 것이다.
방이 따뜻해지면 아궁이의 잔불을 정리하고 알루미늄 포일에 싼 고구마를 알불에 묻는다. 가마솥의 물을 퍼내고 녹이 슬지않게 물기를 닦아낸다. 어릴 때는 알루미늄 포일이 없어 고구마를 재에 묻고 알불을 올려 구워 먹었다. 이젠 정리가 끝난 아궁이 앞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호호불며 먹으면 된다.
우리는 눈과 체형만을 보고 상대방을 상상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했다. 마스크 쓴 세상을 살아온 것이다. 가면이라 해서 모두 부정적인 건 아니지만 뒤돌아보니 부정적인 가면이 더 많다.
칼 로즈스는「진정한 사람되기」에서 ''개인은 조금씩 세상에 내보인 가면 너머의 것을 탐험한다. 자기 자신도 속아왔던 가면 너머의 모습을. 그래서 개인은 점점 더 자신의 모습이 되어 간다. 타인에게 맞추어왔던 겉모습, 모든 감정을 차갑게 부인했던 모습, 냉철한 합리화를 모두 벗어 던지고 살아 숨 쉬고 느끼고 동요하는 모습으로 변한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스스로에게 부끄럼이 없는지, 세상의 눈치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지는 않는지 묻는다. 그리고 겹겹이 쓴 가면을 하나둘 벗겨 일렁이는 불꽃에 내던진다.
2024.11.1. 김주희
첫댓글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실된 자아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