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을 진술하다/ 조재형
무더운 여름날이다. 젊은 아버지 손수 흙집을 짓다. 읍내 보건소를 다녀온 후 몸져눕다.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를 뿌리치고 떠나다. 유복자인 막내 슬픔이 새 식구로 들어오다.
이른 봄날이다. 누님의 손에 이끌려 학교 문턱을 넘어서다. 생전 처음 수많은 이성을 접하고 놀라다. 험난한 줄서기를 처음 배우다. 행복은 점수순이라는 걸 아울러 익히다.
청명의 초저녁이다. 진로에 회의를 품고 담배를 배우다. 군대 영장을 내림받고 머리를 깎다. 입영 전날 뚝방촌 여인숙에 홀로 버려지다. 난생 처음 여자를 일독하다.
하짓날 한낮이다. 데모하는 갑장들과 적이 되어 싸우다. 이유도 없이 선임에게 두들겨 맞다. 개새끼라는 방언을 처음 입에 올리다. 개 같은 군대를 전역하다.
시린 가을이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공복의 길에 접어들다. 배당받은 첫 사건의 신병을 처리하다. 쓸데없는 죄책감에 잠을 못 이루다. 천직이 아니란 걸 어렴풋이 예감하다.
꿈같은 날이다. 출가를 꿈꾸던 중 인연에게 발목 잡히다. 신혼 여행 중 카메라에 담은 추억을 분실하다. 딸의 출산을 지켜보며 환희를 체득하다. 아이의 올음소리에 놀라 방황을 접기로 결심하다.
붉은 만추 무렵이다. 제주 섬으로 유배되어 육친과 떨어지다. 식솔들 눈에 밟혀 밤마다 소주에 몸을 싣고 출렁이다. 관사에 일찍 버려지기 싫어 야근에 매진하다. 속 모르는 조직에게 모범으로 치하받고 쓸쓸해지다.
눈발에 지구를 내려치는 동짓날이다. 매형이 운명에 일격을 당하고 요절하다. 몰아닥친 사별에 가화만사성이 무너지다. 장지에게 구두를 분실하나 망인이 타고 간 것으로 자위하다. 사고 원인을 밝혀낸 날 꿈 길에서 대면하다.
절망이 고인 봄날이다. 오랫동안 개종을 노리다 직업만 바꾸다. 밀려오는 형용사 틈에서 접속사로 전전하다. 좌절의 막후에서 기울어가는 꿈을 긍정으로 버팀목하다. 사랑 앞에선 여전히 머뭇거림으로 일관하다. 그 후로도 번번이
- 월간 『현대시』 2015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