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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백 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문장>(1941. 4)-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회고적, 토속적, 서정적, 감각적
◆ 표현 : 과거지향적 정서(공동체적 삶으로의 회귀에 대한 향수)
눈을 매개체로 하여 풍성한 고향의 옛 모습을 회상함.
농촌 공동체의 옛 모습을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열거함.
평안도 방언을 구사하여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정감을 형성함.
지시어와 의문형의 사용(의미의 강조, 다양한 의미 함축)
시상 전개(흥겨운 분위기 → 국수 만드는 과정 → 전통과 문화의 확인)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그 무슨 반가운 것 → 국수
* 김치가재미 → 겨울철 김치를 묻은 다음 얼지 않도록 그 위에 수수깡과
볏짚단으로 나무를 받쳐 튼튼하게 보호해 놓은 움막. 넓은 뜻으로는
김칫독 묻어두는 곳(김치 창고).
* 멕이고 → 활발히 움직이고
* 양지귀 → 양지바른 가장자리
* 은댕이 → 언저리
* 예대가리밭 →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 전설상의 커다란 뱀. '이무기'의 평안도 방언
* 분틀 → 국수 뽑아내는 틀
* 큰마니 → 할머니의 평안도 방언
* 집등색이 →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자채기 → 재채기
* 이것은 그 곰의 ~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 설화적 분위기로 그려냄.
국수를 만들어먹는 '오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함.
*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 국수의 맛 = 우리 민족성의 맛
* 댕추가루 → 고추가루
* 사리워 → 담겨져서
* 탄수 → 식초
* 삿방 →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 아르궅 → 아랫목
* 고담하고 → 속되지 않고 아취가 있는(화려하지 않으나 고급스러운)
◆ 제재 : 국수(화자가 추구하는 대상으로, 일제에 짓밟히기 전 우리 민족의 본래적인
삶과 민족성)
◆ 주제 : 눈 오는 날 국수를 만들어 먹던 고향 마을의 정겨움에 대한 추억과 회상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농촌 공동체 생활 속에서 국수를 만들어 먹음(흥겨운 분위기 + 전통의 확인)
◆ 2연 : 국수에 곁들여 먹는 음식과 맛
◆ 3연 : 국수를 함께 만들어 먹는 마을 사람들의 심성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구수한 향토적 정감이 물씬 풍겨나오는 시이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밤에 국수 만드는 일로 들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정겨움과 서로 돕고 서로 어울리는 공동체적 삶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특히 국수를
만드는 재료인 메밀이 익어가는 과정을 계절별로 드러낸 부분(실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도 독특하지만, 국수가 우리의 정서에 맞는 전통 음식임을 드러낸
부분(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 사리워 오는 것이다)도 인상적이다. 이 시에서는 국수를 해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석의 시는 공동체적 삶에의 회귀, 향수와 같은 과거 지향이 주를 이룬다. 그가 평안도 사투리를
질박하게 쓰고, 말투 또한 생활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도 이런 과거 지향 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낡고 오래된 것들에의 그리움은 자연히 애련한 정서를 불러오고, 온전한 사람에의 복구를 염원하는
사회적 성격도 개입하게 된다.
이른 바 서술시에는 지나친 사회 의식의 발로로 구호 차원의 주제 진술이 두드러진다. 사회 의식적
시를 쓴 동시대의 부류 중 백석과 이용악이 돋보이는 것은, 그런 서정적 힘을 동반한 가운데
주제 의식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백석의 시에는 백여 가지 음식물 이름이 등장하며 그는 특히 음식물이라는 소재에 집착을 보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특수한 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시에서 음식물은 민족과 민족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백석이 전 국토를 유랑하면서 음식물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다.
국수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국수와 얽힌 추억들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인 삶을 상기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시이다. 음식이란 단순히 식욕을 채우는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마다 문화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그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의 체질이나 성격을
결정짓기도 한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통해 어릴적 토끼 사냥, 꿩 사냥하는 추억, 겨울밤 쩡쩡 얼은 동치미 국물 마시던
추억을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한 개인 내지 집안, 나아가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결정짓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음식물은 경우에 따라 성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먹으면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고 정의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화자는 이 시에서
객지를 유랑하다가 국수를 통해 자기 몸 속에 흐르는 핏줄을 확인하고 현재의 삶과 상실된 과거의
민족적 삶을 대비시켜 역설적으로 식민지 삶을 환기시키고 있다.
■ 맥락읽기
1. 특유의 사투리들이 주는 효과는?
정겹다, 향토적, 토속적
2. 이 시 속에 나타난 계절은?
겨울
3. 마을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은근히 흥성흥성 들떠 있다.
4. 무엇이 마을의 분위기를 들뜨게 하고 있을까? 시 속에 나오는 '이것'은 무엇일까?
국수
5. 국수를 반갑고 친밀하고 고담하고 소박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국수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어를 한번 찾아보자.
하로밤 뽀오얀 입김 속에서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온다.
왕사발,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6. 눈내린 겨울철의 산골 조그만 마을이 뜻밖에도 분주하고 흥성스러운 이유를 알겠다.
뭘 하느라 이리 들떠 있는가?
꿩사냥, 국수 만드는 일, 국수를 만들어 먹는 즐거움 때문에
7. 국수를 만드는 재료인 메밀이 익어가는 과정을 계절별로 나타낸 부분을 찾으면?
실같은 봄비 속을 ~ 갈 바람을 지나서
8. 12행~15행(이것은 아득한 옛날 ~ 텁텁한 꿈을 지나서), 19행~21행(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 큰 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설화적 분위기로 이 국수를 만들어 먹는 일이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느껴지고
국수에 대한 친밀감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9. 국수 만들어 먹는 일 하나로 마을 전체가 들떠 있다는 것은, 평소 이 마을 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말해주는가?
서로 돕고 어울리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마도 마을 아이들이
낮 동안 잡은 꿩고기를 장만하며 이웃집 부인네들이 부엌에서 함께 국수를 누를
것이고 남정네들은 또 한 방을 차지하고 앉았고 노인네들이 또 한 방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10. 국수와 곁들여 먹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동티미국, 댕추가루, 산꿩고기
11. 긴 겨울밤 밤참으로 먹는 국수의 맛은 어떨까?
참 맛있지!
■ 더 읽을거리 : 백석의 시 연구 -유재천- (1930년대 민족문학의 인식)
백석의 시에는 백여 가지 음식물 이름이 등장하며 그는 특히 음식물이라는 소재에
집착을 보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특수한 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시에서 음식물은 민족과 민족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백석이 전 국토를
유랑하면서 음식물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국수 일부>
국수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국수와 얽힌 추억들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인 삶을
상기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시이다.
음식이란 단순히 식욕을 채우는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마다
문화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그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의 체질이나 성격을
결정짓기도 한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통해 어릴 적 토끼 사냥, 꿩 사냥하던 추억,
겨울밤 쩡쩡 얼은 동치미 국물을 마시던 추억을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한 개인 내지 집안, 나아가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결정짓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음식물은 경우에 따라 성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먹으면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고 정의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자는 이 시에서 객지를 유랑하다가
국수를 통해 자기 몸 속에 흐르는 핏줄을 확인하고 현재의 삶과 상실된 과거의
민족적 삶을 대비시켜 역설적으로 식민지 삶을 환기시키고 있다.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그느슥히 여진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북관>
북관 지방을 떠돌며 명태 창란젓을 먹으면서 음식 속에서 조상을 느끼고 상실된
조국을 생각하는 시이다. 여기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을 넘어
상실된 조국을 상징하는 성스러움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화자는 창란젓을
입에 넣고 오래 오래 끼밀면서 그 맛을 음미하고 저절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
음식이란 어머니가 우리에게 물려준 조상의 맛이고 문화이다. 그 속에는 대대로
물려오는 조상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다. 조국을 상실하고 나라없는 백성으로
떠도는 사람들에게 맛은 바로 바로 조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음식 앞에 저절로 무릎을 꿇고 눈물로 그것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한다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는 농짝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를 치는 도야지 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믄드믄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멘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
<북신>
메밀내, 부처를 위하는 노친네의 내음새는 정갈한 성품을 의미하며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꿀꺽 삼키는 모습은 순박하고 야성적인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 민중의 모습이며 <목구>의 호랑이, 곰, 소처럼
꿋꿋하지만 어질고 정 많은 우리 민족의 성품이다. 화자가 돼지고기
먹는 것을 보고 뜨한 것을 느끼는 이유는 겉으로 보기에 착하고 어질기만
할 것 같은 사람들의 피 속에 꿋꿋한 기질이 숨쉬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이 바로 광개토대왕이나 소수림왕 같은 지도자를 만났을 때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고 경계를 확장할
수 있었던 힘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백석 : 백기행시인
출생 : 1912. 7. 1. 평안북도 정주
사망 : 1996. 1.
학력 :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영어사범과
데뷔 :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
경력 :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조선일보사 출판부
작품 : 도서, 오디오북, 기타
백석(白石)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었다. 본명이
기행(夔行)인 백석은 오산고보를 다니는데, 학과목 중에서 특히 문학과 영어에 관심과 소질을 보인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나오고서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그러다가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 사범학과에 들어간다.
1930년 그는 열아홉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해 당선되는데, 이 등단작은 시가 아니라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단편소설이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한
백석은 귀국하고 바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비롯해 번역 산문 「임종 체홉의 6월」,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 1935년 <조선일보>에 단편 「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한다.
백석의 초기 단편들은 노쇠한 부부, 죽음 등 삶의 어두운 부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부문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런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다.
백석이 구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보다 감정을 웬만큼 은폐할 수 있는 시로 전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창작 이외의 문단 활동은 일절 꺼린다거나,
집에 돌아와서는 병균을 염려해 늘 손과 얼굴을 씻는1) 그의 유난스런 폐쇄성이며 결벽증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는 뜻이다. 그는 1935년 《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산지」, 「주막」, 「나와 지렝이」,
「비」, 「여우 난 곬족(族)」, 「흰 밤」 등을 발표한다. 백석이 1936년 조광인쇄주식회사를 통해 펴낸
첫 시집 『사슴』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시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사슴』은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발간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1937년 겨울, 백석은 두 해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려고 함경도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게재한 산문 「가재미.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이 밖에도 같은 해 백석은 <조선일보>와 《조광》, 《시와 소설》에 「통영(統營)」, 「오리」, 「탕약(湯藥)」,
「연자ㅅ간」, 「황일(黃日)」 등을, 1937년 《조광》에 「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탸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1938. 3.)
백석은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서 「함주시초」를 비롯한 여러 시편을 쓰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 허전한 느낌이 든다. 두 해 전에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잠깐 본 이화여고 학생 ‘란(蘭)’, 지난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 만난 ‘자야(子夜)’,
그리고 영생고보 학내 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 지나간다.
1938년 백석은 영생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藥)」,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이 무렵 백석은 동료 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찾게 된다. 란을 보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혈관은 펄떡거린다. 백석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통영 출신의 처녀 란에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랑 고백은 차치하고 재입사한 지
열 달 만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린다. 그는 떠나면서 친구들인 소설가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 오리라.”고 말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 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그만둘 때까지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이런 일로 북만주 두메산골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려고 시작에 몰입한다.
1939년 <조선일보>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백석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뒷날 백석의 명편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을 실은 잡지 《학풍(學風)》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고
백석을 극찬한다.2)
같은 해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사》에서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강화되면서 백석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산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3)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 없이 떠도는”것이다.4)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시집』에 싣는다.
해방 뒤 귀국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가서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신한민보>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해방 후 고향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 분단을 맞는다. 북한에서 「뿌슈킨 선집 - 시편」을 번역하기도 하고,
꾸준히 시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하는 백석은 1996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 [白石] - 빼어난 토속어 지향, 그 시적 보고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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