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제1차 세계 대전 개요(1914년~1918년) 上
솜 전투 포격전으로 파괴된 마을. 힌덴부르크 선을 넘는 마크 V 전차.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기뢰에 맞아 침몰한 HMS 일레시스티블. 솜 전투 도중 방독면을 착용한 영국군 비커스 기관총 병사.
제1차 세계 대전 (World War I, WWI 또는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렸다. 미국에서는 처음에 유럽 전쟁(European War)라고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병사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해 사상자 비율이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 중 하나이며, 참전국의 수많은 혁명 등을 포함하여 주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들 동맹끼리의 충돌이다. 한쪽 편은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협상국이며, 다른 한편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협상국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 이러한 동맹은 재조직되었고 더 많은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가담했다. 궁극적으로 유럽인 6천만 명을 포함한 군인 7천만 명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에 동원되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 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 지난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끼리 서로 연결되었다. 수주 이내에 강대국끼리 전쟁이 시작했고 이 분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면서 독일군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파리 앞에서 독일군이 진격을 멈춘 이후, 서부 전선은 1917년까지 참호전과 같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로 진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시나이 반도 등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는 1915년 참전했고,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참전했으며, 미국은 1917년 참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동맹국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춘계 공세 이후,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다. 앞의 2개 제국은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후자의 2개 제국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 및 서남아시아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면서 새롭게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유럽의 민족주의 부활과 독일에서 파시즘의 장악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게 되었다.
1914년 10월 캐나다 잡지 맥클린스에서는 "어떤 전쟁은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대전(Great War)이다"라고 말했다. 1914년 말 뉴욕에서 발행한 전쟁의 기원 및 초기 역사에 관한 책의 제목은 "세계 대전"(World War)라는 이름으로 붙여졌다. 전간기 기간 동안, 영미권에서는 이 전쟁을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는 1914년 9월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어의 전체적 의미에서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장교이자 저널리스트인 찰스 아 코르트 레핑턴(Charles à Court Repington)이 지은 1920년대 역사책 제목이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에서는 ‘First World War’이라는 용어를, 미국에서는 ‘World War I’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정치 및 군사적 동맹
19세기 유럽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동맹은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신성 동맹으로부터 시작했다. 1873년 10월에는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독오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 독오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군사 동맹 지도. 협상국은 초록색으로 나타냈으며, 동맹국은 갈색으로 나타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양면전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비스마르크가 세운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4년 후인 1894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러불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
군비 경쟁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독일이 통일한 이후, 산업 및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중요한 경제 자원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는 독일 제국해군에 투자하여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각 국가들은 주력함을 더욱 많이 건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6년 HMS 드레드노트의 건조 이후 대영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경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 사이의 군비 경쟁은 모든 유럽 주요국이 유럽 전역의 분쟁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를 생산하는 데 산업 기반을 기울이면서 유럽 전역으로 경쟁이 확장되었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국가의 군비 지출은 50% 상승했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병합을 선포하는 포스터를 읽는 사라예보 시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보스니아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 점령으로 세르비아 왕국 및 그 국가의 후원자인 범슬라브주의 동방 정교회의 러시아 제국을 화나게 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행보는 이미 "유럽의 화약고"로 널리 알려진 발칸반도의 균형을 붕괴시켜 평화 협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인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결과 체결된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는 독립했으며,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영토를 확대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감소했다. 1913년 6월 16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 및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33일간의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패배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루마니아에게 남도브루자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발칸반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 사진은 일반적으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체포당하는 사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일부는 사건 당시 방관자였던 페르디난드 베흐를 찍은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세르비아의 흑수단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차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한 수준이었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나중에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의 여파로 거리에 모여든 군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력 사태의 확대
그러나 사라예보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세르비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사라예보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그롬의 특성을 갖추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면서 이런 폭력 사건에 대해 말했다.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에서 뿐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일어났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유명한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통계내렸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 집단이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시작했다.
7월 위기
사라예보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간 1달 간의 외교 기동으로 이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관리(특히 검은 손 조직의 임원들)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세르비아에게 의도적으로 전쟁을 자극할 10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가 10가지 요구사항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역사가인 헤우 스트라첸은 "세르비아의 초기 모호한 응답에 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동에 차이를 주었을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해야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리 인기있는 성격은 아니였으며 제국은 그의 죽음에 그렇게 애도를 표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내키지 않고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지원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명령했다.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같은 날 독일 제국은 동원령을 발동했다. 독일은 베를린의 대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이 올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러시아는 동원령을 해제하는 것에 협상하자는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
독일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동부에서 진군하기 전에 프랑스 지역을 빠르고 대규모로 침공해서 서부를 미리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와 동시에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프랑스 내각은 즉시 군사 동원령을 내리라는 군의 압박에 저항하여 사건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경에서 10 km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독일 제국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8월 3일에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 8월 4일,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벨기에게도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상태를 유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 제국이 무시하자,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전쟁의 진행 과정
개전
동맹국 사이의 혼란
동맹국의 전략은 잘못된 의사 소통으로 혼란을 빚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달랐다. 이전의 군사 전개 훈련 계획은 1914년 초 개정되었지만, 개정 이후의 훈련 계획은 진행된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휘관들은 독일이 러시아와 전투하면서 북부 전선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군의 대부분을 막을 것이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이 나누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4년 9월 9일 셉템베르프로그라암(Septemberprogramm)에서는 독일의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가 독일의 전쟁 목적 및 승리할 경우 연합국에게 요구할 사항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세르비아 전역
오스트리아가 침공하면서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세르비아군 간에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대량의 인명 손실로 그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첫 번째 연합군의 주요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전선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신 세르비아 전선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시켰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 실패는 지난 20세기동안 우월한 적을 상대로 승리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린 군인이 참전한 전역이다. 츠부스니카에 태어난 몸칠로 가브리치는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그의 부모, 할머니, 형제 7명이 죽은 이후 8살에 세르비아 육군 제6 포병 사단에 입대했다. 10살때 그는 상병으로 승진했으며, 11살에는 하사 대리 병장이 되었다.
벨기에와 프랑스의 독일군
서부전선의 영국군 야전병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제7 야전군의 서부군)은 개정된 슐리펜 계획에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 독일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국경으로 진군, 독일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둘러싸 남쪽으로 포위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독일은 한 전선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동시에 다른 전선에서는 러시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충족시키기 위해, 슐리펜 계획은 1870~1871년의 보불전쟁과 같이 최대한 빨리 프랑스로부터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한 계획으로 짜여졌다. 또한,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위해 라인 강의 서부가 국경과 맞닿아 있는 알자스로렌의 험한 지형을 통해 공격하는 대신 영국 해협으로 진군하여 영국의 지원을 저지한 이후 파리를 공격한다는 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대부분의 군대를 러시아로 보냈다. 러시아는 동맹국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동원령을 완료하는데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4년, 전선으로 가는 길에 있는 화차에 있는 독일 군인. 전쟁 초기에는 양 측이 매우 짧은 전쟁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기존의 모든 독일의 전쟁 계획은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행군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할 때 벨기에를 통한 자유로운 행군을 원했다(원래는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를 거부했다). 중립국인 벨기에는 이를 거부했고, 따라서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하고자 했다. 프랑스 또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을 이동시키고 싶었지만, 벨기에는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독일의 제안 뿐 아니라 프랑스의 제안 또한 거절했다. 결국,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벨기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전투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벨기에군 대부분이 지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안트베르펜으로 후퇴하여 항복했다.
이 계획은 독일의 우측이 프랑스군을 우회하기 위해 진군해야 했고(프랑스군의 대부분은 프랑스-독일 국경에 몰려 있었다) 이후 파리까지 남쪽으로 진군해야 했다. 8월 11일부터 24일까지 국경 전투에서 독일군은 승리를 거뒀다. 9월 12일, 프랑스군은 영국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이루어진 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파리 동부로 진격하는 것을 방어했고 다시 독일군을 전선에서 50 km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서부 전선에서 기동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알자스 남부 공세는 8월 20일 뮐루즈 전투로 시작했지만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장교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매우 일찍 2개 군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다. 프랑스 침공에 동원되기로 예정되었던 제8 야전군을 철도를 통해 재빨리 오스트프로이센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끄는 이 군은 8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일련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좌절시켰지만, 지치지 않은 독일군을 동부로 이동시킨 결과 1차 마른 전투에서 연합국이 전술적 승리를 이끌었다. 동맹국은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하고 2개 전선에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독일군은 프랑스 내의 방어하기 좋은 지역에서 전투를 했고, 영구히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23만명의 프랑스군 및 영국군을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 문제 및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 결정은 독일군이 전쟁 초기 승리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1914년 멜버른의 병력 충원소.
뉴질랜드는 1914년 8월 30일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다. 9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및 군사파견군(AN&MEF)이 독일령 뉴기니의 뉴포메른 섬(나중에 뉴브리튼 섬이 됨)에 상륙했다. 10월 28일, 페낭 해전에서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이 러시아 순양함 젬추크를 침몰시켰다. 일본군은 독일의 미크로네시아 식민지를 장악하고 칭다오 전투를 통해 중국 산둥 반도에 위치한 칭다오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칭다오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SMS 카이저린 엘리자베스의 철수를 거부하자, 일본은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1914년 11월 이 함선은 칭다오 방어전에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침몰했다. 몇 달 이내에, 연합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지역을 장악했다. 오직 독일령 뉴기지 지역에서만 고립된 상선 기습 및 방어 태세만 있었다.
아프리카 전구
전쟁의 첫 번째 충돌로는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사이 식민지 세력의 충돌이었다. 8월 6일~7일에 프랑스와 영국군은 토골란드 및 독일령 카메룬 지역을 침공했다. 8월 10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산발적이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대령 파울 폰 레토우보르베크(Paul von Lettow-Vorbeck)가 이끄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군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격전을 이끌었고 유럽에서 휴전이 이루어진 지 2주가 지나서야 항복하였다.
인도의 연합국 지원
영국 정부가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과는 달리, 인도에서는 영국에 대한 충성과 전례없는 호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인도 국민 회의 및 기타 단체의 인도 정치 지도자들은 열심히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했으며, 영국에 대한 전쟁 지원이 인도 자치 운동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영국령 인도 제국군은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보다는 열세였다. 인도 중앙 정부 및 인도 토후국이 많은 음식, 돈, 탄약 보급을 보내주는 동안 130만명 가량의 인도군 및 노동자가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자원군으로 활동했다. 총 14만명이 유럽의 서부 전선으로 보내졌고, 70만명이 중동 전선으로 보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인도인 47,746명이 사망했고 65,126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쟁 자체로의 고통 뿐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영국 정부가 인도 자치에 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인도 자치 운동은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서부 전선 참호전의 시작
Mud stained British soldiers at rest
솜 전투 첫째 날 통신 참호에 있는 영국 얼스터 소총병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군사 전술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는데 실패하면서 구식이 돼버렸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강한 방어적 전략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으며, 구식의 전술로는 더 이상 대부분의 전쟁에서 돌파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철조망은 밀집보병의 진군에 심각한 방해물이 되었으며, 포병은 기관총과 결합하여 개방지를 횡단하는 데 매우 어렵게 만들어 1870년대보다 더욱 치명적으로 발전했다. 양측 지휘관은 많은 사상자 없이 참호전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 때 기술 진보로 인해 화학 무기 및 전차가 발명하는 등 새로운 공격 무기를 개발하게 만들었다.
1914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어난 1차 마른 전투 이후 협상국 및 독일군은 서로 측면을 포위하기 위해 북부에서 기동전을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기동전을 바다로의 경주라고 부른다. 이러한 측면 포위 시도가 모두 실패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는 곧 독일 제국이 벨기에 해안부터 로렌 지역까지 단단하게 구축한 방어선을 이룬 것을 보게 되었다. 독일은 점령 지역을 방어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참호는 프랑스 및 영국군의 참호보다 더욱 많이 건설되었다. 영국-프랑스군의 참호는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전까지 머무르는 "임시적인" 방어선에만 끝나 있었다.
양측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이용하여 교착 상태를 깨려 시도했다. 1915년 4월 22일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평화 회의의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는) 염소 가스를 이용했다. 곧 양측에서 여러 종류의 가스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지만 전투를 겪은 군인들은 독가스 전쟁이 가장 두렵고 기억에 남는 공포가 되었다. 1916년 9월 15일에는 전체적으로는 솜 전투의 일부인 플레르-쿠르슬레 전투에서 영국군이 처음으로 전차를 이용했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차의 효과는 커졌다. 독일군은 자신들이 디자인한 전차는 매우 적은 수를 사용했으며, 대부분은 연합국에게 노획한 전차를 이용했다.
1917년, 비미 리지 전투에서 전진하는 캐나다군과 영국군 마크 II 전차.
양측 모두 2년 동안 서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을 하지 못했다. 1915~1917년 동안, 대영제국 및 프랑스는 전략, 전술적 방향의 측면의 선택 때문에 독일보다 더 많은 사상자로 고통받았다. 독일은 오직 하나의 주요 공세만 시도했지만 연합군은 독일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16년 2월 독일은 프랑스의 베르됭에서 프랑스 진지를 공격하면서 베르됭 전투가 시작되었다. 1916년 12월 프랑스의 반격으로 공세 시작 지점 이전까지 독일군을 퇴각시키기 전까지 전투는 독일군이 많은 이익을 보았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엄청났지만, 독일군의 사상자 또한 이에 못지 않게 높아서 양 측 교전국의 사상자는 70만명 에서 97만 5천명 가까이 된다. 베르됭은 프랑스의 의지 및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영국-프랑스군은 솜 전투를 통해 독일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이 시작한 7월 1일 당시 영국 육군은 역사상 가장 큰 사상자가 발생해, 첫날 전투에만 19,240명이 사망하는 등 총 사상자가 75,470명이나 되었다. 솜 공세 전체 기간 동안 영국군의 사상자는 약 42만명이었다. 프랑스군 또한 대략 2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독일군은 5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16년 전체 기간 동안 베르됭에서의 오래된 공격은 솜 전투의 심각한 사상자와 합쳐져 프랑스군이 지쳐 붕괴 위기까지 달했다. 1917년 4월 5일 니벨 공세가 연합국의 실패로 끝난 이후 영국 및 프랑스군의 헛된 정면 공격 시도는 프랑스 병사(poilu)의 프랑스군 반란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일어난 영국의 아라스 전투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져 궁극적으로 전략적 가치는 떨어졌지만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아라스 공세의 일부분으로 캐나다 군단이 비미 리지를 점령했고, 이는 해당 국가에게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국가정체성이 전투로 탄생되었다는 생각은 이후 캐나다의 군사 및 일반 사학계에서 널리 퍼지게 되는 의견이 되었다.
1917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파스샹달 전투는 이 기간 벌어진 영국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프랑스의 지원)가 되었다. 이 공세는 10월 전장이 진흙탕으로 되기 전까지 연합국 사이의 약속으로 진행되었다. 사상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거의 20만명에서 40만명 사이로 추측한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은 몇 년 동안 많은 지역의 점령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전선은 종종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은 끊임없는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전장으로 나타났다.
해전
전쟁이 시작했을 당시, 독일 제국의 순양함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연합국 상선을 공격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은 비록 연합국 선박을 보호하는 데는 무능력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그들을 패배시켰다. 예를 들어, 칭다오에 주둔한 독일의 동아시아 함대의 일부였던 경순양함 SMS 엠덴은 15척의 상선을 포획하거나 침몰시켰으며, 러시아 순양함 및 프랑스 구축함도 침몰시켰다. 그러나, 장갑순양함 SMS 샤른호르스트, SMS 그나이제나우, 경순양함 SMS 뉘른베르크, SMS 라이프치히, 수송함 2척으로 이루어진 독일 동아시아 함대는 선박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고 대신 영국 군함을 만났을 때 독일 영토로 항해했다. 독일 함대 및 SMS 드레스덴은 코로넬 해전에서 장갑순양함 2척을 침몰시켰지만, 1914년 12월 포클랜드 해전에서 탈출한 SMS 드레스덴 및 약간의 보조함을 제외한 모두가 파괴되었고, 탈출한 선박들도 마스아티에라 해전에서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포획되었다.
전쟁 발발 이후, 영국은 독일의 봉쇄를 시작했다. 이 전략은 지난 2세기 동안 여러 국제법에 의해 성문화 된 원칙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여러 중요한 군사적, 민간적 자원 공급 차단에 효과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영국은 중립국 선박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공해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모든 함선의 이동을 막았다. 이후 이 전술을 제한적으로 따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도 유사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1916년 유틀란트 해전(독일어로 Skagerrakschlacht)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가장 거대했던 해전이었으며, 전쟁 중 유일한 전함 간의 전투였다. 이 해전은 1916년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북해의 윌란 반도 부근에서 일어났다. 독일의 대양함대는 라인하드 세어가 지휘했고, 영국의 대함대는 제독 존 젤리코가 지휘했다. 독일 함대가 해전에 돌입하기 시작하자 자기 함대보다 더 큰 영국 대함대를 피해 탈출하면서 영국 함대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 수상함대의 대부분은 전쟁 기간 내내 항구에만 있어야 했다.
1918년 독일과의 휴전 당시 런던의 타워 브릿지 근처에 전시된 U-155.
독일의 유보트는 북아메리카와 영국 사이의 보급선을 차단하려 시도했다. 잠수함전의 성격은 공격이 자주 경고없이 왔으며 상선의 승무원들은 생존률이 희박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항의를 시작했고, 독일은 교전 규칙을 바꿨다. 1915년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가 침몰한 이후, 독일은 여객선이 지나다니는 해로에서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영국은 "안전 장소"(구명보트와는 다른 표준)에 승무원을 배치하고 경고를 보내는 프라이즈 규칙 보호를 넘어서서 상선을 무장시켰다. 마침내, 1917년 초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 규칙을 도입하면서 미국이 선전포고했다. 독일은 미국이 해외에서 많은 군대를 수송하기 전에 연합국 해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장거리 유보트를 5척만 유지시킬수 있어서 실제 효과는 미미했다.
1917년에는 상선들이 구축함들과 같은 호송선단을 보호를 받아 유보트의 피해가 줄어들었다. 이러한 호송선단 전술은 유보트가 표적을 쉽게 찾지 못하게 하여 피해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하이드로폰과 폭뢰가 도입되면서 구축함이 수중에 있는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송선단은 상선이 호송선단이 모일 때 까지 기다려야 해서 보급 전송이 느려지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러한 지연을 막기 위해 새로운 화물들을 구축하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군인 수송선은 잠수함에게 너무 빨랐기 때문에 호송선단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유보트는 199척을 이용해 5,000척 이상의 연합군 함선을 침몰시켰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은 항공모함이 처음으로 나온 시기로 HMS 푸리어스가 1918년 7월 톤데른 기습에서 소프위드 카멜을 발진시켜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또한, 대잠 순찰기로 소형 순찰선을 띄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