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2.3. 강촌의 전원 일기,44회.(엄마가 적은 아들애의 수험일기.둘)
산골의 겨울나기는 쉽지않다.
하릴없이 지난 날들을 더듬고 있다.
'강촌 블러그'와 '강촌의 가족 카페'에
보관하고 싶어 정리하고 있다.
신명나게 사랑하면서 살아온 나의 젊은 시절...
잘라 없애버리기엔 아까워서 ...
뒷뜰에서 일기 주인공의 아이들이며 강촌 손주들이 놀다 떠난 자리
엄마가 적은 아들애의 수험 일기
1997년 1월×일 ( 큰애는 달력에다 오늘 날짜에 가위표를 그으면 서 오늘이 영원히 갔다는 표시를 했다. )
큰애는 달력에다 매일 한 칸씩 싸인펜으로 가위표를 그었다. 어릴 적에 자기 생일을 기다리고 소풍갈 날을 기다릴 때도 큰애는 곧잘 달력에 가위표로 표시를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한가한 마음으로 긋는 가위표가 아니다.
큰애는 가위표를 긋는 것이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을 가로막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가위표로 오늘을 묶으면서 시간이 그 가위표 안에서 멈추어 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가 버린 시간을 영원히 묶어 버림으로써 열려 있는 내일을 큰 가슴으로 맞이하겠다는 다짐에서일까. 오늘도 큰애는 달력의 오늘 날짜에다 아침에 가위 다리 하나를 긋더니, 저녁에 마저 하나를 그어서 오늘을 영원히 갔다는 표시를 했다.
나는 하루 하루가 큰애의 가위표에 묶인 달력 앞에서 아들아이의 마음을 읽는다. 시간이 바쁘다는 말도 들려 오고 시간을 아껴쓰고 싶다는 다짐도 들려 온다. 그리고 시간을 참으로 소중하게 쓰겠다는 자기와의 약속을 읽기도 한다.
1997년 1월 ×일 (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자식에게 자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 )
남편은 밤 늦게 친구와 같이 왔다. 이미 술이 거나하게 취한 친구를 앞세우고
들어오더니 술상을 봐 오라 했다. 큰애가 아버지 친구분 앞에 나와 넙죽 엎드려
절을 하자, 그제서야 남편은 정신이 드는지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나 오신 친구를 어쩌겠는가.
술상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자식에게 자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나 같으면 술김이 아니라 아무리 곤란할 입장이래도 수험생인 큰애를 잊어버리고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술이 거나하도록 취한 친구가 그런 눈치를 챌 리도 만무하고 또 수험생 뒷바라지를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 집 분위기를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술상을 앞에 놓고 남편은 친구 좋다고 호탕하게 떠들면서 술잔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술이 확 깨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또 안쓰럽게 보였다. 이것이 여성의 모성 본능이라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며, 나는 남편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를 접대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했다. 아들애는 아들애 데로 또 남편은 그 나름대로의 삶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고시원보다 분위기가 더 편안하고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모곁에 찾아 온 아들애인데...수험생을 둔 부모는 부모부터가 수험생이어야 하는데...
1997년 1월×일 ( 빨간 당근 주스를 만들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
새벽 6시. 굳게 닫힌 큰애의 방문 앞에 서서 두 번 노크를 했다. 곤하게 잠이 들어 있을 큰애가 내 노크 소리를 들었을 리 만무하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큰애를 불렀다. 큰애가 일어나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험 공부를 하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곤하게 잠이 든 아이를 깨우는 일일 것이다. 몇 번 불러서 ‘으응’하고 반응이 오면 십 분쯤 더 있다가 방에 불을 밝혀 놓고 본격적으로 깨운다.
K교수의 문화사 강의 테이프를 틀어 놓고 이불을 정리하는 아들애의 기척을 들으면서 나는 강판을 꺼냈다. 빨간 당근을 굵고 잘 생긴 것으로 골랐다. 강판에 갈아 아침 주스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싱크대 위에 강판을 고정시켜 놓고 당근을 갈았다. 밑 그릇이 가득하도록 갈아진 당근을 망주머니에 넣어 꼭 눌러 짰다. 진 다홍색 고운 물이 망 주머니 구멍 사이로 흘러나온다. 어린아이 팔뚝만한 당근 하나를 갈면 유리 컵이 치먼하게 한 컵의 주스가 된다. 믹서기를 이용하면 좀 더 수월할 터이지만 내 손으로 공을 들이고 싶다.
우유 한잔과 주스 한잔 그리고 심심하게 탄 커피 한 잔을 들고 큰애가 앉아 있는 책상 머리에 갖다 놓았다. 큰애는 나를 돌아보고 한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보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아침’
큰애와 나의 오늘은 또 이렇게 시작됐다.
1997년 1월×일 ( 아우는 집에만 들어앉아 있는 형에게 운동 기구를 선물했다. )
녀석은 언제나 편안한 모습이다.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너무 태평스러운 마음이 될까 봐 그것도 마음이 쓰인다. 일없이 안달복달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
외출은 물론 일체 전화도 받지 않고 책상만 지키고 있는 형이 힘들어 보이는지 아우는 형을 위하여 실내에서 운동할 수 있는 화살 꽂기를 사 왔다. 자기의 용돈 형편으로 볼 때 큰 돈을 투자했을 것 같은 물건이었다. 형을 경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형! 운동도 좀 해 가면서 공부해’ 하면서 운동기구를 내밀더니 아예 벽에다 못을 치고 형의 키에 맞추어 걸어 주었다.
형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살피는 아우,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복학을 앞둔 아우가 자율스럽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터인데, 자기 때문에 집안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싶어 미안해하는 형,
대구 앞산에서... 강촌 가족의 1980년도 어느 날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한 잔 드리고파요.ㅎㅎ
첫댓글 추억은 아름다워
자신을 사랑하자.
오늘도 '좋은 데이.
이강촌이 강촌에게
오늘은 눈 길 걸으면서 소리높혀 노래 부르기
왕음치
감동 깊은 일기 읽고 행복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