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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82회>
눈보라를 헤치고 나선 운주길, 백제의 견훤과 신검의 대군은 고려가 포위해놓은 벌판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습기와 과로로 견훤의 병은 더욱 악화되고 때아닌 추위로 병사들이 얼어죽으면서 견훤은 결국 회군을 명하고 기회를 빼앗긴 신검은 아버지를 원망하는데... 사면이 포위된 상황. 백제는 화친문서를 보내 시간을 벌고자 하지만 백제의 약점을 본 고려의 왕건은 고심 끝에 공격을 명하고 백제의 책사들은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는데...
씬 어느 들판 길 (낮)
신검의 군대가 오고 있다. 바람은 여전하다. 이제는 진눈깨비마저 날리고 있다. 신검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런 하늘을 본다. 멀리서 고려의 첩자가 숨어 보고 있다가 모습을 감춘다. 신검의 군사들은 갑작스런 추위에 손을 불고 몸을 떨며 지나쳐 가고 있다.
씬 그곳 어느 산길
조금 전의 신검의 군대를 보았던 첨병이 숨가쁘게 지나쳐 사라져 간다. 그렇게 멀어지면...
씬 왕건의 영채
산 중턱에 왕건과 이치, 유금필, 그리고 제장들이 모여 있다. 유금필이 방금 돌아온 첨병을 보고 있다.
유금필 드디어 백제군이 이 운주 안으로 들어섰다는 말이냐?
첨병 그러하옵니다, 총사. 그것도 정확히 우리 군이 삼면을 포위해 놓은 벌판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확인했사옵니다.
왕건 백제의 왕도 오고 있더냐?
첨병 백제의 왕은 볼 수가 없었사옵니다. 다만 왕이 탄 듯한 마차 하나가 군사들에게 호위되어 오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왕건 마차가........? 아니, 전장터에 나오면서 마차를 타고 나왔다는 말이냐? 더구나 이 산악전에.....?
이치 소장이 말하지 않았사옵니까? 백제군에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하옵니다.
배현경 그러하옵니다, 폐하. 지리적으로 우리보다 갑절이나 빠른 저들이 이제서야 도착을 했사옵니다. 이것은 저들 진중에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하옵니다.
홍유 소장의 생각도 그와 같사옵니다. 아무래도 견훤왕에게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아보이옵니다. 그 사람의 평소 성격이 마차나 타고 전장터에 나올 인물이 아니옵니다.
왕건 그래... 그건 그러하오. 나도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오.
복지겸 우선 백제군이 어디에 영채를 세우고 있는가를 보다 정확히 알 필요가 있사옵니다.
염상 이미 우리 군이 포위해 놓은 벌판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하지 않사옵니까?
왕건 알 수 없는 일이야. 저들도 첨병을 보냈을 것이고 우리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을 것인데 무리하게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고 있어.
이치 그것이 운주의 특별한 지형 때문이옵니다. 누군가 이곳에 와서 선점을 하는 군대가 그만큼 유리한 곳이옵니다. 아마도 백제군은 그곳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저쯤해서 우리 동정을 계속 살피려 할 것이옵니다.
왕건 (지형도 보며) 그나마 우리가 반나절을 먼저 와서 이렇게 여기, 여기, 여기.. 삼면에 군사를 배치한 것은 아주 잘한 것 같소이다. 다 이치 장군의 덕이오.
이치 폐하의 복이시지 신의 공은 아니옵니다. 이번 전투는 폐하께서 이미 선점을 하셨사옵니다. 허허허.....
박술희 장담만 할 것이 아니올시다. 저들이 그렇게 무모하게 올 이유가 있소이까? 일단 적진을 계속해 살펴보면서 충분하게 대처하는 여유가 필요할 것 같소이다.
이치 물론입니다. 자, 총사..?
유금필 말씀하시오. 이장군.
이치 말씀드린 것처럼 운주 일대는 이 사람이 훤하오이다. 본군은 유장군이 맡으시고 퇴로는 우리가 맡겠소이다.
박수문 벌써 퇴로를 운운하시오이까?
이치 하하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겼다고 말입니다. 좋은 지형도 선점을 한데다가 날씨마저 갑자기 얼어붙고 있습니다. 첨병들의 말을 들으니 백제군은 겨울 준비를 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추울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반면에 폐하의 군대는 북쪽에서 왔기 때문에 추위에 강하오이다. 게다가 백제군의 내부에 뭔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오이다. 이미 이 전투는 결론이 났소이다.
왕건 뭘까...? 저들 내부에 생긴 일이라는 것이 과연 뭘까.......?
유금필 어쨌든 우리는 적진을 다 파악했사옵니다. 군대는 오 천의 갑사가 왔다는 것이고 견훤왕의 주변에 일이 생겼다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저들은 별 준비 없이 서둘러 이곳에 오기에 바빴사옵니다. 이제 마지막 전략을 점검하고 공격준비를 해야 할 것이옵니다.
왕건 그리하도록 하십시다.
씬 운주 근처 벌판
신검의 군대가 오다가 행렬을 멈춘다. 그리고 주변 산과 들을 본다. 진눈깨비가 점점 커지고 있다.
신검 이건 벌써 눈이 오는 것이 아닌가?
양검 그런 것 같사옵니다, 총사.
신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추위가 오고 있어. 이번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속전속결로 끝을 내야해.
종훈 여러모로 양쪽 전력을 비교해 볼 때 우리보다는 고려군이 갑절이나 되는 먼길을 돌아왔사옵니다. 그쪽의 군대가 더 피곤하고 어려울 것이옵니다.
박영규 모르는 말씀... 저들이 먼저 운주에 와 있다면 전략적인 좋은 위치는 다 차지하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공격을 받는 쪽이 되고 저들은 공격을 하는 쪽이 됩니다. 유리할 것 없습니다.
애술 그건 그렇소이다. 박장군의 말씀이 옳아요. 예정대로라면 고려군이 지금쯤 와 있을 것이외다.
신덕 앞에 첨병을 띄워 놓았으니 소식을 기다리기로 하십시다. 이제 거의 운주에 온 것 같습니다.
최필 총사, 운주는 불과 여기서 십여 리도 채 아니 되옵니다. 이쯤해서 진을 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김총 최필 장군의 말이 옳사옵니다. 이쯤해서 다시 군을 정비하시오소서.
상귀 그리하시오소서, 총사.
신검은 주변을 돌아보며 끄덕인다. 그들의 시야로 산 구릉들이 겹겹이 보여온다. 이미 등성이마다 하얗게 눈이 쌓였다. 저만큼 견훤이 탄 마차가 보인다.
신검 여기다 영채를 세울 것이다. 각 군대는 대오를 나누어 군영을 새워라. 그리고 폐하를 어서 군막으로 뫼시어라. 여기다 본영을 삼을 것이다.
신덕 군영을 세워라. 파달 장군은 부장들을 재촉하라. 속히 대오를 나누어 군영을 세워라. 그리고 공격대형을 갖추어라. 대형을 갖추어라.
부장들 (복창한다) 대오를 갖추어라... 군영을 세워라.....
군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신검의 표정에서 저만큼 옮겨지고 있는 견훤의 마차가 보인다. 어둠이 내리고 있다.
씬 그 군막 안 (밤)
견훤이 밖으로부터 옮겨 들어와 마련된 침상에 눕는다. 여전히 군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바람 소리, 소리..... 견훤은 더더욱 힘이 들어 보인다. 병색이 완연하다. 목소리도 떨리고 힘이 빠졌다. 내관이 화롯불을 가져다주고 나간다.
견훤 바람소리가...... 극성....이구나.... 운주에... 다... 온 것인가...?
훈겸 예, 폐하. 그러하옵니다. 신은 너무도 불안하고 두렵사옵니다. 폐하께오서는... 이미 버티실 근력을 다 잃으셨사옵니다. 등창이 더더욱 승해서 견디시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견훤 그래... 힘이 들고... 자꾸.. 열이 나고... 숨마저 가쁘고... 이 열을.. 내릴 약이 좀... 없는가...? 자꾸만... 정신이 흐려지는구나...
훈겸 송구하옵니다, 폐하. 약이 듣지를 않사옵니다. 요양을 하시면 탕재를 하셔야 하옵니다. 그렇지 못하니 약이 듣지를 않는 것이옵니다.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폐하...?
견훤 모두들....... 어찌들 하고.. 있는가...?
훈겸 이미 전투 준비들을 마쳤다 하옵니다.
견훤 그래....? 왕건 아우도..... 여기 와 있겠지....? 왕건 아우도.....?
견훤은 헐떡이며 그렇게 말한다. 너무도 괴로워 보인다.
씬 신검의 군영 마당
수없이 늘어진 영채들 사이를 신검이 보고 있다. 멀리서 두 필의 말이 달려와 지나쳐 간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 급히 군막으로 가면....
씬 신검의 군막 안
정탐병들이 들어와 군례를 한다. 신검, 양검, 용검, 금강, 최승우, 종훈, 박영규, 신덕, 최필, 애술, 김총, 상귀, 파달, 상애들이 함께 해 있다.
신덕 너희들은 어젯밤에 나갔던 첨병들이로구나. 그래 고려군은 어찌되었느냐?
군사 고려군은 이곳에서 불과 십여 리 밖에 둔을 치고 있사옵니다.
최필 고려군은 얼마나 되느냐?
군사 줄잡아 처음에는 오 천이 되어 보였사옵니다마는 그중 이 천이 양쪽으로 나뉘어 사라졌고 천여 명이 앞을 막고 있사옵니다.
최승우 이천 정도가 사라졌다...?
군사 예, 파진찬 어른.
최승우 복병이올습니다, 총사. 저들이 매복에 들어간 것을 뜻하옵니다. 그 매복지점을 모른다는 말이냐?
군사 예, 파진찬 어른. 소인들은 이곳 지형에 어두운데다가 행동을 넓게 할 수 없어 끝까지 쫓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최승우 매복이옵니다. 조심해야 할 것이옵니다.
신검 (끄덕이고 나서) .... 고려의 왕은 함께 왔더냐?
군사 예, 총사. 고려의 왕이 분명히 와 있음을 보았사옵니다. 지금 우리 앞을 막고 있는 본군에 있사옵니다.
금강 그리고 누구 누구가 나와 있던가? 장수들 말이다.
군사 장수 유금필을 비롯하여....
애술 누구...? 유금필....?
군사 예, 장군. 하옵고 전의 성주 이치가 앞을 서고 있고 그 주변으로 배현경, 홍유, 박술희, 박수문 같은 장수들이 모두 와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신검 처음부터 누가 먼저 운주에 도착하느냐가 관건이었어요. 그러나 실망할 것은 없소이다. 할만 합니다.
종훈 그렇사옵니다. 결국은 군사들이 싸우는 일이옵니다. 적도 우리도 서로 군세가 비슷하옵니다. 싸워볼 만 하옵니다.
신검 옳은 말이오. 겁을 먹을 이유가 없소이다. 그러나 문제는 폐하의 환후와 더불어 이 빌어먹을 추위올시다. 엄청난 추위예요.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다 꽁꽁 얼어붙고 있소이다.
박영규 그리고 두려운 것은 이 추위에 대한 아무 대비도 없다는 것이옵니다. 군사들 말이옵니다. 이 밤 사이로 얼마나 얼어죽을지 아무도 모르옵니다.
신검 하나부터 열까지 이번 일은 다 꼬이고만 있어. 며칠 씩 비가 쏟아지더니 갑자기 살인적인 맹 추위가 몰아닥치고 있어.
양검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왔사옵니다. 우리가 힘이 들면 적 또한 힘이 드는 법이옵니다. 이번 운주전투는 명실상부하게 형님의 모든 운명이 걸려있는 전투이옵니다. 싸워야하고 이겨야 하옵니다.
신검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럴 각오로 이곳에 온 것이야. 허나 우선 이 밤을 나는 것이 당장 문제다. 이 추위 말이다. 그리고 저들이 어디다 매복을 두었는지도 알아보아야 할 일이고... 그렇지, 그리고 아버님... 아버님은 지금쯤 어찌 되셨는고..?
씬 견훤의 군막 안
정신은 있으나 견훤은 완전히 기력을 잃었다. 여전히 울부짖는 바람소리만 삭막하게 들려오고 있다.
견훤 아직도... 전투를.. 아니 하는 모양이지...?
훈겸 예, 폐하. 날이 어두웠사옵니다.
견훤 춥구나... 엄청나게 추워.... 아직도... 제장들이 회의 중인가...?
훈겸 그런 것으로 아옵니다.
견훤 (눈물 글썽이며) 이 하찮은 등창 하나가... 짐을 잡는구나.. 이 작은 종기 하나가 나를 잡아... 왕건 아우가.. 왔다고 했지...?
훈겸 그렇다 들었사옵니다.
견훤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 모양이다... 하늘이..... (사이) 내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훈겸 어서 돌아가시어 요양을 하시는 길이 최선이옵니다. 그 이외에는 신도 장담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그때, 군막 문을 열고 신검 형제들과 최승우, 박영규가 들어선다. 모두 예를 취한다. 견훤이 힘없이 본다. 침묵이 흐른다.
견훤 신검아...
신검 예, 폐하.
견훤 밖이 매우 춥다지....?
신검 예, 폐하. 환후는 좀 어떠하시옵니까?
견훤 내가 좀.. 무리를 하였다... 상태가 매우.. 좋지를 않구나.... 싸울 수 있겠느냐...?
신검 어렵기는 하오나 이미 결심이 되어 있사옵니다. 염려 놓으시오소서.
견훤 아무래도... 하늘이 막는 모양이다..... 이 전투는... 어려워 보이는구나...
모두둘 .............
견훤 고려군은... 추위에 강해.... 우리 군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저들이 먼저... 요충지들을 선점했어..
신검 수적으로는 비슷하옵니다. 싸울만 하옵니다.
견훤 아니다. (사이) 전쟁은... 수로 하는 것이 아니야.... 파진찬....?
최승우 예, 폐하.
견훤 그래, 처음부터... 자네 말을.. 들었어야 했어... 무리였지... 지금은... 어떠한가..? 돌아갈 수... 있겠는가...?
최승우 늦기는 하였사오나 그래도 길을 열 수는 있을 것이옵니다.
양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겝니까, 파진찬..? 이대로 돌아가자는 것입니까?
용검 아니 됩니다. 이제 와서 등을 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미 삼면이 적군이라 들었습니다. 후퇴를 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어요. 선택은 싸움밖에 없습니다.
금강 아버님이 위독하십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길 확률도 적사옵니다. 무리를 하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최선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옵니다.
박영규 그렇사옵니다. 회군을 해야 하옵니다, 총사. 이미 폐하께오서도 이 전투의 사정을 읽으셨사옵니다.
신검 ..............
견훤 애꿎은... 병사들이... 불쌍하다... 회군을.. 생각해보거라...
신검 ................ (생각이 많다)
견훤 너의.... 마음을... 안다. 이 아비가... 다 알아...(사이) 이번 전투는.. 어렵다... 인간이 모든 걸... 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자연 앞에서는.. 한낱 미물에 불과한... 법이다... 회군하거라...
신검 아바마마, 이 전투는 아바마마는 물론 소자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 전투이옵니다. 이 신검이가 해 보이겠사옵니다. 처음부터 그리 하셨듯이 지금도 허락하시오소서. 조금만 참아 주시오소서. 해 보이겠사옵니다.
견훤 늦었다... 이미... 떠날 때부터.. 다 늦어 있었다... 처음부터..
신검 아바마마...
견훤 (눈을 감으며) 늦었다...
아무도 말이 없다. 그저 바람 소리만 이들의 침묵과 정적을 깨우고 있다. 신검이 눈을 감고 있는 견훤을 보고 있다. 입술이 할말을 못하고 떨고 있다.
신검 (마음의 소리) 아옵니다, 아바마마.. 사실 처음부터 어려운 전쟁이었사옵니다. 헌데 소자는 앞장을 섰사옵니다. 왜 그랬겠사옵니까? 아바마마 때문이 아니옵니까? 한번만 더 기회를 주마, 한번만 더 기회를 또 주마... 그 기회를 잡아 보거라, 기회를 잡아 보거라... 그래서 이곳 운주까지 밀려왔사옵니다. 언제나 주시지는 않고 주실 듯이 하셨사옵니다. 헌데 지금은 돌아가시자 하시옵니다. 왜 그 다음 말씀은 아니 주시옵니까? 왜요..? 왜요....?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이옵니다. 소자는 그 말씀이 듣고 싶사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온 운주이옵니다. 왜 말씀을 아니 주시는 것이옵니까? 왜요..? 왜요, 아바마마......?
그런 신검의 절망적이고도 답답한 표정에서 천천히 디졸브...
씬 왕건의 군영 그 밤
설경이다.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다. 곳곳에 화톳불이 보인다. 살을 에이는 바람소리에 군사들이 몸을 움츠리며 번을 돌고 있다.
씬 동 왕건의 군막 안
제장들이 모두 모여있다. 심각한 표정들이다.
왕건 아직도 백제군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소이다. 백제의 왕이 오기는 왔으나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어요.
유금필 뿐만 아니옵니다. 비록 전투대형은 갖추었으나 공격할 의지가 크게 보이지 않고 있사옵니다.
홍유 전의 성주 이치 장군은 처음부터 저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보아왔사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맞아 떨어졌사옵니다. 백제왕에게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하옵니다. 사고가 생겼다는 말이옵니다.
복지겸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정탐병들은 분명 백제왕에게 뭔가가 생긴 것을 고해오고 있었사옵니다. 백제왕이 있는 군영 쪽의 경계가 삼엄하다고 하옵니다.
염상 이렇게 계속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이미 적군의 약점이 파악되었사옵니다, 폐하.
유금필 그러하옵니다. 날이 밝는대로 공격을 함이 어떠하오리까?
박수문 복병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윤신달 저들이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어떤 헛점을 노리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옵니다. 좀 더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백제왕은 물론 그 아들 신검이도 왔고 또한 백제의 천재라는 최승우도 와 있는 대규모의 전투이옵니다. 결코 맥없이 당할 저들이 아니옵니다.
왕건 그건 그러하오. 매사 조심을 하면 할수록 좋은 법이오. 오늘 하루만 더 지켜보십시다. 그리고 공격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하십시다. 저들이 퇴로는 이미 이치 장군이 막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배현경 그러하옵니다. 좌우도 우리 군이 각기 일 천씩 노리고 있고 정면에는 폐하의 본군이 있으며 이치 장군이 저들의 후미 쪽으로 갔사옵니다.
왕건 엄청난 냉파가 몰려들고 있는데 병사들은 어찌하고 있소이까?
배현경 우리 군사들은 평소부터 추위에 익숙해져 있어 나름대로 그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알고 있사옵니다. 심려치 마시오소서.
왕건 하지만 갑작스런 추위올시다. 아주 맹추위에요. 엄청난 동장군이에요.
유금필 그래서 내일 아침 공격이 적기라는 것이옵니다. 해가 떠오를 무렵이면 새벽보다 더 심한 추위가 밀려오는 법이옵니다. 그 떄를 기하여 공격을 한다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왕건 기다려보세. 내일 하루만 더 기다려보세. 보다 확실한 저들의 사정을 살펴보자는 것이야.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고려군이 뭔가 유리해지고 있다는 것이야. 기다려보세. 여유를 가지고 말이야.... 다시 한번 내의성령의 점괘에 기대를 해 보세나. 우리가 대승을 한다고 하였던가..?
최지몽 예, 폐하. 모든 점괘가 다 이루어지고 있사옵니다.
왕건 (끄덕이며 미소) 그래, 그런 느낌이 들어....
씬 신검의 군영 부감 (새벽)
엄청난 한파다. 군사들이 곳곳에 비실대며 쓰러져 있다. 삭풍이 모든 것을 휩쓸고 있다. 곳곳에 병사들이 죽어있다. 바람소리가 마치 비명소리처럼 온 들판을 휩쓸고 있다. 곳곳에서 파달, 상애들이 부장들을 이끌고 횃불을 들고 병사들을 흔들거나 걷어차며 깨우고 있다.
파달 잠이 들면 아니 된다. 눈을 뜨거라. 움직여라. 눈을 감으면 죽는다. 눈을 떠라.
상귀 눈을 떠라. 눈을 감으면 얼어죽는다. 눈을 떠라...
그렇게 파달, 상귀들이 그들을 깨우지만 이미 죽어가거나 죽어있는 병사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그들이 한숨을 쉬며 계속 깨우고 있다. 그 한쪽으로 방향 감각도 없이 창과 칼을 버리고 걸어가는 병사들이 곳곳에 보인다. 상애가 보고 소리친다.
상애 어디로들 가는 것이냐? 돌아오라. 탈출병은 모두 참수한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활을 쏘아라.. 무엇들 하느냐? 활을 쏘아라.
상애와 함께 온 군사들이 활을 쏜다. 걸어가던 병사들이 맥없이 쓰러진다. 그런데도 또 한쪽으로 군사들이 아무 의식 없이 가고 있다.
상애 돌아오란 말이다. 돌아와... 이 멍청한 놈들아,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파달 기가 막힌 일이로다. 우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어. 모두 제정신들이 아니야. 오, 이런....
그 위로 서서히 붉은 여명의 아침이 밝고 있다. 바람소리...
씬 신검의 군막 외경
씬 동 군막 안
여전히 제장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신검도 말이 없다. 최승우는 눈을 감고 있다.
애술 총사, 예상대로 지난밤에 얼어죽은 군사의 수가 헤일 수도 없이 많았사옵니다.
신덕 탈주병 또한 수백이 넘는다 하옵니다.
최필 탈주병이 아니옵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이 몽유병자처럼 온기를 찾아 떠난 것이옵니다.
박영규 우리가 염려한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사옵니다. 우리는 이미 싸울 여력을 상실했사옵니다, 총사. 속히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옵니다.
신검 무엇을 말이오?
박영규 폐하께오서도 회군을 권유하셨사옵니다.
신검 이곳에 오자고 하신 분은 바로 폐하이십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가자는 말입니까? 싸움도 해보지 않고 가자는 것입니까? 그래서요..? 그래서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최승우 기회는 또 있고 앞으로도 많사옵니다.
신검 그래요. (한숨)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말이 너무 한가롭게만 들립니다. 또 있다구요..? 그렇지 않을 겝니다.
신덕 총사, 이미 폐하께오서 회군을 하라 하셨다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옵니다.
금강 그러하옵니다. 회군하시오소서, 형님.
신검 이미 우리는 배수의 진을 치고 이곳에 들어왔다. 적은 우리를 삼면으로 포위해 있어. 회군도 그렇게 쉽지가 않게 되었다.
그때, 군막 안으로 파달과 상귀, 상애들이 들어선다.
신검 밖을 돌아보고 온 모양인데 어떻소이까?
상귀 말이 아니옵니다. 도저히 전투는 불가하옵니다. 곳곳에 얼어죽은 병사들이옵고 십여 리 좌우로 적군이 우리를 노리고 있사옵니다.
파달 뿐만 아니옵니다. 우리 후미 쪽으로 전의 성주 이치가 일단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사옵니다.
모두들 ............. (놀란다)
신검 진퇴양난이올시다. 싸울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고...
종훈 어차피 우리가 힘이 들면 저들도 힘이 드옵니다. 문제는 누가 끝까지 남아서 이기느냐 하는 것이옵니다.
신검 (한숨) 아니오. 다들 이미 포기들을 하고 있소이다. 늦었어요. 문제는 어떻게 회군을 하느냐, 하는 것이오. 파진찬 좋은 생각이 있소이까?
최승우 저들은 이미 우리 군의 약한 곳을 훤히 들여다 보았사옵니다. 안전하게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신검 그렇다면 어찌하자는 것이오?
최승우 한쪽으로 저쪽과 시간을 벌면서 한쪽으로는 회군을 하는 길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옵니다.
신검 어떻게 말이오?
최승우 과거에도 폐하와 고려의 왕은 조물성에서 만난 바가 있사옵니다.
신검 이번에도 만나자는 것이오? 아버님은 환후가 중하시오.
최승우 시간을 벌자는 것입니다. 폐하의 친서를 우리가 써 보내어 서로 화친을 청하는 것이지요. 저쪽도 춥고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이옵니다. 싸움도 다 때가 있는 것이니 훗날 좋은 때를 만나 다시 한번 겨룸이 어떠한가 하고 청해보는 것이지요. 애꿎게 불쌍한 군사들만 희생시키지 말자 하는 것이옵니다.
신검 저들이 듣겠소이까?
최승우 한번 해 보는 수밖에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군을 서둘러야 할 것이옵니다.
신검 (끄덕인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 보십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회군을 준비하십시다. 서둘러들 주시오.
모두들 예, 총사.
신검 .................. (답답한 그 한숨과 표정에서)
씬 부감
벌판을 백제의 상귀가 부장 둘을 이끌고 흰 기를 들고 가고 있다. 그렇게 벌판을 달려 사라지면....
씬 왕건의 군영
멀리서 오고 있는 상귀 일행들을 유금필과 제장들이 보고 있다.
박수경 백제군에서 사자가 오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유금필 ............ (끄덕인다)
모두들 그렇게 보고 있고 드디어 상귀 일행이 가까워져 경계병 사이를 지나 이들 앞에 이른다. 그리고 말에서 내린다.
상귀 대 백제국 장수 상귀라 하오이다.
유금필 무슨 일이오.?
상귀 대 백제국 황제 폐하의 친서를 고려국 폐하께 전해 올리러 왔소이다.
부장이 받아 유금필에게 전한다. 유금필이 받아 든다.
유금필 답장을 원하는 것이오?
상귀 그러하오이다.
유금필 기다리시오.
유금필이 안으로 간다. 상귀와 그 일행은 기다린다.
씬 왕건의 군막 안
왕건이 그들이 보낸 친서를 읽고 있다. 견훤의 소리가 들려온다. 유금필, 박술희, 복지겸, 홍유, 배현경, 윤신달, 염상, 왕충, 박수문 형제, 최지몽들이 함께 해 있다.
견훤 (소리) 아우님, 잘 계셨는가..? 생각지도 못한 날씨와 추위 때문에 고생이 피차 많았을 것이네. 어떠한가..? 싸움도 다 때가 있는 법, 이러한 추위 속에서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군주의 도리가 아닐 것일세. 오늘은 서로 물러나서 다음을 기약함이 어떠한가?
왕건 (접으며) 금필 아우도 보았는가?
유금필 예, 폐하.
왕건 일리가 있는 말이 아닌가? 솔직하고 말일세. 사실 이 엄청난 한파 속에서 작은 승리를 얻기 위해 싸운다는 것은 문제가 있네. 얼마나 불쌍한 병사들인가?
유금필 폐하, 저들이 이미 약한 모습을 보여왔사온데 여기에다 인정을 주시려 하시옵니까?
왕건 그 옛날 조물성에서 백제의 왕은 내 곤궁함을 들어주었네. 이번 일이 그와 같지 아니한가?
박술희 이것은 전쟁이지 사사로운 은원관계가 아니옵니다. 조물성에서는 저들도 더 버틸 수가 없어 우리의 청을 들어준 것이옵니다. 지금은 그 때와 다르옵니다.
배현경 그러하옵니다, 폐하. 저들의 청을 들어주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저들의 약점이 이로써 다 확인되었사옵니다.
홍유 하지만 폐하께서 굳이 저들에게 인정을 주시고자 한다면 서로 좋은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유금필 그렇지 않소이다. 저들은 뭔가 문제가 생겼고 자리를 잡지 못해 허둥대고 있사옵니다. 지금이 적기이옵니다. 쳐야 하옵니다.
윤신달 총사의 말에 적극 공감하옵니다. 영을 주시오소서.
왕건 ...............
왕충 영을 주시오소서, 폐하. 공격을 하는데 있어서 시기를 잃게 되면 오히려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옵니다.
왕건 ........ (한참 고민하다가) 제장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공격하십시다. 후미에 가 있는 이치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리시오. 군사를 정비해 놓았으니 곧 공격하도록 하십시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그러나 전쟁은 전쟁이고 기왕에 서신이 왔으니 답을 아니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먹을 가져오게.
내군 부장이 대답하며 먹과 붓을 대령한다. 왕건이 미소를 지으며 뭔가 써내려 간다.
씬 동 군영 마당
유금필이 나와 기다리고 있던 상귀에게 답서를 전한다.
유금필 가서 전하시오. 우리 폐하의 답서요.
상귀 화친이오이까? 전쟁이오이까?
유금필 전쟁이오.
상귀 알겠소이다. 가자.
그들이 말을 타고 돌아간다. 한참을 보고 있다가 유금필이 영을 내린다.
유금필 부장들은 들으라.
부장들 예, 총사.
유금필 폐하의 영이 내리셨다. 전군 전투에 돌입한다. 제장들은 각자의 군대를 인솔하시오. 좌우에 나가있는 군대는 홍유, 윤신달 장군이 맡도록 하시오.
그들 예, 총사.
유금필 본군은 박술희 장군과 함께 이 몸이 맡을 것이오. 복장군께서는 배현경 장군과 함께 폐하를 뫼시도록 하고 왕충, 박수문 장군 형제분은 내 좌우를 맡아 주시오.
그들 예, 총사.
유금필 저들 후미에 나가 있는 이치 장군에게 전령을 띄워라. 곧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전령을 띄워라.
부장들 예, 총사.
삽시간에 상황이 바쁘게 돌아간다. 그 분주한 모습에서 유금필의 표정으로....
씬 신검의 군영
군사들이 모두 전투 준비에 임해 있다. 장수들의 모습도 병사들과 함께 보인다.
씬 신검의 군막 안
신검이 울화가 치미는 표정으로 소리지르고 있다. 양검, 용검, 금강과 더불어 박영규, 최승우가 함께 해 있다.
신검 거절을 하였다는 말이지...? 고려의 왕이 거절을 하였다...? 그럴 테지.. 우리의 약한 모습을 보았는데... 그렇게 할 리가 있는가? 폐하께서는 어찌되었는가?
양검 이미 마차를 준비하여 밖으로 뫼셔 가고 있사옵니다.
신검 적군은....?
용검 벌써 오후가 한참 지났으니 해가 저무는 대로 공격해 올 것이옵니다.
신검 우리가 회군하는 그 후미에 전의 성주 이치가 있다지..?
박영규 그렇다 하오이다, 총사. 하오나 그들의 군대는 얼마 아니된다 들었사옵니다. 문제는 고려의 본군이옵니다. 아무래도 일전이 불가할 것 같사옵니다.
신검 그래도 급할 때에는 형제들이오. 매부께서 금강이와 더불어 아버님을 호위해 빠져나가도록 하시오.
박영규 예, 총사.
신검 어차피 한바탕 해보아야 직성이 풀리게 생겼다.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지. 너희 둘은 나와 함께 저 고려군을 실컷 두들겨주고 가자꾸나. 저들이 이리로 오겠다 하니 잘하면 고려왕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해보자꾸나. 독을 품고 해보자꾸나.
두 형제 예, 총사.
신검 더 이상 별다른 전략이 있을 수 없소이다. 파진찬께서도 아버님과 함께 가보시구려. 연세가 많이 드셔서 우리와 함께 버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최승우 예, 총사.
신검 가자. (나가며) 금강아...?
금강 예, 총사.
신검 아버님 잘 뫼시거라. 그래도 네가 옆에 있으면 많이 든든해하신다. 알겠느냐? 모든 조치는 이미 다 취해놓았다.
금강 예, 총사.
신검 황도까지 아버님을 잘 뫼시지 못하면 너는 군률을 적용 받을 것이다. 잘 뫼시어라. 아버님은 살아 계셔야 한다. 그래서 다음 황제가 옥좌에 오르는 것을 친히 보셔야 한다. 꼭 그리 하셔야 한다. 가자.
신검은 형제들과 함께 그렇게 빠져나간다. 최승우와 박영규, 금강들이 잠시 그렇게 섰다. 박영규가 말한다.
박영규 서두시지요, 파진찬 어른...? 곧 적병이 밀려올 것이옵니다.
최승우 가십시다.
그들도 그곳을 그렇게 빠져나간다.
씬 그 일각
허술한 수레가 기다리고 있다. 견훤이 옮겨지고 있는 것을 박영규, 금강, 최승우들이 보고 있다.
박영규 도대체 이 수레가 다 무엇이란 말이냐? 곧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수레가 아니냐? 이것이 어디 폐하를 뫼실 어차라고 할 수 있겠느냐?
훈겸 박장군, 일부러 그리했다 하오이다. 적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말이오. 종훈 군사가 그리 했다 합니다. 폐하의 어의도 저들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소이다.
최승우 좋은 생각이오. 공산 전투에서 고려의 왕이 군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친 것과 같은 것이올시다. 서두시구려. 시간이 없어요.
박영규 살살 하거라. 폐하께서 힘이 드시다. 조심조심 뫼시어라.
견훤 (옮겨지며) 이보게.. 사위... 드디어... 고려군이 오는 게로군...
박영규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심려치 마시오소서. 무사히 이곳을 나갈 수 있사옵니다.
견훤 늙는 것은... 서러운 것이야. 병든 것도..... 서러운 것이고..... 아니 그런가, 파진찬............?
견훤은 수레 위로 옮겨진다. 훈겸이 옆에 서 있고 또 다시 저만큼에서 최필들이 화려한 진짜 어차를 앞세워 달려온다. 모두들
본다.
최필 박장군, 나는 이 거짓 어차를 호송해 갈 것이오. 저들을 유인하는 동안 뒤따라오다가 추격군을 벗어나 가도록 하시오.
금강 사태가 이토록 위급하다는 말인가?
최필 자, 앞을 설 테니 어서 따르시오.
박영규 저 어차와 사이를 두고 뒤를 따르라. 가자...
최필이 앞서 달려가고 그 한참 사이를 두고 다시 이들 수레가 뒤를 따른다. 누워있는 견훤 위로 허술한 군졸의 옷들이 덮여진다. 그렇게 그들은 멀어진다. 그들 쪽으로 해가 막 넘어가고 있다.
씬 그곳 신검의 군영
신검이 한쪽으로 멀어지고 있는 최필과 견훤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
신검 아버님께서 출발을 하신 모양이다.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 이렇게 참담할 수가 없어. 도대체 이 꼴이 뭐란 말인가?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렇게 가시다니.....
애술 곧 적이 올 것이옵니다, 총사. 우리가 한동안 버터야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신검 알고 있소이다. 그래도 종훈 군사가 좋은 꾀를 낸 것 같소이다. 최필 장군이 이치의 군대를 따돌려야 할 것인데...
종훈 그리 될 것이옵니다. 이치의 군대는 송악에서 온 군사들이 아니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옵니다. 화려한 어차를 보면 그대로 그것만을 쫓을 것이옵니다.
신검 준비들 하십시다. 한식경 정도만 끌다가 후퇴하여 퇴각하도록 하십시다.
모두들 예, 총사.
씬 왕건의 군영 (밤)
막 어둠이 내리고 있다. 그들의 시야로 멀리 들판이 보여온다. 그리고 그곳에 신검군의 깃발들이 아스라이 보인다. 홍유, 윤신달은 보이지 않고 나머지 공격군이 모두 보인다.
유금필 페하, 공격할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왕건 (끄덕이고) 그렇구먼. 어둠이 내렸어. 공격하게. 나는 여기서 본군을 지휘하며 지켜보겠네.
유금필 예, 폐하. (앞으로 나서며) 자, 시간이 되었다. 전군 공격하라
박술희 공격하랍신다... 공격하라... 공격 앞으로....
소라수가 나팔을 불고 이어서 기마병들이 지축을 울리며 한꺼번에 달려나간다. 북소리, 소라소리, 그리고 말발굽 소리들로 천지가 진동한다.
씬 그 벌판
어둠이 완연하다. 멀리서 고려군들이 벌판을 덮으며 오는 것이 보이고 있다. 신검과 그 형제들 그리고 애술, 종훈, 신덕, 상귀, 파달, 상애, 김총들이 보고 있다.
애술 적군은 기병이 우리보다 우세한 것 같사옵니다.
종훈 일단 궁수들을 배치해 놓았으니 한동안은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그 다음에는 백병전을 벌렸다가 다시 일보 후퇴하여 또 싸우고 하기를 반복해야 할 것이옵니다.
신검 좌우측에서도 한꺼번에 밀려들어올 것인데, 누가 맡겠소이까?
양검 소제와 애술 장군이 맡겠사옵니다.
신검 그리 하도록 하라. 자, 적군이 온다. 모두 위치로 가라. 적군이 온다.
신덕 적군이 온다. 모두 자리를 사수하라. 궁수들은 준비하라.
모두들 부산하게 대비한다. 고려군은 점점 더 가까이 온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그들에게 드디어 신호와 함께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한다. 엄청난 화살들이다. 고려군이 수없이 나뒹굴고 죽어나간다. 쏘고 죽어나가고, 쏘고 죽어나가고....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백병전이 시작된다. 천천히 디졸브되면...
씬 어느 산 고지
달빛이 유난히 밝다. 이치와 부장들이 산 아래 길을 보고 있다. 마치 대낮처럼 불빛을 앞세운 최필의 어차가 달려오고 있다.
부장 장군, 저기를 보시오소서. 웬 마차가 급히 달려가고 있사옵니다.
이치 견훤왕이다. 도망치는 것이야. 앞에서는 싸우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 도망치는 것이다. (가만히 보며) 틀림없다. 왕들이 타는 어차이다. 매복된 군사들을 준비시켜라.
부장 예, 장군. (계속 보다가) 그 뒤로 한참 떨어져서 물건을 실은 수레들도 가는 것 같사옵니다.
이치 그까짓 것들은 신경쓸 것 없다. 왕이 탄 어차를 잡아라. 어차를 잡아야 한다. 군사들을 모두 그쪽으로 모아라. 어차다... 어차를 잡아라...
부장 예, 장군.
이치 자, 우리도 저들을 추격하자. 가자.
이치가 부장들과 함께 산비탈을 달려 내려간다.
씬 그 산길
말에 채찍을 때리며 최필과 그 일행들이 어차를 몰아오고 있다. 그 뒤를 사이를 두고 견훤이 탄 수레들이 가고 있다. 이 수레도 속력을 내어 달리고 있다. 박영규와 금강들이 견훤을 호위하고 있다.
박영규 저기... 적병들이 아닌가?
금강 그런 것 같소이다, 매부. 이치의 군대들인 것 같소이다.
박영규 다행히 저들은 저 어차에 폐하가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모두들 저쪽으로 밀려가고 있사옵니다. 잠시 말을 멈추어야겠사옵니다. 말을 멈추어라. 멈추어라...
견훤 ....................?
그 시야로 최필들이 이미 이치의 군사들과 대적하는 것이 보인다.
씬 그곳
이치와 그 군사들이 달려오고 있다. 최필이 어차를 세운다.
최필 웬 놈들이냐? 썩 비키지 못할까...?
이치 허허허.... 기다린지 오래이다. 견훤왕이 그 안에 탄 모양이로구나. 목을 내어놓고 가거라.
최필 고얀 놈이로구나. 저놈을 쳐라.
이치 이들을 막아라. 저 어차를 잡아라.
백병전이다. 필사적인 전투가 혼전을 이룬다. 최필은 수없이 적군을 베이지만 이치 또한 백제군들을 풀베듯 베고 있다. 그 혼란 저만큼 뒤에 견훤의 수레가 서 있다. 그러다가 조금씩 최필이 길을 뚫고 있다.
이치 길을 열어주어서는 아니 된다. 막아라... 길을 막아야 한다.
최필 어차를 뫼시어라. 어서 길을 뚫어라.
필사적이다. 최필과 부장들은 계속해 이치의 군사들을 벤다. 그리고 조금씩 길이 열렸다.
최필 뫼시어라... 뫼시어라.... 어서 뫼시고 가라....
최필이 그예 이치에 의해 어깨를 베이면서 길을 뚫는다. 마차가 그 사이를 비집고 달리기 시작한다. 이치가 소리친다.
이치 무엇들 하는 것이냐? 저 안에 견훤왕이 있다. 잡아라. 저 마차를 잡아라.
그러나 마차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다. 군사들이 쫓아간다. 막고 있는 이치는 여러 부장들과 함께 그예 최필을 베었다. 최필이 죽어가며 마차가 가고있는 쪽을 본다. 이치가 소리치며 다시 쫓는다.
이치 적장이 죽었다. 쫓아라... 견훤왕을 잡아라.
모두들 그렇게 마차를 향해 다시 달려간다. 수레와 군사차림을 한 박영규들만이 남았다.
박영규 어서, 저쪽으로 길을 잡읍시다. 저쪽으로
견훤이 그렇게 실려가며 본다. 그러다가 최필이 안간힘을 다해 견훤을 보고 손을 뻗치는 것을 보았다.
견훤 오호... 최필이 아닌가..? 최필이 아닌가...?
그러나 견훤은 그예 죽어 가는 그를 확인한다. 최필이 그렇게 쓰러졌다. 그렇게 수레는 점점 멀어진다. 달려가는 그 위 견훤의 그 참담한 표정에서....
<182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