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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풍·1
출처 동아일보 : http://news.donga.com/Column/3/all/20170602/84685356/1
풍·1 ― 이윤택(1952∼ )
아이들이
봄소풍을 간다
잘난 권세도 학문도 닿지 않는 곳으로
민들레 풀씨처럼
움직이는 세계의 느낌처럼
철 지난 역사를 뒤켠으로 밀어내면서
우리는 민들레 풀씨를 불어본 때를 기억할까. 기억 속의 우리는 아마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풀씨가 흩어지는 모양은 신기했겠고, 세상은 넓어보였을 것이다. 바람이 데려가는 저 풀씨처럼 마음도 넓게 커져 갔을 것이다.
누구에게든 그러한 아이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우리의 눈빛은 맑았고 이마는 빛났을 것이다. 우리는 가장 바람직한 인류였고 가장 인간적이었을 것이다. 남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나쁜 일이었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올바름이 좋은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하면 사랑했고, 미움은 오래 담지 않았다. 남이 아프면 덩달아 찡그렸고, 남이 웃으면 영문도 모르고 웃었다.
이렇게 맑고 바른 아이는 어른이 되면서 점차 사라진다. 극소수의 몇 명만 제외하고는 어른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거울을 보고 눈을 닦아도 아이의 눈빛은 돌아오지 않고, 물을 받아 낯을 닦아도 맑은 이마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 너무나 바람직하고 인간적인 세계가 그리울 때에는 오늘의 어린아이를 보면서 배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여전히 최고의 인류다. 민들레 풀씨가 바람에 날아가듯 자유롭고, 어떠한 인위도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샛별
나는 어린 시절 해 질 무렵이면 대지 위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샛별 하나를 '내 별'이라 하여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중에 밝힐 것이지만, 가장 어렵고 힘겨웠던 한때 ㅂ이란 성을 가진 사람의 함정과 위증으로 숱한 고통을 받았을 때도, 해 질 언저리 가장 먼저 반짝이는 샛별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이기에 인류를, 이 나라를, 나의 이웃을 생각하며 안쓰러워해야 하는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자문하면서 도리질을 하곤 했다.
나는 늘 샛별을 보며 큰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옥수수 빵 몇 개 쪄서 가끔 달성공원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입장료가 20원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20원이 없어서인지 아까워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노인들이 공원 입구나 다리 밑에서 쪼그리고들 있었다. '내가 돈을 벌면 저 노인들 모두를 입장시켜 드려야지. 그리고 옥수수 빵도 많이 쪄서 나누어 드려야지'하고 나는 벼르곤 했다.
그 후 첫 직장에 순탄하게 입사하여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ㅈ이라는 직장 동료를 알게 되어 우연한 기회에 'SOS 어린이 마을'과 '희망원(고아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 가 보고는 달성공원 앞 노인들보다도 부모 없이 팽겨쳐진, 자라나는 새싹들이더 안쓰럽게 느껴져, 그 즉석에서 'SOS마을 후원회'에 가입했다. 돌아오면서, 이것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란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 이후 가끔 정기적으로 이름 없는 곳들을 찾아가곤 했다. 그 이후 '부자가 되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은 더욱 많이 했지만, 월급쟁이로서는 가뭄에 물 한바가지 격의 월급밖에 안 되는 형편이었다. 그 후 10년 동안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여 모은 돈으로 몇이 어울려 가장 전망이 밝다고 생각되는, 굴뚝 없는 서비스 산업인 관광 분야에 약 3년 동안 뛴 적이 있었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이 분야의 기획 사업들은 내가 10년 전 대구 시장실에 간곡하게 청원 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약간의 과장을 한다 치더라도, 두루마리(간곡함과 정성을 표하고자 두루마리에다 내용을 적었다)로 약 100m쯤 되는 계획서를 제출했다. 대구에는 큰 자원과 재원이 없는 점을 미루어, 이 분야로의 진출을 간곡히 청원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가난하고 힘없는 소규모 경영을 하는 한 시민의 위치에서 부시장님 뵙기가 그렇게 힘든 것인 줄 미처 몰랐다. 그 사업을 설명 하고자 몇 개월 이상 새벽마다 앞산 ㅁ아파트를 드나들면서 기다려도 뵙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어떤 분의 힘을 얻어 겨우 사업 설명을 해 올렸다. 그리고 그 계획서의 원본도 시장 비서실을 통해 제출하여, 구체적인 방향 설명을 하고 긍정적인 해답을 받았다. 그런데 추진 과정에서 전혀 상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그 사업이 이루어지면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다. 사회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으며, 돈을 쓰는 진정한 방법을 시범해 보이고 싶었다.
그때의 꿈은 이루어지는가 했더니 그만 산산 조각이 나 버렸고, 한 점 구름처럼 흩어져 버렸다. 설날 아침 부하 직원들이 "이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하면 "이놈아, 그렇게 인사하지 말고 나를 보면 '떼부자가 되십시오!'라고 해라"하고 핀잔을 주며 부자가 되어 보려 했던 생각도 한 점 물거품이 되어 흩어져 버렸으니, 지난 꿈들은 한갓 휴지 조각보다 못한 것들이 되어 버렸다.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우연의 일치인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내 곁에서 작용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신기하고 신비로운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엔가 큰 부자가 되어 온 인류에게까지 도움을 줄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곧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벌이 되어 어떤 큰일을 해 보겠다는 생각이 180도로 전환한 것은, 그 일 이후 '나 안의 나', 알맹이의 마음이랄까 정신이랄까, 그것을 알게 되고 난 후였다. 샛별은 더욱 가깝게 다가왔으며, 나는 마음의 재벌이 되어 빈곤에 허덕이는 수많은 마음들에게 맑은 '님의 소리(자연의 소리)'를 한 아름씩 안겨 주어야겠다는 새로운 생각을 떠 올렸다.
온갖 산새들이 다 모여들어 날개짓을 하고, 달콤한 바람이 주변에서 싱그러운 향기를 모아 왔으며, 오색 찬란한 빛viit줄기가 온 누리를 가득 채웠다. 하늘에서는 표현할 수 없이 경이롭고 은은한 아름다운 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렇게도 재잘 거리던 산새와 풀벌레들 까지도 숨을 죽였다. 이 힘, 초광력超光力을 이 지구촌에 탄생시킬 때가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나는 어린 시절 토굴 속에서 보았던 도인의 목소리가 다시 귓전을 울리는 것을 들었다.
요즈음 초광력超光力을 펼쳐 내릴 때 나타나는 현상은 그것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때로 바람이 없는 고요한 날 어느 계곡에서 명상에 들어가면, 온 산의 나뭇잎들이 심하게 팔랑이다 못해 통째로 흔들린다. 분명히 바람이 없는데도. 이상하다는 생각과 함께 잠깐 침묵에 잠기면, 하늘 위에서부터 다섯 개의 불꽃이 내려오면서 찬란한 쌍무지개가 허공을 가른다. 그럴 때면 고요 속의 고요가 느낌으로 스며든다. 그럴 즈음이면 나의 나는 어디론가 향해 간다. 목말라 허덕이는 '마음'들의 세계를 향하여...
하나의 샛별에서 부터 이 삼라만상 모두를 한 점 착오 없이 스스로 이끌어 가는 우주의 무한한 존재가 있음을, 그 존재 안에 우리의 마음이 있음을 느낀다. 어느덧 재벌의 꿈은 하나의 풀잎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큰마음을 향해 간다. 우주의 원리, 한없는 우주의 존재인 그 빛viit을 향해 간다. 그 빛viit은 나의 마음에서 온 누리의 마음과 마음으로 성큼 파문을 일으키며 나간다.
오! 이 기쁨. 이 평화와 충만으로 가득한 경이로움은 두 줄기의 쌍무지개가 되어 이곳에서 하늘 위 하늘나라에까지 드리운다.
빛viit의 책 1권 '빛viit으로 오는 우주의 힘 초광력超光力 P. 74 ~ 77
그때 그 시절
감나무에 매달린 추억
찌그러진 바께스와 누런 양철로 된 큰 주전자를 든 당번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앞줄에 서려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하지만 앞줄은 이미 새벽부터 와 있던 서너 명의 아이들이 차지한 상태다. 사실 앞에 서나 뒤에서나 급식량은 달라질 것이 없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빵을 받아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은 것일 뿐. 급식을 하는 시간의 백열등이 켜지기를 기다리며 아이들이 살을 에는 듯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겨보려 발을 동동 구른다. 또 몇몇 아이들은 울긋불긋 얼어터진 손등에 호, 호, 하고 입김을 불어넣어 녹여보기도 한다.
일주일에 두 번, 강냉이 찐빵과 우유 배급이 있는 날은 마치 동네잔칫날 같았다. 평소 지각에결석을 밥 먹듯 하던 녀석들도 이 날만큼은 절대 늦거나 빠지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조차 평소보다 이삼십 분 씩은 일찍 오셔서 배급에 차질이 없도록 몸소 챙기시는 것이다.
마침내 식간에 불이 켜지고, 토끼털 귀마개를 검은 고무줄로 동여맨 소사 아저씨가 어정어정 걸어 나왔다. 그리고 커다란 찜통을 열어젖히자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과 함께 퍼지는 구수한 찐빵 냄새……. 코흘리개 녀석 하나가 눈을 지그시 감고 흠흠~ 하고 황홀해하던 표정이란. 벌써 꽤 오래전 일인데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다.
팔공산 빛viit명상 터 초입에 감나무 몇 그루를 심어놓았다. 바로 어린 시절 감나무에 얽힌 애틋한 기억을 추억하기 위해서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 집 앞마당의 감나무는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서 있었다.
“얘들아, 감 따거라!”
어머니의 말씀이 신호탄이라도 되듯 여덟 형제가 앞 다투어 감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서 이 소식을 알았는지 동네 사람들도 허겁지겁 감나무 아래로 모여드는 것이다. 마치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무엇이 있기라도 한 듯 걸음을 재촉하는 그들의 얼굴에 어려 있던 배고픔,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이 짠하게 만드는 잊을 수 없는 표정이다.
다른 형제들은 신이 나서 감 따기에 여념이 없을 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배고픈 표정을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어 멀리 담벼락 밑의 사람들을 향해 감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이를 본 형제들이
“야, 니 지금 뭐하는기고?”
하며 화를 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저 아래에서 감을 받아든 사람들은 언제 준비해왔는지 된장을 꺼내들었다. 감의 떫은맛에 목이 메일까봐 감을 된장에 찍어먹는 것이다. 된장에 찍어먹는 감 맛, 과연 요즘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각설이 친구
학교에 가면 한 학급에 70-80명씩이나 되는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들어차 대체 수업을 하는 것인지 노는 것인지 분간하지 못 할 때도 많았다. 담임선생님조차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지 못 하시고 출석부 없이는 누가 자신의 반 학생인지조차 확인 할 수 없었다.
점심 시간이 되면 반 이상의 아이들이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들어올 땐 모두 배가 복어처럼 볼록해져서 돌아왔다. 점심 도시락 대신 우물물로 배를 가득 채우고 말이다.
내 짝은 그런 형편의 친구들 보다 더한, 매끼 밥을 빌어먹는 각설이였다.
“경식아, 너 재밌는 노래 또 불러봐, 그 노래 참 우습고 좋다.”
“좋기 뭘 좋노? 광호 네가 부르라 카이까 또 한 번 불러 본데이, 어얼씨고씨고 들어간다아아아~ 저얼 씨고 씨고 들어간다아아,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아~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내가 경식이에게 재미있는 노래를 불러 달라고 청하면 경식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눈을 질끈 감고 책상 위에 바가지를 둘러엎어 연필로 장단을 쳐가며 각설이 타령을 불러 댔다. 그런 경식이의 노래와 익살에 모든 친구들이 배를 움켜잡고 깔깔거리면 경식이는 더 신이 나서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그 구성진 노랫가락 속에는 무언가 모를 애달픔이 담겨 있었다.
사실 경식이는 공부보다 각설이 타령을 잘 부르는 것이 더 급했다. 얼마나 슬프고 애처롭게 타령을 하느냐에 따라 얻어먹는 밥의 양이 달라졌다. 그래서 그 친구는 내가 청하지 않아도 쉬는 시간마다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배짱 좋고 여유만만 하던 각설이 경식이도 매월 말만 되면 풀이 죽었다. 그 때만 되면 어김없이 선생님으로부터 월사금 독촉을 받기 때문이다.
“인석아, 받을 때가 없어도 일단 나가! 어디 가서든지 빌려오란 말이다. 너 벌써 석 달 치나 밀렸어. 이젠 더 사정을 봐 줄래야 봐줄 수도 없어!”
“없는데 어떡하는교? 먹고 죽을라캐도 돈 땡전 한푼 업심더, 쌤요.”
이때만 되면 스승과 제자의 사이는 집세를 받는 주인과 하숙비를 독촉 받는 하숙생 꼴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이 시절에는 혼내는 사람이나 혼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모두 안 된 것도 마음 아플 것도 부끄럽고 미안할 것도 없었다. 그만큼 다들 가난하고 함께 배고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손이 나도 모르게 그 날 아침 아버지가 주신 월사금이 담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그 놈을 만지작거리다 과감하게 월사금 봉투를 경식이 앞에 들이밀었다.
“경식아, 잠깐만! 이거 너 해.”
“이게 뭐꼬? 니 월사금 30원 아인가?”
“일단, 이 돈으로 월사금 내. 난 걱정 말고. 나는 월사금이 밀리지 않았으니 선생님께서 봐 주실 거야.”
“광호야, 니 이래도 돼는 기가? 암튼, 참말로 고맙데이! 정말 고맙데이!”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나를 몹시도 매몰차게 내쫓으셨다.
“이 녀석, 정광호! 넌 형편도 좋으면서 왜 월사금을 안내? 어디다 까먹은 것 아니야? 어쨌든 너도 나가서 빨리 받아와!”
이렇게 해서 나와 내 친구들은 교실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쫓겨났다기보다 신나게 뛰쳐나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좀처럼 오지 않는 자유의 시간이 찾아왔기에!
친구들과 신나게 들판으로 달려가는 내게 이미 가방은 오간 데 없고, 옆구리에 찬 자랑스런 수통이 달그락달그락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이 수통으로 말하자면 전쟁 중 군인들이 쓰던 물통인데 어떤 사연인지 우리 집 다락방에 골동품처럼 누워 있다가 내 눈에 띄어 다시금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그 수통은 비가 오는 날이면 시냇가의 붕어로, 오늘처럼 맑은 날이면 메뚜기로 채워져 허기를 달래주는 간식통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는데 덕분에 책보보다 더 소중한 대접을 받았다. 그 수통이 이제는 검게 찌그러진 모습으로 내 방 한 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쫓겨난 후의 이야기를 연결해 가자면, 다음날, 선생님께 월사금만을 드리기가 겸연쩍어 수통의 메뚜기와 꺼내서 함께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도 못 이기는 척 눈을 흘기시면서 받으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자리에 들어가 얌전히 수업해라.”
하시는 것이다. 나와 그분의 입가엔 미소가 돌았고 그러면서 이미 어제의 일은 그분이나 나난 없었던 일이 되었다.
비 오는 날이면, 아예 수업을 뒷전으로 하고 선생님 몰래 교실 밖으로 친구들과 뛰쳐나가곤 했다. 다름 아닌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쏟아져 내린 빗물에 학교 뒤 개천이 넘쳐나면 숨쉬기 바쁜 붕어, 미꾸라지, 가물치 등이 그냥 물위로 둥둥 떠다녔다. 아무 요령 없이도 손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참을 신이 나서 옷이 젖는 것도 모르고 고기를 잡고 있노라면 어느새 우리를 혼내기 위해 씩씩거리며 선생님도 옷을 걷어 부치시고 도랑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 고기를 잡고 계셨다.
이처럼 굳이 잘못을 빌고 용서해 준다는 말이 없어도 몸짓과 표정으로서 용서받고 화해하던 그 시절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그 무엇이 있었다. 제자의 부스럼 병이 안타까워 자신의 월급을 뚝 떼어내어 치료비로 보태시던 선생님, 그리고 친구의 월사금을 내준 후, 돈을 다시 받으려는 어설픈 거짓말에 모른 척 하시며 묵묵히 30원을 또 내어주시던 부모님, 그렇게 그 때 그 시절은 모두에게 사랑이 있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출처 빛viit의 책 2권 행복을 나눠주는 남자 P. 20 ~ 26
첫댓글 나눔을 실천하시는 학회장님 어린시절이야기, 빛으로 마음이 풍요로워지시기를 바라며 나누어 주시는 빛, 학회장님의 깊은 사랑에 머리숙여 감사의 마음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풍1의논단글과 귀한빛글감사드립니다.
감동이 절절히 느껴지는 그때 그 시절은 인정이 살아서 비록 가난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속의 생활과 학회장님의 감동적인 어린시절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의 어린시절은 가난속에서도 사람의 정과 사랑이 느껴집니다.
빛명상인으로서 제 자리에서 역할을 하니 이시대에는 많이 모자라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네요...
그렇더라도 현실과 타협하지않고 좀 모자란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학회장님의 어린시절 나눔의 이야기 언제 읽어도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의 어린시절의 일화를 통해 나눔의 진정한 마음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의 어린시절 이야기는 저도 일부분 겪어본 추억이라 더욱 와닿는 이야기 입니다
학회장님의 사랑이넘치는 순수한 추억 감사드립니다
학회장님의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시고 배려해 주시는 경천애인의 사상은 어릴때부터 계속 지금까지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저도 따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의 귀한 이야기를 함께 할수 있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귀한 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때 그 시절 " 감사드립니다.
힘들었지만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정과 나눔이 있어 그런가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학회장님 어린시절 이야기
너무 재밌습니다. 읽는 내내 옛날이 그리워져서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어려운 친구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던 그 마음.... 학회장님의 마음이 바로 그
빛마음 입니다. 언제나 감사 올립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도 거지가 많았던지... 매일아침이면 문앞에서 밥을 얻어먹는사람들을 볼수있었죠
학회장님께서 어렸을때부터 많은 친구들을 도와주셨군요 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의 어린시절 이야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