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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동(2024.9.22./ 창조절 제4주일)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가복음 8:27-3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넷째 주일이다. 이제 비로소 가을이 오는 모양이다. 지난 추석 전에는 문수산성교회를 다니던 해병 하사 이봉준 집사님이 햅쌀을 직접 가져왔다. 폭염 속에도 어김없이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의 수고가 참으로 귀하다.
가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고르라면 ‘가을편지’이다.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난 김민기 님의 노래가 입가에 맴돌 때 진짜 가을이 온 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바로 ‘내 기쁨의 그대’를 찾는 일이다.
창조절은 자연뿐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예전의 불편한 관계가 있다면 다시 풀고, 어쩡한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더 많은 격려와 배려가 필요한 계절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는 일 년 365일, 평소와 평생, 내 사는 모든 날 동안 가장 소중한 시간과 기회일 것이다.
1)
어제 그제 이틀 동안 국제컨퍼런스에 다녀왔다. 외국에서 온 손님들과 5끼를 함께 먹었다. NCCK 100주년과 도잔소회의 40주년을 맞아 세계 열 몇 개 나라에서 방문하였다.
세계교회와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방문한 그들은 대체 왜 한국을 방문한 것일까? 단순한 선교 비지니스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같은 고백으로 기도하고, 같은 고백으로 찬양할 수있는 힘은 무엇일까?
바로 오늘 설교 제목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
원어인 그리스어든, 영어든, 독일어든, 스페인어든 중국어든 일치된 공통의 고백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같은 믿음, 같은 실천이다.
우리가 믿고 또 바라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을 묻고, 또 그 결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손꼽는다. 이것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사람의 위대한 인물에 머물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이다. 메시야는 ‘기름부음 받은 종’이란 뜻인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신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이 메시야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너무나 지당한 고백이지만, 그 고백처럼 살기는 쉽지 않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변질을 유혹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주님이 나의 그리스도 됨을 인정하고, 내 삶을 통해, 내 생명을 다해 고백해야 한다.
세상에 메시야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많다. 그들은 대개 종교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이단의 교주는 예수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다. 애초에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처럼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기름 받은 종, 메시야, 심지어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복음을 위장한 거짓 복음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경영방식으로, 무엇보다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기성 종교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통해 성장하였다. 신비주의와 신격화를 통해 하나님을 자처한다.
겸손과 자기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길과는 정반대로 걸으면서 다시 오실 재림주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현혹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배워서 아는 존재가 아니다. 저절로 깨닫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만나고, 내가 경험해야 할 주님이시다. 우리 믿음의 근본과 기초는 예수님과 나 자신과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그리스도이시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갈릴리 북쪽 빌립보 가이사랴(바니야스)에 가셨다. 그 도시는 로마 황제의 명예를 위해 분봉 왕 빌립이 건설한 것이다. 황제 숭배를 위한 거대한 신전 규모가 크고, 화려하였다. 모든 우상을 대표할 만한 위상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곳을 지나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
제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여론을 전한다. 예수님을 가리켜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였다. 죽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나타났다고 하였다. 또 다시 오시기로 예언된 어떤 선지자라고 한다고 하였다.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온갖 기적을 행하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관심사였다.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시던 예수님은 왜 이런 질문을 던지셨을까?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으시는 이유가 있다. 제자들은 거대한 황제 숭배 신전 앞에서 그 규모에 주눅 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세상 왕국의 권력 앞에서 기가 죽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물으신다. 네가 마음으로 믿는 신이 이런 규모와 권위를 자랑하는 우상이냐?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인가? 그래서 다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변자로서 고백한다. 그의 생각은 일반 사람들의 모든 생각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
2)
대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등장할 만한 다른 인물로 투사해 보았다. 죽은 세례 요한이 아닐까, 다시 오기로 약속한 엘리야가 아닐까.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이 위대한 점은 누구를 빗대서가 아니라, 영웅과 같은 인물을 투사해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직접 그리스도로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지, 어떤 다른 인물의 대리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보고 어떤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였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일찍이 아깝게도 실패한 영웅들의 모습이었다.
4복음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언하기 위한 책이다. 요한복음은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우리가 예수님을 알려거든 성경에 등장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가를, 고백했는가를, 주님과 더불어 살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자기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됨은 어떤 모습일까?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란 말을 소문 내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진정으로 메시야의 길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
장차 자기에게 일어날 일, 곧 수난을 밝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미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기대하는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외면하고 싶은 고난이란 방법을 통해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31).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이름대신 인자라는 자기표현을 사용하시면 곧 닥칠 불가피한 수난과 부활에 관해서 드러내놓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신다. 세상의 우상은 영광과 권위와 규모의 논리를 통해 자기를 과시하려고 한다. 왕국을 건설하고, 경제적 성공을 기반으로 삼으려고 한다.
예를들어 온갖 이단들의 공통점은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는 점이다. 거짓이나 추문이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엄청난 규모의 신전과 같은 건물을 짓고, 교인들을 동원하고, 행사를 벌인다.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여 교주의 영광을 보여주고, 물량적인 것에 주눅 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과 방식이 전혀 달랐다. 영광과 축복을 남발해도 모자랄 정도인데, 외려 수난과 십자가를 말씀하신다.
얼마 전까지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비유를 사용해 에둘러 표현하셨다. 제자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주는 그리스도’란 고백을 듣고 나서 이제 제자들이 또 다른 오해를 할까 싶어, 또 제자들에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당장 베드로가 주님의 길을 가로 막고 나섰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당하는 수난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였다. 베드로의 만류에 대해 예수님은 적대자를 꾸짖듯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
베드로는 위대한 고백 후에 헛발질을 한 셈이다. 위대한 고백으로 천국의 열쇠를 얻게 된 베드로이지만, 순식간에 주님의 길을 가로막은 사탄이 되고 말았다. 베드로에게는 한편으로는 거룩한 갈망이 불붙듯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적 욕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천국의 열쇠를 지고, 주님의 길을 거스르는 모습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차렷’이란 말이 있다. 지금까지 어수선한 동작을 정리하고 집중하라는 것이다. 본래 예전에는 ‘차렷’이 아니라 ‘정신 차렷!’이었다. 그런데 요즘 군대는 차렷만으로는 안 된다고 한다. 산만한 젊은이들에게 몸만 집중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렷이 아니라 ‘정신 차렷’을 해야 한다고 한다. 나이 드신 분들은 그때는 군인이 정말 군인 같았다고 한다.
정말 제자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예수님은 정신교육을 다시 시키신다. 인간은 너무 무력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따르려면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3)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란 어떤 의미일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공통된 고백 때문에 세계 그리스도인이 함께 한다. 그리스도인의 일치 운동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꾸 차이를 강조하지만, 차이는 차이일 뿐 다름이 아니다. 주는 그리스도란 의미는 이런 것이다.
-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 주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 동의하고 참여하겠습니다.
- 악, 부패, 억압, 갈등, 탐욕,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실천하겠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사랑하겠습니다.
- 복음의 증인으로 복음의 여정을 이어가겠습니다.
- 하나님의 감탄사인 “참 좋구나”로 내 삶을 채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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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다. 본래 기름은 탈진한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열을 내리게 하고, 고통을 덜어주는 약으로 쓰였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기름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메시야를 그리스도로 불렀다.
교부들은 예수님을 ‘따라 놓은 향수’(아 1:3)라고 고백하였다. 이런 고백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의 향유와 함께 우리의 육신 속으로 흘러 들어오신 뒤 그 향유로 인해 그리스도로 불리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흘러넘치고 하나님의 영이 쏟아 부어진 그 분, 그 분만이 이 이름의 유일한 주인이시다, 라는 믿음이었다.
“당신은 가장 낮은 곳의 바다 나는 어디쯤에서 바다로 흐르는 물입니다”(정명성).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철저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심지어 목숨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운 그런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과 선포된 복음은 너무도 크고 중요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숨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어느 한 순간 극적인 드라마와 같지 않다.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이번에 컨퍼런스에서 만난 미국 그리스도(제자) 교단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오래전에 미국 10여개 교단이 모여 교단 이름을 모두 같은 신앙고백인 ‘그리스도’라 하고 자기 교단 이름은 그리스도 뒤에 괄호를 만들어 그 안에 넣기로 하자고 뜻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그리스도(제자)교회’만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별명이 ‘괄호 교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동행자이고, 우리 인생의 목적지이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하나님의 기름,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다. 그 이름 안에 하나님을 닮은 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시고, 아름다움을 복원시키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있다.
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나는 괄호 안에 존재한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복될까? 예수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신다.
그런 나를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같이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